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황제와 딸
* * *
"애니야."
"야옹"
"무령님이 날 안부르신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아..."
"애옹"
"황궁에 찾아오시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를 부르시는 것도 아니고...
물론 이제 이전처럼 편하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애니를 쓰다듬는 손은 어딘가 서운함이 묻어있다.
검은 털은 관리가 꾸준히 된 것 처럼 윤기나는 털이 반질거렸다.
"애니야, 너도 무령님 뵙고싶지 않니?'
"애옹."
"그래그래, 난 잠깐 방에 다녀와야겠어."
"야옹!"
"애니? 어디가 애니!"
애니는 쪼르르 달려가 먼저 플로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플로라가 즉시 애니를 뒤따라가보지만 이미 애니는 플로라의 서랍을 열어 젖히고
그 안에 든 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아하하... 그거... 알고 있었어...?"
에리아의 사진들과 에리아가 모르게 모은 잡다한 물품들.
작게는 에리아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칫솔부터, 속옷, 그리고
RPHC188 포션들도 있었다.
에리아의 연구실에 달린 CCTV영상을 확보해서
극비리에 제조, 유통되던 포션을 대량으로 매입해 넣어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보란듯이 놓인 외설적인 기계장치가 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것.
하리지나 여타 과격한 귀족들의 애용품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더럽다는 말로 일축했던 물건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적적함을 달래주는 좋은 친구였다.
"애옹..."
애니의 눈빛이 어딘가 안쓰러워보이면 그제서야 플로라는 고개를 붉히고 헛기침을 했다.
"흠흠... 넌 고양이라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그런게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란다."
플로라로서는 애니가 고양이이기 이전에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다는 것 따위는 알 리도 없었기에
되는 대로 이야기 할 뿐이었지만 애니는 그런 플로라를 말 없이 바라보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다가 한번 플로라를 돌아보고 낮게 울었다.
마치 볼 일이 다 끝나고 나면 그때 다시 부르라는 듯이.
"아... 다 들켰었구나..."
플로라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서 멍 하니 그런 말을 하고는
곧장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끌어올렸다.
"흐아으....!!"
몇 번이가 뒤척이며 침대 위를 구르다가
이불을 뻥뻥 발로 차면서 들썩이는 침대를 끌어안은 플로라의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달려나온 비서장이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플로라는 급히 침구를 정리하고
고상하게 문을 열며 말했다.
"흠흠... 무..무슨 일이냐?"
"아...아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기에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줄 알았사오나..."
"아... 그런 거구나...? 아무 일 없느니라..."
"그러시다면 저는 이만 나가보ㄱ..."
"그래, 어서 나가보거라. 왜 그렇게 멀뚱히 서 있느냐?
무슨 문제라ㄷ...."
둘은 문제를 깨달았다.
플로라는 빠르게 누가 볼새라 서랍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삐질대는 땀을 살짝 닦은 후에 아무 일 없는 것 같은 얼굴로 다시 섰다.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서로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플로라는 조용히 이를 갈며 생각했다.
'서랍 안닫았었구나....'
"그... 비서장? 급한 일이 있지 않나?"
"아...! 네! 급한 일이 있었지요! 하하...!"
"여기까지 내 생각에 먼 걸음 했음에도 아~무것도 특별한 일이 없었던 점.
아쉽게 생각한다."
"하하... 그렇습니다..."
"아~무. 아~무 일도 없었다는건 그대도 동의하겠지?"
"그...그렇습니다..."
"후우... 됐다. 나가보도록."
집사장이 떠나고나서 플로라는 털썩 주저앉아서 중얼거렸다.
"아...황제 괜히 했나... 이젠 자유 시간이랄게 없어..."
그렇게 털썩 주저앉아서 손등을 메만지면 플로라의 그림자에서 어느새 애니가 사르륵 올라온다.
애니는 자연스레 플로라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 올라서는 그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가르릉대다가
다시 내려와서 방에 놓인 가구를 밟고 올라서서 창문 위에 앉았다.
흔히 식빵이라고 표현하는 자세로 가만히 앉아 바라보다가 입에서 무언가를 뱉어내는 애니를 보고
플로라는 그 뱉어낸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그건 작은 도장이었다.
선대 가주, 그리고 그 선대 가주때부터 줄곧 사용해온 에반제인가의 도장.
주로 편지 끝머리에 한번 찍을 때 쓰던 도장은 이제는 오래 사용하지 않은 물건이다.
