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화 〉 바다는 늘.
* * *
딱히 무언가를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고, 배 위에서 멀리 보이는 바다를 향해
마력탄을 날렸을 뿐이다.
팡 하는 소리가 나면서 작은 물보라를 만들어낸 마력탄을 올려다보면서
나름 무료함을 달래보고 있었던 정도였을까.
몇 명의 선원이 나에게 찾아와서 마력탄을 쏘는 행위는 자제해 달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삐삐는 폴리모프 상태로 선상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도도도도' 발걸음 소리를 냈다.
선원들에게 찾아가서 웃으며
"아지찌, 지뽀 이써?"
하고 물어보면 선원들이 웃으며 쥐포는 없다고 말하며 말린 북어포를 가져다 준다.
삐삐는 신이 나선 북어포를 들고 돌아와 양 손으로 그 기다란 걸 잡고
조금씩 떼어 먹고 있다.
"마마, 이거 머거."
"북어포? 이거 나 주는거야?"
"응. 마덥쪄..."
아무래도 입맛에 맞지 않았나보다.
삐삐는 북어포를 내게 넘기고 다시 도도도도 뛰어가버렸다.
나는 북어포를 조금씩 떼어먹으면서 파라솔 아래 썬배드에 누웠다.
"맥주 한 잔만 가져다 주시겠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나를 바라보고 있던 선원 하나가 금새 맥주를 가져다 주었다.
살얼음이 동동 뜬 맥주였다.
"고마워요."
"하하, 아닙니다. 이게 제 일인데요. 따님이랑 두분이서 여행하시는 건가요?"
"네,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네요."
"남편분은 같이 안다니시나봐요?"
"아... 뭐 혼자 잘 살겠죠."
"남편분이 들으시면 많이 서운하시겠는데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고 후훗 웃어보였다.
차가운 맥주의 살얼음이 녹기 전에 입에 가져다 댔다.
"참 저희도 고객님께는 개인적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배는 수상하다고 생각해 잘 빌리지 않으니까요."
"수상하죠. 강화 궤도... 부양함이었나요?"
"원래는 과거에 만들어진 전쟁용 선박이라고 하더군요.
강화라는 말이 원래 그렇게 아무데나 붙는 단어는 또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는 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그래도 민수용이든 전쟁용이든 뭐가 어떻습니까? 지금은 그냥 관광상품인데.
참 이런걸 잘도 숨기고 다녔다지 뭡니까 전대 가주란 작자는."
"전대 가주라면 분명 케이 겔데어스라는 사람이었죠?"
"예, 그랬죠. 지금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지만요.
살해당했다고 그러던데... 그것도 한 사십여 년 전쯤에요.
참 그 해괴한 날이라고 합죠. 무슨놈의 귀족들이 그렇게 한날 한시에 싸그리 죽었는지."
"전 그 이야기를 잘 몰라서요. 혹시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건 국가적으로 엠바고가... 아, 벌써 엠페레스가 아니군요. 여긴 해상이니까요.
다만 어디 가서 제가 말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주신다고 약조해주시면
이 무거운 입을 열어 드리지요."
"그런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못해도 아마 한 50년 정도 됐을 겁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엠페레스의 선왕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마... 엠페리어인지 뭔지 하는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장미 꽃밭 한가운데 쥐 죽은 듯 누워 숨을 거두었지요.
사건은 상당히 빠르게 퍼졌고, 금새 용의자들의 색출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사건에서 당시 브리깃의 가주였던 에스트릭스 공작이 실권하고 추방당했죠."
"브리깃이라는 이름이 생각보다 자주 나오네요."
"6귀족이라는건 또 그런 겁니다.
그리고 40여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 바로 그 아들인 에드먼드 브리깃을
다시 권력의 탁자로 돌려놓은 기념으로 벌인 축제였습니다."
"축제요?"
"그 사건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시그릿 플뤼네와 케이 겔데어스
에드먼드 브리깃과 선대 에네도르 까지 말이죠.
그 왜 죽은 이들은 말이 없다고 그 날 이후로 사건은 싸그리 덮였습니다.
관계자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사건의 진상을 아는 사람이 없죠.
하지만 유력하게 떠오르는 설은..."
"설은...?"
