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화 〉 다른 과거
* * *
나는 삐삐를 앉혀두고 아주 기초적인 부분부터 가르쳐주기로 했다.
"자, 삐삐 잘봐. 이 책은 요즘 쓰는 언어가 아니라서 나름의 복잡한 규칙을 따르게 되어있어.
여기 이 글자 보이지? 이 바탕이 되는 아래 큰 획이 모음이야. 여기에 여러가지 세로 선이 있지?
이게 악센트랑 단모음을 나우는 거거든?"
"담모?"
"단모음이라고 하는거야. 언어에 따라 있는 언어가 있고 없는 언어가 있어.
입술의 모양이 변하지 않고 발음할 수 있는 모음군을 말하는건데,
모음이 뭔지는 배웠어?"
"반네리 이모가 알려져써!"
그래? 그럼 계속 보자, 모음은 이러게 구역을 분할해서
아래 큰 가로획에 왼쪽부터 사등분을 한 구역의 위 아래에 세로선이 어떻게 그어지느냐에 따라 나뉘는거야.
그래서, 아무 것도 없으면 우리가 읽는 자음형태의 기본, '으' 발음이 되는거고. 알겠니 삐삐?"
"아라떠!"
나는 삐삐를 한참 가르쳤다. 오늘은 적어도 자음 모음의 조합부터 글자 읽는 부분까지는
가르쳐 두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러면 저 쪽의 가로 획이 없는 글자는 어떻게 읽습니까?"
나를 바라보고 질문을 하기 시작한 학자들이었다.
어느샌가 삐삐 뒤에 나란히 앉아서 노트와 펜을 들고 필기를 하고 있었다.
삐삐는 뒤를 돌아보고 학자들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져씨들두 공부해?"
"그래, 아저씨들은 이런걸 공부하는게 일인 사람들이란다."
"엑... 재미업써..."
삐삐는 학자들을 둘러보고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희도 같이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어... 네 뭐 그러세요... 애 공부에 도움이 되는 선에서 봐드릴게요."
그렇게 말하자 급박하게 움직이는 학자들이 어느새 하나 둘 불어나더니
결국 내 앞에 두 줄로 길게 늘어서서는 강의를 듣는 학생들 처럼 앉았다.
처음에는 노트와 펜 정도였던 준비물품도 점차 화려해지더니
고가의 기록마법이 적힌 종이를 가져오는 이들도 생겼다.
결국 나는 삐삐를 가르치려다가 뼈의 저택에 있는 모두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강의를 하면 할수록 점차 사람들은 내가 선 강단쪽으로가까워졌다.
부담스러울 만큼.
"여러분 조금 뒤로 가 주실래요? 너무 가까운데요?"
"아..! 죄송합니다!"
그들이 뒤로 두 걸음 이동할 때였을까, 뒤에서 화난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안보여! 비켜!"
그러나 인파는 그리 간단히 물러날 정도가 아니었다.
잔뜩 심통이 난 삐삐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온 몸으로 '나 삐쳤다' 하고 있으면 나는 강의를 멈췄다.
"거기 안경쓰신 분, 뒤로 가세요."
어느새 강의를 듣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세미나 실에서 회의를 하던 사람들이나 아래 생활관에서 쉬던 사람들도 소란스러운 현장에
얼떨결에 끼어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펜을 잡은 것인지 머리가 부스스한 사람, 아직 잠이 덜 깬 사람들도
함께 자리에 뒤섞여 있었고, 덕분에 나중에 합류한 사람은 이 강의가 왜 시작된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로
그저 앞으로 앞으로 나아온 것이다.
그제서야 강의의 흐름이 자신 때문에 끊겼다는 것을 깨달은 안경쓴 남자는
머뭇대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 앞으로 걸어가 볼이 빵빵해진 삐삐를 안아들고 다시 앞으로 돌아왔다.
"거기 의자 하나만 가져다주세요."
그 말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빠르게 내 앞으로 의자를 전달하는 모습이 보였고
강의에 홀리듯 착석했던 사람들은 그제서야 나와 삐삐를 발견했다.
