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 주인
* * *
이제 대강 알았다.
도르테우스의 제단을 왜 셰릴 린이 찾으려고 하는 건지를.
그리고 왜 피드 린이 그걸 돕고 있는건지도.
"아무튼 무령님께서도 이 일은 함부로 어디 가서 이야기하고 하시면 안됩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이 일이 알려지면 교회도 교회지만은 일단 사회가 혼란스러워 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막을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유의할게요. 가능하다면 도서관에 대한 정보를 얻었으면 좋았겠지만요."
내 말에 프란이 흘끔 데이비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가 데이비가 다시 그를 째려보면 바로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괜찮았다. 이건 이제 제인에게 부탁해서 생쥐굴의 힘을 빌리면 되는 문제니까.
"아무튼 우선 비밀로 해 주신다니 안심은 됩니다. 참..."
"도서간? 비미리야?"
그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은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천진난만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암막으로 덮인 유모차 안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목소리가 들리면
데이비는 눈을 망연히 하늘로 올리고 넋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맙소사... 주여..."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모차 안에서는 밝은 목소리만 나온다.
"마마, 삐삐 나가두대?"
"왜, 답답하니?"
"응. 여기 이제 꽉이야."
그럼 나올때 엄마가 뭐 하라고 했지?"
"반짝반짝 해야대."
"잘했어."
폴리모프를 한 삐삐가 암막을 손으로 들추고 나오면 데이비가 물었다.
"이 아이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앨리스 삐삐 세리타인이요."
언제까지 삐삐로 부를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새로 지었다.
삐삐는 미들 네임으로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나름의 작명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El Vloffnig'r Estro 와 Ella Serityne.
그럼 당연히 딸인 삐삐도 엘이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앨리스로 정했다.
Alice는 철자가 다르지만 세세한 부분은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 앨리스야, 지금 들은 건 절대 비밀이란다. 알겠니?"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삐삐를 설득하는 데이비가 허무해질 정도로 삐삐는 경쾌하게 말했다.
"삐삐는 삐삐야. 그치 마마?"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삐삐도 맞고 앨리스도 맞아."
삐삐는 잠시 가만히 멀뚱멀뚱하다가 고개를 꺄우뚱하고 대답했다.
"왜?"
"삐삐는 친한 사람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알겠지?"
"왜?"
"삐삐라는 이름은 귀엽긴해도 언제까지 쓰기는 좀 그렇잖아?"
"왜?"
나는 그제서야 왜의 지옥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삐삐는 한참 많은 것들이 궁금할 시기였다.
"삐삐라는 이름은 특별하니까? 아무나 막 부르면 아깝잖아?"
"글꾸나!"
삐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안뇽 아지찌. 삐삐는 앨리쑤야."
"그래 앨리스야. 아무튼 여기서 들은건 비밀이니까 어디가서 말하고 그러면 안된다?"
또 갸우뚱.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삐삐는 역시나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왜?"
"어...."
데이비는 착잡한 표정을 하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런걸 어디 가서 함부로 말하게 되면
사람들이 그 정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건 당연한 거잖니?"
"왜?"
"으으... 그러니까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정보잖아?"
"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니까...?"
"왜?"
"스승을 브끌스 이뜨느끄...?"
"그르끄느..."
"후우... 앨리스야... 이 악무는건 따라하지 않아도 된단다...."
"왜?"
더 하면 진짜 울 것 같은 데이비의 표정을 보고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삐삐에게 말했다.
"삐삐야."
"응?"
"비밀로 하기로 엄마랑 약속할래?"
"왜?"
"사탕 줄게."
"지뽀는?"
"쥐포도 사줄게."
"약쏘기야?"
"그럼~"
"구래!"
삐삐는 까르륵 웃으면서 기뻐했다.
"됐지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데이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 뭔가 해결이 되기는 한 것 같은데 지금 그 자신만만하신 표정은...
묘하게 기분이 좋지 않군요."
"육아는 아직 서투르신가봐요?"
"흐...흐흐... 으즉 득싄의르스...."
"어머? 저한테 이 악무셔도 되나요?"
"하...하하.... 제가 언제 이를 물었다고 그러십니까..."
프란은 그런 스승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세미나실에서 나왔다.
거나시스와 그 동료 연구자들은 문 앞에서 우리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상당히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야기는 다 끝나셨습니까?"
