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화 〉 마녀의 각성
* * *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했고, 그 앞으로 에리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섞였다.
"그... 무령님...?"
플로라의 의문섞인 말.
분명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에리아는 차분하게 그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자르고 답했다.
"삐삐가 납치됐어."
한마디 했을 뿐인데 데레코즈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의 얼굴이 굳었다.
"회의는 그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겠지 얘들아?"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게비디가 말했다.
"가시죠.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엔시온이 침묵한 채로 앉아있었다.
분명 별로 탐탁치 않은 눈빛이었다.
"가자 엔시온."
플로라가 탁탁 자리를 털고 일어나 품에서 애니를 꺼내면 엔시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로 말은 필요 없었다.
중절모를 살짝 벗은 데레코즈가 손을 뚜둑이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서로 삐삐를 찾아내면 연락을 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들은 해산했다.
처음 거리를 달리기 시작한 것은 게비디였다.
"그 작은 아이를 어찌 무력으로 위협한단 말인지...
죄질이 아주 나쁘단 말이지... 어린 생명은 말이지.
때타지 않은 순수한 악의가 보장될때 예쁜건데 말이야.
어른들의 더러운 속내를 보여주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그런건 천천히 배워도 늦지 않을텐데."
그가 달려 도착한 길은 에리아의 상담소였다.
이미 그 앞에 박혀있던 블랙과 화이트는 사라진지 오래다.
검붉은 피가 낭자하고 바닥의 보도블럭은 깨져 박살났으며
그 위로 사람의 살점, 혹은 가죽 따위가 날카로운 돌에 찢긴채 갈려있다.
들러붙은 모양이 썩 역겨웠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지나가며 뱉어낸 침 따위가 있었다.
자신은 이미 이런 광경이 익숙했으니 그러려니 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걸리는 모습이다.
"참, 언제 봐도 미리타엔은 그다지 아이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 아닌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단 말이야.
다른 곳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뭐, 집이 제일 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무전기를 연결했다.
"킬레리들, 미리타엔 전 구역에 있는 킬레리들에게 전한다.
삐삐를 찾는다. 찾는 즉시 내게 회신할것. 알아서 잘 처리하길 바란다. 우리의 방식대로.
이상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거리를 돌았다.
거리를 돌다보면 왜인지 모를 불쾌한 정액냄새가 말라비틀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미리타엔의 골목 골목의 노예들이 내는 냄새일 거라 생각하며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그의 방식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며 엔시온은 그가 어리석다고 표현했다.
"킬레리들이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건 좋지 않거늘...
덩치가 큰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성급하단 편견을 갖고 싶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내가 본 덩치큰 아저씨들은 다들 그렇구나.
자기만의 왕좌에 앉은 걸 말리지야 않겠지만, 적합한 최적의 방식이랄게 있는 법이지."
그녀는 낮은 한숨을 내뱉고는 자책하는 말을 했다.
"전장의 붉은 요정도... 이젠 동네 심부름꾼 처지로구나.
아줌마...니까 별 수 없나.
기다리렴 건방진 꼬마야."
그녀는 구역을 나누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잘 아는 구역부터 시작해서, 잘 모르는 구역, 으슥한 뒷골목.
숨겨진 아지트가 있을법한 곳까지.
어떤 전쟁이든 우선 배경이 되는 전장에 대해 잘 아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생각하는 최적의 방식에 필요한 기본적인 요소였다.
납치라. 분명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선호할 것이다. 그 꼬마라면 분명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했고, 그렇다면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금방 소동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으슥한 곳을 위주로 돌아보며 찾을 생각으로 첫 목적지를 정했다.
창관이 잔뜩 들어선 거리 뒤로, 걸인들과 노예들이 거리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에 섞여
뒤섞이는 공간. 아무도 타인에게 신경쓰지 않고, 오직 자신의 쾌락에 집중하는
비역하고 불쾌한 골목. 오직 그곳에는 먹히는 자와 먹는자, 그리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뱀과 하이애나 같은 무리들 뿐이다.
휘리릭 창을 돌리고는 바닥에 거꾸로 꽂아놓고
도움닫기를 통해 창을 박차 뛰어오른다.
