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화 〉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고 누군가에게는 악몽이던
* * *
"대략 한 24년 전 쯤이었던가..."
창틀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엔시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손에 묻어난 회색 먼지는 그리 많이 쌓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24년 전, 자신이 아직 젊었을 때, 엔시온의 아버지는 플라이트 가의 가주였다.
선대 대공이었던 아버지는 상당히 다각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현 황제, 에반제인 플로라의 부친과도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곤 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명실상부한 미리타엔의 2인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위엄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세상에 없는 이유라고 하면 무능한 자신 때문이라는 오랜 생각이
늘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 들어찼다.
"엔시온, 내 딸아. 너는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타협하지 않으며
양보하지 않고 그럼에도 자비롭고 빛나야 한다.
존경은 한 몸에 사로잡아야 하며, 원망은 가슴에 담아낼 줄 알아야 하고,
큰 뜻보다는 손 안에 쥔 새를 헤아릴 줄 아는 대공이 되거라. 내 말 알아 듣겠니?"
오래 전의 그녀의 아버지는 늘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지금도 그녀는 그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타협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으면서 자비로울 수가 있다고...?
그러면서 존경을 받아야 했고 원망을 받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것도 아니고
가슴에 담아내라는 말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했다.
사라진 사람은 사라진 사람이고 이제는 그 유지를 이어받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리라 여겼으니까.
엔시온의 아버지는 24년 전에 미리타엔을 떠났다.
"이젠 이 대공이라는 자리가 내게 짐인 것 같구나.
넌 나보다 더 좋은 대공이 될 수 있을 거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미리타엔을 떠났다.
잘 살겠지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던 그녀에게 언젠가 날아왔던 편지는
그녀의 눈시울을 적셨다.
"내 딸 엔시온 플라이트에게. 아마 네가 이 편지를 볼 쯤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란다.
네가 이미 대공의 자리를 훌륭히 이어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이제 내가 없어도 너는 잘 해내겠지.
나와의 약속을 정말 잘 지켜 주었다 엔시온. 사랑한단다."
그녀가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았기 떄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부친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그 자리가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학회에 가입하고, 수많은 논문을 펴내고, 억지로 정권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랜 생각에 괜히 그녀는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 있나?"
짧은 한마디에 바로 그녀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하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개새끼는 잘 있나?"
"네. 데려올까요?"
"아니, 내가 가지. 안내해라. 물건도 준비해두고.
지금쯤 아주 주린 배를 부여잡고 있을 테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차디찬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녀가 지하실에 도착하면 그곳에는 이미 하녀들이 준비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차가운 글라스와 와인병, 그리고 앉을 의자.
그녀는 익숙한 듯 그 의자에 앉아 잔을 들었다.
그러면 하녀가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라준다.
사슬이 쩔그렁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읍...으읍!!!"
엔시온이 차분히 고개를 든다.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재갈이 물린 채로 사지를 구속당한 남자였다.
사지는 사슬에 묶여 지하실 벽에 고정되어 있었고,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면서도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그녀가 손에 든 와인잔을 노려본다.
"우리 사이가 언제부터 그렇게 과격해졌었지?
확실히 오래 굶기는 한 모양이구나."
"으읍!!!"
"아직도 길이 안들었군. 나는 네가 배 곯을 것을 걱정하여 일찍 돌아왔는데도."
묶인 남자는 바르르 떨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노려보았다.
"내 생각도 해 줘야지. 난 죽을 예정이던 네 목숨을 거금을 주고 사 왔단 말이다.
내 등을 치고도 여전히 살아있는데 감사하는게 낫지 않겠나?"
"크으으!! 으윽!!!"
"이래서 교육이 덜 된 자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녀는 정색한 채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재갈을 벗겨라."
하녀가 무심한 듯 재갈을 벗기면 오랜 동안 먹지 못한 듯 피골이 상접한 것으로 보이는
지친 남자가 외쳤다.
"차라리 죽여라! 이 악마같은 년! 네가 그러고도 지도자더냐!"
"멍."
"뭐...?"
"대답은 언제나 멍이라고 말했을 텐데."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을 튕긴다.
