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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01화 (201/303)

〈 201화 〉 영웅이야기

* * *

대장간으로 처음 떠난 이들이 제일 먼저 만들어낸 것은 작은 희망이었다.

그 작디 작은 희망은 떠난 왕을 기리는 마음이 일으킨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왕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도구를 만들었다.

이것이 태초의 아티팩트라고 불렸으며 이것을 더러 사람들은 왕의 발자취라고 했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서 대장간의 가장 위대한 기술자에게 그것을 넘기기로 했고,

언제든 돌아올 왕을 기억하기로 했다.

아르간티아는 인간들에게 띄지 않기 위해서 그들을 떠났다.

그들이 이루어낸 세상을 자신의 개입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르간티아는 걸음을 옮겼다.

인간의 시대를 방해하는 다르말록을 봉인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다르말록의 제단을 부수는 것이었다.

제단을 그가 내리치면 거대한 진동이 울렸고, 괴가 그 앞을 막아섰다.

아르간티아는 괴와 전투를 벌였으나 결판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러나 유한한 생명이 결코 불사의 존재를 이길 수 없듯,

결국 괴의 몸은 무너지고 그 발 아래 썩어갔다.

썩어가는 괴의 몸에서는 부패한 존재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괴물이라고 불렸다. 괴물은 후에 그 형태를 따라 마물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대개 지성이 없으며 자신을 죽였던 아르간티아와 그의 형상을 취하는 인간을 습격하곤 했다.

개중 괴가 받았던 다르말록의 은총이 유독 많았던 것들이 종종 그 형태를 취하고

지능을 얻게 되었다. 그들 역시 대 자연의 품에 뒤섞여 퍼져나갔고,

최후에는 동물이 되거나, 토벌당하거나, 숨어 살게 되었다.

괴물도, 정령도 미리타엔에서 퍼져나간 사냥꾼들에게 사냥당해갈 뿐이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오롯이 부정한 자들만이 아니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갈 뿐이었고 점차 새 시대는 과거를 잊어갔다.

아르간티아 초국을 떠난 이들의 후손이 아르간티아를 잊어가는 것 마저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죽은 시대는 모조리 스러졌다.

네메시스의 앞으로 나아간 이들은 모두 공정하게 도르테우스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했다.

다르말록의 꼬임에 넘어가 찰나의 순간에 그를 배신하고 그의 아들을 져버린 이들을

도르테우스는 진심으로 안타까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심판대에 선 영혼에게 그가 물었다.

"자, 네 이름은 무엇이냐?"

왜 였을까.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남자 앞에서 더 큰 형벌이 무서워

고개를 돌리고 이름을 밝히는 이들 앞에서

데릭은 그렇게 말했다.

"데릭 로드원이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가 어긋났다.

그의 존재를 설명하던 인과가 어긋나고 그의 인생이 부정당했다.

거두어지려던 손이 실망으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뒷걸음질 쳤다. 두려움으로 인해 멀어지는 영혼을 도르테우스는 뒤쫒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도 낯선 광경이었다.

사냥꾼이었던 존재가 다시 땅을 밟았을 때, 이미 불타 사라진 육신을 대신하고

그 대지 위로 뻗어낸 것은 마른 뼈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냥꾼이었던 자는 사냥감이 되었다.

죽음을 거부한 도주자. 그것은 다르말록에게서도, 도르테우스에게서도,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서도 결코 용인되지 못할 두려움이었다.

한 평생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만을 영원히 후회하며 속죄하는 존재는

자신이 만들어낸 사냥꾼의 후손들이 두려웠다.

창칼을 들고 따라오는 자들을 피해 그는 자신의 불사를 연구했다.

살아있는 모든것을 연구해야 했고, 죽음 앞에서 도망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이미 자신의 후손으로서 퍼져있는 로드원의 이름들이 마주해서는 안될 자들이 되었음을 깨닫고

그는 절망했다. 그런 그를 발견한 것은 검은 로브를 입은 여자였다.

제사장으로 불린 여자는 그를 발견하고 되물었다.

여자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그 모습으로 살아있는가? 내가 기억하는 그대는 분명..."

"죄를 지었소.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미련이 나를 죄로 이끌었고

이제 그대의 군세마저도 내 모든것을 앗아가려 하오."

"아주 나쁜. 나쁜 꿈을 꾸셨구려."

해골은 그녀의 앞에서 말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죄인이라면 기꺼이 그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낮은 목소리를 듣고 죄인은 통감했다.

