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다른 전쟁
* * *
"혹시 엘프의 기원이라고 아십니까?"
"엘프요?"
내가 되물으면 프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고 데이비는 푹 한숨을 내쉬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엘프는 천사의 자손이라고 하지요. 반대로 오크는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고요."
"네...?"
"역시 반응을 보아하니 잘 모르시는군요. 엘프의 기이한 자존감의 원인은 거기 있습니다.
천사의 후손으로서 그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인간보다 신에 가까운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마력을 다루는 것이 인간보다 익숙한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런..."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엘프는 타천의 결과물이니 타락한 존재라고 볼 수 있지만요.
천사는 예로부터 수명에 끝이 없으며, 하늘에 가까운 자라고 했습니다.
즉, 번식행위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그러니 엘프라는 것은..."
"쾌락에 영생을 팔아버린 타천의 결과물이라는 거겠네요?"
"네. 엘프는 인간과 천사의 사이에서 나타난 신 종족입니다.
그래서 수명이 인간에 비해 월등하게 긴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럼 그게 엘프의 역사인 건가요?"
"그렇습니다. 엘프의 역사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입니다.
천사는 남성이 없다고 하지요. 그 때문에 결국 천사들은 대부분 타락하게 되고
순수한 천사들은 인간들과 거리를 둔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것도 인간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지만요.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언젠가 본인들이 다시 완전한 존재가 될때 맞이하러 온다고 했다나요."
"그래서 그게 어떻게 도르테우스의 제단과 관련이 있는 거죠?"
"엘프만 있었다면 그랬겠지요."
데이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방에서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노트를 꺼냈다.
그걸 내게 넘기면서 그는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 악마 역시 인간과의 자손을 낳았습니다.
이 또한 수많은 악마들을 죽게 만들었지요.
그 당시 다르말록의 영향 아래 있었던 인간들이 무차별적으로 악마를 사냥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과정중에서도 생존하는 자손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깝게는 악마,
멀게는 오크까지 세분화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나는 그가 준 노트를 펼쳐보았다.
그 노트에는 내가 묻고 싶었던 것들이 적혀있었다.
제일 시선을 끌었던 것은 다름 아닌 책의 방식이었는데,
어느 시대에 이 책이 남겨질지 모를 것을 염려해서인지 그림책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 같았다.
악마와 인간의 번식. 현 시대에 보이는 저열하고 추악한 쾌락을 형상화한 그 외설적인 그림의 중간에는
어째선지 익숙한 얼굴이 섞여 있었다.
"이건..."
"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가운데 있는 것은 다르말록입니다.
다르말록은 인간의 번식을 주도하고 악마들이 인간과 섞여들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다양한 악마들이 태어난 것이지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은 확실한건, 그는 인간을 그저 소재로써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더군요."
악마는 모두 남성뿐이었다.
아마 천사가 그랬듯 악마 역시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남성으로 태어난 자손은 오크, 혹은 고블린 따위의 생물이 되었고,
여성으로 태어난 자손은 서큐버스 따위가 되어 사라져갔다.
하지만 다르말록의 계획만큼 악마들은 번식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그것은 악마의 지도자였던 최초의 악마가 공석이 되어
그 자리를 대체할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해야 했기 때문이었고,
이 때문에 순혈 악마들은 자신의 힘을 키우는데 집중했지,
번식경쟁에 뛰어들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과의 교접이 가능했던 악마는 주로 약하거나 지능이 부족한 개체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대다수는 자손과 함께 사냥꾼들에 의해 토벌당하고 말았다.
고블린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고, 우월한 번식력을 통해 번져나갔고
오크는 집단을 이루어 오르그라는 지역으로 넘어갔다.
그곳은 오크를 위하여 준비된 땅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엘프는 자신들의 뿌리가 차별화되었고, 본인들이 특별하다고 여기게 되었고,
오크들은 태어난 것을 저주하는 종족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악마는 인간을 피해 숨어들더라도 계속 지상에 남아 섞여들며 그들을 구경하는데 비해
천사들은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를 혐오하여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으니
엘프들은 의지할 대상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자신들의 부족을 만들고 그 거주지에 맞춰 진화하기 시작했다.
엘프가 빈 구역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오크는 인간들에게서도 엘프에게서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하게 된 것이 도르테우스의 신화였다.
차원을 관리하는 그의 제단이 사라지면 이 세계에서의 모멸이 없는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그들을 과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의 첫 번째 위치가 이곳입니다."
데이비가 그렇게 말하고 바닥을 신발굽으로 두번 두드렸다.
"네?"
"오크와 엘프는 이곳을 접전으로 두고 싸웠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엘프들이 죽었습니다.
무차별적으로 말이죠.
그 전쟁에서 주력했던 것이 바로 인간 엘프 연합군이었습니다.
물론 성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실패했다는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배신을 했다고 하더군요.
애초에 인간이 엘프의 손을 잡고 군을 결성했던 것 자체가
이단을 척결하는 과정중에 더 위협적인 적을 먼저 처리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 엘프들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로 감정의 골이 깊어져
결국 연합이 와해되고 말았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크들이 이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엄청난 수의 엘프들을 오르그로 끌고 갔던 겁니다.
엘프들은 노리개로 쓰이다 버려져 객사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고 하고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프란이 그의 표정을 잠시 살피는가 싶더니 대신 대답했다.
"데이비 선생님께서는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지만 엘프의 후손이십니다.
더 정확히는 엘프와 인간의 혼혈이시죠. 엘프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희석되긴 했지만요."
"정확히는 증조할머니까지는 엘프셨지요.
아직도 살아계시지만요. 노인네가 나이도 들어차는데 아직도 정정하셔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쓱한 듯 고개를 저어보인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 건가요?"
"어... 음... 그...."