그녀의 유연한 몸은 마치 튕겨나가듯 날아올랐다.
어느새 박혀있던 창은 휘리릭 튕겨져 그녀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공중에서 바라보면 더 많은 시각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든 것은 언젠가 이전에 보았던 것 같은 남자였다.
"어디서 봤더라... 저 체구, 외모. 어디서 본 기억이 있는데 왜 생각이 잘 나지 않는...
아. 그렇구나... 그렇지... 후후후..."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손에 쥔 창을 꾸욱 쥔다.
본디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즉시 지워버리던 그녀의 기억에 남았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인간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흥미롭다는 듯 입가를 끌어올렸다.
"뭐, 꼬마 찾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원래 아줌마들은, 네트워크로 승부를 보는 거라고 했으니 말이야."
그 위로 떠오르는 추억은 아직 어리고 미성숙한 주제에 오만했던 남자였다.
'가지고 놀기 좋겠다.' 그런 생각이 슬쩍 떠올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애써 그녀는 꼬마를 찾는데 관련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 의문을 사고 너머로 넘겼다.
엔시온이 그렇게 멀어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은 것은 왜인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 데레코즈는 말 대신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한쪽 입꼬리만 올린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떠난 후에도 영 기분이 좋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는 터벅터벅 걸어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아보이십니다 대공님."
"좋을리가 없지. 오랜만에 엔시온에게 음식을 먹일 기회였는데...
무산되었단 말이야... 참 친해지기 어려운 여자야.
이정도면 하늘이 내게 벌을 주는 걸지도 모르겠어.
기껏 준비한 음식을 버리게 생겼으니. 자네라도 먹겠나?"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운전을 해야 해서."
"누가 뭐라나? 집에 가져가 먹게. 회라서 빨리 먹지 않으면 상할걸세.
그래도 아마 한두시간은 넉넉하겠군."
"감사합니다. 이따 쉴때 먹겠습니다. 식사를 못해서."
"그나저나 혹시 자네는 만약 애완견을 납치한다면 어디에 숨길 것 같은가?"
"애완견 말입니까?"
"그래. 애완견. 뭣하면 반려동물 정도도 괜찮네."
"잘은 몰라도 빨리 처리해버리고 현물로 바꾸기 위한 암시장을 찾지 않을까 싶습니다."
"암시장... 암시장이라... 그럼 암시장으로 가세."
"네, 모시겠습니다."
데레코즈는 가볍게 창 밖을 바라보며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참, 별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중독성이 상당하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창 밖으로 담배꽁초를 던져버리고는 안주머니에서 에라옥신을 꺼냈다.
에라옥신을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고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뱉더니 물었다.
"자네는 담배 피우나?"
"에라옥신 정도만 피우고 있습니다."
"그래... 그렇군. 건강 조심하게. 저번에 병원에 가 보니
난 이미 폐가 상당히 나빠졌다더구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은가?
참... 폐고 간이고, 맘편히 담배도 못 피우겠단 말이야.
에라옥신은 한대로는 부족한데 말이지."
그는 에라옥신을 여러대 더 꺼내 입에 물었다.
4대나 되는 파이프를 물고 나서야 그는 여유롭게 웃었다.
"그래. 이게 행복이지. 냄새가 신경쓰이면 창문을 열게."
데레코즈는 그렇게 말하고 쿠션에 기댔다.
다시 눈을 감고 짙은 연기와 낡은 올드 재즈 음악에 푹 젖어들었다.
바닥. 밑바닥.
그 아래에서 물큰하게 솟아오르는 찐득하고 검은 불쾌함.
그리고 그 위를 미끄러지듯 걷는 검은 드레스의 여성.
"모든 아이는 말이야. 어머니와 함께할 때 행복한거야.
모든 어머니가 다시 아이를 그리워하듯이.
슬픈 얼굴을 한 어머니를 보는건 말이야... 썩 유쾌한 일이 아니거든."
저벅저벅 걸어갈 뿐임에도 주변의 모든것이 어둠에 먹히는 것 같은 진득하고 무거운 감각에
집어삼켜진다. 그 사이에서 고고하게 걷는 그녀의 찰랑이는 은발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플로라 에반제인. 그녀가 손을 까딱이면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슬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이전보다 더 마력을 다루는데 능숙해진 그녀는 이제 감히 천재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도 할 수 없고 알 지도 못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영역에서 응용하고 발전시키는 것 하나만은 예술과도 같았다.