플로라는 그 도장을 주워들고 괜히 저택에 홀로 계실 어머니를 생각했다.
티들렌 에반제인. 분명 노쇠한 몸이지만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 걸맞는 행동을 하셨다.
그래서 더 존경했기도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늘 어머니께 의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께 의지하기만 하던 그 순수한 소녀는 없어졌다.
이제 미리타엔에 너무나도 잘 녹아들어버린 플로라는 더 이상 순수라는 것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머니.. 죄송해요. 이렇게 되어버렸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비록 지금이 자유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전 언제나 최고였던 에반제인을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만들거고, 누구보다도 위에 선 지금이 행복해요."
조용히 주먹을 쥐고 고개를 끄덕인 플로라는 옷장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과감하게 구석에 놓았던 옷을 꺼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시도할 수 없는 옷이라고 해도 좋을 노출이 과격한 옷이었다.
더욱이 최근 들어서 급격히 몸에 굴곡이 늘어난 그녀였기 때문에 더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검은 천은 시스루와 망사로 이루어져서 겨우 중요부위만 가리고 있었고,
포인트로 금빛 라인이 그어진 고급스러운 옷이었는데, 하늘하늘해서 속이 다 비쳐보이는 가디건을 두른
상당히 도발적인 모습이었기에 그녀로서도 상당히 무리를 많이 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 오늘은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겠다.
애니, 너도 같이 갈거지?"
"애옹."
플로라의 과격한 복장을 본 애니가 그녀의 품에 뛰어들면
자연스럽게 플로라의 검은 복장 사이사이에 그림자가 그 틈을 메우며
검게 일렁였다.
그 모습은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물론 그 정도를 가린다고 크게 건전할 모습은 절대 아니었지만 말이다.
플로라는 애니를 대동하고 성을 나왔다.
오랜만에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은 꽤 낯선 것도 같았다.
시간상으로 그리 오래 지난 것은 아니지만, 왜일까.
집이라는 감각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그 느낌이 괜히 정말 오랜만에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유롭게 주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티들렌이
그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걸어나와 말했다.
"잘 지냈나 보구나."
"네 엄마."
"성에서의 생활은 할만 하니?
난 아직도 네가 늘 어렸을 때의 그 철부지 꼬마같아서 걱정이 되는구나.
물론 무령님께서 잘 돌봐주신다고 하지만..."
"엄마, 걱정마세요."
"참, 황제라는 사람이 이렇게 누그러져서 괜찮으련지..."
"괜찮아요. 이젠 예전의 어린 아이만은 아니니까."
"내가 보기에는 넌 아직도 아이란다."
"난 돌아가지도 않을거고, 더는 울지도 않을거에요. 그러려고 여기 온 거고.
마지막으로 그걸 말해주려고 온 거에요."
"너도 이미 알겠지만, 난 너를 믿는단다. 이제 엄마는 신경쓰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렴.
무령님같은 좋은 분을 만나고, 친구들도 생긴 것 같아서 난 이제 더 바랄게 없단다.
플로라. 이제껏 많이 참았잖니.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엄마...."
"다만, 옷은 좀 차려 입었으면 좋겠구나. 그런 남사스러운 옷 말고."
"안됐네요. 이미 딸내미는 엄마 손을 떠났거든요? 헤헤."
"그래. 이참에 엄마도 대공가에서 물러나기도 했겠다.
여행을 다녀오려고 하는데."
"여행?"
"이제 나도 소박하게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했단다."
"바다라... 바다... 좋네. 나도 언젠간...."
"그래,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뭐 먹고 싶은거라도 있니?"
"아냐. 나 또 금방 나가봐야 해. 일이 있어서. 엄마도 잘 지내시고요."
"그래."
플로라는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말한 자신이 무색해질 정도로
따뜻한 눈물이 한방울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이상은 울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그 한 방울의 눈물이 더 무거운 것 같았다.
플로라는 눈물을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돌리고 짧게 인사를 한 후에 돌아나갔다.
닫힌 문 뒤에서 티들렌이 차를 들고 다시 식탁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여보... 우리 딸 다 컸지? 언제 저렇게 씩씩해져서는...
이제 참한 신랑감 하나만 물어오면 되겠는데. 그렇지?"
티들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콜록이는 기침에는 붉은 피가 섞였다.
"저 애 앞에서 이 꼴을 보여주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
플로라, 아무래도 이미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나봐. 내 몸은.
