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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188화 (188/303)

〈 188화 〉 황제와 딸

* * *

삐삐가 꼬리를 흔드는 모습은 꽤 귀엽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각 없이 엉덩이를 쭉 빼고 흔드는게, 마치 장기자랑을 하는 여느 유치원의 아이들 같았다.

하지만 그런 천진한 모습에 더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결국, 나는 삐삐를 안아 들었고 그제야 플로라와 애니를 발견했다.

"미안해, 못볼걸 보여 버렸네. 오랜만이네."

가볍게 손을 튕겼다.

마력을 휘감아 플로라의 옷 위로 실처럼 엮어 덮었다.

"여자애가 그런 차림으로 다니면 못써 플로라.

여기 삐삐가 보고 있잖아."

삐삐는 별생각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쩐일이야 플로라? 애니까지 데리고. 오랜만이네."

"아뇨아뇨, 별일은 없어요. 그냥 놀러 왔어요.

최근 들어 바쁘다고는 하셨지만, 게비디나 엔시온은 다 만나셨잖아요!

가끔은 억지를 좀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고나 할까요?

이해해 주실거라 믿어요."

"음, 그래. 안 그래도 한번 부를 생각이었으니까.

플로라는 요새 어떻게 지냈어?"

플로라는 애니를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고 가벼운 생각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음, 글쎄요. 국무 처리하는 것 외에 따로 다른 건 안한 것 같네요.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어려운 건 딱히 없었던 것 같은데, 이제 앞으로 가 문제예요."

"앞으로?"

"회의 중에 나온 이야기인데, 앞으로는 미리타엔이라는 국가를 떠올렸을 때

폭력보다 먼저 기술선도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바꿔보려고 하거든요.

물론 저도 어느 정도는 악습으로 굳어질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하는데 말이죠."

"여러모로 너도 고생하는구나."

"네, 뭐 다들 그렇죠. 게비디도 상당히 고생하는 것 같던데요.

폭력이라는 이미지를 벗자고 하면 제일 먼저 내쳐지는 게 콜로세움이니까요.

어떻게 콜로세움을 양지로 끌어내야 할지 생각이 많아 보였어요.

그러면서도 자기는 콜로세움은 목숨을 걸어야 비로소 진짜라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아무리 그래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양보하기 어렵다나 봐요.

그게 자기가 콜로세움의 노예들을 존중할 수 있게 하는 최후의 수단이라나?"

"알아서 잘하겠지."

"그렇겠죠... 아 참, 그리고 혹시 무령님, 도서관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도서관?"

"그 반응으로 보아 모르시는 것 같네요.

도서관이라고 하는 건..."

"책 마니 이써! 삐삐 마니 가! 언니랑 마마만 말해.

삐삐도 껴죠!"

발레리아가 화들짝 놀라서 삐삐를 저지하려 한다.

내가 괜찮다고 발레리아를 안심시키면 발레리아는 혼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실례했습니다."

"아냐, 일단 삐삐는 내가 관리해도 되는 거니까.

그래서, 플로라. 도서관이야기를 계속해줄래?"

"지난번에 콜로세움의 우승 건으로 찾아왓던 그 유레크로스의 패잔병 있잖아요?"

"아, 류해백씨?"

"네. 도서관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어요. 그리고 몇 번인가 그러던데요.

'이게 아닌가?' 라고요. 뭔가의 압박에 쫓기는 사람 같았어요."

"압박이라... 확실히 정보상단에 관해서 이야길 할 때도 생각보다 급해 보이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어.

대체 그 도서관이 뭔데 그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확실한 건 그 군인은 무령님께 관심이 꽤 많아 보인다는 거예요."

"관심이라. 확실히 의아하긴 했어. 아무래도 묘하게 빈포드와 카르고르 사건에 집착하는 것 같았거든."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기야 하더라구요. 따로 사람을 시켜서 감시를 붙였어요.

혹시 위해가 되는 일을 하려고 하거든 즉시 처리할 수 있도록요.

그래서 혹시 도서관이 뭔지 아시는지 여쭤본것뿐이예요."

우리가 대화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삐삐는 삐친 건지 입을 삐죽 내밀고는

고개를 돌려서 발레리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반네리 이모 또 거짓말해써. 마마가 더 대단하자나!

삐삐가 배우는 거 마마는 안 하는데 언니는 해."

"아니예요, 황제께서 무령님을 많이 좋아하셔서 그런거예요."

그 대화에 나도 궁금해서 끼어들어 보았다.

