〈 183화 〉 군인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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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크로스의 공동 묘지. 그 곳에 메마른 비석이 둥글게 깎인 곳.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꽃을 한 송이 들고 선 남자의 이름은 존이다.
마른 비석에는 빈포드 락크루거라는 이름과 작은 글귀가 적혀있다.
[늙었다고 물러서지 않았고 이가 없다고 짖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장님..."
존은 손에 들었던 꽃을 내려놓고 뒤로 돌아섰다.
"오늘도 오셨습니까."
"아아... 그렇지 뭘. 나도 이 나이 먹고 눈물만 늘어선... 갱년기가 무섭긴 하구만.
그래도 교회 측에서 이렇게 터를 마련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네.
자네도 잘 지내는 것 같구만 지미."
"아이들이나 가르치고 하는게 뭐 못지낼게 있겠습니까?"
"한대 피우겠나?"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몇 시간 뒤에 미사가 있어서요.
담배냄새를 풍기면서 들어가면 아이들을 안아줄 수가 없습니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로고.. 난 아직도 자네가 어떻게 성직자로 지내는지 모르겠어.
하기사 어릴 적부터 예상을 벗어나는 사람이기야 했지만서도."
"아시잖습니까. 저는 선생님을 만나고 변했다는걸."
"그래서 참 웃긴거야. 피터, 그 신부도 젊었을 때는 자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괴짜였거든."
"지금도 정정하십니다."
"그래, 뭐 그거야 그렇겠지. 그 사람이 어딜 가겠냐만은.
그 왜 저번에 보니 교회 지하실에서 하루 종일 틀어박혀 나오질 않던데.
무슨 일 있었나?"
"그럴리가요. 그냥 위에서 한 소리 들으신거죠.
교국에서 편지가 날아와서 지하에서 한동안 답신을 포함해서 편지며 글이며 쓸 게 많으셨다는 것 같습니다."
"교회도 피곤하구만."
"누가 아니랍니까? 혹시 하나 드시겠습니까?"
제임스는 막대사탕을 하나 건네며 물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사탕은 안좋아하네."
"그러시겠죠. 담배를 딱 일주일만 끊어보십시오. 시도때도 없이 물고 다니게 될 겁니다."
"그 꼴을 보고 어떻게 부하들이 기강이 잡히겠나?"
"하긴 듣고보면 또 그렇군요."
"빈포드님께서는 훌륭한 군인이셨지. 기사로서 한 번의 흐트러짐 없이
이렇게 떠나신 후에도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시니 말이네."
"확실히 그렇군요. 엊그제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아십니까?"
"왔다간 사람이라... 군인이겠지?"
"미리타엔의 게비디 대공이 다녀갔습니다."
존의 손이 미묘하게 떨린다.
그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왔다던가?"
"마찬가지로 헌화를 하고 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르게 만났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게 전부였다고?"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지. 미리타엔의 대공이나 되는 작자가..."
"교회에 난민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을 지원해주고 갔습니다.
덕분에 굶주리는 이 없이 지내게 되기도 했었고요."
"지원을 했다고...? 대체 그 오크가 왜... 아, 무령인가..."
"그건 또 아닐 겁니다. 누가 시켜서 온 사람이 그런 묵념을 할 수는 없습니다."
"묵념이라..."
"그도 결국 군인이었다는게 아닐까요?"
"군인이 그렇게 명예 없는 싸움을 할 것 같은가?
인간을 개조하고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려가는 소모전은 군인이 할 수 있는게 아니란 말이다!"
"혹시 모르셨습니까? 게비디 대공은 최전선에서 빈포드 대장과 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개조인간 병사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 대체 왜 그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말인가?
정말 그가 군인으로서 명예라는걸 알고 있었단 건가..."
"그건 신만 아시겠지요."
"아니, 신은 모를걸세."
"신이 모르신다니요?"
"전쟁이라는건, 그리고 군인이라는건 결코 숭고해질 수 없는 거니까.
