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화 〉 삐삐의 하루
* * *
오늘은 아침부터 마마가 집을 나갔어.
마마는 자주 집을 비워.
그래도 평소에는 삐삐가 보고싶다고 하면 바로 와줬는데
오늘은 마마도 바쁜가봐.
"삐삐, 아침 먹을래요?"
발레리아 이모야. 집에서 삐삐 돌봐주는 착한 이모야.
처음 봤을때는 좀 나쁜짓 했는데 사탕 많이 줬어.
이모 맨날 삐삐한테 책 읽어줘. 처음에는 좋았는데 지금은 재미없어.
그림책이 좋았는데 요즘에는 회색 종이만 자꾸 읽어줘서 싫어.
회색 종이는 아침마다 이모가 집 앞에서 주워와.
거지도 아니면서 바닥에 떨어진거 들고 와.
회색 종이는 재미 없어. 그래도 가끔 마마가 나오곤 해.
마마가 나오는 부분은 여러번 봤어.
아까도 마마가 나오는 종이 읽어달라고 했는데
한 8번 정도 읽어달라고 했더니 이모가 잠깐 쉬고 하쟤.
"밥 모야?"
"맛있는거에요."
맛있는거 아닌가봐.
반짝반짝한거 안나왔어.
또 이모 거짓말했어.
이모 맨날 거짓말해. 재밌다고 하고 재미없고 맛있다고 하고 맛없어.
그래도 마마가 착한짓 해야 된다고 했어. 골고루 먹어야 착한 아이랬어.
그래서 삐삐 골고루 먹어. 근데 거짓말 나쁜짓이잖아.
"시러!"
"안먹을거에요?"
"꼬기!"
"고기는 없어요. 어제 삐삐가 다 먹었잖아요."
고기 없어... 반짝반짝했어...
거짓말 아냐... 안먹을래...
꼬르륵...
"사탕!"
"밥 다 먹으면 줄게요."
밥으로 풀 나왔어. 맛없어.
밥먹으면 이모가 사탕을 줘.
딸기맛 사탕이야. 삐삐가 제일 좋아해.
그래서 마마한테만 줄거야. 삐삐꺼야.
이모는 사탕부자야. 맨날 착한짓하면 사탕줘.
"자, 그럼 다시 책 볼까요?"
"시러..."
"안되겠네... 무령님께서 삐삐가 말 잘들으면 주말에 산책가겠다고 했는데..."
또 거짓말이지? 삐삐 안속아.
근데 이모 반짝반짝한다. 진짜다.
"책 죠아!"
"자, 오늘 읽어볼 책은 '나의 작은 행성과 아이들'이에요."
"나애 쟌 행성가 아이들?"
"네. 먼저 읽어줄테니까 따라읽으면 돼요.
'내가 막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내게는 작은 꿈이 있었다.' 자, 읽어볼래요?"
"내..가... 맛 하꾜에 드러가기 저내 내게는 쟈근 꾸미 이썼다."
"잘했어요. '그건 3년 전의 노동자의 이상론과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것이기도 했고
오히려 그와 상극인 허구를 쫒는 망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었기에
누구에게 쉽사리 말을 꺼내기조차 어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조금 어렵겠네요."
"삐삐 힘드러..."
"그럼 천천히 해볼래요?"
"그건 3년 저내 노동자... 노동자가 모야?"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일하고 돈을 받는걸 노동이라고 해요.
돈이 뭔지는 알려줬었죠?"
"응..."
"계속 해볼까요?"
"이상루가 어쩌...."
"아, 이건 루가 아니라 론이에요."
"이상논? 이상논이 머야?"
"음,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만 하는거에요."
"이케 대면 조케따?"
"네. 그런거에요."
이모는 똑똑해! 뭐든 다 알아! 재미는 없어도 좋아.
그래도 이번에 읽은 책은 많이 어려웠어.
책을 다 보고는 독후감도 썼어.
이모는 내 독후감을 좋아해.