기껏 무령님께서 병은 고쳐주셨지만, 이젠 슬슬 갈 때가 된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하며 티들렌은 손수건으로 흘린 피를 닦아내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젤렌지가 그랬듯, 티들렌 또한 에리아의 변화에 따라 치유 효과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병은 이미 치유되었다지만, 이미 몸을 망가뜨린 혈액암의 후유증을 노쇠한 그녀의 몸은 버텨내기 어려웠다.
스스로 짐작하는 몸 상태에 벌써 교회에서 얻어온 성수를 여러 병 마셔보았음에도
에리아의 말처럼 몸 상태가 호전되는 일은 없었다.
이미 그 피에 에리아의 마력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일테지만, 그런걸 티들렌이 알 리가 없었다.
티들렌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신의 독방으로 돌아갔다.
플로라는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로 애니를 안고 콜로세움 근방의
작은 상담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애니야, 이제 다 와간다. 나도 많이 삐쳤거든?
엔시온에 게비디까지 다 만나셨다면서 나만 안부르셨다는건 너무하잖아?
난 황제니까 이정도 억지는 부려도 되겠지?"
애니는 고개를 끄덕인다.
밤마다 그렇게 보고싶다고 이불을 걷어차고 앙앙 울어대는데
여기서 반대했다가는 정말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기도 했던 모양이다.
상담소의 문을 두드리면 그 안에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오늘 영업은 종료되었는데요?"
"에반제인 플로라 황제다. 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느니라. 문을 열어라."
"네? 어머...!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정말 죄송합니다!"
부산스러운 소리가 난다. 뭔가 펑 하는 소리, 쾅 하는 소리.
플로라는 억지로 문을 열어젖힐까 하다가 아까 전의 자신의 꼴을 떠올리고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잠시 기다리면 안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발레리아와 작은 금발의 소녀가 발레리아의 손을 잡고 서있었다.
"언니 안뇽!"
"어...언니...?"
당황한 플로라와 천진한 삐삐. 둘의 첫 만남은 그것이었다.
"삐삐! 그렇게 인사하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이 나라에서 제일 높으신 분이란 말이에요!"
"노파?"
"그러니까, 제일 대단하다는 말이에요!"
"마마보다?"
"네, 마마보다요!"
"그럭구나... 안냐세여... 처음뱁개씀니다...삐삐 세릿딴임니다..."
플로라는 벙 쪄서 발레리아에게 물었다.
"그... 이 아이는...?"
"무령님의 따님이십니다. 삐삐라고 합니다."
"그럼, 무령님께서는 지금 어디에..."
"잠시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가셨습니다."
"하아... 그래, 잠시 안에서 기다려도 되겠지?"
"네, 어서 들어오시지요. 그나저나 호위도 없이 단독으로 오시면..."
"혼자라니? 아니다. 애니가 있지 않으냐?"
그렇게 말하고 플로라는 가게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어우, 역시 보는 눈이 있으면 힘들다니까. 그래서, 무령님은 어디가셨어?"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셨어요. 겸사겸사 책도 사신다고 하셨는데."
"까만언니야, 이거 머고요."
삐삐는 작은 사탕을 하나 내밀었다.
파인애플 사탕이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언니한테는 존댓말 안해도 괜찮아. 엄마 친구니까."
"마마 친구 마나! 친구 부자야!"
"친구 부자...?"
플로라는 애니와 삐삐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픽 웃었다.
"무령님 근처에는 자꾸 이런 귀여운 아이들이 있으니 흐뭇해진단 말이야."
삐삐는 폴짝 뛰어서 플로라 품의 애니를 만지더니 말했다.
"반네리 이모! 이거 야옹이?"
"네, 고양이에요."
"우아! 야옹이 첨바써!"
애니는 귀찮다는 듯 꼬리를 살랑거린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삐삐에게 플로라가 웃으며 묻는다.
"왜, 꼬리 신기해? 하긴. 너랑 나같은 사람들한테는 없으니까. 그치?"
"아니거든? 삐삐 꼬리 이써!"
"뭐?"
플로라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삐삐는 뒤로 홱 돌아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꼬리를 꺼내 보이며 살랑살랑 흔들었다.
"어...?"
"어...."
"캬아악!!!"
"바! 삐삐 꼬리 이찌?"
순간의 정적.
그리고 그때 마침 정적을 깨는 목소리.
"다녀왔어. 발레리아, 내가 좀 늦었나? 잘 있었ㅈ....어...?"
그리고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에리아가 화들짝 놀라 달려오며 말했다.
"아이고 삐삐야!! 또 사고쳤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