그저 희생자일 뿐이고 처절하게 살기 위해 몸부림친 사람들일 뿐이지.
그런건 성스럽고 고고한 신께서 아실리가 없다는 말이야.
그런 밑바닥의 몸부림같은걸... 알았다면 전쟁같은게 일어나진 않았겠지.
우린 그 더럽고 처절한 밑바닥에서 서로가 희생자일 뿐이라는걸 알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했을 뿐이야. 나 대신 더러워진 사람을, 나 대신 떨어진 목숨을."
"그건.... 또 그렇겠군요."
"역시 괴짜야 자네는. 신부가 신의 불완전을 인정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
"뭐, 너무 완벽하면 인간미 없잖습니까? 아르간티아신은 인간이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거 하나 빠진다고 해서 사람들이 덜 믿고 더 믿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댈 곳을 내어주는게 종교의 역할이지,
모든게 전능하다는 프레임에 빠져 사람 하나 위로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오호, 날 위로했다는 건가?"
"그럼요. 손수건 필요하세요?"
"부탁하지."
존은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는 돌연 피식 웃어보이고 말했다.
"기억하나 제임스, 우리 아들이 어릴때
자네에게 두들겨 맞아서 울며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는데."
"아하하.... 모르겠는데요..."
"정말?"
"후... 기억합니다. 하고 말고요. 몇 번이나 조니에게도 사과했었어요."
"난 그때 영락없이 자네가 군인이 될 거라 생각했어. 아주 훌륭한 기사 말이지."
"사람이나 때리고 다닌 제가 말입니까?"
"더 정확히는 기사들의 무덤 위에서 장난을 치던 조니와 그 무리들이었지.
기사들의 무덤가 위에서 목검으로 칼싸움을 하던 내 아들이 맨몸인 자네에게
그렇게 두드려 맞고 돌아왔을때, 나는 처음으로 조니를 기사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어.
내 아들이 그 기사라는 이름과 생명의 무게를 알았으면 했거든."
"그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냥,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제일 낮은 이의 안식을 기억하던 꼬마가
제일 높은 곳에서 빛나는 신을 쫒겠다고 했을때 나는 실망했었다네.
하지만 오늘 보니,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군.
역시 자네는 내가 아는 제임스 트러스트 그대로야."
"에이, 사람이 매번 변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대로라고 하십니까~"
"철도 안든 그대로구만."
"하하하...."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흘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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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별건 아닙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조금 감상에 젖었습니다."
"별일이네. 콜로세움에서 제일 과격한 네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군요."
"조만간 한번 들러주셨으면 좋겠다고 한건 너였잖아."
"그랬죠. 무령님께서는 최근 무탈히 잘 지내셨습니까?"
"그렇지 뭐. 너도 짐작하다시피 육아에 전념하고 싶은데 가게도 봐야 하고
연구소 업무도 있어서 피곤하네. 그 포션 물량은 정해진 수량만 나갈 수 있는데
자꾸 발주가 이상하게 들어와서 피곤하다니까.
말해놓고 나니까 불만이 많은 것 같기야 한데, 발레리아가 잘 해줘서
큰 문제는 없는 느낌이네."
"그러십니까."
그렇게 말하고 게비디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여 입술을 적셨다.
"얼마 전에 류해백이라는 사내가 왔었습니다.
콜로세움을 떠나서 개인적으로 저를 만나고 싶었다더군요.
물론 그 남자가 제게 개인적으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묻더군요. 아버지는 어떻게 싸웠느냐고, 훌륭한 전사였느냐고 말입니다.
저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군인과 전사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성과로 평가해야합니다. 임무를 띄고 나와 얼마나 잘 싸웠느냐가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전사는 얼마나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는가가 중요한 평가 요소입니다.
즉, 얼마나 잘 싸웠는가 보다 어떻게 싸웠는가에 더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저는 그에게 사과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전쟁이었고 누군가 사과하는 순간 양쪽 모두가 우스워져 버리고 맙니다.
