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 뼈의 저택
* * *
배는 한참을 나아갔다.
에스트로가 배에 오르고 나서는 별다른 위험요소는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에스트로는 배에 올라서 삐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때 아빠가 어떻게 했었냐면..."
냅다 자기더러 아빠를 맡아달라고 했는데도 능숙하게 삐삐에게 옛날 이야기를 하며
환심을 사려고 하는 모습이 정말 나름대로 진심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파파 나쁜 짓 해써."
"응 응 괜찮아. 아빠는 다 당사자들이랑 대화로 풀었어."
능글능글하게 말하며 빠져나가는 그는 아이를 상대로 자신이 어떻게 교회를 교란시키고
사제들을 죽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명을 이어나가는지 설명했다.
물론 아이가 상대라서 그런건지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성인인 사람이 들으면 도저히 해맑게 말할 수준은 아니었다.
당사자들과 대화로 풀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죽은 이들의 피를 흡수해 그 원념과 피에 엮인 영혼을 상대로 상당히 '신사적인'
제안을 해서 그들과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건 협박이다.
뱀파이어에게만 가능한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당장 목에 칼을 들이민 상대가 지갑에서 돈을 빼간다고 그걸 거절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마 그 '대화'를 거절한 이들은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파파 대다내..."
"그럼~! 삐삐 아빠가 되려고 노력 좀 했지!"
노력이 맞나...?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뱃머리에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땅은 이제 슬슬 배에서 내릴 시간이
그리 머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 내 심정을 읽은 것인지 에스트로는 삐삐를 한 손으로 품에 안고 돌아왔다.
"육지가 가까워졌는데, 어디로 갈 생각이지?"
"나야 뭐 당초 계획대로 뼈의 저택으로 갈 생각이야.
거기서 학자들을 볼 수 있겠지."
"그렇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삐삐를 보고 말했다.
"삐삐야, 아빠랑 숨바꼭질 할까?"
"숨바꼭질? 할래!"
"그럼 아빠가 60초 셀테니까 숨어?"
"응!"
삐삐는 그렇게 말하고 쪼르르 내려와서는 도도도도 달려서 사라졌다.
저 멀리 발치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우리를 바라보는데,
선실에 숨어서 우리를 바라보다가 우리가 고개만 돌리면 눈을 질끈 감는다.
이게 그 타조식 은신인가?
에스트로는 삐삐를 슬쩍 바라보곤 안도한듯 웃었다.
"저기까지 갔으면 안들리겠지.
얼마 전에 그 녀석을 만났어."
"그녀석이라니?"
"젤렌지. 아무래도 백색의 고원 어디엔가 터를 잡고 숨어지내는 것 같은데.
아주 불길하고 기분나쁜 마력을 얻은 것 같아."
"마력을 얻었다고?"
"그래. 뒤틀린 심성과 집착 때문이겠지. 왜 놈이 고원을 떠나지 않고 버티고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분명 무언가 꿍꿍이는 있을거야. 조심하는게 좋아."
"그래도 이걸 가지고 삐삐를 물리지는 않았을 거 아냐?"
"역시 감이 좋구나. 이 엠페레스의 겔데어스 상단 말인데,
아무래도 뭔가 수상해."
"수상하다?"
"기본적으로 마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소해진 세상에
마도공학이 이런 식으로 발달했다는게 이상하잖아?
분명 이런 기술력이 있었다면 먼저 대장간에서 조사를 마쳤겠지.
마력을 마술로 치부하는 세계에서 선택받은 이들을 따로 모아 군대를 결성하는 이들이
이런 병기를 관광용으로 사용할 수 가 있다고 생각해?"
"무슨 의미야?"
"이 배를 비롯해서 각종 마도병기는 아무래도 이 시대의 물건이 아닌 것 같다는 의미야.
그게 아니라면 어디선가 비정상적으로 마력을 추출해낼 수 있는 자원이 있거나.
뭐랄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이상해. 많이 어색하다고."
"겔데어스 상단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
에스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가락이 배의 끄트머리에 걸린 작은 깃발을 가리켰다.
"잘 봐둬. 저 깃발. 무늬는 분명히 상단의 무늬가 맞아.
하지만, 저런 휘장을 달고 깃봉에 장식을 화려한 창날로 달았다는건..."
"아무래도 군수 목적이라는 의미지?"
"그래. 단순히 군수 목적이라기 보다는 '현역'으로 사용되는 녀석이라는 의미지."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파파! 안차자?"
삐삐의 목소리가 들리자 에스트로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고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걸었다.
"우리 삐삐가 어디있지~? 아무리 찾아봐도 안보이네~?"
"히히히...."
삐삐는 문 뒤에 숨어서 기분 좋은듯 웃고 있었다.
그래, 좋은게 좋은 거지 뭐. 조심은 내가 조심하면 되는 거고.
지금은 그저 현상에 집중하자.
그게 뭐라고. 삐삐가 있고, 에스트로가 있고, 친구들이 있는 지금을.
