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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07화 (207/303)

〈 207화 〉 마녀의 각성

* * *

"손이 보이는구나? 그렇게 느긋하게 정리하라고 이곳에 부른 것이 아니었을텐데.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하...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두터운 방 안에서도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지는 목소리.

그건 어느 귀족의 저택에서 있을 법한 일이었지

궁에서 있을법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나?"

"황제께서 왜 저러시는지 아는가?"

"오늘 '그' 날이랍니다."

"그 날? 그 날이 뭔가?"

"무령님이 오신다고 했답니다."

"참... 무령님만 아니시면 일도 잘하시고 성격도 좋으신 분이신데

이상하게 무령님 이야기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지신다니까."

"그 이야기 함부로 하지 말게나."

낮고 중엄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하인들이 화들짝 놀랐다.

그곳에는 붉은 피부를 한 거구의 오크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그들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게...비디 대공님...!"

"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런 말을 들으면서 게비디는 너그러이 웃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허리를 펴지.

나는 생명의 소중함을 아주 잘 아는 사람... 아니, 오크거든.

믿어줄지는 모르겠다만."

"믿습니다! 믿고 말고요!"

"그래, 수고들 하게."

게비디는 그렇게 말하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하인들이 숨을 고르면 그 뒤에서 한층 더 싸늘한 목소리가 들린다.

"너희 뭐야? 길을 막고 서있네?"

긴장이 풀어지기도 전에 뻣뻣하게 굳은 어깨가 삐걱대며 돌아간다.

그 앞에는 매끄러운 머리칼을 한손으로 쓸어넘기는 날카로운 인상의 여성.

엔시온 플라이트였다. 그녀는 가만히 하인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픽 쉬고 웃었다.

"그래, 아무리 궁이라고 해도 이런 떨거지들은 있기 마련이구나.

잘하라고. 잘. 열심히 하는 건 그닥 중요하지 않으니까.

이런 아무나 들어오지도 못할 곳에서 일하는 사람을 어중이떠중이를 쓸 수는 없잖아?"

"그...그렇습니다..."

"너 몸에서 에라옥신 냄새나. 궁 내에서 피우는거 불법 아니었나?

아, 네가 아니구나...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하하... 그렇게 하인들을 쥐잡듯 잡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능글능글한 실눈. 그리고 여유롭고 후덕한 분위기.

그러나 대비되는 어딘지 모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한 손에 짚고 중절모를 한 손으로 벗어 인사를 하는 중년의 남성은

데레코즈 로드원 대공이다.

"황제폐하께서 거하시는 궁에 이정도의 품격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궁에 에라옥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와? 기본적인 매너는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제 살냄새일 뿐입니다."

"으으.. 역겨워."

"너무 그러지 마시죠. 제 딴에는 나름 만회해 보겠다고 간식을 좀 만들어 왔거든요.

이번에는 특별히..."

"미안, 식사를 했거든."

"10시인데요?"

"아침을 늦게 먹었어."

"저번에 생선 회를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회를 떠 봤습니다."

"맛 정도는 볼게."

"감사합니다. 전 먼저 실례하지요."

그렇게 말하고 데레코즈도 회의실로 들어갔다.

하인들이 굳어있는 사이로 엔시온이 얼굴을 들이밀고 그들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잘들 해."

굳어있는 그들이 어떻게든 머리를 끄덕이면 그녀는 그들의 양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무령님만 남으셨군."

"그래도 그분께서는 성격이 좋으시니까..."

그들은 다시 문 앞에 나란히 서서 각을 잡고 대기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30분, 1시간, 그리고 1시간 16분이 지나고 나서야

왜 무령이 오지 않느냐며 문 안에서 성질을 내는 플로라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들은 빨리 무령이 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문 저 멀리 걸어오는 금발의 여성을 본 그들은 자신들이 한 생각을 모조리 철회했다.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문 열어줘."

분명 친절하게 말하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사고가 날 것 같은 얼굴.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회의실 내부로 들어가서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 그녀를 보고

오늘 무언가 터지겠구나 하고 하인들은 생각했다.

30분쯤 전이었을까.

에리아가 궁으로 떠나고 발레리아 역시 대공들을 부르려고 했을 무렵이었다.

궁에 도달한 에리아가 그 입구를 마주했을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간, 잘 지냈길 바랍니다. 이번이 몇 번째죠?"

"누구세요?"

에리아가 뒤를 돌아보면 한 사람이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채로 서 있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요. 뭐, 기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물건을 되찾아 가겠다고요."

"아가씨? 아, 너 세실 린 패거리구나?"

"아, 기억하셨습니까?"

"내가 가져갔던게 분명 십자가 맞지? 근데 그걸 순순히 주진 못하겠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이제 그건 필요가 없습니다.

다르말록 교단은 등진지 오래니까요."

"그럼 왜 온건데? 딱히 내가 뺏ㅇ..."

"표정이 변하셨군요. 이제 좀 감이 오십니까?"

