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 루트8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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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미리 이어둔 마법진을 통해 전이할 생각이었다.
그게 제일 빠르기도 할 테니까.
오래 걸으면 삐삐는 분명 지칠게 확실했다.
그런데도 내가 전이문 마법진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누가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진이 훼손되어 있었다.
상담소는 건드린 기억이 없었으니 만큼 아마 마운틴엘프가 거주하는 텔레프란쪽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 같았다.
덕분에 삐삐와 내 몫으로 배편을 예약해야 했고, 시간에 맞춰서 부두로 나가야 했다.
배를 탄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예약한 배는 아무래도 대형 수송함이었던 것 같다.
국가간의 무역을 주도하는 거상이 물건의 유통을 위해 배를 운영하던 것을
민간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중간과정에서 추가적인 수입을 벌어들이는 구조 같았다.
덕분에 객실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삐삐를 안고 배정된 방으로 탄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무래도 삐삐의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애가 자꾸 헥헥거리며 헛구역질을 하는게 아무래도 멀미가 꽤 심한 편인 것 같았다.
"마마... 삐삐 우엑 해...."
덕분에 나는 삐삐를 따로 안아들고 바깥 바람을 계속 쐬어야 했다.
원래 계획은 삐삐를 데리고 방안에서 도착할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는데,
하는 수 없이 폴리모프를 시켜서 데리고 선상으로 올라가야 했다.
다행히 날은 맑아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삐삐는 내 쥐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허덕이며 바람을 맞았다.
안그래도 집중력이 상당히 흐트러졌을텐데도 폴리모프를 상당히 잘 유지했다.
간혹 등에서 뭔가 꼬물거리는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삐삐를 데리고 가만히 선상에서 눈에 띄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여기저기서
날 발견하고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있었다.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저는...."
"혹시 미리타엔의 무령님 아니십니까? 이런 곳에서 뵙다니 반갑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그저 어영부영 넘겨내며 말을 돌리고 있을 때였을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네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은 쳐내며 내 앞으로 나타난 남자가 있었다.
그 훤칠한 키와 훈훈한 외모에 사람들은 멈칫 뒤로 밀렸다.
"에스ㅌ..."
"쉿."
그는 내게 웃어보이며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내가 안고있던 삐삐를 쓰다듬었다.
"이 아이는?"
오랜만에 나타난 에스트로는 자연스레 사람들을 물리고 내게 다가왔고
삐삐를 보자마자 흥미로운걸 발견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평소에 없던 연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나도 거기 맞춰주기로 했다.
"멀미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아, 멀미... 제가 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아, 멀미약이라도 있으신가요?"
"어... 어린 아이들에게는 멀미약을 먹이면 안됩니다.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알려드리는 겁니다.
잠깐 봐도 괜찮을까요?"
"네, 그럼 한번 봐주시겠어요?"
내가 삐삐를 살짝 건네면 그가 받아들려고 하자마자 삐삐가 캬르륵 거리며 내 옷을 꼭 붙들고 에스트로를 노려본다.
그 모습에는 나와 그 모두가 당황했다. 삐삐는 아무래도 에스트로를 겁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좀 많이 무서운가보군요. 하하..."
삐삐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삐삐 시러... 무서... 마마...."
나는 삐삐를 안심시키려고 해봤지만 아무래도 쉽게 적대감을 떨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린 아이들은 경계심이 상당하니까.
"음, 어쩔 수 없죠. 그럼 이렇게 하시죠."
에스트로는 손을 뻗어 남들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붉은 빛을 만들었다.
그게 사람들의 생명에서 만들어진 피에 마력을 담은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삐삐는 당연히 학을 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안에 담긴 마력은 흥미롭게 바라보긴 하는 것 같았다.
"삐삐야, 저거 싫어?"
"시러... 무셔..."
애가 싫다는걸 억지로 받아봐야 좋을 것도 없었다.
물론 천각룡이니만큼 여러 마력을 받아들이는게 중요하기도 할 테고
멀미에 효과가 있는 무언가의 마법도 섞여 있었겠지만,
삐삐가 싫어하면 굳이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되겠네요. 우리 애가 너무 싫어해요.
죄송합니다."
"하...하하... 어쩔 수 없죠... 일반적으로는 다들 좋아하는 외모일텐데 이상하네요..."