어차피 내가 원치 않아도 조금씩 떠밀려 나아갈 거라면
이정도는 괜찮을지도 몰라...
내가 혼자 바다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리고 있을때
선장이 내가 든 맥주잔에 작은 우산 장식품을 올리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아, 얼마나 걸릴까요?"
"따님 숨바꼭질만 끝나시면 언제라도요."
"그것 때문에 오셨구나?"
"흠흠... 부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금방 정리할게요."
"네, 정박 준비를 하도록 하지요."
선장은 그렇게 말하고 뒤로 돌아섰다.
내 잔에 있는 우산 장식을 살짝 들고 일어섰다.
"삐삐! 에스트로! 이제 내릴 준...ㅂ..."
내가 부르고 있으면 어느새 에스트로는 삐삐를 한 손으로 들쳐안고 짐을 다 챙겨
내릴 채비를 마친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마, 빨리와!"
"그래. 금방갈게."
나는 선장에게 간략한 설명을 듣기로 했다.
"여기 지도 보이십니까? 지금 정박한 곳이 여기, 뼈의 저택 서쪽의 곶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또 사막지역이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뼈의 저택이 나올겁니다."
"고맙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한바퀴 크게 돌아서 완만히 들어간 저택 북서쪽의
만에 정착하려고 했습니다만, 때가 맞지 않아 수위가 낮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혹시 애프터 케어 서비스를 원하시면..."
"아, 그건 됐어요. 제 몸 지킬 여력은 있어서."
"그건... 그렇겠군요."
선장은 나와 에스트로를 바라보고 픽 웃었다.
"저 꼬마는 분명 아주 엄청난 아이가 되겠군요."
"그렇게 만들려고요."
내 대답에 에스트로는 삐삐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했다.
"뭐해? 안내려?"
"간다 가."
배에서 내리고 나서 에스트로를 바라보면 그는 내가 뭐라고 말하려고 하는지 이미 다 안다는 듯
머리를 정리하고 말했다.
"나도 생각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지.
그런데, 이제 나도 아직 일이 있으니까.
삐삐는 아빠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지?"
"파파 가?"
"응, 잠깐 일하러 다녀오려고."
"파파 몃밤 자면 와?"
"음... 엄마 말 잘 듣고, 다섯 밤 자면 놀러갈게."
"아라떠!"
삐삐는 폴짝 에스트로의 품에서 내려서 내게 돌아왔다.
"간다?"
"삐삐, 아빠 간대. 가기 전에 아빠 안아줘."
"그래두 대?"
"응."
삐삐는 머뭇대다가 에스트로를 안아주고 돌아왔다.
에스트로는 멋쩍은 듯 웃다가 괜히 고개를 돌리고 버럭했다.
"거기 선장님, 안가십니까?
애프터 케어 필요 없다고 말씀 드린지 꽤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요?"
선장은 이미 천천히 멀어져가는 배 위에서 흐뭇한 얼굴로 에스트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 다 빨개져서 선장님한테 화내는거야? 참..."
"너까지 그러지 마..."
에스트로는 그렇게 중얼대고는 얼굴을 팍 숙였다.
"가볼게. 삐삐, 에리아 잘 있고."
에스트로는 그렇게 말하고 괜히 애먼 발로 모래를 걷어차는가 싶더니
한숨을 길게 내쉬고 날아서 사라졌다.
어쩐지 그의 등에서 외로움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아쉬움일지도.
그가 사라지고 나서 나는 삐삐를 데리고 모래 위를 걸었다.
마치 처음 분노의 사막을 건넜을 때 처럼 보드랍게 밟히는 모래가 느껴졌다.
나야 이제는 익숙한 느낌이지만, 삐삐는 아무래도 낯선 것 같았다.
그래도 사막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군데군데 보이는 짐승의 뼈가
아무렇게나 널려 말라가고 있었다는 점 정도일까.
누군가는 사막에서도 뼈 정도야 흔히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묻겠지만,
엄연히 다른 점은 있다.
사막의 뼈는 죽음을 예상하지 못한 자들의 것.
쓰러져 죽고, 먹혀 죽은 잊혀진 자들의 것이라면
이곳의 뼈들은 온전히 생을 다해 마감된, 살아간 이들의 것이라는 정도일까.
그 뼈의 차이는 간단하다면 간단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뼈의 크기, 배열, 구조 따위가 모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다 마르지 못해 단단했던 사막의 뼈와 달리
이곳에 보이는 뼈는 이미 오래 무뎌져 간단히 부러지는 노쇠한 뼈였다.
낡은 용골, 과거 생물들의 잔해따위가 그저 이곳에 그들이 살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이곳이 왜 뼈의 저택인지, 알 것 같았다.
걸음을 더 옮겨 나는 저택의 벽면을 마주했다.
상당히 오래 전에 지어진 것 같은 외관, 그리고 황량한 디자인이지만
오랜 기간 꾸준히 관리된 것 같은 투박한 계단. 모래먼지가 쌓여도 반질거리는 문.
