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옛 것은 묻어야 하는가
* * *
뼈의 저택을 나오면 내 뒤로 거나시스와 데이비가 있었다.
"저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거나시스가 내게 물었다.
"글쎄요. 하던대로 하세요. 하던대로. 아실 거 아니에요?
고작 하루만에 뭐가 많이 달라지고 그러진 않을테니까."
"아뇨, 달라졌지요. 저 학자들을 보십시오. 하루만에 한달음 진리에 가까워진 저 얼굴들을.
기대로 가득차버린 얼굴들입니다. 저 희망을 부디 꺼뜨리지 말아 주십시오."
"음... 저는 아르간티아가 아니지만, 그래도 만약 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한번 성공을 잡을 뻔 한 사람이 과연 포기할까요? 저 학자들은 아마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약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저는 프란을 보면서 그걸 느끼기도 했고요. 저 사람들의 가능성을 절대 낮잡아보시면 안돼요."
"프란...이..."
"하실 수 있어요. 그런 분들이시리라 믿고요.
뭐, 저야 필요한건 다 알았으니까 이만 사라질게요.
여러분들의 조항에 따라서요. 뭐 책을 가져가는 입장에서 당당하니까 좀 그렇긴 한데.
언젠가 알게 되실 겁니다. 종교 아래에 지식이 묶여있을 수는 없다는걸."
나는 삐삐를 쓰다듬었다.
"할부지 안뇽!"
삐삐는 폴짝 뛰면서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들도 멍하니 삐삐를 바라보다가 허탈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돌아가세 거나시스. 하던거 계속 해야지."
"그래. 답잖은 짓을 했구만."
"다만 아까운건 저런 분이 학회에 들어오시지 않았다는 걸세."
"아쉬워할게 아니야. 우리가 만들어내야지. 그런 인재를."
"그래. 그래봐야지."
그들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주변의 흙먼지 날리는 사막의 돌 위에
작게 마법진을 새겨넣었다.
언제든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저택의 연구 자료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하에 있다는 제단을 언제 그녀가 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쪽의 마운틴 엘프의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분명 그곳에는 미리타엔의 상담소로 이어지는 전이문의 마법진을 그려두었을 텐데
누군가가 훼손하지 않고서야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아함을 가지고 마법진을 새긴 숲으로 돌아가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익숙해보이는 물체가 보였다.
마법진을 그렸을 장소. 그 위에 무언가 덮였다.
낙엽과 갖은 풀 따위가 쌓인 아래에서는 딱딱한 것 같지만 아직 말캉한 것이 있었다.
사람? 아니... 그건 엘프였다.
다 죽어가는 엘프의 노인이었다.
내가 그린 마법진위에 쓰러진 것은 분명 시도라였다.
이미 의식이 없어 보였는데, 아마 죽기 직전까지 다친 것 같은 모습에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이래서 마법진이 작동을 안했구나."
시도라의 피가 번져 마법진이 얼룩이 되어있었다.
게다가 손톱이 깨지도록 마법진이 쓰인 돌판을 긁어댄 것 같았다.
이미 돌가루가 잔뜩 끼어 피가 흐른 손톱과 손가락은 그녀의 처절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죽었나..."
내가 그녀의 맥을 짚으면 아주 미약하게 맥이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곧 꺼져갈 것 같은 미약한 숨이었다.
등에서 관통당한 것 같은 치명상으로 인해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 같았다.
나는 마력을 끌어 그녀의 끊어질 것 같던 숨을 하나씩 이어붙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녀의 맥박을 돌리기 위해 마력을 불어넣으면
거죽같이 말랐던 뺨 위로 주름진 눈가에 한방울 눈물이 흐른다.
"오... 당신이군요..."
"왜 이런데에 누워있는지부터 궁금한건 많지만, 일단은 쉬고 있어."
나는 그녀를 들쳐메고 주변을 흙벽으로 두른 후에 바닥에 훼손된 마법진을 손봤다.
미리타엔으로 이어지는 마법진이 다시 그려지면 나는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무령님? 왜 벌써 오셨어요?"
발레리아가 그렇게 말하려다가 멈칫 하더니 쓰러진 시도라를 보고 곧바로 침대를 비웠다.
"자꾸 사건이 생기니 지루할 틈이 없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시도라를 눕히고 포션을 여럿 제조해 먹이고 부어주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그녀의 고통스러운 숨이 안정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그녀는 잠에 들었다.
엘프의 질긴 생명력으로 인해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던 것 같지만
문제는 그런 자잘한 부분이 아니었다.