"자, 다시 소개를 해야겠네요. 제 이름을 엘라 세리타인이고요,
여기 있는 아이는 제 딸 앨리스 삐삐 세리타인이에요.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여러분들 앞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지만,
본 목적은 딸아이 공부에요. 여러분들께서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강의는 2시간 하고도 40여분 가량 이어졌고, 삐삐가 꼬박꼬박 졸기 시작할 때 끝이 났다.
간단하게 문자의 정립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뿐인데, 앞에 앉은 청중이 학자들이다 보니
확실히 질문의 질이 높았다. 나중에 가서는 삐삐가 이걸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될 정도였는데,
이해를 못했다면 몇 번 더 가르치면 될 일이니 나 역시도 막막한 심정이긴 했지만
어떻게든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강의를 마쳤다.
삐삐는 의자를 두개 정도 이어붙인 간이 침대에 뉘이고 그 뒤로 몰려오는 학자들의 질문공세를 받아내야 한 나는
결국 '질문은 수업시간에만' 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잠에서 깰 쯤 칭얼대던 삐삐에게 누군가가 해조류를 말려 튀긴 것을 건넸다.
삐삐는 기분이 좋아져서 쪼르르 내게 달려왔고 나는 삐삐와 함께 그걸 먹었다.
삐삐는 맛을 좋아하는건 아닌 것 같았지만 바삭바삭 부서지는 식감이 재미있었는지
한참을 바삭바삭한 튀김을 먹다가 물었다.
"마마, 삐삐 반짝반짝 언재까지 해?"
"왜? 힘들어?"
"아니? 근대 삐삐 좀 심시매. 반짝반짝 하면 꽉이야."
나는 삐삐를 쓰다듬어주고 가방에서 유모차를 꺼내주었다.
"그럼 여기 들어가서 좀 잘래?"
"아라떠! 마마 채고야!"
삐삐는 유모차 속으로 들어가서 쉬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와서 내게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물론 그 안에는 거나시스도 끼어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이제서야 인사드립니다 무령님."
그들이 조용히 그렇게 인사하면 나는 손을 절레절레 휘저었다.
"아뇨, 뭐 그런 대접을 받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요.
여러분이 삐삐 먹을 것도 잘 챙겨주셨으니까 괜찮아요."
"조금 더 조사를 하다보니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이 저택에 있는 서적의 상당수는 과거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제 이야기도 있었나요?"
"이제껏 몰랐던 부분이 아까 강의를 들으면서 해소되는 바람에 말이죠.
사실은 한편으로 정말 놀랐습니다.
이제껏 조사했던 내용들이 한 점을 중심으로 맞아가기 시작하고
그 축이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죠."
"지금은 그냥 애 엄마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이 많은 학자들을 가르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니까요.
아직 저택의 모든 서적을 조사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히 빠른 속도로 연구에 진척이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녀로 살아오셨던 순간의 역사도 이곳에 적혀 있습니다."
한 학자가 책을 들고 말했다.
책에는 큼직하게 '마법연구의 발달과정'이라고 적혀있다.
"마법 연구의 발달 과정?"
"이 책은 이제까지 고작 2장까지 겨우 해석한 정도였습니다.
1장에서는 마법 연구의 기원을 다루는 내용이었고,
2장에서는 마법연구가 어떻게 발달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분화 과정을 다루고 있지요."
"그래서요?"
"2장에 등장하는 주된 개념이 바로 연금술과 마녀입니다.
마법의 주된 틀이 잡히기 이전에 마녀와 연금술사, 그리고 이들을 사냥하는 과정에서
신성마법이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하거든요."
"질리게 보셨겠네요. 나름 저도 그정도면 유명인이죠?"
"하하... 네, 그렇습니다."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들과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세미나실을 한칸 빌려 그곳으로 유모차를 끌고 들어가면
그 뒤로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다.
"혹시 뼈의 저택에는 어쩐 일로 오신건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뭐 말 못할 것도 없죠. 사실 개인적으로 조사하고 싶은게 좀 있어서 왔어요."
"개인적으로 조사하실 것 말입니까?"
"네, 아까 보니까 역사 위주로 연구하시는 분들 같던데 맞나요?"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바라보고 나서 나도 흐뭇하게 웃었다.
"혹시 도르테우스의 제단에 관련된 연구를 하신 분은 계실까요?"
내 질문에 그들은 하나같이 표정을 구기고 잠시 침묵했다.
