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 생쥐굴의 늙은 여왕
* * *
노인은 조금 우스운지 껄껄대며 웃다가 다시 내게 말했다.
"그래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뭐냐? 내가 그냥 노망난 늙은이면 어쩌려고?"
"어머, 이제와서 아닌 척 하시는 거에요?"
"아니~ 노망난 것 맞지.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가 건네준 조개를 다시 주워 열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생으로 조개를 몇 개나 집어먹는 것을 보고 가방에서 발화부를 꺼내
주변에 젖지 않은 나뭇가지따위를 모아 불을 지폈다.
"구워드시면 어떨까요. 생으로 드시는 것보다 나을텐데."
그렇게 말하면 노인은 잠시 불을 보더니 내게 물었다.
"이야, 그거 신통하다. 나 몇 개만 줘봐라. 이런데서 자면은 턱이 돌아가요.
아주 밤마다 추워 죽겠다니까. 너는 많잖아 그거."
"언제는 모포 있으시다면서요."
"이거랑 그거랑 같어 임마? 그 내가 뭐시여.. 진주도 줬는디 그게 아깝냐!"
"딱히 아깝지는 않아요. 그냥 농담 한 번 해본거죠."
나는 발화부를 넉넉하게 집히는 대로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젖으면 안돼요."
"아, 안되는거냐? 물 끓일수도 읍서?"
"냄비같은걸 구하시면 되죠."
"이 바다에 냄비가 어딨냐."
그렇게 말하고 그는 좁은 집에서 나오더니 나무 판자를 놓고 그 위에 철퍼덕 엎어져
어디론가 또 질질 몸을 끌고 기어갔다.
갯벌 어딘가에 박힌 나무 말뚝. 밧줄에 묶여 십자로 놓인 말뚝에는 낡은 철모가 걸렸다.
아마 누군가의 묘라고 생각해도 큰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거기서 그 철모를 집어들고 돌아와서는 이리저리 둘러보고 만족한 듯 바닥에
철모를 내려놓았다.
"나쁘지 않아. 그래도 그 소독은 해야 되겠지? 그치?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철모를 받아들고는 내가 준 발화부로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철모 안에 불이 붙은 발화부를 집어넣고 백사장 위로 철모를 박아놓았다.
잠시 지나면 타닥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모 내부의 천과 방충제 역할을 하던 것들이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그 노인은 내게 철모를 건네고 말했다.
"물 담아와봐라."
"왜 거기까지 갔을때 안 떠오시고?"
"너 바보 아니냐? 물을 뜨고 여기까지 찡찡대고 기어오면 그 물이 가만 있냐?
다 쏟아지지!"
"조심히 기어오시면 되죠."
"누가 몰라? 오래 걸리잖아! 팔다리 멀쩡한 놈이 사사건건 트집은..."
"어르신도 팔다리는 멀쩡ㅎ..."
"빨리 안다녀오냐!"
그의 막무가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기에 마지못해 나는 물을 채웠다.
단, 바다까지 다시 갯벌에서 질척대며 다녀올 자신은 없었기에 마법으로 공기중에서
수분을 모으는 방식을 사용했다.
"능숙하구만."
별다른 말 없이 물을 다시 끓이기 시작하더니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이건 말이야, 죽은 군인의 군모야. 지금은 다 낡은 쇳덩이지.
그래도 비교적 최근 보급되는 물건이라 말이지, 묵직하고 녹이 슬지도 않어.
다만 어디사는 어떤 놈이 비듬이라도 있다고 하면 밥먹기가 꺼려 지겠지만서도..."
"아까 그 말뚝은 그럼..."
"아, 죽은 내 동료였지."
"그럼 어르신도 군인이셨나요?"
"틀린 말은 아니지. 아무튼 그 젊은 친구는 전쟁중에 죽었어."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물이 끓는 것을 보고 그곳에 조개를 집어넣었다.
군인이라...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그닥 친하지는 않았지만은 살아남은 건 나니까 동료 정도는 챙겨 주는거라고 보면
얼추 맞지 않을까. 나도 왜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으니까 말이야."
"그럼 그 허리는 전쟁중에 그렇게 되신 건가요?"
"허리? 너도 이 허리에 관심이 있냐? 전쟁? 그렇지... 그렇고 말고.
이젠 어떤 전쟁이었는지 기억도 안니지만 말이야.
대체 내가 뭘 위해 싸운건지도 모르고, 어... 어떻게 싸웠더라...?
싸우기는 했던가...?"
노인은 그렇게 제멋대로 떠들다가 말했다.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구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원하는 답이 아니라서 미안하구만.
그래도 하나 기억나는 이야기를 해주지. 나는 아마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마 내가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찜찜한 두려움은 없었겠지..."
