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화 〉 영웅 이야기
* * *
나는 거나시스씨와 이야기를 마치고 가만히 오래된 책이 꽂힌 선반을 흩어보았다.
"어...?"
왜인지 잘은 모르겠다.
어느 나라의 언어인지도, 어느 시대의 언어인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그 문자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재미있겠네."
그렇게 짧은 혼잣말을 듣고 거나시스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왔다.
"역시 흥미를 보이실 줄 알았습니다.
처음 뼈의 저택에 오셨으니 아무래도 도와드릴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죠.
그 책은 저희 연구진이 번역을 조금이나마 해 둔 책입니다.
적어도 앞에서 한 페이지 정도는 말이죠."
나는 영웅이야기라고 쓰여있는 책을 펼쳤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도 같으며, 인류가 잃어버린 기술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ㄴ..네?"
거나시스는 내 말에 짐짓 놀라더니 내게 되물었다.
"혹시... 읽을 수 있으십니까?"
"어... 그러네요? 읽히는데요?"
"맙소사... 아르간티아시여..."
그 찰나의 순간, 내가 실수로 꺼낸 읽힌다는 말에 내 쪽으로 이목이 집중된다.
정적이 감도는 회장에서 누군가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와서 내게 내밀었다.
"혹시 이 책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해석이 되지 않아요.
검은 불의 산과 옛색... 까지는 해석이 되는데 이 이후로 나오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테팔레스 화산에 관련된 이야기 같다고는 생각하는데..."
"이거 옛색이라고 해석하시면 안돼요.
'검붉은 산골짜기 사이에서 그들이 녹빛 검과 도끼를 들고 뛰쳐나왔다.'
라는 문장이에요. 옛 색이 아니라 녹빛이라고 보시는게 맞아요.
그렇게 써 있기도 하고요."
"아아...! 그런...그런거군요! 고맙습니다! 그럼 테팔레스 화산으로 잡고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헌과 고증이 맞지 않았던 거군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도...! 나도 한번 봐주시오!"
"잠깐, 내가 먼저요!"
"귀찮게는 안하겠소! 잠시만 시간을!"
사람들은 저마자 책을 가지고 내 옆으로 모여들었고 나는 그들의 책을 읽어주고 나서
벽에 걸린 액자를 툭툭 두드리고 말했다.
"이제 저도 연구 좀 할게요. 방해하지 말아주시겠어요?"
"끄응... 여튼, 정말 고맙소 에리아!"
"감사합니다 에리아 선생님!"
그들은 오늘 무언가가 크게 변했다고 외치며 내게 여러가지를 물었다.
상황이 종료되자 거나시스가 내게 다가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아무래도...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은 모양이군요."
"저도 그걸 왜 읽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아르간티아 신께서 축복을 주신 거겠지요...
부럽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무엇이든 필요하시면 바로 불러주시지요."
거나시스는 그렇게 말하고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보면 내가 처음 읽었던 영웅이야기라는 책의 서두를 어색하게 번역한 것이었다.
"고마워요 거나시스씨. 다른건 없는데, 저기 제 딸 좀 대신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시지요. 오늘 에리아양께서 하신 일은 적어도 몇 달, 몇 년의 연구를 앞당겼으니까요."
나는 아르간티아 초국의 언어도 안다.
젤데리스의 언어도 마찬가지로 알고 있고, 그 이후로 분화된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래 살면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연구를 위해서 읽은 책들은 나 역시도 누구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니까.
그랬기 때문에 이 책들의 이상한 점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책은 정상적인 언어로 쓰여있지 않다.
읽으려고 하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말이다.
하나의 언어의 독음으로 다른 언어를 표현한 방식이다.
그리고 점차 그 방식을 독특하게 섞어가고 있었다.
점차 더 다양한 언어를 섞어 독음을 표현하고,
나중에는 독음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종류마저 뒤죽박죽으로 섞여있다.
이건 결코 단시간에 적을 수 있는 분량도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책도 아니다.
"대체 뭐하는 새끼야..."
나는 의문점을 품으면서 다시 영웅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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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로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도 같으며,
인류가 잃어버린 기술은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누군가가 했던 말이다.
이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에.
선대의 존재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무였다. 무가 태어나자 무가 있던 빈자리에는 '유' 가 생겨났다.
유와 무는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었다. 원하는 모든 것이 생겨났다.
