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마녀의 각성
* * *
무능력한 여성.
그저 그렇게 생각했던 상대가 나타난다.
주변으로 아무리 마력을 산개해도 끈질기게 나타나는 불쾌한 얼굴.
무능력이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끈덕지게 일어서는 저 괴물같은 근성또한
플로라를 질색하게 만들었다.
"난 남은게 없거든... 여기서 죽을 각오로 오기도 했고..."
"죽을 각오? 농담도 잘하는구나. 본체는 멀쩡한 곳에서 꿈이나 꾸는 주제에 죽을 각오를 입에 올려?"
"사랑하던 사람이 눈앞에서 죽었거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는데 말이야...
고백이라도 한번 해볼걸 그랬지. 그래서 난 이제 잃을 게 없어.
그리고... 각오 정도는 죽여도 되잖아? 옆에 클론들도 죽어나가는 와중에."
"이건 확실히 거슬리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마력으로 이루어진 사슬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와
자신을 블랙이라 소개한 여성의 복부를 관통한다.
그러나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는다.
"계속 해볼까? 난 손해볼게 없어서... 이 거리에 쌓이는 시체를 보고나면
황제의 이미지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모귀드의 클론을 만들기 위해 있는 시설의
전력, 영양액, 약품, 기술력. 아깝지 않아?"
몸을 아끼지 않고 달려드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플로라는 확실히 버거움을 느꼈다.
개인과 개인의 전력차를 비교하면 당연히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겠지만,
꾸준히 나타나는 블랙은 플로라의 신경을 갉아먹고 있었다.
차라리 한번에 나타난다면 범위를 지정해서 눌러버리면 그만이라지만,
꾸준히 하나를 처리할 때마다 어디선가 끊이지 않고 튀어나오는 상대는 확실히 마력의 소모를
격심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중간에 쉴 틈 조차 없었기 때문에
플로라의 당당한 얼굴에서도 땀이 한방울 흘렀다.
그렇다고 이들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이 이 곳에서 이 블랙이라는 여자를 묶어두지 않으면, 분명 이 클론들은
미리타엔 각지로 퍼져갈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보고는 없었음에도 이런 클론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공장쪽에서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책임자로 임명된 에리아가 여행을 자주 떠났으므로 보안에 취약해진 탓이었다.
이제껏 일은 제대로 하고 있었기에 딱히 건드리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사실이다.
다시 숨을 고르고 달려드는 여성은 아까와 같은 전혀 지치지 않은 얼굴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너무나 지쳐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건, 자신의 마력고갈과의 싸움이었다.
화려하고 동적이던 마력의 운용을 간결하고 강력하게 집중시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양쪽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정교하고 예리하네요. 점점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요."
"하아... 하아..."
발 아래로 뻗어가는 그림자는 신속하게 블랙의 발목을 묶는다.
때 아닌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발목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고통.
애니와 플로라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싸우는 모습이었다.
"정말 대단하긴 하네요. 천재라더니. 정말 천재야...
어, 미안해요. 어휘력이 그닥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고 또 하나의 블랙이 앞으로 쓰러진다.
쓰러지면서도 플로라의 앞까지 기어이 따라붙어 주먹을 내지르던 그 손마저
검은 그림자의 장벽에 허물어져 사라진다.
탁. 팔에 맞고 떨어지는 돌.
플로라가 고개를 돌리면 그 눈에 들어온 것은 노예였다.
걸인? 노숙자? 어떻게 불려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은 노예 하나가
나체로 정액이 뚝뚝 떨어지는 성기를 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에 안겨있는 것은 똑같은 나체의 블랙이다.
"미친년... 기어이 몸을 팔았더냐..."
"이 나라의 골목에는 유독 노예가 많더라구요?
어차피 죽을 클론인데, 섹스 한번에 편을 모으는 거라면 나쁜 거래는 아니죠?
아니면 혹시 자국민이라서 신경 끄고 계셨나요?
아니면, 약자는 선하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그제서야 둘러본 거리 구석구석에 모인 노예들과, 거기 함께 뒤엉킨 블랙.
어디서 튀어나온건지에 대한 의문 하나가 해소된다.
하지만 상황은 더 악화될 뿐이다.
"황제가... 황제가 저기 있다!"
누군가의 외침 하나가 전황을 어렵게 한다.
이곳에 모인 노예들, 그리고 클론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상위 계층에 대한 혐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사회 구조? 실력? 법? 어쩌면 힘? 자세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들의 앞에 던져진 수많은 나체의 클론들과 그 가운데 선 분노의 대상.