"손 끝 하나라도 대기만 해봐. 반드시 찾아내서 찢어죽일거야."

"그건 저한테 하실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그쪽으로는 사람이 갔을테니까요."

"비켜."

그렇게 말하고 에리아는 상담소를 향해 뛰었다.

다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자신이 빼앗은 것. 짚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경매로 받아낸 천각룡의 알. 원래라면 그들이 가져가려고 했을 물건.

그러나 이제 알은 없다. 상담소의 삐삐의 방에서 자고 있을 딸을 건드리겠다는 말을

어떻게 엄마가 그냥 넘긴단 말인가.

그러나 탕 하는 소리가 들리고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느껴진다.

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지고 바닥에 흙먼지를 날리며 굴렀다.

에리아는 바로 일어나서 몸의 흙을 털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너 그 새끼구나? 내 대신 교관으로 왔던..."

"네, 화이트 교관입니다. 반가워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 총을 가지고 있을리가 없지..."

"아가씨께서는 뼈의 저택 지하의 제단을 목표로 하셨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곳에 있었죠. 할수없이 포기했어요.

하지만, 그 제단이 아니더라도 제단은 아직 있으니까요.

그 결계를 열기 위해서 그 물건은 꼭 필요하거든요."

"물건? 삐삐가 물건이라고 했어?"

"설마 그깟 도마뱀에게 마녀님께서 정이라도 드셨습니까?"

거리 한가운데서 싸우면 단연 주목을 받는 것은 에리아였다.

아무리 수상한 상대라고 해도 콜로세움 우승자 타이틀에 마녀, 무령이라는

기이한 경력을 쌓아올린 그녀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다.

"후우..."

자신이 만든 총은 아무리 보더라도 마력 적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탄알 한 번 나가지 않는 장난감으로 보일 뿐이다.

물론 치명상을 입지는 않아도 다리에 꾸준히 축적되는 피로는 그녀를 지치게 만든다.

골목사이를 돌며 사람들의 시선이 띄지 않는 곳으로 돌려고 해도

상담소의 위치가 그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실 줄은 몰랐습니다.

왜 그러시죠? 여기는 미리타엔 아니었습니까?

저를 이 자리에서 죽이셔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텐데요."

"구경거리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에리아는 상담소쪽으로 달릴 뿐이다.

점차 헉헉대는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상담소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화이트는 그녀의 다리를 묶었다.

와당탕 앞으로 고꾸라진 에리아가 고개를 들면

얇은 실이 자신의 발목에 묶여 살을 파고들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런...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발목을 잡는게 일이니까. 아, 이런 개그 안좋아하는데 씨..."

"이제 그 어색한 존댓말도 할 생각이 없나봐?"

"성격에 안맞아서."

에리아는 가방을 뒤적이고는 발화부를 꺼내 스스로의 다리에 붙였다.

불길이 타오르고 실을 태우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다시 일어나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상담소쪽으로 걸어갔다.

한쪽 다리는 여전히 실에 묶여 질질 끌리고 있었고 불이 붙어 실이 겨우 끊기고 나면

그제서야 앞으로 넘어질 뻔 하면서도 상담소 문을 억지로 열어젖혔다.

"삐삐야!"

그러나 상담소 내부는 조용했다.

온통 어질러진 상담소의 소파는 터져있었고, 술잔따위는 깨져 있었으며

군데군데 금빛 바스라진 비늘조각이 박혀있고, 액체따위는 바닥에 흐르고 있으며

흙모래가 바닥에 흩어져있다. 그리고 옅은 담배냄새와 찐득하게 늘어붙은 정액냄새.

침대 위에는 다리에 피멍이 잔뜩 들어서 겨우 숨이 붙은 것으로 보이는 시도라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산산히 조각난 거울조각이 날려있었다.

"바뀐게 하나도 없잖아. 여전히 개새끼들이잖아.

내 친구, 내 딸. 전부 뺏어놓고 뭐가 달라졌다고?

그래, 내가 강압적으로 묶어둔 건 그러려니 해.

날 떠나겠다고 해서 놓아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내 집도 망치고, 내 딸도 건드린건 말이야... 그러면 안되는 거잖아..."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야?"

그곳에는 몸을 숨기고 시간을 벌 생각이었던 블랙이 있었다.

에리아는 이를 빠득 갈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블랙은 그대로 끌려와 그녀의 앞에 무릎꿇은 채로 목이 졸려 켁켁거렸다.

"크윽.... 켁... ㅎ..하..."

"닥쳐."

블랙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에리아는 말 대신 빈 왼손을 뻗었고,

도망치려고 하던 화이트가 바닥에 쾅 소리를 내며 쳐박힌다.

몸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꽉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화이트를 바라보고

에리아는 한 가지를 물었다.

"삐삐 어디있어?"

"모른다..."

"그래, 미리타엔이었지. 삐삐만 무사하면 다 보내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내가 알던 인신매매범이 하나 있었는데... 얼굴이 싹 다 갈린 사람이었어."

