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194화 (194/303)

〈 194화 〉 남자와 사랑

* * *

모건은 널스페이지를 빠져나와 한동안 무표정하게 걸었다.

그렇게 그가 도착한 곳은 공원이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면서 모건은 멍하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미 노쇠한 몸은 그 풍경에서도 잘 녹아들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실례합니다."

모건의 쳐진 어깨를 툭툭 두드린 낯선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상당히 젊어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한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당신은... 분명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 였나요?"

"절 아십니까?"

"네. 알고 말고요. 직업이 기자라서요."

그럼에도 그는 차분해 보였다.

에스트로는 그의 옆에 앉아 물었다.

"잠깐 앉아도 괜찮겠습니까?"

"이미 앉으셨잖습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그래서, 엠페레스에는 무슨 일로 찾아오신 건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그런 정도라면요. 그나저나 제가 두렵지 않으세요?"

"두려운 것... 두렵다라... 그렇네요. 두렵습니다."

"하하... 됐습니다. 괜한 질문을 드렸군요.

제가 여기 있는 이유라... 그냥 뭐 그런 겁니다. 생각할게 있어서,

주변에 벤치가 있기에 생각을 좀 정리할까 해서요.

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시는 것 같던데, 얼마나 아시나요?"

"많이는 모릅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저 기사에 적히는 내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참 신뢰가 가는 말이군요. 살면서 기자들과 친해질 일은 잘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에게서는 제가 아는 사람의 냄새가 납니다. 아주 연하지만요."

"누구인지 짐작은 가는군요."

"그러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에스트로는 후후 웃어보이고는 머리를 손으로 한번 쓸어보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이고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여자 때문에 고민이 많아서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 보군요?"

"저도 나름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모르는게 많아서 고민입니다.

모든게 다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아닌 경우가 있어서 말이죠."

"허허... 말씀해보시죠. 제가 미력하나마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기삿거리로는 아주 흥미로울텐데 이걸 말해도 괜찮으려나 모르겠네요."

"부담스러우시면 이야기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스트로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괜찮겠지요. 혹시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셨죠?"

"독신입니다."

"어....실언을 했군요."

"괜찮습니다. 저도 사랑한 여자가 없었던 건 아니거든요.

다만... 저보다 조금 일찍 떠났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로 보아, 사랑에 관해서 고민이 있으신가 보군요?"

"네. 부끄럽지만 그렇군요. 세간에 알려진 제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남자라면 언제나 그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이지요.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도 하지못한 머저리지만요."

"저랑 비슷하시네요. 저도 만만찮은 머저리라서요. 몇 번인가 죽어보기도 했는데,

결국 떠오르는 여자가 한명 뿐이더라고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아... 알것도 같군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전 그 여자를 찾았습니다. 한참을 헤맸고 결국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던 그녀가 분명한데도 그녀가 절 대하는 자세가 변한거에요.

제게 웃어주던 그 미소가 다른 사람을 향해 있었고, 늘 따뜻했던 그 품에서 이제 제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아직 그녀가 절 사랑할거라고 믿었던 그 짧은 순간이 그 긴 시간을 배신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일 한심한건 저겠죠."

"한심하다뇨.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야 이제 떠나버린 여자를 만날 수도 없다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아직 기회가 있고, 시간이 있고, 한번 더 말을 걸어볼 상대가 있잖습니까.

분명 거절당하더라도 상대를 싫어하는게 불가능한 그런 사람. 아닙니까?"

"제가 이미 한번 거절 당했다고 이야기 했었던가요?"

"아뇨, 뭐 대강 짐작이 갔습니다. 비슷한 처지라서요."

"아무래도 여기서 당신을 만난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모건입니다."

"기억해두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군요.

그런데 혹시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올해로 일흔이 조금 넘었군요."

"역시, 뭔가 이상하더군요."

"40이 조금 넘어서 지인에게 선물받은 약을 마셨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 지인의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아니오, 업무로 잠깐 만났던 거라 그 이후로는 만난 적도 없군요."

"그럼 혹시 특징적인 부분은 기억나시는 것 없으십니까?"

"음, 아! 찰랑거리는 금발이 인상적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듭니다."

"역시 그렇군요..."

"아시는 분입니까?"

"네. 어쩌다 보니까요."

모건은 그의 반응에 조금 흥미를 느꼈지만

굳이 자극하지 않는 것이 그에게 더 좋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빚어진 처세술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자로 살아온 세월은 그를 남들에게 미움받지 않는 방법을 먼저 깨닫도록 했다.

직업 특성상 적을 만들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지했기 때문이다.

분명 초창기에 기자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쯤에는

그 역시도 자극적인 기사를 많이 적곤 했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그는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한 기사가 아니라,

진실을 알리기 위해 여론을 배제한 경우였다는 점이 달랐을 것이다.

그 기사를 냈을때 돌아올 사회적 파장보다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 당시의 그는 그렇게 믿었었다. 누군가는 악역을 자처해야 한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냈던 기삿거리들은 결국 그를 '재수없는 새끼'로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여러 곳에서 항의메일을 받기도 했었고, 때로는 지나가는 길에

간간히 들리는 욕을 받아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 판단은 결국 그의 친구를 죽게 만들었다.

자신의 무능함이 죽인 친구와 자신의 섣부른 판단이 죽인 친구.

그 두명을 처음으로 잃고 나서 그는 기자를 계속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회의감이 들었다.