"여기가 맞는 게 분명하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생각보다 상당히 헐거웠다.
무거울 것이라는 내 예상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바람에는 전혀 휘청이지 않았다.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 하나의 학자여.
부디 이곳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면 그 안은 거대한 도서관과 유사했다.
큰 서재와 테이블, 방에 모여 세미나를 열고있는 노인들.
책들을 쌓아두고 그 옆에서 학술지를 작성중인 노인.
이들 모두가 나의 방문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다만 내게 말을 거는 한 노인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삐삐는 내 품에서 폴짝 뛰어내려서는 그 노인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할부지 안뇽~"
"그래, 꼬마야. 언니 따라온거니?"
"삐삐는 언니 업써. 마마야."
"오호, 어머니께서 상당히 젊으시구나.
그래 혹시 삐삐는 곡물과자 좋아하니?"
"죠아!"
"그래 그래...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구나. 다른 할아버지 할머니들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앉아있어야 한다?"
"녜..."
삐삐는 내게 돌아왔다.
"마마, 할부지 죠은 사라미야."
나는 삐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그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거나시스라고 하지요. 거나시스 프렌델부르크.
거나시스라고 불러주십시오."
"전 엘라 세리타인이라고 해요. 에리아라고 불러주세요.
아무래도 엘라라는 이름은 아직 뭔가 낯설어서."
"그러지요. 뼈의 저택은 처음이신가요? 간단히 안내를 좀 해 드릴까 하는데."
"그래주시면야 감사하죠."
그는 천천히 안쪽 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모든 학자들의 중립구역이기도 한 곳입니다.
현재로써는 곳곳에 자리한 과거 용종이나 생물의 뼈,
그러니까... 화석...이라는게 발굴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이 저택에서 거주하던 사람이 모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건물의 건축 측정연도를 따져보면, 못해도 아르간티아 초국전후라더군요."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건재하네요."
"네, 지어진 것이 그 당시였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시대가 변할 때마다
새로 보강, 증설을 계속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현재에 이르러서는 저택이 되었지만
원형은 작은 크기였을 것이라도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럼 이 곳에 있는 연구서적이라는 것들은...?"
"네, 아마 그 시절 이래로 모인 과거의 학술지라고 보시는게 맞겠군요.
그래서 저희로서도 연구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만,
단순히 아르간티아 초국어로만 쓰인 것이 아니기도 하고,
아르간티아 초국 당시에 언어의 분리 시절에 쓰여진 것들도 많아
현재는 전체 서적의 약 2%를 해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흥미롭네요."
"그래서 이 곳에는 역사학자, 물리학자, 마력연구자, 언어학자를 비롯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구를 위해 방문하고 있습니다.
여기 간단한 규칙을 따로 적은 안내문이 벽에 걸려있으니, 한번 보시지요."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액자가 하나 걸려서, 그 안에는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1. 절대 물리력을 행사하거나 타인에게 가하는 모든 종류의 범법행위를 금한다.]
[2. 찾는 자는 누구라도 막지 않도록 하며, 떠나는 자는 누구라도 붙잡지 않는다.]
[3. 다른 모든 연구자들의 연구를 방해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4. 모든 자료의 반출을 엄금하며, 적발시 퇴출하며 저택으로의 출입을 금한다.]
삐삐가 과자를 여유롭게 먹을 수 있는 이유를 알것도 같았다.
취식에 대한 조항이 없다.
"그 음식물은 자유롭게 먹을 수 있나보네요?"
"그래야지요.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적게는 몇 주에서 몇 달, 많게는 몇 년도 여기 틀어박힌 사람이 있으니까요.
식사는 하고 살아야지 않겠습니까. 단, 저희끼리의 약속으로 냄새를 풍기는 것과
수분이 있는 것은 금지했습니다. 물은 저 복도 끝에 정수기를 설치해 두었습니다.
씻는 문제는 지하의 창고를 개조한 생활실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되겠군요."
"생활실이요?"
"네, 다들 침낭따위를 가지고 오는 지라, 큰 강당에 작은 샤워칸 5개가 전부입니다.
식수를 포함한 생활용수는 모두 켈데어스 상단에서 지원해준 상하수도 장치를 통해
저택 뒤의 바닷물을 정수하고 있습니다."
"나름 본격적이네요.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겠어요."
"여기서 저희가 자료를 아무리 찾아도 결국 읽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연구가 더딥니다.
그렇게 완성된 논문이나 이론은 학회를 통해 세상에 발표됩니다.
이곳의 자료들은 오로지 그 시대의 것들만 남기는 것이지요."
"그건 긍정적이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였다.
"혹시 모르시는게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시지요."
나는 유난히 여유로운 이 노인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거나시스 씨는 여기서 어떤 연구를 하시나요?"
"저는 아는게 잘 없어서, 그저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조금씩 틈틈히 보고
공부하는 입장일 뿐이지요. 아직 제가 주체적으로 무언가를 연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더군요. 요즘에는 저보다 우수한 학자가 많아서 말이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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