이전의 그녀는 가학 자체를 담았었기에 마력이 거칠었으나
이제는 어딘가 끈적하고 떨쳐내기 어려우며 동시에 묘한 중독성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그 마력을 옆에서 보조하는 검은 그림자의 마력.
플로라는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으로 자신이 아는 삐삐의 이미지를 그리고 집착의 마력을 사용한 것 뿐이다.
마력은 알아도 마법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던 그녀는 본능적으로 마법의 요건을 갖춰가고 있었다.
맨 처음 에리아를 속박했던 간단한 욕망의 마력식에서 점차 구체화되고 방향을 지정하는
정교한 마법의 영역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앞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이미 너덜너덜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검붉은 피를 질질 흘리며 비틀대는 사람을 마주하고 플로라가 물었다.
"거기 너. 이름이 무엇이더냐?"
그제서야 자신을 돌아보는 시선에 플로라는 빠르게 상대를 마력으로 구속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느니라.."
"그런거... 버렸는데요..."
상대는 자신을 노려본다.
이 나라에서. 이 미리타엔 제국이라는 명실상부한 절대 권력의 국가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적의 담긴 눈빛에 플로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만히 상대를 바라본다.
"여자로구나. 숨길 생각이었느냐?"
그 눈에 떠오르는 옅은 동요에 플로라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물었다.
"혹시 삐삐라는 아이를 아는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를 혼자 떠들게 할 생각인가? 무언은 긍정으로 받아도 괜찮다는 이야기겠지?
마지막으로 묻는다. 이름을 버렸다고 했지만 불리는 이름은 있을 터. 말해보라."
"블랙."
"짧아... 너무 짧구나."
마력의 사슬은 블랙의 몸을 감아매고 천천히 조여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숨을 쉬지 못할 정도가 되고 나면 그제서야 플로라가 말했다.
"무슨 말이던 편안히 해 보아라. 가능하면 삐삐의 위치를 말했으면 하는구나."
그리고 블랙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말이라도?"
"그래."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야?
영영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어.
이 기분이 어떤지 알아?"
"계속해보도록."
"우리는 말이야. 버림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야.
서로 치유하는 사람들일 뿐이라고.
그런데 이제 막 행복에 가까워진 우리를...
너희같은 다 가진 새끼들이... 방해하려 하지마..."
블랙은 그렇게 말하고 피가 흐르는 입으로 웃어보였다.
붉게 물든 이가 가지런했다.
머리는 헝클어진 산발로 그렇게나 피와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지저분한데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는 얼굴은 강한 독기가 서려있었다는 것을 플로라는 느꼈다.
"구원을 받았다면, 치유 받았다면 더 높은 곳을 향할 줄도 알았어야지.
불쾌하다고 여겼는데 말이다. 동족 혐오라는게 이런 것이로구나.
너무 닮아서 오히려 지독하게 불쾌한 것 말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 이미 여지는 없음을 느낀다.
"우리...라고 했나? 몇명이나 더 있지?"
"우리? 전부 4명. 나머지는 전부 죽었거든."
"그런가."
플로라는 그녀의 목을 꺾어버리고 걸음을 옮겼다.
뚜두둑 소리가 나며 블랙의 몸이 허물어진다.
"우리는 전부 해서 4명."
"뭐?"
플로라가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죽였을 블랙이 서 있다.
그렇다면 죽인 블랙은..?
바닥에는 여전히 죽은 블랙이 널브러져있다.
"그런데... 나는... 두명?"
"아니, 세명?"
"네명인가?"
뒤로 이어붙는 목소리들.
그리고 늘어나는 블랙.
플로라는 직감했다.
"클론인가?"
"난 블랙, 아무 능력도 없어. 보다시피. 그래서 그분을 위해서 선택한거야.
네리 M 모귀드의 클론 배양시설 말인데, 우리가 털었거든.
아직 보고가 안 올라왔나봐?"
"이런... 개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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