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영웅 이야기
* * *
2장
그는 국가를 세우고 그 기틀을 닦았으며 인간들이 화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간들은 결국 자신보다 하나 더 가진 자를 질투하고
하나 모자란 자를 멸시했으며 패배한 자였던 왕을
그저 무언가 하나를 더 얻기 위해 따르고 있음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괴가 처음으로 초국을 침범했을때, 이들은 왕을 비난했다.
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도 언젠가 노력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아직 블페르와 데아투스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자비 없이 그들의 곁을 떠나갔다.
시간이 흘러 블페르와 데아투스는 아르간티아를 도와 초국을 발전시켰고,
마침내 왕의 비호 아래 눈을 감았다.
데아투스는 자신이 이뤄낸 모든 것들을, 이제껏 보존해온 지식과 역사를 맡아줄 후계를 뽑았다.
그의 이름이 바로 데릭 브라이어였다.
왕은 기록을 다루기를 바랐고, 그의 아버지에게 날마다 부르짖었다.
그 부름에 응답한 도르테우스는 가진 기록에 새로 개념을 적어넣었다.
기록에 간섭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마력'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또 흘렀다. 오로지 시간만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모든것이 시간 아래 변해갔고, 오직 왕 만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언젠가 자신을 죽이리라 여겼다.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모든 것들에게서 손을 떼고 있었다.
다르말록에게 패배하고 국가를 세우고, 인류를 바라보던 그의 눈이
다른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그는 국가를 세우고 도르테우스의 제단을 짓고, 인간에게 권능을 하사했다.
더 많은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했고, 그것이 자신의 역량으로 해낼 수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먼저 태어난 인간으로서 그들의 짐을 덜고자 했다.
그리고 결국 그가 마주하게 된 것은 도르테우스의 제단 앞에 꿇어 앉은 이들이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보다 그들이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외치는 광경이었다.
가진 것을 나누지 않음에 분노하는 이들을 보고 아르간티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모든 것이 이렇게 귀결되리라 말했던 다르말록의 말을 애써 부정하던 그의 표정에는
깊은 슬픔이 서려있었다. 왕은 그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묵묵히 발을 돌렸다.
발을 돌린 왕을 백성들은 지지하지 않았고, 그들은 점차 쾌락과 열망을 가져다준 다르말록의
발 아래 조아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괴의 눈은 그들에게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고, 하늘에 떠 있는 다르말록의 눈을
그들이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마력을 선물했던 그는 모두가 이 권능을 이루길 바랐다.
그것이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그의 바람은
그렇게 서서히 사그라져갔다.
누군가 그에게 이전같은 열정을 요구할 때마다 왕은 어딘가 공허한 눈을 하고 말했다.
자신은 모든 것을 이루고 싶었노라고. 그러나 그 모든것이 또 하나의 지배였노라고.
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이 아니었는데, 자신은 헛된 우물을 파고 있었다고 했다.
모든것을 이루어주고 싶었던 것이 결국 자신의 욕망이라면 겸허히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 그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이루어주었다고 여긴 것들을 저들이 신으로 바라본다면
자신은 그 자리를 버리고 인간으로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인간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르테우스의 신전을 세우고 기도하던 날을 회상했다.
그는 인간들에게 인간의 방식을 가르쳤다.
권능이 아닌, 손으로 땀으로 일궈낼 수 있는 일들을 아름답다 말했다.
"나는 무능한 자요, 여러분의 구원이 되지 못함을 깨달았소.
그러나 그것은 누구도 마찬가지이며, 그대들의 의지를 꺾으려는 것일 뿐,
결코 그대들을 구원하지 못하네. 스스로 일어나게.
두 다리를 딛고 다시 손에 인간의 도구를 들고 피땀을 흘리게.
여러분은 스스로 이뤄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고
이제 그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으니 나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네."
광장의 인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왕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대들은 무능한 신과 전능한 인간중에 어느 쪽을 믿을텐가?"
