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 영웅 이야기
* * *
엘타리스는 자신의 망각의 저주를 둘로 나누었다.
망각의 탈린과 소실의 엘라로 나누었다.
결국 모든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다시 쌓아올리는 것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
기록에 적히는 것은 존재하게 된다. 존재를 적은 기록이기에
역으로, 적힌 것은 존재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분신, 엘라의 존재를 기록했고,
그 껍데기만 남은 탈린이 남았다.
탈린은 저주로 인해 모든 기억을 잃었다.
그로 인해서 엘라가 태어났고,
엘라는 존재하기 이전의 탈린의 기억을 가지지 못했다.
다르말록은 이들의 우주를 통제하고 그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자신의 피와 최초의 악마의 날개로 감시자를 만들었다.
감시자는 괴라고 불리며 우주의 끝에 앉아 인간을 감시했다.
또한 천사의 날개로 기둥을 세워 자신을 위한 신전을 만들어
세계의 중심에 박아넣고 나서 만족한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이 신전에 공물을 바치는 자는 다르말록의 총애를 받으리라고
그렇게 공포하고 나서 다르말록은 그들을 풀어주었다.
인간은 다르말록의 아래에서 혼란을 겪어야했다.
유한한 생명과 공포에서 이들은 더 이상 질서를 찾지 않았고
폭력과 강제로 쾌락을 탈취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영원을 기억하는 이들은 괴에게 핍박받아야 했고
누구도 그들의 힘이 되어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르말록을 따랐다.
이를 가만히 볼 수 없었던 것이 아르간티아였다.
아르간티아는 뛰어난 지도력으로 다시 인간을 하나로 규합해내
아르간티아 초국이라는 국가를 세우게 되었고
첫 번째 왕의 자리에 올랐으나 괴는 이를 가만히 놔 두지 않았다.
괴는 인간들을 시기하고 질투를 조장했고
아르간티아의 위상을 깎아내렸다.
이들은 아르간티아의 패배를 알고있었다.
자신들보다 위대한 존재이기에 따르지만
더 강대한 존재 앞에서는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 위대한 아르간티아도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르간티아는 스스로를 원망했다.
스스로의 무능함에 슬퍼했고 이들을 위해 새로운 힘을 원했다.
더 이상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비어있는 풍요는 찬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 시점부터 아르간티아 왕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왕은 이것을 백성에게 나누었다.
"비어있는 풍요는 생명을 낳고
생명은 풍요를 이루고
그 끝에 다시 비어있는 풍요를 남기니
이는 영원히 이어지는 죽음의 유산이라."
그러나 여전히 아르간티아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백성들은 풍요를 받고도 일구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비어있는 풍요가 점차 빛을 잃어
그들의 유산은 더 이상 풍요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들은 어리석었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테라시아의 대지 위에서 테라시아를 잊었다.
아르간티아의 투쟁과 최초의 존재들의 저주를 잊었다.
죽지 않는 아르간티아와 다르게
이들은 하루하루 죽어가며 도르테우스의 손에 소멸을 맡겼다.
아르간티아는 이에 도르테우스를 위한 제단을 만들었다.
도르테우스를 위한 제단에 올라
아르간티아는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다.
도르테우스의 유산은 이미 우주에 흩어졌고
최초의 존재는 힘을 잃었으니
다르말록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아르간티아의 기도가 333일이 되던 날에
도르테우스는 아르간티아에게 두 번째 유산을 내렸다.
그것이 바로 모방의 창조였다.
모방의 창조를 받은 아르간티아는 그들에게 모방의 창조를 나누었다.
죽어가는 인간이 죽음에 저항하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게 되었다.
더 이상 완전한 창조도 아니었고 불안정한 모방이지만
이들은 유산을 이어간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로서 인류는 자손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고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자손을 기르고
교육해 새로운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르간티아는 이들을 축복해 달라며 한 번 더 도르테우스를 불렀고
도르테우스는 큰 고민끝에 이들에게 진실의 영을 선물했다.
진실의 영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것이었고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빠르게 기술을 전파하고
문명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인간은 그로 인해 오만해지고
감사를 잊어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쾌락을 가르친 것은 다르말록이었다.
그는 욕망의 저주를 이들에게 내렸고
이들은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서로 죽이고 빼앗고 싸우고
결국 다시 모든 유산의 빛을 꺼뜨리고 나서야
이들은 아르간티아의 앞에 찾아왔다.
"위대하신 아르간티아여, 우리의 유산이 빛을 잃었으니 도와주십시오."
"그대들은 유산을 돌보지 않았다. 욕망에 져버린 그대들에게 나는 유산을 남길 힘이 없다."