진실을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해온 일이 사람을 죽였다.

어쩌면 이제까지 써온 기사들이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트. 그것은 자신이 추천해준 것이었다.

지물포에서 특별히 좋은 종이를 써서 만들었던 노트.

그곳에 회고록처럼 적힌 친구의 유언은 그의 많은 것을 앗아갔다.

진실에 못박혀 있었던 그의 눈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고,

미움받는 일도, 상처주는 것도 싫어하는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그건 그에게 있어 긍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지독한 상실감이었다.

모건은 문득 든 옛 생각에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실이 뭐라고. 그 같잖은 정의감이 뭐라고 내 친구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나는 여전히 기자를 하고 있는지. 그 물음은 지난 몇십년간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마 비슷한 이유에서 아버지의 정보상단을 물려받아 그의 죽음을 찾고 있던,

그리고 자신의 이루지 못할 속죄를 되풀이하던 여자가 떠오른다.

동족혐오. 그 여자가 싫었던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왜 이런 기억이 문득 떠오르는 것인지도 그는 알지 못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신데 괜찮으십니까?"

"아...네. 괜찮습니다."

"혹시 담배 피우십니까? 하나 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옛 생각을 좀 했습니다."

"아, 연인분의...?"

"아... 네... 네네..."

모건은 그렇게 둘러대고 말했다.

"제 연인이었던 여자는 아주 지적이고 총명한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절대 과시하지 않았고, 차분하고 깔끔한 여자였지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커피를 아주 못 내리는 여자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집에 늘 믹스커피를 구매했었습니다.

늘 과하게 볶다 태워버린 커피가 쓴 맛을 내서,

어쩔 수 없이 설탕을 몇 숟가락씩 집어넣고 맛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해맑게 웃으며 그렇게까지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주던

그런 수수한 여자였어요."

"그렇습니까?"

"늘 홍차와 함께 독서하는 것을 즐겼어요... 저에게는 그럴 때마다 커피를 끓여줬었고요.

제가 맛 없는 커피를 마시다가 '난 네가 내려준 커피가 제일 좋아.' 라고

거짓말을 한 이후로는 늘 '자,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커피. 이름은 모건 브랜드 어때?'

라고 말하며 저를 놀리곤 했습니다. 전 그게 뭐냐고 놀려대며 웃었고요.

독서를 유난히 좋아했어요. 제게 종종 책을 선물할 정도로요.

특히 베스트 셀러로 나온 책이라면 늘 서점에 달려가 기쁜 얼굴로 책을 안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녀는 저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행복해 보였어요.

늘 웃고 있었거든요. 덕분에 저도 책을 많이 읽어야 했고요.

그녀와 대화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죠."

모건은 말을 삼켰다.

지금은 그녀의 커피가 그리워서 잊지도 못하고 그 커피 맛을 찾아 다니고 있다는 것을.

이제 그의 집에 믹스커피는 모조리 버려 없다는 것을.

언제든 그녀가 돌아올 수 있도록 준비한 보금자리에서 없는 것은 오직 그녀 뿐이라는 것도.

이제는 뼈저리게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저 그리워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어서.

그래서 날마다 적신 베개가 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겨우 무뎌진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래서 무뎌졌다는 사실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의 외로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모건은 주먹을 쥐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안았을 때의 온기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건 이미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부둥켜 안고 마지막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서로 우는 것 말고 할 수 있는게 없었으니까.

결국 그녀는 죽었고, 그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와 함께 사라져간 그녀의 온기가 아직도 그리웠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찌질한 새끼.'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없다.

그래서. 그래서 모건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상당히 이야기만 들어도 좋은 분이었나 보군요.

많이, 정말 많이 사랑하셨다는게 느껴집니다.

저도 그런 연애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네. 지금 생각해도 참 과분한 여자였습니다. 전 그녀보다 좋은 여자는 찾을 수 없어요.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그러니까 전 혼자 늙어 죽는게 맞는 거겠지요.

그래서 감히 말씀드린 겁니다. 당신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걸요.

무ㄹ...흠흠... 실례했습니다. 그 여성분이 따로 좋아하시는 남자분이 없다면

그건 아직 기회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에게 있어 익숙한 사람이 되어야겠죠. 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요.

저는 그렇게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아는 사람이었지만요,

차차 그 사람이 제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고,

어느새 그 사람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차서 일이 잡히지 않게 되더군요.

그렇게 시간을 들여 서서히 다가가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당사자에게든, 주변인물들에게든요. 자연스럽게 그 관계에 녹아드는 겁니다.

주변 인물들이 모두 인정할 수 있도록 가까운 사이가 되고 나서 다시 도전해보시죠.

그정도로 노력한다면 분명 실패하더라도 진심을 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벼운 말 몇마디보다 진심이 훨씬 강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변 인물들이 모두 인정할 정도로... 그렇...군요...!"

"도움이 조금이나마 되셨으면 좋겠군요."

"네, 고맙습니다. 당신의 곁에도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잖아요? 제가 주제 넘게 한마디 드리자면,

그 여성분께서도 이렇게 기운없어 보이는 모습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지 않으십니까?

다소 진부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이거군요."

에스트로는 그렇게 말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모건은 홀로 공원 벤치에 앉아서 픽 웃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흘렀다.

그 한방울은 금새 걷잡을 수 없게 번져갔고, 그의 허탈한 미소 속에 감춰졌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런...걸까? 그런 거냐 엘리마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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