정확히는 분노를 표출해도 된다고 느껴진 대상.
이들의 내일 없는 인생에 이것은 다시 없을 유흥이었다.
그들이 올려다보던 콜로세움이, 자신들의 눈 앞까지 내려온 모습이었다.
절대 닿을 수 없는 꽃이었던 플로라가 지금 자신들의 앞에서,
블랙이라는 무능력한 사람에게 고전하며 허덕이고 있는 모습에
노예들은 자신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큰 희망이 아니었고, 결코 간단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0%에서 1%가 된 차이는 결코 적지 않다.
아니, 1%가 아니더라도, 0.1%? 0.01%? 그 작은 가능성이라도
누군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선발 한 명만 있다면 충분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반드시' 그 상황에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씨발! 황제가 예쁘다더니! 내가 먼저다!"
"비켜 이 새끼들아!"
쾅 하고 떨어지는 마법. 알 수 없는 충격.
연달아서 노예들을 쓸어내는 플로라의 발악과도 같은 것이었다.
블랙도 막아야 했고, 노예들도 치워내야 한다.
이것은 분명 과거의 0%를 바라보던 노예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력이라는 미지의 영역은 마법을 다루지 못하는 이들에게 신의 영역이었으니까.
알지 못하고 두려워한다면 신격화가 가능하다. 태초에 번개가 그렇게 숭배되었고
불이 그렇게 찬양받았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는 단 하나의 조건만 달성하더라도 더는 그것이 신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다.
더는 그것이 미지의 영역이 아니거나, 혹은 더는 그것이 두렵지 않거나.
그리고 그 현실을 마주한 플로라는 당황했다.
자신의 마력이 보이던 특성은 가학이었고, 사람들은 마땅히 그녀의 마력 앞에
공포로 떨고 괴로워하며 몸서리쳐야 했다.
그것이 사라진 이들을 앞에 두고 플로라가 스스로의 마력에 확신이 사라진 순간.
그녀의 천재성은 멈춰버리고 말았다.
이미 많은 인파가 그녀 앞에 몰렸음에도 플로라는 이들에게 마력을 사용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순간까지도 마력을 어떻게든 짜내려고 했을 뿐이다.
블랙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인파에 섞여 밀려오며 결국 플로라의 앞까지 다가온 블랙이 품에서 마력권총을 꺼내
플로라의 머리에 조준하고 발포한다.
하나가 아니다. 인파속에 숨은 이들이 제각각의 권총을 발포한다.
유레크로스에서 훔쳐온 총은 도합 10정이었고
그들은 아직 남는 총을 6정 가지고 있었으니까.
블랙이 그걸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플로라의 패배였다.
사방에서 마력탄이 날아왔다.
많지는 않지만 그 위치를 특정해내긴 어려웠으며
이 인파를 상대하며 총알을 막아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탕 하고 날아온 마탄은 플로라의 이마 한가운데 명중했고
플로라는 뒤로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플로라는 그대로 간살당했을 것이다.
노예들이 그녀에게 달려들려고 한 순간, 그리고 블랙이 승리를 확신한 순간.
그 시야가 어두워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아... 주인이 되어서 반려묘에게 구원만 받다니.
이래서는 황제로서 위엄이 살질 않는단 말이야 애니."
아까와 같은 목소리. 그렇지만 어딘가 위엄을 한꺼풀 벗어던진 듯한 소녀의 목소리.
"냥."
"알겠어. 황제 플로라로 싸우는건 그만하자. 이젠 뭐가 좋으려나...
가학공...도 아니고, 음.. 그래. 마녀의 제자 플로라가 좋겠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시야에서 그저 들리는 대화를 블랙은 멍하니 서서 반추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대화지? 대화? 고양이와?'
멍하니 사고가 흐려진다.
동시에 머리가 아파진다. 눈에서 쨍한 통증이 느껴진다.
축축한 감각. 그리고 찐득한 감각.
몸 전체가 빨려드는 감각.
블랙은, 수많은 블랙들은 그런 상태로 멈춰버렸다.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녀들이 하나 둘 무너지기 시작한다.
뜨거운 고통이 휘감긴다.
사고가 끊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둘 멍하니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진다.
노예들은 플로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더 환하게 타오르는 그녀의 눈은 결코 패배를 직감한 얼굴이 아니었다.
"잘 듣거라 노예들이여.
오늘 있었던 일은 없던 것으로 해 줄 수 있으니,
그대들이 하려고 했던 일을 하거라.