"문제는 척추네. 뒤에서 습격당한 정도로 생각했는데, 아니야.
저건 마력회로를 노린거야. 정확하게 12번 척추를 부숴놨어.
제대로 서지도 못하겠네. 게다가, 앞으로 마력을 다루지도 못할거고."
"이번에는 또 어디서 데려 오신 건가요."
"엠페레스 동부 마운틴엘프의 땅에서."
"그런가요. 그래도 다행이긴 하네요.
무령님께서 점점 이 곳을 집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요."
"보통은 다치지 않았다고 걱정하지 않아?"
"안다칠걸 제가 아는데요."
"그래... 그리고 여길 집이라고 생각해서 온 게 아냐.
네가 있으니까 온 거지.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죽어서도 내 옆에서 벗어날 생각 하지마. 나도..."
까드득 이가 갈렸다.
"두 번은 없어."
내 말에 잠시 멍 한듯 나를 바라보던 발레리아는 픽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래야죠. 아무래도 저는 엄청난 블랙기업에 취직한 모양이네요."
"블랙이지. 근데 언제 이 나라에 화이트가 있었나?"
"이 나라에 화이트가 있으면 아마 그 곳이 제일 위험하겠네요."
"삐삐 아라! 불랙! 까망이야!"
"네. 맞아요 삐삐. 오랜만에 돌아왔으니까 같이 공부나 하러 갈래요?"
"공부.... 윽... 마니핸는대..."
삐삐는 철푸덕 손님용 테이블 위에 엎어진다.
"발레리아, 나는 한동안 저 엘프 간호를 좀 해야겠는데,
오늘 내일 이틀간은 공부 좀 쉬고 애 좀 놀아줘. 네가 읽을 서적은 따로 네 방에 둘게.
삐삐 상으로 삐삐 사탕 5개랑 패패루 포 3장 정도만 줘.
그리고 장 보고 오는 길에 쥐포도 부탁할게."
"네. 맡겨주세요. 그나저나 쥐포는 왜... 맥주를 사 올까요?"
"아니, 삐삐가 좋아하더라고."
발레리아는 고개를 돌려 엎어진 삐삐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폴리모프가 풀린 용 상태였다.
긴장이 풀려 편한 모습이 된 것 같았다.
요 며칠 공부만 시키고 했더니 지친건지 새근새근 졸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삐삐를 조심스레 방에 눕히고
그 옆에 놓인 작은 가방에 사탕과 패패루 포를 넣어둔 다음,
장을 보러 갔다. 가방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있다.
[삐삐 안녕. 플로라 언니야. 삐삐가 가방을 좋아한다고 해서 언니가 가방을 준비했어.
특별히 튼튼하고 귀엽게 만든거니까 맘에 들어했으면 좋겠네.
다음번에 꼭 다시 보자.]
나는 가방을 한번 들어봤다가 놀랐다.
"내 것보다 고급이네."
샌들핀의 가죽을 가지고 만든 가방인데, 옆으로 매도록 만들어진 가방이다.
악어 가죽으로 만든 가방보다 4배 이상의 단가를 자랑하는 데다가,
모래는 물론이요, 방수처리도 되고, 먼지 하나 묻지 않을것이다.
강도는 말할 것도 없다. 색은 밝은 레드.
게다가 무두질을 어떻게 한건지 아주 가벼웠다.
어린 아이는 모르겠지만 패션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알법한 고급 브랜드.
볼라모 사에서 만들어진 제품.
게다가 버클 근처에 PiPi라고 쓰인걸 보면 모를 수가 없다.
플로라... 주문제작이라니... 돈 좀 썼구나...
다음날 아침은 꽤나 분주했다.
본격적으로 시도라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전체적으로 피부에 주름이 진 상태였고, 머리는 희끗해 푸석했다.
그러나 머릿결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한 것은 보였다.
아무래도 나이가 무심했던 모양이다.
몸 상태를 체크하고 있으면 어느새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녀에게 미리 준비했던 커피를 건넸다.
"여긴...?"
"우리 집이야. 다 죽어가기에 데려왔지."
"아... 하하... 감사... 합니다..."
"묻고 싶은게 많아. 이미 알고 있겠지만."
"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답해 드리지요."
"무슨...일 있었어...?"
"그냥, 생각이 변했을 뿐입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가 준 커피를 마셨다.
"그러니까 그 생각이 변하게 된 이유는 말해줄 생각이 없는거지?"