사회적으로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착하고 나쁜 것을 떠나 그 순간 옳은 것이었습니다.
사과를 받는 순간 빈포드의 죽음은 존중받지 못한 개죽음이 될 것이고
저와 미리타엔의 싸움은 그 명분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마 그도 그걸 알고 있었겠지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마 원망하겠지요.
적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이야기를 오래 나누어보고 싶었던 남자였다고.
빈포드는 제게 있어서 어려운 적이 아니었지만 떨쳐내기 어려운 적이었다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눈 앞의 무령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게비디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전사의 이야기다.
전사가 아닌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가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지요.
제가 콜로세움을 우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는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머지 않은 곳이었고, 저는 즉시 달려갔습니다. 처음에는 궁금했습니다.
왜 저를 버렸는지에 대해 묻고 싶었고 저를 버렸다는 것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여유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제가 미리타엔에 자리를 잡은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기도 했죠.
저는 제보를 받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유레크로스 북부의 사막 초입쯤이었을 겁니다.
노쇠한 오크 하나가 그곳에서 패패루를 잡아먹으며 연명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엘프의 피가 흐르지 않아 노화한 모습이었고,
제가 살아있을것이라곤 생각조차도 안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겠지요. 저를 바라보고도 제가 누구인지도 몰라 경계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하지만 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눈, 그 몸에 있는 문신.
버려져 뒷골목을 헤매면서도 끝까지 잊지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저는 아버지를 향해 처음으로 주먹을 뻗었습니다.
저를 버리고 이제껏 세상에 홀로 던져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늙은 오크의 멱살을 잡고 몇 번이고 말했습니다.
왜 어린 아이를,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도망쳤느냐고 말입니다.
그제서야 오크는 저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아, 내 아들이냐? 그래, 몇번째 아들이지? 버린 자식이 한둘은 아니라서.'
저는 그 순간 주먹을 멈췄습니다. 그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고 표현하는게 더 맞겠군요.
잠깐동안 생각을 정리하며 저는 그 남자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 모든 기대와 자비를 일순간에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제 주먹보다 빨리 아버지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군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게비디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눈 위의 흉터를 메만지더니 말을 이었다.
"그가 그러더군요. 아버지를 죽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복수에 실패한 저는 그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한참을 싸웠죠.
아직 어린 나이였던 저는 그 군인과 몇 시간이나 싸웠지만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군인이 저를 봐줬던 것이겠지만요. 그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가족의 피로 자신의 손을 더럽히면 그때는 구원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게 단순히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아니라,
전사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명예가 없는 자를 상대하는 것은 전사가 아니라 군인이어야 한다고요.
전사라면 명예를 결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말을 그리 성실히 이행하지는 못했지만요.
지금 생각해도 참 낯뜨거운 말입니다. 전사라... 누가 요즘도 전사라는 말, 그런 명예를 따르겠습니까.
하지만최근 들어서는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한결같이 우직하고 바보같은 사람들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대단하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명예는 잘 몰라도결국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전사도 아니고 군인도 아닙니다. 하지만 단지 그가 제 인생의 어느 기점에서
그 방향키를 꺾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인생이 결코 가볍지 않은것임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차분하게 머릴 쓸어넘겼다.
내가 침묵하고 있으면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저는 싸움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습니다.
져본 적도 없었습니다. 살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고, 그렇기에 깔끔하지 않으며
난잡하고 거칠다는 말이 꼭 들어맞을 겁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콜로세움에 몸담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면 어떤 싸움을 하는 자든,
또 어떤 이유로 죽었다고 한들 결국 그 목숨을 걸었다는 점에서 양보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정도겠군요."
그래서 저는 옛 생각에 그 군인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그 목숨에 나름의 가치가 있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게비디는 마지막으로 남은 커피를 목 뒤로 넘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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