"그렇지. 무령님, 오랜시간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동료들이 왠지 그의 얼굴이 더 지쳐보인다고 말하는걸 들으면서
나 역시 유모차를 끌고 지하 생활관으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연구과제를 붙들고 충혈된 눈으로 미친 것처럼 자료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게 달려오더니 물었다.
"선생님,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아무리 해석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읽는 법은 알았는데 도대체가 이 '원상복구의 피폐론'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원상복구의 피폐론이요? 그럼 연금술 연구하시는 분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연금술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거 그거일걸요? 재료 A를 B로 환원하면서 순수하게 화학식만 가지고 물질 변화가 어려운 경우
마력으로 보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미세하지만 물질 자체에 변화를 주기 때문에
원래 상태와 똑같은 물질은 아니게 된다는 이론이요.
이게 분명 원래는 환원 구조이론이라고 했던 건데, 아... 그 새끼 그거 이름이 뭐더라...
겉멋만 잔뜩 들어서 어떻게든 이름을 멋있게 해야 된다고 했던 애가...
아, 브롬파르브. 브롬파르브였을거에요."
"책에는 브롬바르프라고 써 있습니다."
"아 걔가 그런 이름이었나. 별로 안친해서."
"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여기 와서 자기소개만 몇 번을 하는건지 모르겠네요.
엘라 세리타인이에요. 세간에서는 에리아라고 불리고 있고요."
"아...! 마ㄴ...흡...!"
"아, 뭐 괜찮아요. 맘에 들지는 않는데, 다들 그렇게 기억하더라고."
"죄송합니다..."
"알려 줬으니까 이제 나와줄래요? 나도 좀 쉬려고 하는데."
"아, 들어가시죠."
의외로 지하에는 상하수도 시설부터 쉼터까지 생각보다 잘 구현되어 있었다.
다만 삐삐가 가지고 놀 만한 물건은 딱히 없어서 삐삐가 지루해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마냥 또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이고 삐삐야! 책으로 도미노를 하면 안돼!"
"삐삐야!! 책으로 성을 쌓아도 안돼!!"
"삐삐야아아!! 책으로 탑 쌓지마!"
"삐삐! 책 던지지 마!"
지루할 틈이 없어서 오히려 문제였다.
사방이 책 뿐이면 공부에 흥미를 좀 붙이려나 했더니
애들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것 같았다.
"삐삐. 가만히 앉아있어."
"왜?"
"엄마 화났어."
"마마 하내지마... 그럼 늘거..."
"엄마는 안늙어. 아니 대체 얘가 어디서 이런 말을 배운거야?
삐삐 가만히 앉아있어. 책 읽으면서. 아니면 책 가져와. 엄마가 읽어줄테니까."
"구래."
삐삐는 도도도 뛰어 어디론가 가서 책을 집어들다가 한 학자와 대화를 시작했다.
"안뇽!"
"하하, 그래 꼬마야. 안녕? 많이 컸구나?"
"꼬마 아냐! 삐삐는 앨리쑤야!"
"앨리스? 그래, 앨리스 안녕."
"아이 자래따... 차칸 아찌네..."
삐삐는 그렇게 말하며 학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삐삐야!!"
나는 화들짝 놀라 삐삐를 안아들었다.
"아휴, 죄송합니다... 애가 철이 없어서..."
"아뇨, 애들은 그렇게 크는거죠.
저도 누구한테 칭찬을 들은지가 너무 오래된지라, 좀 반가웠어요."
"하하... 하..."
"아지씨가 조아해 마마."
삐삐야, 그래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그러는거 아니야."
"왜?"
칭찬은 원래 그런거야.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왠지 입이 턱 막힌다.
그러게? 왜지? 누가 칭찬은 그렇게 흐르는 거라고 가르쳤지?
"음... 사람에 따라 예의없게 보일 수 있거든...
일단... 그렇대...."
"삐삐 반네리 이모하구 배어써!"
"그럼 어떻게 해야해?"
내가 되물으면 삐삐는 차렷자세를 하고 서서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말했다.
"참 자랫쯉니다..."
그렇게 말하고 방긋 웃는 삐삐를 보고 젊은 학자는 방긋 웃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그는 서재로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맞다. 책... 무슨놈의 자료가 이렇게 알려진게 하나도 없고...