탁 소리와 함께 나타난 십자창. 엔시온은 그걸 한 손에 들고 빙빙 돌리다가
그대로 남자의 마른 팔에 꽂아넣었다.
"끄아아아악!!!"
"말이 어렵나? 멍이라고 했는데."
"끄으으....ㅁ...멍...."
"그래, 개새끼가 사람 말을 하는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허억...허억..."
"상처는 적당히 치료해줘라. 다시 입도 틀어막아두고."
그 말에 하녀들이 다시 그를 붙잡아 입에 재갈을 물리기 시작한다.
"아악!! 저리 가라! 꺼지란 말이다!! 이 개새끼들!! 개만도 못ㅎ...읍읍!!"
"나는 말이다, 24년 전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16년 정도 전에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전해들었지.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아버님의 행적을 조사했다.
아버지의 유해도 찾아냈고, 아버지의 일기장도 찾아냈다.
개인적으로 사람도 고용해서 말이지. 그래, 그게 너였다 이버.
분명히 나는 네게 사례를 하겠다고 말해두었다.
일반적으로 손에 넣지 못할 막대한 금도 함께 말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는게 좋을거다.
그런데 유품이 하나도 없더군. 그래, 뭐 없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일기장에 분명히 내게 전하는 유품을 적어두신 아버님께서
그 유품을 눈에 띄는 곳에 두지 않았을리 없다.
그리고 그건 네가 팔아 넘긴 것이었지? 그렇지 않나?"
"으읍!!"
"아니라고 잡아뗄 필요 없다. 이미 네 주변 측근들에게 이야기는 다 들은 후니까.
내가 이 이야기를 네게 하는 것도 벌써 16년째였던가?
그래, 네가 왜 개새끼라고 거기 붙들려 있는지 잊어서는 안되는 거니까 말이다."
엔시온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품으로 적혀있던 2가지. 하나는 붉은 눈의 거북의 주홍빛 등갑으로 만든 피리였고,
다른 하나는 천년을 산 코끼리의 금빛 상아로 만든 보검이었다.
무엇 하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는 물건이었지.
보검은 고대 왕가에서 전해지던 물건이었지.
피리는 아버님께서 날 위해 직접 만드신 물건이었고."
빠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은 팔을 내리치고, 늙은 남자의 얇은 팔은 너무나 간단히 부러졌다.
남자는 저항을 포기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시시하군. 아무래도 기분이 풀리질 않는다.
어릴땐 더 재미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와인을 묶인 남자의 머리 위로 천천히 부었다.
젖은 머리에서 천천히 흐르는 포도주를 향해 남자는 고개를 치켜들고
필사적으로 술을 마시려고 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이 성격을 고치기 어려울 것 같구나.
결혼은, 다음생에 해야겠다."
그렇게 말하고 엔시온은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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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였던가?
오랜만에 발레리아와 함께 삐삐를 유모차에 태워서 밖에 나왔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오래 되지도 않았지만 왠지 더 삭막해 보이는 그 곳,
젤렌지의 저택이었다.
"이곳으로 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음, 그럴 것 같아서. 삐삐라면 알겠지."
천천히 지하실로 걸어내려간다.
내게는 썩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을 다시 찾아온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하실의 굳건한 벽을 맨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면서 나는 바닥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는 녹이 슬어버린 방치된 톱날과 부러진 수술대.
어딘가 불쾌하게 코를 찌르는 약냄새에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삐삐야, 잠시 나와볼래?"
삐삐는 썩 달가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마마?"
나는 삐삐를 안아들었다.
"반짝반짝 간질간질 아내두 대?"
"지금은 안해도 돼."
삐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발로 벽을 긁어댔다.
"삐이익!!"
예상대로였다.
젤렌지가 날 가두기 위해서 준비했던 벽은 럼버레인 소재.
즉, 지룡의 비늘이 사용된 것이다.
그런 소재를 삐삐가 발견한다면 무언가 반응이 있지 않을까 한 것이었다.
천각룡이 최강의 용은 아니라지만 그럼에도 위험도를 최상위로 설정한 이유가 여기 있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천각룡이 성장하는 단계에서 다양한 마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으로 그 단일 개체가 예상할 수 없는 정도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 럼버레인에 삐삐를 가져다 댔다.