"그날 그들을 죽인 것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그 말을 마치자 마자 빠악 하는 소리가 났고 선원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이 새끼가 손님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확실하지도 않은거 함부로 떠벌리면
나중에 누가 책임질건데? 우리 선원들 다 잘리면 네 책임이야. 알아?
하여튼 입 싼 건 알아봤는데 이정도일 줄은 몰랐네."
선장은 그렇게 부하를 저지하고 내게 와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방금 들으신 이야기는 잊어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럴 수야 없겠지요.
다만 어디가셔서 발설하지 말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야지요. 우리 애는 어디 있나요?"
"아, 따님이라면 저기 계십니다."
"어ㄷ... 삐삐야!!"
삐삐는 양 팔을 쭉 펴고 도도도도 뛰어다니며 난간을 붙들고 빙빙 돌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묘기와도 같았지만, 역으로 말하면 그렇게 위험천만할 수가 없었다.
나는 빠르게 삐삐를 향해 달려가 삐삘ㄹ 껴안아 멈춰세웠다.
"응? 마마?"
"삐삐야... 제발 엄마 간 떨어질 일 좀 하지마..."
"간 떠러져?"
"그래..."
삐삐는 잠시 고민하다가 빵끗 웃으며 내 가방에 있던 풀을 꺼내 내밀었다.
"삐삐가 부쳐주께!"
"하하.... 아니야... 마음만 받을게 고마워."
나는 삐삐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삐삐는 이제 폴리모프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도 상당히 익숙해진 것 같았다.
쓰다듬어주면 헤헤 웃는 모습이 천진해보이기까지 했다.
이대로만 가면 아주 평화로울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런 평화는 길지 않았다.
"좌현에서 물보라가 일고 있습니다 선장님!"
"이정도 속도라면 10분, 아니 5분내로 도착합니다!"
"뭐야..? 대체 어디서 날아오는 거냐? 진원지를 찾아!
어차피 이 배는 그리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강화갑판을 믿고 우현으로 돌려 속력을 올려라!"
"아무래도 버려진 군도에서 날아오는 것 같습니다!"
"버려진 군도라고? 거기 사람이 살기도 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나는게 아니고서야 도무지 거기 외에는 방도가 없습니다!"
선장은 까득 이를 갈고 키를 돌렸다.
그리고 몇 번인가 경로를 수정하고는 내게 다가와 말했다.
"아무래도 무언가가 접근 중인 듯 하여, 편안한 여행에 조금은 방해가 될 것 같아
미리 양해 말씀을 구합니다."
"그럴 수도 있죠."
"선장님! 너무 빨라 막을 수 없습니다!"
"부딫힙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쾅 소리가 나며 배가 크게 휘청거렸다.
좌우로 넘실대는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고
갑판 위에서는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들었다.
"나 왔어."
"저...저 놈은...!"
"저괴물이 어떻게 여길..?"
"엘 플로프니거 에스트로다! 쏴라! 고객께 다가가지 못하게 해!"
사방에서 총이 발포된다.
그러나 태연하게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총알은 그의 몸에 박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앞으로 한 걸음 걸으면 그의 발밑으로
투두둑 떨어지는 총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피하십시오!"
"도망치십시오! 여긴 저희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지하에 쉘터가 있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선원들의 고함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트로는 내 앞까지 다가와서 말했다.
"해가 세네. 선배드 근처로 가서 계속 이야기하면 어때?"
"대체 뱀파이어가 낮에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한건 어디 사는 누구야?"
"글쎄, 구시대적인 스테레오 타입인걸."
"그 왠지 뭐랄까, 네가 말하니까 되게 낯선거 알지?"
우리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선원들도 당황하는가 싶더니 총을 내린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 실례지만 고객님께서는...?"
"어머, 나 누군지도 모르고 태운거에요? 나 에리아라고 하는 사람인데."
"에리아...에리아..... 에리...아..? 에리아?!"
"네, 에리아에요."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노조에 한번 찔러봐야겠군요.
상부와 드잡이 한번 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허탈하게 웃었다.
선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선장만이 내게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두 분은 어떤 관계이십니까?"
"파파!"
"친구요."
"애인이요"
저마다 다른 말에 그는 잠시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모자를 눌러쓰고 뒤로 물러섰다.