"닥치시오! 우리가 구원을 바랐을 때 외면한 그대가
이제와서 우리를 다시 다르말록에게서 떼어내려는 것은
순전히 그대의 권력에 대한 미련이 아닌가?
아르간티아! 모두 인간이었고 인간일진대 어찌 인간 위에 인간이 서겠는가!
우리가 그대를 따른 것은 저 메말랐던 토지 위에 스러지지 않기 위함이었소.
우리는 이제 자유하고, 그대가 원하던 이상으로 강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간섭하지 마시오!"
아르간티아는 그날 스스로 왕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누구도 왕이 아닌 그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날 밤, 그렇게 사라졌다.
아르간티아 초국은 왕을 잃었고, 그렇게 2대 국왕으로 추대된 자가 바로
블페르의 후손, 올라르였다.
아르간티아의 빈자리를 위해 다르말록이 지명한 사자였고,
그가 왕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올라르는 강인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거짓된 힘도, 비어있는 풍요도 없었다.
그는 아르간티아의 자리를 새로운 것을 채우려고 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새로운 권력이어야 했다.
다르말록은 그에게 새로운 권능을 선물했다.
왕이 변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통솔할 자는 마땅히 가져야 한다고 말하며
'원하던 안식'을 내렸다.
올라르는 안식을 원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그의 안식을 모르게 했다.
예리하게 벼려져있던 검이 두 갈래로 나뉘는 순간이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안식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이룬 안식을 손에 쥐고 행복을 누렸다.
점차 안식을 위해 인간을 소모하기 시작하는 그는 다르말록의 사자로서 너무나 어울리는 존재였다.
하나씩 후회하는 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손에 단단히 붙든 것이 도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기어오르는 발목이라는 것이 확실해질때,
처음으로 누군가 말했다.
"나는 이곳을 떠나겠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네.
인간의 손으로 이룬 것을 다시 이 땅에 번성하게 만들고 싶다네.
아르간티아를 추억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옳았고
우리는 그를 잃은 바보들이네.
그렇다면 적어도 그가 보기에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에 또 다시 누군가가 일어섰다.
"나 역시 그대의 말에 동의하오.
아르간티아는 우리를 전능한 인간이라고 했네.
인간은 인간을 버리지 않네.
저 인간성을 져버린 자들이 더는 우리를 속박하지 못하게
이곳을 떠나려 하네."
"가는 길에 목이 마르지는 않겠는가?
술이 있으니 가면서 한잔씩들 하세.
거 왜 집 떠나면 속쓰리고 그리울 것 아닌가?"
그들이 하나 둘 모여 떠나갔다.
올라르는 그들을 비웃었다.
"동부로는 길이 없고, 북부는 퀘트론이 있는데, 그대들은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나?
남부로 떠나기라도 할 생각이신가?"
"그렇다면 서부로 가겠네."
"서부? 그곳은 테팔레스가 남았을 뿐인데, 그 불구덩이가 들끓는 아가리로
걸어들어가겠다는 건가?"
"아암, 우리는 그럴 생각이네. 애초에 신을 등지고 홀로 서는 일이 쉬울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벌을 받는 이들이, 편하면 안되잖은가?"
"하! 웃기는군, 그럼 그렇게 하시지."
그렇게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부의 화산지대로 떠나고
인간 위에 인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이념으로
그들이 국가아닌 자그마한 마을을 이루니, 이를 대장간이라고 했다.
대장간이 생겨나고 인간들은 점차 초국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르말록에게 충성하는 이들에게 다르말록은 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르말록의 종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혐오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였다.
자신의 발목을 아직까지 붙잡고 더 위로 올라가려 하는 자신을 끌어내리는
신 앞에 나란히 꿇어앉은 인간들.
그리고 다르말록의 총애를 받아 다른 인간을 짓밟는 저 무자비한 올라르였다.
결국 반역자들은 늘어갔다. 올라르 왕은 그들을 북부로 추방했다.
다시 초국의 비호가 없는 황무지로 그들을 내쫒은 것이다.