나는 말 대신 데릭이 이전에 넘겨주었던 노트의 천각룡 페이지를 살짝 펼쳐 그에게 넘겼다.
그는 가만히 그걸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체질상의 문제니까...
그럼 혹시 보고 배우는 정도는 가능할까요?"
"보고 배운다?"
에스트로는 그렇게 말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라졌다.
그러더니 인식 저해와 무감각 마법을 두르고 다시 나타났다.
"멀미가 걸린다는 건 배에 타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응... 그렇지."
"그럼 날면 되는것 아니겠어? 인간이라면 어렵겠지만, 뭐 용이라면 못할 것도 아니지.
게다가 천각룡이라며? 천룡종이잖아? 날아다니는 용이라고."
"어...?"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에스트로는 상당히 우아하게 뒤를 돌아섰다.
그의 옷은 형태를 바꾸고는 마치 막이 달린 날개와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건 뭐야...?"
"뭐긴, 뱀파이어니까 박쥐 날개 정도는 있는거지.
고전적이지만, 그게 정석인걸 어쩌겠어?"
그렇게 말하고 그는 살짝 날개를 펄럭이더니 말했다.
"그래서 그 용은 어떻게 된거야?"
"내 딸이야. 이번에 새로 생긴."
"새로 생겼다? 뭐... 잘은 몰라도 여전히 사고를 몰고 다니는구나 엘라.
그러면 내 딸이기도 한건가?"
"누구 마음대로?"
"하하... 그럼 그냥 삼촌 정도로 치자고.
딸처럼 아껴주는건 상관 없지?"
"그렇기는 한데, 이 애가 과연 널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노력은 해볼게. 아빠로 인정받으려면 나부터 열심히 해야지.
그래도 난 아직 네가 날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낯 뜨거운 소리 좀 하지마. 어떻게 그런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는거야?"
"원래 그렇잖아? 몸이 차면 마음이라도 따뜻해야 하는 법이라고."
"무슨 논리야?"
그는 대답대신 픽 웃어넘기고 말했다.
"그래서 나 사랑안해?"
"뭐... 호감 정도는 있어. 호감 정돈. 대략루트 4의 결과값에서 cos.260도의 결과값에 500을 곱한 값을 빼서...
거기다가...기분으로 3정도 더해줘. 너무 어렵나? 쉽게 풀어서...한... 백점 만점에 루트 8317점 정도?"
"뭐야 그게. 차라리 싫다고 직설적으로 말해주는게 상처라도 덜 받겠는데?
너한테도 좀 더 노력 해야겠네. 일단 남편이 아빠보다 먼저인 거였지?
그나저나 말이야, 이번에는 배나 타고 조용히 가 볼까 했더니,
네 덕분에 그것도 글른 것 같아."
"왜? 인식 저해 결계는 펴 둔 것 아니었어?"
"그랬지. 그런데 이 배에 성가신 영감님이 한 분 타셨네.
아무래도 내 뒤를 밟으신 모양이야.
아까 잠깐 빠졌을때 봤는데, 어디부터 따라온건지는 몰라도,
이 이상 날 따라오게 둘 수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에스트로는 아까보다 한껏 과격하고 자유로워보이는
상쾌한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삐삐에게 말했다.
"잘 봐라 꼬마야. 아빠가 가르쳐주는 첫 번째 교육이야."
"야 그러니까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말하고 에스트로는 날개를 활짝 펴고 배 난간을 붙잡더니
휙 몸을 날려 밖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 그와 동시에 인식저해 결계를 해제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금방 다시 찾아갈게! 사람들의 눈이 좀 사라진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그렇게 말하고 그는 사라져 버렸다.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나만 그를 바라본 것은 단연 아니었다.
선상위의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만큼 시선을 끄는 모습이었으니까.
애초에 인간이 그렇게 하늘을 나는 것 자체가 놀라운데
거기에 날개도 펴고 날아간다? 말도 안되는 화젯거리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자신들과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이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라는 것이 밝혀지면 또 한번 소란스러워지겠지.
그걸 보던 삐삐가 멍하니 뒤를 구경하다 내게 물었다.
"무서운 아져씨, 파파?"
"아냐... 절대 아냐 삐삐..."
"그럼 삐삐 파파 어디써?"