이것은 환호가 아니었다. 또 다른 광인이 죽기 직전까지도 그릇된 신앙을 위해

동료를 팔아넘기려고 하는 울부짖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의 다리에는 어느 새 무거운 족쇄가 달려있었고, 그가 끄는 발 아래로

그 죄의 무게를 통감하게 하고 있었다.

"우스운 꼴이구나. 사냥꾼이었던 자가 신념을 져벌고 도망치려 하다니.

나와 내 후손이, 네가 만들어낸 사냥꾼의 검을 들고 영원히 널 저주하리라."

죄인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단 한번의 마법. 평생을 흑마술을 연구했던 그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간단했던 마법이 그녀에게 쏟아진다.

그녀를 위해 익힌 마법이었지만 결국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돌렸다.

제사장은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온 몸이 비틀려 꺾여 죽었다.

그녀의 피가 처절하게 튀면 죄인은 도망칠 방도를 찾아야 했다.

눈에 띄어서는 안되는 그의 눈에 든 것은 제사장이 입은 검은 로브였다.

이후 버려진 자들의 구역에서 제사장이었던 여자가 나체로 비틀려 죽은 것이 알려지고,

종종 제사장의 로브를 입은 해골이 족쇄를 질질 끌며 나타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아르간티아는 이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아야 했다.

버려진 자들의 도시 옆 작은 터에서 그는 작은 소녀와 대화를 나눌 뿐이었다.

소녀는 등에 커다란 상처가 있었고,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그들은 그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점점 상태가 심해지고 있어. 얼마 지나면 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할까 걱정이야."

"괜찮을거야."

몇 번인가 대화를 주고받던 그들은 거대한 탑을 만들었다.

빛이 광명했고,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비석을 세웠다.

그 거대한 돌탑 앞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가 흩뿌려져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 영영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버려진 구역의 사냥꾼들은 모든 것을 추적했다.

마침내 그들이 노리는 창끝이 아르간티아와 그 옆의 소녀가 되어서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르간티아는 침묵했다. 그는 말 대신 북동부의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가 사라진 곳을 영원한 침묵이라고 불렀다.

영원한 침묵은 금새 빠르게 얼어붙었고, 차디찬 얼음만이 그곳을 메웠다.

소녀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을 데려가려고 하는 아르간티아도,

자신을 붙들어 함께 가자고 말하는 버려진 구역의 광신자들마저도.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아르간티아는 불사의 존재였지만 수 많은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그녀를 구할 만큼

초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 역시도 그저 하나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저 눈물을 머금고 그녀가 언젠가 다시 모든 것을 잊어주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아르간티아가 사라진 구역을 멍하니 바라보던 소녀는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새로 드리우는 창검을 피해야 했고, 고통을, 공포를, 혐오감을 새로 익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에 대한 반가움보다 그들을 피해 도망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했다.

그러나 소녀는 연약했고, 붙들려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소녀는 그렇게 붙들려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내게 왜 그러는 거에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는 소녀는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을까 싶을 때까지

그들의 손에 이끌려 고초를 당했다. 그 시간은 17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 않으며 17년간 고문을 당함에도 죽지 않고,

그 몸이 회복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이들은 비로소 부정한 자를 찾아냄에 기뻐했다.

이들은 떠나간 아르간티아를 추적하기 위해 그곳으로 제사장의 딸과 사냥꾼을 앞세워

나아가기 시작했고, 버려진 자들의 구역에는 그저 소녀를 고문하는 심문관들만이 남았다.

찬 북부에서 제사장의 딸은 사라진 왕을 찾기 위해 전초기지를 세웠다.

그리고 심문관들은 폭력에 의지하며 눈 먼 정의를 앞세워 아르간티아 초국을 침공했고

아르간티아 초국은 그날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더는 그곳에 영웅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에 새로 자리잡은 것이 이아에르 왕국이었다.

이아에르는 다르말록에게 더 적극적으로 의지했으나 다르말록은 이미

버려진 자들의 도시라는 구역에서 그들에게 마음을 주고 있을 뿐이었고,

그를 따르는 이들이 북부의 영원한 침묵에서도 새로 마을을 만들기 시작했기에

그들의 기도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아에르는 다르말록을 져버렸다.

결국 그가 자신들을 구원할 생각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아에르에서 나온 첫 영웅은 몰이었다.

몰은 처음으로 인간의 영역에서 기적을 이룬 사내였다.

그는 과거에 신이 그랬던 것처럼 짐승을 길들이기 시작했고,

곡식을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비어있는 풍요를 다시 되살려냈다.