"삐삐, 오늘은 무령님이 늦으신다고 했어요. 같이 산책이라도 갈까요?"
"가두 대?"
"삐삐가 폴리모프만 잘 하면 괜찮아요.
그리고 여차하면 쓸 수 있도록 미리 어제 유모차를 사왔거든요.
선팅을 한 주문제작품이라 밖에서는 안보일 거에요.
물론 이걸 쓰지 않는게 제일 좋겠지만요."
"유모차?"
"음... 아이들이 타는 작은 수레에요."
"삐삐 아이 아냐."
"그래요? 그럼 앞으로 사탕은 필요 없어요?"
"으으...."
"유모차도 못 탈텐데요?"
"삐잇...."
사탕은 좋은데 삐삐는 아이 싫어.
"삐삐, 그럼 사탕 다 먹을 때까지만 아이 할래요?
제가 사탕을 더 줄 수 없을때 알려줄게요.
그럼 그때 어른 해요."
"죠아!"
역시 이모는 똑똑해.
나두 집 밖에 오랜만에 나가서 신나.
반짝반짝 간질간질했어.
폰니모푸? 그거 하면 마마가 꼭 옷상자에 있는 쥐색 옷 입으랬어.
이거 마마 냄새가 나서 좋아.
"잘 입었네요 삐삐. 그런데, 그건 후드라서 일단 옷을 입고 입어야 해요.
만세 하면 입혀줄게요. 그리고 오늘은 신발도 신을거에요."
"더워..."
"무령님이 좋아하실거에요."
"마자... 마마 이쁘다구 해써."
"삐삐 혹시 가지고 싶은거 있어요?"
"가방!"
"가방이요? 가방은 왜요?"
이모는 똑똑하면서 이런건 몰라.
마마는 가방을 맨날 들고다녀. 맛있는거랑 마실게 들어있어.
먹어도 먹어도 맨날 그 안에 가득 있어.
삐삐도 할거야.
"가방!"
"그래요, 알겠어요. 가방도 하나 사면 되겠죠.
갈까요?"
이모랑 시장에 왔어.
시장은 맛있는게 많아. 동글동글한 거 맛있는 냄새가 났어.
집어먹으면 뜨거워. 이모가 와서 종이를 줬어. 삐삐 저거 알아.
배웠어. 저게 돈이라고 하는거야.
"삐삐, 계산도 안된 도넛을 집어먹으면 안되는 거에요."
"도넛?"
"네. 도넛이에요."
"도넛 죠아!"
앞에서 도넛 부자 아저씨가 삐삐 보고 웃었어.
도넛을 많이 줬어. 아저씨도 좋은 사람이야.
"삐삐, 먹고 싶은게 있으면 말해주세요. 사드릴테니까요.
아무거나 집어먹으면 나쁜 짓이에요."
"아라떠..."
"일단 입에 있는 도넛은 다 먹고 말해도 괜찮아요."
여기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났어.
"이모, 나 저거 사주라."
"저게 뭐... 닭꼬치네요? 몇개 먹을 수 있어요 삐삐?"
"마니!"
"그렇게 말고요. 구체적으로요."
"하늘만큼 땅만큼!"
"알겠어요. 그럼 일단 두 개 사올게요. 다 먹으면 또 먹는걸로 해요."
"죠아!"
닭꼬치 좋아. 마마도 주고싶어.
"이모, 더 사자!"
"삐삐, 아직 다 먹지도 못했잖아요. 다 먹고 사기로 약속했죠?"
"마마도 줄거야!"
"아...."
이모 멈췄어.
"그래요, 그럼 하나 더 살까요?"
이모랑 손잡고 하나 더 샀어.
닭꼬치 하얀 종이로 돌돌 말았어.
따뜻했어.
닭꼬치는 삐삐가 들었어.
이모 걷다가 멈췄어. 뒤에서 모르는 사람이 말걸어서.
마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말랬어.
"이런데서 만나다니 우연이군. 킬ㄹ... 실례, 발레리아였지?"
"아, 엔시온 대공님. 안녕하십니까?"