그녀는 울컥한 듯 눈물을 흘리더니 쿨럭였다.
입을 가린 손틈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그날이었습니다.
그 마법사가 돌아가고 나서 저는 부족들을 설득했지요.
분명 우리를 받아줄 곳이 있을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무른 생각이었던 것 같더군요."
"설마..."
"네, 저는 내쳐진 겁니다. 천신을 부족으로 모셔가지도 못했고,
우유부단한 판단으로 부족을 방해하던 주제에
이제와서 지켜오던 것들을 버리자고 말했으니 달갑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요.
저도 그 정도는 감안했지요. 상당히 인도적인 처분이기도 했고요.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으니 아마 잘 돌아갈 겁니다."
"그렇게 말할거면 적어도 인상은 좀 펴고 웃는 얼굴이라도 보여주던가.
질질 울면서 설득력이 퍽이나 있겠다.
커피보다 차가 낫겠네. 차 마셔."
"고맙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며 RIC9호를 건넸다.
속으로는 비릿하게 웃었다.
물론 피로 회복 용도로 건네기도 했지만 자백용도로도 효과가 있을 테니까.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은 차 같은걸 마시고 싶지가 않아서.."
그녀는 차를 밀어놓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혹시 정말 외람된 부탁이지만, 절 강하게 만들어주실 수 있습니까?"
"왜?"
그녀는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저를 따르던 아이들, 부하들, 가족들 모두가...아직 거기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할 정도면 부족에 문제가 생긴거 아냐?"
그녀는 그제서야 조용히 이불을 끌어올렸다.
"전 몰랐습니다. 부족에 대해 아무것도.
말라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엘프 부족이 아니었어요.
저였던 거죠.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 꿈을 보셨을 테니까."
"그래."
"전쟁 이후 말라세를 잃고 나서 그 부하들은 저 때문에 말라세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실제로 크게 다르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이제 저는 말라세의 후광을 업고
그들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있을 뿐이었어요.
제가 그 유지를 포기하고 말라세의 죽음을 헛되게 한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들은 부족을 스스로 관리하려고 했어요."
그녀는 등을 메만지고 피가 묻어나온 손을 바라보며 떨었다.
"그 아이들은 착한 아이들입니다. 저를 공격하지도 않았어요.
저에게 은퇴를 제안했을 뿐입니다."
"그럼 문제는?"
"그 아이들이 교국을 공격했어요.
순수의 폭포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요.
그리고 기어이 그곳을 점령했습니다.
좋았죠. 처음 며칠은. 교국에서 지원부대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그 팔라딘은 자비가 없었습니다 무참하게 동료들이 짓밟혔어요.
이제 겨우 숨어지내는 이들이 남았을 뿐입니다.
그 마법... 그건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부패. 썩어들어가는 마력이었다구요. 그 음흉한 웃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부패? 팔라딘이 썩어들어간 마력이라고? 그럴리가..."
"하지만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긴 머리를 뒤로 두르고 모노클을 낀 팔라딘을요. 기이하게 웃으며
선두에서 마력을 휘두르는 마른 남자를요..."
"말랐다고?"
"네. 말랐었지요."
"....."
"도와주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이제 저는 남은게 없습니다. 이미 그 남자에게 마력회로를 뭉개졌기도 하고요.
그가 제 마력회로에 담겨있던 마력을 빼앗았습니다. 동료들이 숙청당하는 와중에도
겨우 전 살아 도망쳤습니다...이제 다 됐으니까.... 부족을 도와주세요..."
"그럼 다른 동료들도?"
"도망친 이들을 제외하면 모두 마력회로가 망가졌습니다.
이제와서 도와주지 않으시리라는 건 알지만..."
"거래 하나만 하자."
"거래요...?"
"네 부족 엘프들. 전부 받아줄게. 미리타엔으로 편입시키자.
그 이후로는 어떻게 살던 관여 안해.
하이엘프들이 아라카스트에서 하던 것처럼 살아도 되고, 적응해서 살아도 돼.
자유 의지는 존중할게. 어때?"
"선택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탁드렸을 겁니다."
"좋아. 계약 성립이다. 일 처리 하러 가자.
아무래도 그 팔라딘이라는 사람. 나도 빚을 진 것 같아서 말이야."
하여튼 재수 없는 놈들이 한데 묶였으니 처리하기가 편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발레리아."
"네?"
"나 성에 다녀올게."
"성에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시켰다고 하고 애들좀 모아줄래?"
"애들이라고 하시면..."
"귀여운 대공이들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