"찜찜한 두려움이라..."
"나도 뭔가를 더 말해주고 싶기야 하지만 기억이 나는게 없어. 난 여기서 살거야.
앞으로도 계속 말이지. 뭔가 내가 다시 필요해지거든 다시 찾아오라고."
"그래요. 알겠습니다."
나는 삐삐를 안고 한발짝 물러났다.
여기서 더 시간을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는 나와 삐삐를 번갈아 바라보며 뭔가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포기한 듯 고개를 저었다.
"생각이 날 법도 한데... 음, 잘 가라고."
결국 끝까지 그의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했다.
삐삐를 다시 포대기에 업고 엠페레스로 오랜만에 돌아오는 것도
조금은 다른 정겨운 느낌이 있었다.
엠페레스의 널스페이지로 발을 옮긴 것은 아마 그 정겨운 느낌을
조금더 강하게 받고 싶은 일종의 향수와도 같은 감정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문을 두드리면 그 내부에서 젊은 여성 하나가 걸어나왔다.
"네, 널스페이지입니다. 무슨 일로...헉!"
그녀는 날 보자마자 바로 알아본듯 바로 능숙한 대응을 시작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냥 방문차요. 모건씨 있으신가요?"
"아, 그방 연락드리겠습니다. 잠시만 여기서 대기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 그럴게요."
상당히 빠른 접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삐삐는 등에서 업힌채로 꼼질대며 뭔가를 하고 있었지만 딱히 나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 폴리모프를 하기 귀찮은 것이겠지.
잠시 기다리면 다시 그녀가 돌아와서 안쪽으로 안내해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나를 데리고 접견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헐레벌떡 준비한 모습이 역력한 모건이 땀을 흘리고 앉아있었다.
"아, 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준비라도 했을텐데요..."
"아, 그냥 얼굴 잠시 뵙고 싶어서 들렀어요. 연락을 드리질 못했네요.
경황이 없어서..."
"아, 뭐 그러실 수 있죠."
"아, 그래서 혹시 빈손으로 오기 뭐해서 이걸 챙겨오기는 했거든요."
나는 상담소에서 미리 챙겨둔 포션을 몇 가지 꺼냈다.
"이번에 새로 개발한건데, 효과는 확실할거에요. LzT2336D라고 이름붙였어요.
그리고 옆에 있는 녹색이 X#51g3이고요."
"음, 신제품이라고 하니 확실히 흥미가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군요.
무령님께서 개발하시는 포션은 이곳에서도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물건이기도 하고요.
다만 그 효과와 이름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름은 재료나 제조 방식을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풀어 적은거에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재료와 무슨 방식을 사용해 만든건지 알 수 있게요."
"오호... 그렇다면 이 약품들은 어떤 효과가 있는 건지요?"
"LzT2336D는 여러 번 개량한 건데, 간단히 말하면 무욕을 가능하게 해주는 약이에요."
"무욕이라고요?"
"원래는 종종 저에게 추파를 던지던 사람들의 성욕을 강제로 제거해주는 약물을 연구하다가
거기서 파생된 거거든요. 아무래도 호프를 하다보면 취객을 상대하게 되니까요.
이 약은 1시간으로 그 지속시간을 줄이고 효능을 대폭 상승시킨 약이라고 보시면 될거에요.
끊기 힘든 유혹에 저항하기에 유용하다고 보셔도 될 것 같네요."
"확실히 독특하기야 하지만, 실용성은 조금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두번째 약품이 있는 거에요. X#51g3은 조금 더 위험하거든요."
"그건 뭐죠?"
"기억속의 상황을 재현하는 약이에요. 첫번째 약은 이 약품의 중독을 방지하기 위함이죠.
흔히 그런 기억 있지 않으세요? 아 그때 좋았는데... 하는 그 순간의 감정 말이에요.
이 약은 뇌의 특정 부분을 건드려서 그 때의 감정을 최대한 끌어내는데 목적을 두고 만들었어요.
물론 복용 후에 최악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실 경우에는 상당히 큰 충격에 빠질 수도 있지만요.
"이건...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군요."
"사실 이건, 아직 출시되지 않은 포션이에요.
불가능한 것도 있고요. 아무리 그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감정은 꺼내지 못해요.
그리고, 기억 자체를 보조해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기억속의 상황에서 느낀 감정과 감각의 영역을
강제로 열어주는 일종의 환각제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위험한 물건이군요."
"저는 이걸 아주 극 소수로 출시할 거에요. 그럼 분명 상당히 거금이 책정되겠죠.
그럼 그때 사용하셔도 좋고 파셔도 좋아요."