이모가 인사를 해.
"삐삐, 인사해야죠. 이분은 엔시온 대공님이세요."
"마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지 말랬어!"
모르는 사람 무서웠어.
"삐삐? 이 아이는 누구지?"
"무령님의 아이입니다."
"무령님께서 남편이 있으셨나? 아직 어린데 당돌하군.
그래서 게비디가 아동복을 선물했나보군.
난 드디어 그 놈이 무령님께 아동복을 선물할 정도로 미쳐버렸나 했지 뭐야.
아차차... 아이가 있었구나."
"미쳐버려떠?"
삐삐가 따라했더니 모르는 아줌마 얼굴 하얘졌어.
이모도 똑같이 하얘졌어. 재밌다!
"삐삐, 그런 말은 하면 안되는 말이에요!"
이모가 하지 말랬어.
"저 아줌마는 햇는데?"
어? 아줌마 얼굴 빨개졌어.
이모는 얼굴이 파래졌어. 이런거 처음봤어.
"아하하....하...하... 아줌마.... 아줌마라... 그래, 그럴 수 있지.... 벌써 그런 나이구나...
아이들은 참... 순수해서 무섭단 말이지..."
"그... 삐삐... ㄱ... 그래도 그런 말 하면 안돼요. 나쁜 말이에요."
"나쁜 말이야? 아줌마 나쁜 사람이야?
마마가 나쁜 사람 지지래."
이모 맨날 똑같은 얼굴이었는데 지금 달라.
눈 엄청 커서 웃겨.
"ㅈ..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교육을...!"
"아니, 괜찮다. 뭐 내가 보아도 난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긴 하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삐삐 다 아라!"
아줌마가 삐삐 열심히 공부했는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화가 났어.
"바보 아줌마! 삐삐 공부 자래!"
아줌마 웃고 있어. 입은 웃는데 눈이 안 웃어.
이모는 바보처럼 입 벌리고 멍하니 서있어.
이모는 똑똑한데 왜 바보같이 서있지?
"그래, 똑똑한... 아이구나... 오랜만에 아이를 만나니 당황했던 모양이다.
이름이 삐삐라고 했나? 나는 엄마 친구란다."
"마마 친구 아냐! 나쁜 사람 그러케 말한다고 해써!
따라가면 지지라구 해써!"
"아...하하... 미치겠구나 정말..."
"미치게떠?"
"아무래도 오늘은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구나.
발레리아... 다음번에 무령님께 정식으로 다시 인사드리겠다고 전해다오."
"....아! 네! 전하겠습니다!"
이모가 말이 없어.
"삐삐... 가방은...다음에 사요...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왜? 이모 힘드러?"
"네... 좀 힘들어서 쉬어야 할 것 같네요..."
"구래... 집에 가쟈... 삐삐 유모차 타도 대?"
"네... 제 생각에도 타는게 좋아 보이네요..."
집에 돌아와서 밥을 먹었어.
시장에서 산 고기반찬 맛있어!
이모는 밥을 먹고 혼자 공부한다고 했어.
삐삐는 그동안 사탕을 먹었어.
마마가 나오는 회색 종이도 봤어.
이모가 오늘부터는 예절교육이라는걸 한대.
중요한건데 안하고 있었대.
이모도 깜빡깜빡하는구나.
삐삐 이거 알아. 「침해」라고 하는거야.
책에서 봤어.
이모 걱정이네... 삐삐는 이모 책임질 수 없어...
마마가 책임져야될텐데...
"이모 아프지마..."
"네, 아프지 않아요. 할 일이 많은데 아프면 안되죠..."
이모 눈이 무서워... 삐삐... 힘들것 같아...
===
게비디와의 대화는 꽤나 길었다.
슬슬 저녁때가 되기도 했고 해서 게비디도 좀 쉬라고 돌아왔다.
저녁식사 정도는 하고 가라고 말하는 그에게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전하면
그도 이해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참, 그랬었지요. 역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는 말이 맞군요."