기밀도 정도가 있지. 이건 무슨 의도적으로 정보를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뭐야 이건? 누가 이렇게 비밀로 포장을 해둔거야?"
그리고 절대로 가볍게 흘려듣지 못할 말이 들렸다.
"도서간?"
공기가. 싸늘해진다.
아까의 세미나실에서는 단 네 명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도서관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변한다.
제각각의 판단을 마치고, 그 눈으로 나와 삐삐를 흩기 시작한다.
불쾌한 감각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들은 시선을 돌린다.
내게서, 그리고 삐삐에게서 뭘 본 걸까?
그 불길함이 무거웠다.
여기서는 어쭙잖은 변명은 오히려 독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실수로 말한 도서관이라면 무마할 수 있지만,
다 알 것 같은 사람이 도서관을 언급하는 것은... 무게가 다르다는 의미다.
"삐삐야, 그게 무슨 소리야...?"
"마마랑 아지씨가 그래쨔나! 도서간 비미리야!"
Holy.... Shiiiiiit....
내 나름의 수습 시도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것은 저 멀리서 이쪽을 맹렬히 바라보는 데이비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교국으로 향해야 했다.
그곳에서 모든 진실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도서관에 대해 증언할 사람을 구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한도 내에서 뭐든 좋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알려주실 분 계신가요?"
나는 먼저 이들의 정보를 얻고 싶었다.
어차피 글른 건 접어두고 더 나은 정보를 찾아내는 효율성이 필요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그 리스크를 먼저 질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면 거나시스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 저택의 규칙 3조를 기억하십니까?
[3. 다른 모든 연구자들의 연구를 방해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무령님의 말 한마디에 이 모든 사람들이 연구를 멈췄습니다.
방해...겠지요. 떠나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다시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거나시스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삐삐에게 칭찬을 들었던 젊은 학자였다.
"누구 마음대로라니! 이곳의 모두가 합의한 내용입니다!"
"집주인은 그런 허락 내린 적 없는데요?"
"그게 무슨 소린가!"
젊은 학자의 옷이 주변을 사르륵 풀어헤치고 장막을 치운다.
젊었던 인상이 변하고 마른 뼈가 그 피부 뒤로 드러난다.
"짜잔! 집주인 데릭 로드원입니다!
아직도 이 저택이 왜 뼈의 저택인지 잘 모르셨나보네요?
하긴, 서적들 해석도 제대로 못 하시던 분들이니까요.
누가 이 고서적들을 꾸준히 여기 모아두고 있었겠습니까?
누가 이 서적들을 날마다 정리하고 주석을 덧붙이고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이곳의 주인일까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육아를 그렇게 멋지게 해내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거든요."
"어..."
"저도 보람이 느껴집니다.
이 분위기, 오랜만이군요? 도서관? 도서관은 제가 아주 잘 알지요.
태초의 기록을 도르테우스가 온전히 관리하지 못해 발생하는 일시적 기록 분실현상.
다른 차원, 다른 세계의 누군가가 차원과 시대를 넘어 다른 세계를 체험하는 현상.
시대를 관찰하고 눈 앞에서 소통하지만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영원의 체험!
그것이 도서관입니다!"
"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제 집에서 별 같잖은 규칙 만들어 붙이면서 스터디 하시는건 그러려니 하겠는데요.
다 큰 어른들이 어린 애 하나 못 잡아서 안달인 눈들을 하시면 보기 상당히 추합니다.
자중하시죠. 이 자료들은 이미 자 따로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두겠습니다만,
앞으로는 자료의 갱신은 없을 겁니다.
아직 못 적은 분량도 상당하긴 한데, 그런거 배워서 어디다 쓰시겠어요?
이런 어린 아이 하나 못 잡아서 안달이신 분들이.
오랜만에 집에 와서 좋은 구경 하고 갑니다. 좋은 정보도 얻었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ㅈ...잠깐! 우리가 잘못했네! 아니, 잘못했습니다!
대인! 데릭 박사님!!"
그들은 보물을 손 앞에서 놓친 이들처럼, 실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규칙같은건... 없었다네요? 그럼 저도 조금만 민폐를 부려볼까요?"
나는 봐둔 책의 제목들을 빠르게 흝어 마법으로 내 가방 안으로 차곡차곡 넣은 후에
유유히 저택을 걸어나왔다.
"자신 있으면 따라오셔도 됩니다. 미움받는게 익숙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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