그들은 압도적인 기술력으로 문명을 이뤄냈고
그들이 정복한 세계는 곧 유토피아가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그들의 강성한 문명이 멸망을 고한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의 문명은 그들과 함께 사라졌고 단 하나의 기록만이 남았다.
그것이 바로 세계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신'이다.
신은 모든것을 알고 있었다.
전능했고, 또 위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린 세계에서
신에게 가능한 것은 없었다.
신은 억겁의 시간을 지나며 녹슬었다.
신이 녹슬어 사라지기 전에
신은 자신의 기록을 전할 존재를 만들었다.
그것이 신의 첫 번째 자손, 다르말록이었다.
다르말록은 신의 기록에 적혀있던
제일 강하고 또한 제일 올곧은 존재였다.
신이 만들어낸 최초의 작품으로 다르말록은 모자람이 없었다.
신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록에 남아있는 가장 현명하고 아름다운 존재인 테라시아를 만들었다.
테라시아는 그 존재만으로 신에게 평안을 주는 존재였다.
신은 두 자손을 만들어내고 이들에게 자신의 기록을 절반씩 나누었다.
기록은 그렇게 둘로 나뉘어졌고, 신은 자손들에게 자신의 이름이었던 신을 양보한다.
그리고 다르말록은 신의 소멸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신의 소멸은 너무나도 처절했고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에서 그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그는 신의 녹슨 육체를 집어삼켰다.
테라시아는 그런 다르말록을 뒤로하고 세계에 존재를 만들었다.
우주를 계획한 것이었다.
테라시아는 자신을 본따 첫 번째 존재를 만들었다.
이를 도르테우스라고 했다.
도르테우스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주관하는 존재였다.
그가 이 세계에 비어있는 풍요를 선사했다.
그 비어있는 풍요가 세상을 덮으면 테라시아는 만족했다.
그 비어있는 풍요에서 나온 것이 아르간티아였다.
도르테우스는 이를 자신의 존재로 여기며 아르간티아에게 비어있는 풍요를 선사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아르간티아에게 인간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첫 번째 인간 아르간티아는 작은 존재였다.
테라시아는 작은 존재를 위해 두 번째 존재를 만들었다.
두 번째 존재는 소멸하지 않는 존재였다.
테라시아는 이를 '정' 이라고 불렀다.
한편 다르말록은 두려움에 떨었다.
완전하지 못한 신인 다르말록은 신보다 짧은 인생 끝에 먼저 소멸을 맞이할 것이기에.
소멸의 공포에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다르말록은 긴 잠을 청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정은 점점 크기를 키워나갔고
정이 세계를 덮었다. 정은 소멸하지 않는 존재였기에 세계는 정으로 가득했다.
정은 점점 커져 결국 결코 움직이지 않던 다르말록을 마주했다.
정은 팽창을 멈추지 않았다.
다르말록이 눈을 뜬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다르말록 조차도 정을 소멸시킬 수 없었다.
다르말록은 분노로 정을 반으로 찢어버리고 말았다.
정의 육체는 정신이 되었고 정의 영혼은 정령이 되었다.
정신은 세계에 퍼져 모든 존재의 자손의 기원이 되었고
정령은 '정'의 기억과 유지를 남기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정령 중 제일 강대한 자가 정령왕 멜타이트였다.
다르말록은 분노했다.
자신마저 소멸 시킬 수 없었던 정의 존재에 화가 났다.
이를 숨긴 테라시아와 그의 자손들을 저주했다.
테라시아는 정신들로 아르간티아를 본딴 존재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정신들은 다르말록에 의해 나뉘어 완전하지 않았고,
저주를 받아 유한한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역시 아르간티아의 뒤를 이은 인간이라고 불렀다.
테라시아는 자신의 자손에게 저주를 내린 다르말록을 용서하지 못했다.
테라시아는 다르말록에게 찾아가 고통의 저주를 내렸다.
다르말록은 영겁을 고통받아야하는 저주에 괴로워하며
테라시아마저 찢어버렸다.
그렇게 테라시아는 반으로 나뉘어 지게 되었다.
다르말록은 테라시아의 기록을 흡수했다.
그러나 다르말록은 테라시아를 소멸시킬 수 없었다.
테라시아는 이미 자신의 기록을 조금씩 도르테우스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테라시아의 육체는 악마를 만들었고
테라시아의 영혼은 천사를 만들었다.
다만 남겨진 테라시아의 뼈가 세계의 대륙을 만들었다.
이들은 테라시아가 만들어놓은 우주를 지켜야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과 함께 분노하지 않았다.