까드드득.

바닥에 짓눌린 화이트가 바닥에 짓이겨진다.

천천히 바닥에 얼굴이 밀리며 피가 쓸려나온다.

빠르게 갈던 것도 아니다.

"화이트!!"

블랙이 그렇게소리쳤으나 정작 그녀도 무언가를 할 여력은 없다.

그저 잠시 목을 조르던 힘이 풀린 정도일 뿐이었다.

에리아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의 돌블럭에 그를 갈면서

다시 블랙에게 고개를 돌린다.

"내 딸 어디있어?"

"몰라! 화이트를 풀어줘!"

"풀어줘? 풀어달라고? 누가? 내가? 너희를?"

에리아는 손 위에 두꺼운 마력탄을 만들어낸다.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크기를 키워가는 마력탄은 점차 구의 형태로 모양을 갖춘다.

그리고는 그걸 블랙의 입에 강제로 쑤셔넣는다.

한개. 두개. 세개. 계속 마력으로 만든 공을 삼킨다.

그러다 에리아가 주먹을 꽉 쥐면 퍽 소리가 나면서 블랙이 앞으로 쓰러져 피를 토해냈다.

"쿨럭! 커억..!"

"일어나."

그렇게 말하고 블랙의 머리끄댕이를 잡아 일으켜세우고는 다시 그 입으로 마력을 먹인다.

"식도, 위장, 소장, 꽉꽉 채워서 터트려줄게.

내가 너무 착하게 살았나봐.

머리가 조금 식으니까 생각이 났거든. 삐삐한테 위치 추적 마법을 걸었다는거."

퍽... 퍼버버벅.

연이어 터지는 소리에 블랙은 더이상 붉은 피를 토하지도 않았다.

검은. 아주 시커먼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어느새 코피는 물론이고,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리고 나서야 그녀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블랙을 휙 집어던진다.

그리고 당황한 것처럼 중얼거린다.

"회로가 끊겨있어..? 이건... 저쪽에서 차단하고 있는거구나?

내가 몸을 못쓴다고 이제 아주 만만했나본데, 그래, 해 보자고."

몇 번의 총격소리.

화이트가 든 권총에서 마력탄이 또 여러발 날아온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깨져 바스라질 뿐이다.

화이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전신에서 마력이 흐르다 못해 넘쳐서 주변의 마력을 깨뜨리는 경지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 눈으로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다.

검지손가락 하나.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걸 봤다.

그리고 방향을 돌려 하늘을 가리키는 손가락.

자신이 본건 그 손등 뿐이다.

그러나 곧 시야는 빠르게 전환된다.

눈 앞이 순간적으로 뿌옇게 변하고 나서 화이트는 자신이 무엇을 당한건지 생각했다.

"환각인가? 아니, 피를 흘리고 있는데 고통을 이기고 환각을 걸수 있을리가.

하지만 아까 그 마력은... 어...?"

그제서야 느끼는 사실.

얼굴이 갈려 피가 흐르고 있는데, 똑 똑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짓누르던 무거운 기압과 자신의 얼굴이 갈렸던 돌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뿌연 시야가 천천히 걷히고 그 사이로 빛이 번지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그는 한숨을 내쉰다.

"구름... 하아... 말도 안되는 괴물이구만."

다시 무겁게 자신을 짓누르는 압력.

땅으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지는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닥을 가리키는 손과 그 흰 손등 뿐이었다.

"화이트...."

블랙의 중얼거림은 거기서 멎었다.

바르르 떨면서 어떻게든 기어 앞으로 나아가고, 겨우 바닥에 쳐박힌 화이트를 붙들고

말을 잇지 못하고 바르르 떨던 블랙이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으...으아....으아아아아...!!!"

에리아는 그런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발레리아."

언젠가 문득 들었던 이야기.

모든 킬레리들은 마스터의 명을 듣기 위해서 귀에 무전기가 있다.

귀고리로 전파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평소에는 꺼두지만,

서로 떨어진 지금은 어쩌면...

"삐삐가 납치됐어. 먼저 찾아줘. 급한 일만 마무리하고 바로 합류할게."

그렇게 말하고 에리아는 주먹을 꽉 쥐고 마력을 도시 전체로 퍼뜨렸다.

"분명 바닥에 깨진 거울은 위상거울이다.

일반 거울은 혹시 삐삐가 깰 까봐 모두 치웠으니까.

그렇다는 이야기는 걸어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고, 그러면...

아직 이 나라 어딘가에 있다는 이야기지."

도시 전체를 뒤덮는 마력방벽. 그 누가 차마 생각지도 못할 규모로 두껍게 생겨난 벽은

굳건하게 미리타엔을 타국과 차단하고 있었다.

그날 국경지대에서는 반으로 잘린 산짐승 따위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도시 전체에 쳐진 장벽을 바라보며 성 앞에서 대기중이던 발레리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삐삐 아가씨를 찾는대로 바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발레리아. 목숨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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