백성들은 좌절했고 그 절망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들은 무능한 왕을 끌어내리기로 했고
진실의 영과 아르간티아를 무참히 박해했다.
아르간티아는 그럴 때마다 말없이 자신에게 남은 유산을 쥐고 있었다.
진실의 영은 그들에게 버려져 부서졌고
아르간티아만이 이를 가엾게 여겨 진실의 영을 거두었다.
아르간티아의 품에는 진실의 영과 비어있는 풍요, 가장된 힘.
세가지 유산만이 남아있었다. 근원부터 가진 유산은 아무리 빛을 잃어도
아르간티아의 손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백성들은 유산을 모욕했다.
그의 무능을 욕하며 아르간티아를 저주했다.
그러나 아르간티아는 죽지 않았고 여전히 유산을 놓지 않았다.
마침내 백성이 아르간티아를 버리고 나서야
그는 고통을 껴안고 걸어갔다.
다른 최초의 존재들과 같이 아르간티아는
왕성과 도시를 뒤로하고 그는 세계의 어딘가로 모습을 감춰버리고야 말았다.
아르간티아가 국가를 세운지 150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유산은 시간이 흘러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진실의 영의 조각은 영감으로,
비어있는 풍요는 지혜로,
가장된 힘은 용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르간티아는 세 유산을 하나로 합쳐 '기적'을 만들어낸다.
기적은 아르간티아가 온전히 유산이 빛나는 시기에 가장 위대한 인간에게 선물했다.
인간이 태어날때 부여하고 그 끝에 그 인간의 영혼과 함께 거두었다.
그렇게 기적은 수많은 인류의 기억을 담게 되었다.
죽음의 유산은 그렇게 '인간의 유산'이 되었다.
아르간티아는 늙지도 죽지도 않았기에
인간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다만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이 우주를 떠돌 뿐이었다.
처음 아르간티아가 인간에게 버려졌을 때,
그는 북쪽대륙의 황무지로 걸어갔다.
그의 발 닿는 곳마다 옅은 생명이 돋아났다.
황무지에 처음 푸른 식물이 돋아나고
황무지를 따라 돋아난 식물들이 뻗어나가
그 일대를 덮기 시작하면 아르간티아는
자신의 눈물로 식물을 길렀다.
아르간티아의 눈물을 받은 나무는 크게 자라
수해를 이루고 이 숲은 울창하게 우거져
단지 멀리서도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화려하게
하늘을 뚫을 듯이 서 있었다.
숲에 바람이 불면 종종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왔고 사람들은 숲을 후회의 숲이라고 불렀다.
후회의 숲은 아르간티아 초국의 북쪽으로 길게 늘어섰고
누구도 쉽사리 발을 들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 아르간티아를 기억하는 이가 사라지고
아르간티아의 행방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건 그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1장.
아르간티아 초국이 처음 세워질 때.
아르간티아는 넓은 광지에서 인간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르간티아를 바라보았을 때
그들은 본능적으로 아르간티아가 그들보다
위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반갑소. 나는 아르간티아요,
여러분보다 조금 먼저 난 존재로서의 인간이오.
우리는 테라시아의 자비아래 이곳에 모였소.
그리고 현재 우리는 홀로 남겨져 이 광지에서
두 발로 굳건히 서야하오.
나를 따라 이 대지에 설 자는 누구인가?
내 뒤를 따라 우리의 집단으로 이 세계를 이룰 자는 없는가?"
맨 처음 앞으로 나선 자는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키가 크고 말라 기이한 인상을 주는 자였다.
그는 유난히 피부가 어두웠고 몸에 털이 많았다.
"나는 블페르라 하고, 당신을 이전부터 주시했습니다.
그대의 이름 아래 우리가 뭉쳐야 한다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블페르는 흙바닥을 주먹으로 한 줌 쥐었다.
"이 땅의 모래 한 알부터, 대지를 이루기까지.
하늘과 구름으로 세상을 덮을 때 까지.
그 무수한 세상의 위에 닿고싶습니다.
당신은 그걸 가능하게 할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블페르의 선언은 아르간티아를 움직였다.
블페르가 무리에서 나와 아르간티아의 뒤에 섰다.
그리고 군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나온 자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는 데아투스라고 하는 자였다.
데아투스는 험악한 인상에 작은 키를 가진 자였다.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 버려진 난쟁이였다.
"나도 그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아르간티아여."
"나는 차별함이 없고 그대들 모두가 나와 손을 잡기를 원하오."
"그러나 왕이 될 자여 그것은 틀렸습니다. 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래서도 안됩니다. 이들의 결속을 유지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걸 알아준다면 당신은 진정 왕이 될 것입니다."
"그대의 의견이 듣고싶소. 부디 나에게 힘을 보태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데아투스는 천천히 걸어나와 아르간티아의 앞에 무릎꿇고 절했다.