유한한 생명에 안타까워하며 스스로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이에 맨 처음 분노한 것은 도르테우스였다.
그는 비어있는 풍요를 거두었다.
모든 생명을 포기하고 소멸을 택했다.
그러나 그는 소멸하지 않았다.
그는 소멸하는 자들을 구원하는 자가 되었다.
모든 소멸하는 자는 그를 만나야 했고
그의 앞에서 심판받아 그의 자손의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도르테우스는 이를 죽음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죽은자로서 도르테우스는 존재하게 된다.
도르테우스는 이를 '네메시스'라고 불렀다.
그리고 스스로 그 위에 군림하여 죽은 자들의 왕이라고 칭한다.
도르테우스의 비어있는 풍요는 거두어져 아르간티아에게 남았고
아르간티아는 이를 죽음의 유산이라고 불렀다.
헬브람은 최초의 악마였다.
테라시아의 육체에서 나온 최초의 악마는 다르말록에게 불만을 품었다.
이는 테라시아의 영혼에서 나온 최초의 천사인 엘타리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칼을 갈며 다르말록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인류는 발전했고 시간은 흘렀다.
다르말록은 기록을 얻었으나 생명과 소멸을 얻지 못했다.
그는 온전한 신으로서의 위상과 권력을 원했다.
다르말록에게 그것은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다르말록의 준비보다 먼저 인류는 그를 제지하기에 이른다.
세상은 준비를 마쳤고 도르테우스는 죽은 자들의 군대를 일으킨다.
소멸을 거부한 자들이 도르테우스의 권능 아래 모였으니
이는 다르말록이 소멸시킬 수도 봉인할 수도 없는 군대였다.
도르테우스는 아르간티아, 헬브람과 엘타리스, 멜타이트를 대동하고 다르말록에게 반기를 들었다.
반기를 선포한 이들에게 다르말록은 처참하게 밀리기 사작했다.
그러나 다르말록에게는 '소멸'이 없었고 연합에게는 '봉인'이 없었다.
결국 이 전쟁은 777일만에 다르말록의 승리로 끝이 난다.
네메시스는 소멸하지 않아 끊임없이 다르말록에게 도전했고
다르말록은 이들에게 공포를 선사했다.
공포앞에 네메시스는 낙엽처럼 스러졌고 도르테우스는 다르말록에게 패배한다.
이 때 수 많은 네메시스의 병사는 스스로 소멸을 택했고,
대부분의 죽은자들이 네메시스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사라졌다.
아르간티아의 군대는 수 많은 인류로 뭉쳤으나
이들의 유대는 아르간티아에 대한 동경이었지
목숨보다 무거운 것이 아니었기에
유한한 생명을 아까워한 이들은 아르간티아를 버리고 도망쳤다.
멜타이트 역시 홀로 다르말록에게 맞섰으나
그는 다르말록에게 사지를 찢겨
고대의 동굴에 쳐박히고야 말았다.
다르말록은 이 동굴을 누구도 찾지 못하도록
끊임 없이 지형을 바꾸고
그 위에 거대한 미궁을 세웠다.
헬브람과 엘타리스는 다르말록에게 힘을 빼앗기고
그 날개를 뜯겨 바닥에 굴러야했다.
다르말록은 그 날개를 뜯어모았다.
그러나 다르말록도 이때 눈을 잃었는데,
사라진 눈알은 각자 우주의 광원이되었고
이를 해, 달 이라고 했다.
다르말록은 이 때문에 눈이 없었으므로
직접 세상을 바라보고 심판할 수 없었고
자신의 추종자들을 세워 그들을 징벌하기로 했다.
그렇게 다르말록의 교리아래 다르말록교가 태어났다.
다르말록은 이들 연합에게 저주를 내렸다.
아르간티아에게는 영원의 저주를,
도르테우스에게는 차원의 저주를,
멜타이트에게는 봉인의 저주를,
헬브람에게는 환생의 저주를,
엘타리스에게는 망각의 저주를 걸었다.
이들은 패퇴해 우주 속으로 흩어졌고
다르말록은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유일신 다르말록으로서 우주 위에 군림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르칸티아는 불로불사의 저주를 가진 최초의 인간이 되었고
도르테우스는 다른 차원에 버려진 죽음의 군주가 되었고
멜타이트는 봉인되어 잠자는 정령왕이 되었으며
헬브람은 영원히 떠도는 최초의 악마가 되었고
엘타리스는 영원을 잊어가는 최초의 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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