삐삐는 벽을 짚던 앞발의 발톱을 세워 벽을 긁는다.
그리고 이윽고 벽에서 주홍빛의 연기같은 것이 스멀스멀 뽑혀나왔다.
"ㅁ...마마...!"
그게 뭔지도 모르고 당황해서 날 부르는 삐삐에게 괜찮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삐삐에게 결국 스멀스멀 흘러들어간 주홍빛 연기가 더는 나오지 않게 되면
내가 물었다.
"어땠어? 무슨 일 있었니?"
삐삐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쥬항색 아져씨 안녀아세여 해써."
"인사 잘 했어?"
"아져씨 삐삐 반짝반짝 갈쳐져써!"
아무래도 럼버레인에서 뽑아낸 것이 엄청난 양의 마력일리는 없겠지만,
겨우 생전의 기억을 간직한 정도의 작은 마력은 남은 모양이다.
삐삐는 가만히 날 보다가 눈을 감고 끙끙거렸다.
"삐이이..."
삐삐가 집중하는가 싶으면 점점 비늘 끝에 주홍빛 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날개는 몸에 딱 붙인 채로 통통한 몸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평평해졌다.
천산갑을 연상케하던 비늘이 이제는 마치 거북과 같아 보였다.
황금빛 비늘에 주홍빛으로 무늬가 새겨진 삐삐는 이전보다 더 화려해 보였다.
"이거 삐삐 할수이따?"
삐삐가 그렇게 말하며 입을 아 벌리고는 '삐이익'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주홍빛의 흙모래가 잔뜩 섞인 브레스가 뿜어졌다.
비록 그 세기는 선풍기 바람 정도였다지만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는게 기특한거 아닌가.
"그래서 아저씨가 다른 말은 안하셨어?"
"아져씨? 모래 마니 잇는데 거기 갑자기 다른 아져씨가 막 빵 해써.
쥬항아져씨랑 빨간 아져씨랑 막 나쁜짓 해. 그래서 쥬항 아저씨가 쿠아앙 해써.
이제 삐삐도 할 수 이써. 근대 빨강 아져씨가 삐죽삐죽한 막대기로 푹푹 해써.
나쁜 아져씨야. 때찌때찌해서 아져씨 등 아야해써.
그 아야한거 다른 아져씨가 가지고가."
"발레리아. 이게 뭔소리야?"
"아마 지룡이 사막 부근에 거주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붉은 남자가 나타나서 지룡을 토벌한 것으로 보이고요.
지룡은 브레스를 뿜어 저항했으나 결국 등에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고,
그 등의 비늘을 붉은 남자가 가져갔다는 것 같군요.
붉은 남자는 아마 인간종, 혹은 그에 준하는 인류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뾰족한 창을 무기로 다루는 것 같으니까요."
"어떻게 알아들은거야? 내가 물어봤지만 대단하네..."
발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평소에는 이것보다 더한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삐삐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 이후의 내용은 발레리아의 해석에 의하면 등의 치명상이 치료되지 않아 당황한 지룡은
급하게 거주하던 사막을 떠나려고 했으나, 뾰족한 것을 다량으로 던지는?
어린 여성에게 토벌당한 것 같다. 여성은 비늘을 대량으로 가지고 떠났고,
남은 몸체는 마력을 공기중에 흩뿌리며천천히 죽어갔다고 한다.
삐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 '아이고, 그랬어?' 라고 해주면서 말을 들어주었다.
삐삐는 조금 지나서 이야기를 다 끝마치고는 원래의 금빛 비늘을 가진 천각룡으로 돌아왔다.
제 나름대로 폴리모프와 마력을 접목시킨 새로운 적응형 마법을 만든 것 같았다.
분석을 할 수는 있었지만 삐삐에 완벽하게 맞춰진 고유 마법과도 같은 영역이었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순수의 마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 어린 아이가 고유 마법을 만들어버렸다는데 큰 충격을 느끼면서
나는 슬슬 뼈의 저택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짐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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