여기, 그대들을 위해 내가 준비한 여인이 넘쳐나지 않으냐?"
플로라의 한마디는 죽음을 각오하고 겁에 질려있던 노예들의 눈을 돌렸다.
'뭔데? 뭐야?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블랙의 사고는 거기서 멈춘다.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쏜 수많은 마탄들을
플로라의 몸에서 스르륵 흘러나온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모두 맞았음을.
자신의 수많은 클론들이 모두 그 고양이의 생명을 앗았다는 것을.
그리고 블랙은 스스로 눈을 감고 서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물에 기름을 부으면 겉으로 보기에는 탁해보이나,
결국 시간이 지나면 걷어낼 수 있는 상태가 된다.
분리하고 나면 물에 큰 변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에 소금을 넣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겉보기에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점차 그 맛이 짜게 변해가고,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소금을 분리하겠다고 물을 끓여버리는 순간, 물은 증발해버리고 만다.
블랙은 움직이지 못한다.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본체가 잠들어있을 연구실의 어딘가 클론의 복제기 안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며 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몇 명의 복제가 죽더라도 상관없다.
조금 트라우마가 될 지는 몰라도, 죽는 것은 클론이니까.
하지만 변화가 생겨났다.
모든 것은 고양이 한 마리 때문이었다.
복제기 안에 잠들어있던 그녀의 의식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몰랐다. 의식이 이어진다는 것도.
복제기 안의 본체 역시 눈을 감은 채로 잠들어 있었기에
클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그녀로서는 뇌로 흘러들어오는 정보를
판별하기 어려운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느껴지는 고통. 그리고 묘한 열기.
흥분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움직일수도 없었고 눈을 뜨지도 못했다.
그저 저항하지 못하는 클론들이 본체로 보내주는 정보를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연구실의 캡슐 속 블랙이 조용히 허덕이며 말했다.
"ㅎ...화...ㅇ...ㅌ.... 미ㅇ...ㅏ...하아..."
그리고 그 시각, 블랙의 클론들은 눈을 감은채로 땅바닥에 뒹굴며
노숙인들에게 그 몸을 내어주고 허덕일 뿐이었다.
저항하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쾌락신호들에 떠오르는 대로 튀어나오는 외설적인 말을 뱉어가며
밑바닥 계층의 노예들의 비루한 성기에 아양을 떨어댈 뿐이다.
이미 뒤틀려버린 사고가 본체가 망가져가는 줄도 모른 채로 멈춘 사고를 억지로 이어붙이려 한다.
플로라는 그 상황을 보며 씨익 웃는다.
"오더: 오버도스"
그녀가 처음으로 영창해 시전한 마법.
중독을 강제하는 마법.
에라옥신을 처음 퍼뜨린 두 명의 여인.
그들 중 하나였던 플로라는 물리적 폭력만이 가학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노예들은 멈추지 않고, 죽을 때까지 정을 토해내다 블랙의 위에서 숨을 거둘 것이다.
"행복한 인생이겠구나."
그렇게 말하고 멀어지는 플로라는 다시 품에 안은 고양이 애니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고맙긴 한데, 너도 이제 스스로를 좀 아껴 애니.
이제 나한테는 너밖에 없단 말야..."
"애옹..."
그리고 거리에서 쏟아져나오던 블랙의 클론들은 이유도 모른채로
생성되자 마자 그 자리에서 멈춰선채
움찔움찔거리며 눈을 치뜬 채로 몸을 떨다 그대로 쓰러져 실금할 뿐이었고
그녀들은 모조리 거리의 노예들의 성완구로 끌려갈 뿐이었다.
그것이 결국 블랙 본체의 뇌를 절여버리고, 그녀의 상식들을 뒤바꾼다.
블랙의 본체였던 것은 이제 제일 뒤떨어진 최후의 클론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무기로 사용하려고 했던 수많은 클론이었던 것들이 결국
그녀가 더는 외설적인 요소를 배제하고는 단어 하나, 사고 하나도 표현할 수 없도록
일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치명적인 소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는 노예들의 욕망을 무기로 그들의 복종을 강요하고
이들이 현 체제를 거스르지 못하게, 아니 거스르기 싫도록 만드는 악독하고
잔인한 여자라는 평이 따라붙었다.
결국 플로라들은 동시에 노예들에게 지지도가 올랐지만, 본인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블랙을 겨우 쓰러뜨린 이후에 지친 얼굴로 마차를 부르고는
"무령님, 죄송해요. 좀 지쳐서... 삐삐는 조금만 쉬고 찾아볼게요..."
라고 말할 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