"곰곰히 잘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포션 두 개를 건네주고 나서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이에 아까 나를 맞이한 여성이 돌아와 자리에
쥐포와 간단한 땅콩 같은 것들을 두고 갔다.
모건은 그걸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건... 최근 들어 잦은 회식이 있었던지라,
다들 술안주로 회사에 포나 견과류를 사다놓았습니다."
나는 땅콩을 한 줌 집어 입에 넣었다.
씹다보니 나쁘지 않은 고소한 맛이 있었다.
최근에 늘 먹던 고급 요리와 동떨어진 가벼운 맛이 반가웠다.
모건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다시 찾아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어떻게 제가 뭐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없겠습니까?"
나는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에 입을 열었다.
"혹시 뼈의 저택을 아시나요?"
"알고 있지요. 저도 찾아간 적이 있었으니까요."
"연구 목적이셨나요?"
"그럴리가요. 취재차 찾아간 거죠. 외부인을 배척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필요하시면 약도라도 그려드릴까요?"
"네. 그러면 감사하죠."
"음, 그러면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노트의 한 페이지를 찢어 거기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기는 어려워도 알아보기 편하게 그린 그림이었다.
"어찌 이런 거라도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하죠. 나머지는 제가 스스로 알아봐도 괜찮고요.
안그래도 어지간한 정도는 정보상단에 물어보고 있거든요."
"정보상단 말입니까?"
"네. 조금 비열한 방법을 쓰고 있기는 한데, 금방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비열하다... 그렇죠. 아주 비열한 사람이죠."
모건은 그렇게 말하며 표정을 살짝 구겨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펜을 가지고 책상을 톡톡 두드리다가 말했다.
"아직 그 집단의 우두머리에는 도달하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네. 그런 셈이죠."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모건은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의 주름진 손가락은 이미 몇 번이나 연락해본 번호인듯 자연스러웠다.
몇 초가 지나고 수화기 너머로는 나이가 지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먼저 전화를 할 줄은 몰랐는데 모건."
"반, 널 만나고 싶다고 하시는 분이 계시는군."
"그 무령님이신가?"
"그래. 네가 올 텐가, 아니면 내가 연결을 해드려야겠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다소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내 일을 망쳐놓는거야?
한두번 했으면 족히 그만할 줄도 알아야지 않아?
내일 모레 관짝 열 사람이 사사건건 나이값도 못하고 이러는거.
부끄럽지 않아?"
"부끄러울 것밖에 없는 인생을 살았거든. 검은 색에 다른 색 조금 섞인다고 티라도 나겠나."
"내가 널 밟지 못한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거야.
아니지, 어쩌면 내가 제일 나잇값을 못하고 있는건가?
대체 요즘 왜 이러는 거야? 다들 내 속을 못 긁어서 안달이고..."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닥쳐. 금방 갈테니까."
쾅 소리가 나고 전화는 끊어졌다.
모건은 다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내게 말했다.
"하하, 금방 온다는군요."
"아.... 네...."
"원래 이런 조직일수록 아랫것들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보다, 위에서 바로 조사하는게 더 빠르기 마련이죠."
"정보상단을 아실 줄은 몰랐는데요."
"저는 생쥐굴 속 늙은 여왕의 유일한 오점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후 스케줄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제 또 취재를 떠나야 하거든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제 앞으로 달아주시면 확인 후에 바로 연락드리죠."
"고맙습니다."
"고맙다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요. 그럼 이만."
모건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이마에 패인 주름이 더 깊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가 방에서 나간 후에 텅 빈 방에서 삐삐가 말했다.
"할부지 나뿐 할부지야. 거짓말 해써."
"거짓말?"
"근대 슥개쥬리 머야?"
"스케줄? 음... 해야할 일이라는 뜻이야."
"그럼 할부지 할 일 업써!"
삐삐는 그렇게 말하고 내 등에서 기어나와 접대용으로 놓인 쥐포를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이거 모야?"
"쥐포."
"지뽀?"
"응. 쥐포라고 하는거야."
"지뽀 마시떠..."
"많이 먹어. 다음에 또 사줄게."
삐삐는 꽤 마음에 들었는지 쥐포를 양손 가득 안아서 뒤뚱거리며
포대기 속으로 들어가 하나씩 꺼내 먹으며 좋아했다.
"포대기는 가방이 아니야 삐삐."
"삐삐도 가방 가꾸시퍼."
"아마 조금 지나면 가방 많이 생길거야."
플로라가 사줄 테니까.
굳이 내가 사줄 이유는 없겠지.
그나저나 모건이 자리를 뜬 이유를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왜 그는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 자리를 뜬 건지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생쥐굴의 늙은 여왕이 그의 무언가를 자극했다는 것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