그가 처음으로 해낸 가장 위대한 업적은 다름아닌, 신의 개입 없이 인간의 지도자가 된 것이었다.

인간은 그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했고, 그의 인도를 따라 군을 세웠다.

그들은 초국의 멸망을 기억했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만들자는 의지를 되새겼다.

북부로 떠난 제사장의 딸, 이름은 메리 디프리온이었다.

메리 디프리온이 사라진 버려진 자들의 구역은

통제하지 못하는, 규율이 사라진 곳이 되었다.

점차 그들의 행위는 잔혹해졌으나 그를 바로잡을 이는 없었고

이들은 그것이 힘의 논리로 귀결되는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메리 디프리온은 통제가 어려워진 버려진 자들의 구역을 내버리고 세운 마을을

더 사랑하기 시작했다. 손 안에 쥔 작은 새는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새떼보다

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세워진 또 하나의 나라의 이름은 디프리온 성령국이었다.

오직 교리에 따라 그들을 규율하고 다르말록의 뜻을 성실히 행하던 국가였다.

그리고 모두가 그 나라를 교국이라고 불렀다.

그 뒤로도 수백년이 흘렀다. 소녀는 원인도 모르고 날마다 고문을 당했고,

이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죽은 눈으로 날마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창검과

모진 마법들, 그리고 약물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그런 눈빛에 오히려 분노한 심문관들은 더 그녀에게 과격한 고문을 반복했다.

그들은 그렇게 그녀를 고문하면서도 그녀의 몸에 닿는 것을 혐오했다.

그건 그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부정한 것과의 접촉은 곧 그녀의 곁에 나란히 묶인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랬기에 어느날 감옥에 나타난 붉은 피의 악마가 그들을 덮쳤을 때에도

그들은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

악마는 그녀를 바라보고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악마의 품에 안겨 사라지면서도 한마디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그럴 기력조차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눈동자 속에 깊은 허무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악마의 도움조차 감사하지 않았다.

그저 악마를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떠날 뿐이었다.

악마는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그리고 또 한번 밝은 빛이 휘감겼고, 그녀의 공허한 눈은

다시 아무 것도 모르던 순수한 빛으로 물들었다.

악마는 페세티아 남부로 사라졌다.

얼어붙은 슬픔이라고 칭하며 그 서늘한 테라시아의 흔적을 넘어섰다.

소녀는 사라졌고, 악마는 인간을 깊이 증오하게 되었다.

이후로 처음, 마녀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면

수백년, 어쩌면 수십년에 한번 씩 흰 빛의 기둥이 어딘가에서 솟구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악마는 빛의 기둥을 따라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이 정화의 빛이라고 여겼다.

홀로 남겨진 아르간티아는 자신의 기적을 쥐고 생각했다.

강성한 신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힘의 간격을 메울 수는 없었으므로

그는 신에게서 힘을 빼앗기로 했다.

그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인간의 위대함을 설파했다.

인간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외쳤다.

처음에는 다들 그를 광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의미하게 삶과 죽음속에서 반복하던 쾌락을 처음으로 거부하고

다시 그들에게 주권을 가져다주겠다고 하는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달랐다.

신을 등진 자들이 그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폭거에 지친 자들이 평화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페세티아 대륙과 대장간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고,

마침내 이들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그것이 바로 아르간티아 교였다.

이들은 더이상 아르간티아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아르간티아를 기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을 바라보면서

그가 자신들을 응원하는 이라고 여기지 못했고

자신들의 산물의 목적을 잊었다.

그러나 다만 그들이 인간의 위대함을 깨닫기 시작한 순간부터 변화가 생겨났다.

다르말록의 영역이 조금씩 줄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으로 추앙받는 존재가 된 인간은 원하지 않았더라도 조금씩, 자신의 등에 그 기대가 걸리는 것을 자각했다.

아르간티아는 기적을 선물했다.

그 기적은 몰에게 권능을 하사했고, 몰은 버려진 자들의 구역을 다시 쳐

그들의 구역을 몰아내고 이아에르의 이엄을 과시하였다.

마침내 버려진 자들의 구역이 사그라지고, 그들이 다시 일어섰을 때는

미리타엔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독기를 가득 품게 되었지만 말이다.

이후로 미리타엔과 이아에르는 전쟁을 계속했다.

무려 182년간의 전쟁 끝에 이아에르는 패배해 사라졌다.

다시 손에 돌아온 기적을 바라보며 아르간티아는 슬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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