"삐삐가 배우는 게 뭔데 그래?"

삐삐는 나를 말똥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안 알려져!"

아무래도 나와 플로라의 대화에 끼지 못하자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높임표현이랑 존댓말이요. 가르쳐 줘야 할 것 같아서요."

그걸 너무 간단히 발레리아가 말해 버리자 삐삐는 큰 배신감을 느낀 표정으로 발레리아를 바라본다.

입이 떡 벌어져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초간 눈만 깜빡이다가 토라져서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콩 닫는다.

"다 미어!"

"에구, 안 되겠네. 발레리아, 잠시 차나 주전부리 좀 내와줄래?

나는 삐삐 좀 달래주고 와야겠어."

"알겠어요. 삐삐도 참..."

"아직 어려서 그래."

나는 삐삐의 방문을 두드렸다.

"삐삐 삐쳤어?"

"아니!"

"그럼 엄마랑 잠깐 이야기 좀 할래?"

"시러!"

"그럼, 여기서 안 나올거야?"

"....."

"삐삐 오늘 밤에 혼자 잘 수 있어?"

"시러..."

삐삐는 그렇게 말하고는 잠근 문을 열었다.

이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엄마가 미안해. 중요한 이야기라 그랬어."

"삐삐도 도서간 아는데에..."

"맞아. 삐삐도 잘 알아. 똑똑하고 말고. 엄마 딸이잖아 맞지?"

"응..."

"자, 눈물 닦고. 가서 발레리아 이모한테 사탕 3개 달라고 해."

"3개...?"

"응. 3개."

"삐삐 공부 열시미 해도 사탕 2개 주는데..."

"가서 엄마가 주라고 했다고 하면 줄 거야."

"미아내..."

"뭐가?"

"마마가 삐삐 시러하는지 아라써..."

"에이, 그럴 리가."

삐삐는 눈물을 쓱쓱 닦더니 물었다.

"닥꼬치 머고도 대?"

"냉장고에 있는 거? 그래."

삐삐는 조금 전까지 울더니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쫄래쫄래 나가서 닭꼬치를 꺼내더니 발레리아에게 사탕도 착실히 받아와서

다시 내 품에 안겼다.

플로라가 그 모습을 보고 괜히 아련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부럽네요. 저도 무령님 품에 안겨보고 싶어요."

"왜, 너도 뭣하면 안아줄까?"

내가 그렇게 물으면 삐삐가 플로라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지그믄 삐삐 차래야. 언니는 삐삐 자며는 해."

삐삐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그렇게 말하면 플로라도 풉 웃었다.

"너 그렇게 울면서도 먹을 건 다 먹고 할 말은 다 하는구나."

플로라도 삐삐와 나름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발레리아가 슬쩍 플로라의 옆에 붙어 물어본다.

"좋은 포지션을 뺏기셨네요?"

"아직 애잖아. 어린 애. 그리고 내가 아무리 이기적이라도...

엄마와 딸 사이를 갈라놓진 않으니까..."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도 그 모습에 한마디 얹었다.

"너도 많이 컸구나 플로라."

"네? 아니예요. 그리고 이제 저는 안기기보다는 안아줘야 할 아이가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플로라의 품 안에서 애니가 기지개를 켰다.

"아, 그래서 무령님. 다음 여행은 언제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글쎄, 아마 삐삐가 예절공부를 대략 마치고 난 다음에 떠나지 않을까 싶어."

"이번에는 어디로 가시려고요?"

"뼈의 저택. 거기서 조사해 보고 싶은 것들이 아직 많거든."

"확실히 거기라면 학회쪽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요.

음... 괜찮으시면 거기서 아까 말씀드린 도서관에 관해서도...."

"응, 조사해볼게... 어머, 삐삐야. 삐삐야?"

"고로롱...고롱..."

삐삐는 어느새 울다 지친 건지 품에서 꼬박꼬박 졸고 있었다.

덕분에 닭꼬치 소스가 내 바지에 묻어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뿔이, 등에서는 뾰족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그래서 무령님, 그 삐삐는...?"

"아, 내 딸이야. 천각룡이라는 용종인데, 귀엽지?"

"그... 제가 아는 천각룡은 토벌 난이도 최상급의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용 뿐인데요."

"멸종이라니. 여기 멀쩡히 살아 있는데."

"아...하하... 역시 무령님은 못당하겠어요..."

"뭘, 너도 만만찮은 고양이 하나 있잖아?"