나는 그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 음... 그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생각을 고르는데
삐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삐삐는 다 아라... 아라버려써... 마마... 말 아내져도 대..."
"뭐?"
이 반응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절대로 모르는 얼굴이다.
아마 가만히 놔뒀다가는 또 오해를 해서 피곤해질 것 같다는 느낌.
그 까다로운 문제에 엮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 감이 그렇게 말했다.
좋은 일이라면 몰라도 나쁜일에서 내 감은 거의 틀리지 않으니까.
애가 왜 어떻게 이런 얼굴을 하는건지 모르겠는데
왠지 심각하게 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삐삐도 아라... '이온' 이라구 하는거지?"
"미치겠네..."
"마마 나쁜말 해... 나쁜말 하면 안대."
"그..그래 미안해..."
"그래두 삐삐는 이애해주께."
이건 진퇴양난이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절대 아냐... 삐삐야... 엄마는 그런게... 엄마는 그런사람 정말 안좋ㅇ..."
말하다가 괜히 멍해졌다. 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이게 맞나...? 내가 왜 얘한테 이런 해명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얘가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배운건지도.
"그런데 삐삐 너 그런거 어디서 배웠어?"
삐삐는 내 눈치를 슥 보더니 고개를 슥 돌려버렸다.
"야! 물어보는데...!"
"삐삐는 어질어질이야. 졸려. 삐삐 자꺼야. 마마 안뇽..."
삐삐는 그렇게 말하고 내 가방을 열었다.
내가 가방을 다시 닫고 삐삐를 바라보며 물었다.
"화 안낼게. 어디서 배운거야?"
"바...반네리 이모가 마래졋써..."
"발레리아... 얘는 대체 뭘 가르친거야... 돌아가면 이야기를 한번 해야겠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삐삐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마... 이모랑 말하꺼야?"
"어. 한번 이야기해보려고."
"아나면 안대까? 하면 시러."
"하지 말라고?"
"으응... 삐삐는 아나는개 조을거가튼데...?"
얘가 이렇게 능숙하게 말하는걸 보니 오히려 더 수상했다.
"하지말자고? 너 솔직히 말해봐. 그거 어디서 들었어?
발레리아한테 배운게 아니구나?"
"어떠케 아라써..?"
삐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화를 내려다가 픽 웃고 대답해줬다.
"삐삐 반짝반짝 안했거든."
그 말에 삐삐는 화들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멀뚱히 바라보던 삐삐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다름아닌
"히끅!"
"어?"
"히끅!"
딸꾹질이었다.
딸꾹질을 할 때마다 몸 전체가 통 튀어오르는게 귀여웠다.
삐삐는 그러면서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눈을 감고 자는 척을 시작했다.
"삐삐야?"
"...."
"삐삐?"
"....히끅!"
"안자는거 다 알아."
"....히끅!"
결국 나는 한숨을 쉬고 이번 일은 덮기로 했다.
하긴 어디서 들었느냐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배우면 안될 것도 아니니까.
단지 내가 괜한 오해를 사는것이 싫었을 뿐이다.
"삐삐야, 화내려는게 아니니까 잘 들어.
아까 그 사람은 삐삐 아빠 아냐."
"그럼 마마는 파파 시러?"
"파파 아니라니까..."
"싫어?"
"응..."
겨우 대답했지만 삐삐의 표정은 묘하게 밝았다.
"마마, 거짓말했어. 반짝반짝 없어."
".....시끄러. 방에 들어가자. 너 멀미는 아무래도 다 나은 것 같다."
나는 삐삐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가자 마자 삐삐는 폴리모프를 풀어 어색하지만 조금씩 방에서 비행연습을 시작했고
아무리 해도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서 결국 내가 살짝 마법으로 띄워주었다.
그러고 나면 삐삐는 지상 30cm정도 떨어진 정도의 높이에서 잘 날아다니며 놀았다.
신경을 겨우 다른 곳으로 돌려두고 나서 나도 잠시 숨을 골랐다.
'싫어?' 라는 질문. 어린 아이가 묻는 질문이 더 피부에 차갑게 와닿았다.
쿵 하고 발등에 떨어지는 도끼와도 같은 감각.
왜 싫겠어. 내 까다로운 기준에서 아무리 감점을 하려고 해도
기어이 91점이나 되는 녀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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