나 역시 그들의 표정을 보고 심상치않은 주제임은 짐작했지만 여기서 물릴 수는 없었다.
잠시 침묵이 내리 깔렸을 쯤, 한 명이 무거운 입을 떼고 말했다.
"도르테우스의 제단은 세상의 끝을 부르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끝을 부른다고요?"
내가 되물으면 뒤에 서 있던 늙은 남자가 먼저 입을 연 학자를 조용히 가로막고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긴장한 것 같은 학자가 우물거리다 말했다.
"하지만 이 분 께서는 아셔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숨길 정보도 아니었잖습니까?
결국 누군가는 알려야 하는 일입니다.
이 세계가 그 제단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 말에 늙은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나가있게. 거나시스, 이 친구들을 데리고 먼저 밖에서 기다려 주겠는가?
나는 에리아 무령님과 이 젊은 학자의 이야기를 지켜봐야겠는데."
"그렇게 하십시오."
거나시스는 머리를 짚으며남은 인원을 통솔해 세미나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 늙은 남자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를 빗어올리고 말했다.
"저는 데이비라고 합니다. 이 친구는 프란 테르도라고 하는 녀석이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테르도 가의 독자 프란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숙인 머리에서 머리 전체를 덮다시피 한 모자가 툭 떨어졌는데,
그 모자를 벗은 얼굴은 상당히 독특해보였다.
겉보기에는 성별을 짐작하기 어려운 중성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는데,
학자라는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모습이었다.
귀에는 멀쩡한 부분이 없을 정도로 피어스가 난자했고,
코에도 뚜레라고 부를 만한 피어스가 있었다.
그럼에도 인상은 상당히 차분해보였는데, 머리는 빡빡 민 상태에 옆머리에 스크래치를 냈다.
그럼에도 차분하고 성격이 무거워보인다는 점이 제일 큰 미스터리였다.
"실례했습니다. 흠흠..."
그렇게 말하고 다시 모자를 쓴 그의 뒤에서 데이비가 말했다.
"이 친구는 어릴때 미리타엔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정확히 말해서는 남치당했다고 보는게 합당하겠군요.
그 당시에 지금 보시는 것처럼 귀에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상처를 입었던지라,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피어스를 달았습니다."
그제서야 다시 바라보니 귀와 스크래치가 긁힌 머리의 흔적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하하... 어쩌다보니 개에게 물려서요. 그 당시의 제가 6살이 조금 넘은 상태였으니
분명 당시의 저에게는 치명적인 상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네 뭐 괜찮아요. 그나저나 세상이 제단으로 유지된다는 건...?"
내 질문에 데이비가 말했다.
"혹시 도르테우스의 권능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권능이라면 알아요."
그는 양 손을 깍지 낀 채로 조용히 턱아래 받치고 외투 앞주머니에서
단단한 나무로 만든 파이프를 꺼내 물었다.
담뱃잎은 들어있지 않았으나 입에 무언가 물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모든 세계와 차원을 구별하는 자인 만큼 그에게 가해지는 부담 역시 적지 않았겠죠.
그러나 이 세계의 차원은 그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것일 겁니다.
그의 아들이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데이비는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권능은 차원을 다룹니다.
그 차원의 경계선에 존재하는 것이 말뚝이라는 설이 있지요.
설이라고 하기야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도 하고요.
제단이 무너지면 다차원의 세계들이 섞이고 만다는 이야기 역시 있었으니까요."
프란이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말했다.
"결국 도르테우스가 총괄한다고야하지만, 만약 그 제단의 전설이사실이라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 자체가 큰 위험입니다.
그래서 학회에서는 처음 제단의 정보를 발견했을 당시 허구로 취급하고
이를 알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게 아직까지 이어진 것이고요.
아무래도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수차례 있었던 모양입니다."
"과거라고요?"
"프란!"
프란의 입을 막으려는 것처럼 화를 낸 데이비도 그의 입을 막지는 못했다.
프란은 어색하게 우물대다가 작게 말했다.
"이제와서 뭘 더 숨기겠습니까."
그들이 결국 고갤 떨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의 비극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모르던 과거의 이야기는 아직 많이 있었음을 다시금 짐작하게 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인간의 기준으로 바라본 역사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또 하나의 과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