애니는 가슴을 펴고 야옹 하고 울더니 꼬리를 흔들어 보인다.

"사역마였죠. 놀라운 일이예요 정말. 사실 저는 제가 애니랑 이렇게 친해질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었거든요."

"그 아이는 누구보다 미리타엔의 불합리한 구조를 잘 아는 아이라서

네 생각에 공감할 수 있는 거야."

"네? 잘 안다뇨?"

플로라가 애니를 바라보면 애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이야기해도 되냐는 의미로 넌지시 던져 보면 애니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무래도 아직은 썩 달갑지 않은 이야기이기는 한 것 같다.

"음... 옛날이야기 하나 해 줄까?

옛날 옛적에 얼굴을 붕대로 감고 다니던 노예상이 있었어.

개인적으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들을 잡아다 팔곤 하는 남자였는데..."

"그거 맨데일이잖아요..."

플로라는 질린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능청스레 되물었다.

"어머? 알고 있었네?"

"장난하시는 거죠?"

"맞아."

"그래서 그 남자 이야기는 왜 하시는 거죠?"

"애니는 그 남자에게 붙잡혔던 노예였거든.

탈출했지만."

"탈출이요?"

"결국 얼마 못 가서 숨이 끊어졌어.

그리고 마녀의 주술과 계약으로 인해 그 소녀는 검은 털의 고양이 마물이 되었단다.

사역마가 되어 버린거지."

"어.... 그럼 그 말은.... 애니가 원래는..."

"사람이었지."

얼굴이 창백해진 플로라가 애니를 멍하니 바라보면 애니는 머쓱한지 꼬리로 살짝 얼굴을 긁는다.

"너 그러면 내 서랍에 있던 그.... 하아....내가 헛소리한 것도 전부 알겠네...?

꺄아아악....!"

애니는 플로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 모습은 마치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뭐, 됐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겠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도 몇 시간 정도 더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다가

플로라와 애니는 궁으로 돌아갔다.

며칠쯤 지나서일까, 티들렌이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황제의 모친이라는 이유에서 그녀의 장례는 화려하다고 해도 부족할 정도로 호화로웠다.

그녀가 자필로 남긴 유언장이 발견되었을 때, 플로라는 차분하게 읽었다.

내용은 단 두 줄의 짧은 문장이었다.

[죽을 때까지 황제로 살 거라 내 딸아.

이제 이 저택으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도록.]

플로라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게 슬퍼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지만,

적어도 그녀는 한동안 웃음이 사라졌었다고 했다.

그녀는 에반제인 대공가의 저택을 처분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그녀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또 마냥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더 성장했다는 의미일 것이고, 또 그만큼 독해졌다는 의미겠지.

가학공의 면모가 드러나는 모습에 나는 그렇게 변해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동정했다.

플로라는 여전히 내게는 밝다. 밝은 모습을 보이고 또 나를 그렇게 따라 준다.

나를 좋아해주는 그녀의 그 진심을 이해할수록 그 어두운 모습에 더 마음이 아팠다.

에반제인 저택의 경우도 원래는 내게 넘기려고 하던 것을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아무래도 그걸 받기가 미안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건 티들렌이 원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저택은 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거상에게 넘어갔고,

거상의 별장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며칠간에 삐삐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적어도 존댓말은 확실히 익힐 수 있는 정도가 된 것 같았다.

인간과는 성장의 척도가 달라서 뭐라고 확실히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말을 할 때면 아직 발음이 새면서도 지능은 착실히 그 이상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나는 큰 걱정없이 삐삐에게 마력의 기초 운용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3주가 지날쯤, 드디어 나는 오랜만에 정든 가게 문을 열었다.

"드디어... 다녀오시는 거죠?"

"응. 너도 잘 있고. 약 잘 챙겨 먹어."

"네. 걱정하지 마세요."

만일을 위해서 챙겨둔 약과 UTUI­Q67 5병을 발레리아에게 미리 맡겨두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일이 생겨도 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몸을 지킬 수단이 없는 발레리아에게는 필요한 물건이다.

"몇 번이나 말해 뒀지만, UTUI­Q67를 다섯 병이나 줬다는 건,

적어도 3병은 널 위해 아껴두라는 의미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건 네 마음이지만, 2병까지만 허락할 거야.

알겠지? 일단 너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무령님께 받는 기대를 그렇게 허무하게 져 버릴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러면 다행이고. 알아서 잘하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발레리아인데.

자, 삐삐야, 갈까?"

"응!"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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