프란이 말끝을 흐리면 데이비가 말했다.
"그 전쟁에서 연합군이 패배한 후에 엘프들이 단지 오크에게만 끌려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만 알아두시면 좋겠군요."
"아..."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하튼 그렇게 수차례의 전쟁이 반복되었습니다.
오르그에서는 마땅히 농사를 포함한 채집및 수렵활동이 어렵습니다.
땅이 척박하고 대다수가 붉은 암석지형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오크들은 꾸준히 엘프들이 거주하고 있는 구역을 침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전쟁에 지친 엘프들이 따로 도망쳐나와 떨어진 것이 지금의 하이엘프가 되었다고 하지요."
"그렇군요..."
"그리고 4차 전쟁에서 엘프가 칼을 빼들고 먼저 습격을 강행했어요.
이제껏 습격을 일방적으로 막아내기만 했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라고 평가합니다.
오크들 역시 그 습격을 대비하지는 못했습니다. 엘프들이 선제 공격을 하리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겠지요.
이 당시 오크들은 상당히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가뜩이나 그 시기는 겨울 쯤이었던지라 오크들은 식량이 없는 상태로 엘프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고요.
그리고 그 당시 엘프들을 지휘하던 것이 말라세라는 엘프였습니다.
상당히 전략적이고 강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제껏 없던 방식의 무기를 새로 들여왔고, 전법을 구사하기 시작했으며
엠브락시아 전, 첼네아르 전, 만그리타 전을 내리 승리로 이끈 주역입니다.
결국 만그리타 전에서 사망했지만요."
"말라세...?"
"네, 인간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엘프였습니다.
만그리타 전에서 오크의 전략에 당해 역으로 포위당한 상태로 군량이 고갈되었던 상황에서
무려 3주를 버티면서 공격을 저지했고, 단신으로 길목을 막아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주로 사용하던 검이 부러지는 바람에 주변의 전우의 사체에서 수급한 단검으로 싸웠다고 하더군요.
결국 엘프들이 퇴각할 때까지 그 길목에서 온 몸에 화살을 8대나 박고 버텨냈다더군요."
"그렇군요."
"분명 그 이전의 기록을 찾아보면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는데
갑자기 어째서 참전한 것인지는 여전히 불명입니다."
"이유가... 있었겠죠..."
나는 그렇게 수긍하고 말을 흐렸다.
"그게 못해도 수백년은 지난 이야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만,
그럼에도 흥미로운 역사임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엘프와 오크의 전쟁의 역사를 조사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던 연구자가 이 저택을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이 저택 근방에서 머물던 오크에게 자문을 구해 그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참 오크들도 엘프들도 처절하게 살았네요."
"그렇게 보실 수 있겠죠."
프란은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도르테우스의 제단이 이 저택 지하에 있다는걸 알아낸 연구진들은
바로 지하를 폐쇄했다고 하는군요.
이 세상의 경계를 무너뜨려서는 안되기 때문에 라는 이유에서죠.
결국 모든 경계가 무너지지 않으면 안전하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또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단순하지 않다?"
데이비가 프란의 머리를 탁 하고 떄리며 말했다.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 다 털어놓으라고 이 자리에 남겨둔 것이 아니다 프란!
제발 그 말의 무게를 좀 깨닫거라.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이거늘..."
"그게 무슨 소린데요?"
"그 말대로입니다. 프란이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가설중 하나일 뿐이고요.
어쩌면 제단은 그저 형식일 뿐이고, 이미 부서진 제단이 존재할 때마다
다른 차원과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는 이론입니다.
상식상으로도 그게 맞기야 합니다만, 아직 확정된 사항도 아니거니와
교회에서도 엄격히 외부로의 노출이나 발설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이제 인정하십시오! 도서관의 존재도 이미 드러난 상태가 아닙니까?"
"아직 일부일 뿐이다! 도서관이 만일 엘프와 오크의 귀에 들어간다고 하면
너는 그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그때가 되면 우리의 힘으로는 막아낼 수가 없단 말이다!"
도서관. 또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플로라가 말했던, 그리고 류해백이 말했던 도서관의 존재가 여기서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것이
나는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는 않았지만 그 존재를 묻지 않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도서관이요?"
"프란, 닥쳐라. 이 이상은 안된다."
"하지만 선생님...!"
프란이 반발하려고 하면 데이비는 그를 노려보며 덧붙였다.
"이 건에 대해 입을 열면 널 파문하겠다.
오늘 네가 생각없이 뱉은 말이 흘러가면 얼마나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지 진정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우리 앞에 있는 분이 어떤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
어떻게 학문에 도움이 될지 모르기에 흥미가 가는 것은 나 역시 동일하단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털어놓아도 될 정보가 아니었단 말이다 네가 입에 담은 것들은!
이 주둥이! 주둥이를 제발 가만 두지 못하겠느냐!"
"스승님... 언제까지... 언제까지 그깟 교국에 휘둘리실 겁니까?
학문이 종교에 얽매여선 안되는 것 아닙니까?
고작 배움에, 진실 몇 개에 휘둘릴 종교라면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 아닙니까?"
"이 새끼가..!"
데이비는 혈압이 상당히 올랐는지 주저앉아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그제서야 프란은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또 교회군요?"
결국 이 모든 역사의 통제를 교회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아르간티아만이 아니라 도르테우스도, 이 역사와 대지 자체를 종교를 이유로 통제하려는 그 태도가
나는 너무나 싸가지 없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화 안나세요?"
데이비는 완전히 구겨진 얼굴로 대답했다.
"나기야 합니다. 연구를 제한당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흠..."
"왜... 왜그러십니까?"
"아니요, 아무래도 정의의 에리아 펀치가 필요한 순간이 아닐까 싶어서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