그들은 버려졌고 아르간티아 왕이 눈물로 이룬 숲으로 발을 디뎠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아르간티아의 권능에 기도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찾지 못하도록. 우리가 영원히 저들의 눈을 피하고,
언젠가 반드시 저들을 몰아낼 수 있도록. 모든 신의 힘이 이곳에서 흩어지고
오직 인간만이 이 곳에서 숨쉴 수 있도록. 그 오만한 숨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곳에서 알게 하소서.'
그들의 기도는 숲에 스며들었다.
도망자들은 숲을 헤매며 죽어갔다.
그 원망이 땅에 울리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그들의 미래를 저주했다.
숲에는 이후로 짙은, 아주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겨우 살아남은 도망자들은 북부에 닿았다.
그곳에는 퀘트론이 이룬 아주 작은 마을이 있었다.
도망자들은 그곳에 섞여들었고, 퀘트로네스 대륙에 처음으로 작은 구역이 생겨났다.
버려진 자들의 구역이라는 이름이 광야에 날렸다.
광지의 바람은 차고 매서웠다.
그들은 신을 부정했다.
신이 있다면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자신들에게 그렇게 혹독한 고통을 안겨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밤, 그가 나타났다.
그는 괴를 앞세워 나타나 텅 빈 눈으로 그들에게 물었다.
"다르말록이 너희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저 아르간티아의 초국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오직 힘을 따르는 것.
나는 너희의 모든 것을 긍정하겠다. 모든 부정한 것을 너희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하겠다.
오직 하나. 나를 믿어라."
퀘트론이 앞으로 나서 물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우리가 저들을 다시 집어삼킬때 그대는 침묵하겠는가?
버려진 우리가 다시 저들의 고향을 짓밟고 저들의 피가 대지를 적셔도
그대는 우리가 옳았노라 말하겠는가?"
"아아, 물론이고 말고. 그대들이 저 작은 국가를 압도할 '제국'이 되더라도 말이야.
결심이 선 것 같은데, 너희에게도 선물을 주지."
그것은 아주 막대하고 강하며 절대적인 권능이었다.
'눈 먼 정의'라고 하는 것이었다.
"네가, 제사장이 되어라. 내 너를 통해 모든 것을 이룰것이다."
다르말록은 그렇게 말하고 요르디프를 메만졌다.
아무도 모르게 다르말록은 요르디프에게 하나의 권능을 더 부여했다.
그것은 '뒤섞인 신의'였다.
"제사장은 너다. 오직 너 하나 뿐이다 요르디프. 너와 네 후손들이 영원히 이어갈 것이고,
내 권능은 저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따라붙는 저주와도 같을 것이다.
그 증표를 너에게 내리니, 이것은 다르말록의 약조이니라.
그리고 내 앞으로 널 영원토록 요르 디프리온이라고 부르겠다."
그렇게 말하고 다르말록은 검은 로브에 금색과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자수가 놓인
것을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다르말록이 떠나간 후에 그들은 눈 먼 정의를 앞세웠다.
부정한 것. 그건 그들에게 있어 인간이 아닌 것이었다.
인간이 아닌 것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오로지 온전할 테니까.
그리고 그 선봉을 맡은 것은 데아투스의 후계, 기록의 데릭 브라이어였다.
"이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외길 뿐이라는 건가?"
"그런...거지."
"좋구만, 로드원이라. 우린 로드원으로 하지. 부정한 것들을 척결하는 이들."
"그래, 그러지."
검은 로브를 쓴 여자가 웃었다.
그녀의 웃음은 어딘가 모르게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기이한 공포감을 주었다.
마치 어딘가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깊고 지독하게 어두운.
영원속에 뒤덮일 것 같은 진득한 수렁 속의 연꽃같은 웃음이었다.
이것이 후에 미리타엔 제국이 되는 버려진 자들의 구역의 시작이었다.
후에 사람들은 올라르의 '원하던 안식'을 '탐욕'으로,
'눈 먼 정의'는 '광신'으로, '뒤섞인 신의'는 '이단'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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