아르간티아가 그 머리에 손을 대고 그를 축복했고, 많은 이가 그 광경을 보았다.
하나 둘 사람들의 무리가 걸어나오게 되었고, 이윽고 모든 인간이 아르간티아의 지휘 아래 섰다.
"좋소, 우리는 나라를 세웁시다. 국가를 세우고 그 기틀을 다질 것이오.
그리고 그 위에서 번영하여 힘을 키우고 우리가 저 위에 두고온 목표로 하는 빛을
다시 우리 손으로 되찾고 싶소."
그렇게 아르간티아는 수많은 사람의 지지 위에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아르간티아는 블페르를 개척자로, 데아투스를 기록관으로 임명했다.
그 누구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블페르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모아 새로운 지역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데아투스는 이들을 기록하고 아르간티아의 비어있는 풍요를 전수받는 자가 되었다.
황무지에서 이들을 일으킨 것은 아르간티아가 보인 가장된 힘이었다.
아르간티아의 발이 처음으로 떨어지고 수백의 인류가 그 뒤를 따라 발을 옮겼다.
이들은 식량도 없었고, 도구도 없었다. 다만 아르간티아를 믿고 그를 따랐다.
아르간티아는 이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었다.
사막과도 같은 열기는 이들을 지치게 했다.
그들은 걷고 또 걸었고 밤이 되면 황무지의 바람소리를 벗삼아 잠을 청했다.
이따금씩 모래폭풍이 불기라도 하는 날에는 종자들의 한숨과 비명소리가 밖을 메웠다.
아르간티아는 죽지 않았으나 이들은 아니었다. 수명에 한계가 있는 이들은
더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원했고, 데아투스는 그들의 입장에서 아르간티아에게
조언을 전했다.
"아르간티아시여, 저들은 지치고 나약합니다. 저 자들은 그대를 원망할 테고,
결국 슬픔에 좌절할 것입니다."
"걱정마시오. 아직 도르테우스가 우릴 지켜주고있으니."
"하지만 저들은 도르테우스를 믿지 않습니다. 비어있는 풍요로는 저들을 살릴 수 없으며,
저들을 좀먹는 것은 불신입니다.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제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소."
"이곳을 거점으로 세우시지요."
"이곳은 너무 척박하고, 저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아니오?"
"다르지요. 이곳에 터를 세우고 블페르를 보내 새로운 지역을 알아오게 하시면
더 나은 구역을 발견했을때 조금 더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블페르가 불만을 표하지 않겠소?"
"걱정마시오, 나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블페르가 뒤에서 나타났다.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열매를 손에 들고 나타난 그는
그 열매를 아르간티아에게 내밀었다.
"식량이 있습니다. 나와 내 무리가 찾아낸 것이니, 왕인 그대가 먹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건 그대가 드시게. 나는 괜찮으니, 그대를 믿고 나 이곳에 거점을 세워도 좋겠는가?"
"그리 하십시오."
그리고 블페르는 그의 무리 6명과 함께 떠나갔다. 모래바람이 그들의 발자취를 지워버리면
아르간티아는 말없이 그들의 뒤를 바라보며 짙은 씁쓸함을 얼굴에 띄웠다.
블페르는 사막을 따라 걸었다. 얼마나 더 나아가야 할지 감은 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각개 조를 나누었다.
둘은 북부로, 둘은 서부로, 남은 둘이 남부로 향했다.
블페르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들이 돌아왔다.
테프라고 이름붙힌 사내가 말했다.
"저 곳은 사람이 살 수 없으며 끓어오르는 피와 저주받은 척추가 날을 세우고,
우리를 그 아가리 속으로 던져넣으려고 하고 있소."
서부로 떠난 자였다. 블페르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조사한 서부의 척추에
테팔레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북부로 떠났던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퀘트론과 요르디프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자는 남부로 간 자들이었다.
페세트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말했다.
"남부에는 넓은 광지가 있었소. 아직 초목이 자라고 있고,
우리가 발을 디딜 공간이 있소. 지금 떠나지 않으면 우리는 잊혀지게 되오."
블페르는 그를 앞장세워 남부로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테리시아의 척추였다.
테라시아의 척추가 거센 모래바람을 막고 있었고, 그 아래로 초목이 자라는 공간이
메마른 그의 발을 더듬었다.
아르간티아에게 돌아가야 했다. 이 곳이라면 무리를 세울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믿었다. 황무지 아래, 테라시아의 가호가 묻힌 곳.
블페르는 기뻐하며 페세트의 이름을 따 이곳을 페세티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르간티아와 그의 무리가 이곳을 찾아 국가를 세우니 이것이 그 아르간티아 초국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