"그렇게 되나... 너도 결혼해야지. 생각 없어?"
"하하... 저는 아직은 인생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서 말입니다...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너정도면 돈 되고 능력 있고 모자란게 딱히 없을텐데?"
"맞는 여자가 없기도 해서 말입니다.
여자를 만나기야 많이 만나 봤습니다만, 결국 다 맞질 않더군요.
이제와서 누구를 또 만난다는 것도 뭐해서..."
"그건 어쩔 수 없지. 성격차는 극복이 어렵다고들 하더라고."
"그렇군요. 앞으로는 성격이라도 맞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말은 그거 말고도 안맞는게 있다는 이야기 같은데..?"
"흠흠... 아버지가 되려면 일단 자식은 만들어야지 않겠습니까..."
"아..? 아..! 흠흠... 아... 그렇지 참... 너같이 듬직한 사람을 받아줄 사람도 잘 없기야 하겠네...하하..."
그와의 어색한 대화가 끝나고 떠날 타이밍도 애매해져서 서성이다가 킬레리 하나가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와서
게비디에게 다음 일정을 안내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도 끝났다.
"가볼게. 다음에 한번 와. 몰랐는데 우리 삐삐가 유난히 겁이 없더라. 사람을 안가려 애가."
"정말입니까? 그럼 다음번에 한번 찾아뵙지요. 역시 어머니를 닮은 모양입니다."
"그런가봐. 갈게!"
나는 그의 저택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왔어 얘들아!"
"삐이잇!!!"
돌아오자마자 삐삐가 방에서 튀어나와 쪼르르 달려와서는 안긴다.
날개를 파닥이면서 안기는 삐삐의 뒤로 발레리아가 나왔다.
"삐삐, 배운대로 인사해볼까요?"
그 말에 삐삐가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폴리모프를 하더니 양 손을 배꼽위치에 두고 고개를 숙인다.
"마마 다녀셔써여."
"이...이게 무슨..."
나는 삐삐를 안아들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디서 이런 이쁜짓을 배웠어! 아구구 삐삐야!"
다만 왠지 피로에 쩔어보이는 발레리아의 얼굴이 걱정스러웠다.
저녁은 발레리아가 사왔다는 고기를 구워 먹었다.
식사를 마쳤더니 삐삐가 내 몫이라며 흰 종이에 싸인 닭꼬치를 내밀었다.
"마마꺼!"
"엄마꺼야? 고마워 삐삐."
나는 삐삐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미 다 식어서 차가웠지만 가열해서 먹으면 되는 거니까.
발레리아는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마치더니
곧 엔시온 대공이 정식으로 인사를 하러 오겠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불찰이라고 말하며 삐삐의 예절 교육에 한동안 주력하겠다는 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보여서 오늘은 쉬라고 했다.
삐삐의 방에 찾아가 물었다.
"삐삐야, 오늘 이모 뭐 있었어?"
"이모 미치게떠 해써."
"뭐...?"
"나쁜 아줌마가 미치게떠 해서 이모 파랑색대써."
"그게 무슨 소리야...?"
"나쁜 아줌마 하얀색에서 빨간색 대써.
눈은 안웃는데 삐삐보고 바보라고 해써. 아줌마 나쁜 바보야."
"삐삐야... 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어...?"
"나쁜 말 함부로 쓰면 안돼. 알았어?"
내가 다소 눈에 힘을 주고 그렇게 말했더니
삐삐는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아라떠..."
"삐삐는 착한 아이니까. 그치?"
"응!"
언젠가 나중에는 쓰지 말라고 해도 쓰겠지만 적어도 지금 가르치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삐삐의 방을 나왔다.
"발레리아."
"네, 무령님..."
"쉬라고 한 차에 미안한데, 나쁜 아줌마는 대체 무슨 말이야?
뭐가 하얘지고 파래져? 애가 이상한걸 배워왔는데... 설명 좀 해줄래?"
"네..."
그녀의 이야기는 꽤나 길었다.
나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마를 탁 쳤다.
"이건 진짜 미치겠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