결국 어떻게 말하던 오해를 살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구조라는 걸 깨달았지만
이제는 2회차라 그런지 굳이 정정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시당초 이제는 더 놀라운 반응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해명을 포기하고 적당히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모로 가도 맞게만 가면 하나는 해결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부디 선내에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주십시오..."
에스트로는 내게 물었다.
"애인이요? 언제는 친구라며?"
"생각이 변했어. 우리 애 아빠도 없이 키울 수는 없잖아?
삐삐도 아빠가 가지고 싶은 것 같고. 내가 생각해보니까
성장기에 부모가 미치는 역할이 아이에게 엄청 큰 거였더라고.
천각룡은 더욱 그렇고? 알지? 그러니까 적당히 이해하고 빨리 마력이나 넘겨.
삐삐 가르쳐주게."
"엘라...? 저 그래도 애인 아니었나요?
애인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 서로 생각하는 정의가 다른 것 같은데...?"
"그래도 아직 남편은 일러. 애인 정도로 만족해.
그래도 무사고로 한 300년 지내면 남편으로 승진시켜줄게.
지금은 뭐 없어. 애교라도 듣고 싶으면 남편까지 노력하시고.
기준점 50점 밑으로 내려가면 짤 없이 해고야."
"어....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벙한 표정이었다.
나는 괜히 그 등을 세게 후려치며 말했다.
"아 뭘 그렇게 벙 쪄있어? 아빠 안할거야?"
"아니! 아냐! 해야지..! 할거야!"
나는 이렇게 당황한 에스트로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삐삐야, 이 아저씨가 파파 해주기로 했어."
"잠깐만, 아저씨? 아저씨라고?"
"아, 왜그러세요 아저씨, 그런 캐릭터 아니시잖아요?
그냥 평소처럼 어른스럽게 네 하고 고개 끄덕끄덕 하는거 그게 뭘 어렵다고?
할아버지라고 안부른데 감사해."
삐삐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에스트로를 올려다보았다.
"아지찌?"
"어...그래... 아저씨야... 오늘 두 번 째 보네?
안녕 삐삐?"
"파파야?"
"응, 오늘부터 파파야."
삐삐는 에스트로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내게로 다가와선
내 가방을 열고 뒤적이다가 소중하게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안은 듯 두 손으로 소중하게 꼬옥 잡은 것을 겨우 내미는 모습에서는
나도 흐뭇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우리 삐삐는 이렇게 또 성장해가고 있었다.
"이거 주께! 삐삐가 아끼는고야. 쪼꼬사탕!"
삐삐가 내민 초콜릿 사탕을 받은 에스트로는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혈당치 올라가는데..."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픽 웃어보이고 삐삐를 뒤에서 껴안으면서 말했다.
"축하해. 그거 삐삐가 딸기사탕 다음으로 좋아하는건데.
아무나 못 받는거야.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해."
물론 딸기 사탕을 주는게 더 신뢰가 높다는 의미지만.
난 딸기사탕 받았는데. 넌 고작 초콜릿 사탕이지?
괜한 우월감에 그에게 흐뭇한, 그리고 얄미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영문도 모르고 얼떨떨한 표정을 보였다.
"인정한다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삐삐가.
조금 더 기뻐하지 그래? 적어도 몇 시간 전보다는 낫지?
적어도 파파 소리 한 번은 들어 봤잖아?"
내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웃는 에스트로는 나를 바라보고 되물었다.
"그... 자기야, 이거 진도가 너무 빠르지 않아?"
"그럼 뭐, 하룻밤이라도 같이 보낼 줄 알았어?"
"아니 뭐 그런건 아니긴 한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상하지 않아?"
" 뭐 로맨틱 따질거야? 너나 나나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너도 이런 수천년 산 늙은이 안고싶진 않을 것 아냐?
서로 필요한 것만 챙기자고. 윈윈 몰라 윈윈?
그럼 됐네. 뭐가 문제야? 넌 딸이 생겼고, 삐삐는 아빠가 생긴거지 뭐.
아니면 너 나 싫어해?"
"아니... 아닌데....
아니 이게 윈윈이 아닌 것 같아서 하는 말이거든..?"
"뭐가 어떻게 됐건, 결국 그렇게 됐네요. 잘부탁해 에스트로.
아니면, 애아빠라고 불러줘야하나? 삐삐 아빠?"
"뭐 이렇게 무드없는 여자가.... 후우.... 이래서 반하면 지는 거라더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