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0화 〉 마녀의 각성
* * *
"대체 저 역겨운 것들은 뭐야?"
데레코즈가 그렇게 말하고 에라옥신 연기를 내뱉던 창에서 고개를 뗀다.
"늘 그렇듯 더러운 노예 새끼들입니다. 뒷골목에서 붙어먹는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암시장 골목은 높은 분들이 더 찾지 않으시는 곳이니까요."
"높은 분들이 찾지 않는다라... 그 말은 틀렸네. 뭐, 아무튼 내가 물었던건 그게 아니야.
붙어먹는 노예들은 그러려니 하는데, 저 여자는 대체 뭐냐는 말이야.
잘 보게. 하나같이 얼굴이 똑같아. 눈 밑 점이나 체형, 가슴 크기나 신장, 목소리까지.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눈이 풀려서는 눈만 맞으면 노예랑 길바닥에서 떡을 치고 앉았지.
요즘 바이오 개인노예는 거리봉사라도 하나? 모귀드는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러고보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모귀드의 클론 개체들이 거리에 풀릴 정도로 저가는 아닐텐데.
분명 그런걸 군대로 부리는 건 '그 놈' 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모귀드도 아닌 클론이 거리를 덮었다는건,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다."
"확실히 그렇군요."
"마음에 안드는데..."
데레코즈는 차에서 내려 암시장으로 걸어갔다.
그 앞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와 같은 차분함이 있었다.
데레코즈를 보고는 황급히 미소를 띄우고 자리를 정리하는 인파들 속에서
그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자네는 먼저 퇴근하게."
그렇게 자신의 검은 차 7대가 일렬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쳤다.
"물건을 좀 봐도 되겠나?"
"아마 원하시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만은..."
"판단은 알아서 하겠네. 잘 생각해보게.
여기서 내가 마음에 드는 물건을 집으면 한동안 장사 전망이 어떨 것 같은가?"
"안내하겠습니다."
"제가 안내해도 괜찮을까요?"
한 상인을 제치고 미소를 짓는 남자 하나가 걸어왔다.
"자네는 누구지?"
"아마 당신이 찾는 것을 제가 구해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호오? 그 말은 마치 내가 찾는게 뭔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 처럼 들리는데?"
"아무렴요. 찾는게 아니더라도 분명 원하게 되실 정도로 매혹적인 상품일 겁니다."
"그래?"
"싱싱할때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아있을 때 보려면 빨리 가셔야 할 겁니다."
"그래 좋네. 어서 가지."
데레코즈는 그렇게 말하며 안주머니에 든 권총을 슬쩍 확인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안내자는 친절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가 어딘가 불쾌해도 데레코즈는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솔직히 말해서 삐삐라는 애완동물따위를 찾고 싶은 생각은 그닥 없었다.
그러나 삐삐가 납치되었다는 그 말 한마디에 뭉개지는 표정들.
분명 그 삐삐를 찾는 것으로 자신의 입지가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입니다."
앞에 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문 앞에 섰다.
지하 어딘가에 위치한 검은 문. 그 너머는 아마 폐쇄된 공간임이 분명해보였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면서도 그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이제 말해주지 그러나? 자네는 누구기에 이곳으로 날 부른건지."
"아, 들켰나요?"
"들키고 말고할게 아니었지. 처음부터 그렇게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데 말이야."
"들어가서 이야기하시죠."
그는 데레코즈를 방 안으로 떠밀고 자신 역시 그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낯선 남자가 문을 닫으면 동시에 문은 검은 빛으로 잠시 빛나는가 싶더니
그대로 사라져 버렸고 거기엔 그저 벽만 남아있었다.
텅 빈 방. 그곳에는 오직 의자가 두 개 놓여있었다.
"다시 인사드리죠. 저는 데릭 브라이어라고 합니다.
다른 이름은 데릭 로드원. 모든 로드원의 시초이자 최초의 탈주자이고
배신자이기도 한 사람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데릭...로드원?"
데레코즈는 자리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걱정 마십시오, 당신을 해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다만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하고 싶다니..."
"모든 로드원이라는 이름이 사라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본디 로드원의 것은 우리의 이름도 아니고요.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평가는 후대의 역사로 남습니다.
우리는 실패했고 틀렸던 겁니다. 지금의 당신이 이해하기는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알 것 같군요. 그럼 내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으면 되겠습니까?"
"믿지 않아도 곧 증명될 겁니다. 정 보고 싶다고 하시면 보여드릴수야 있습니다만,
썩 보기좋은 모습은 아니리라 생각해서요."
그 말은 왠지 모를 섬찟함이 느껴져서 데레코즈는 침묵한채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에리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명은 자신이 찾고 있다고 했었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을 찾고 있다고 했었다.
그리고 둘 다 사람이 아니리라고 했다.
"죽은 자는 마땅히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스스로 불행을 택하는 길이죠.
그래서 저는 그 댓가를 온전히 전하기 위해 그 사람을 찾는 중이지요."
"그게 마녀 에리아입니까?"
"그랬던 때도 없다고 하지는 못하겠군요. 안타깝지만 이미 포기했어요.
이제는 체헤게라는 로드원을 찾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더군요.
분명 느껴지는 기운을 따라 그가 숨은 곳으로 가면 금새 어딘가로 사라져있으니까요."
"사라져있다?"
"그 기운이 점차 약해져 이제는 찾기도 어려워졌고요.
한 달 정도가 지난다면 이제 저는 그를 찾아내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 잡아내야겠지요."
"그럼 날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도와달라는 의미입니다.
당신에게는 두 가지 부탁을, 아니 명령을 하겠습니다.
하나는 앞으로 두번 다시 로드원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그 이름을 놓아주십시오."
"그럼..."
"브라이어. 앞으로는 우리의 원래 뿌리대로, 데레코즈 브라이어로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데레코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 데레코즈... 비슷하네요. 좋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당신에게 맡길 것이 있어요."
데레코즈가 손을 내밀면 데릭은 그에게 마력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알 방법도 없을 고대의 마법부터, 데릭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마법이 섞인
오직 '그'만의 마법. 그 속에 섞인 미미한 보랏빛 실이 어디론가 이어져있다.
"실이 보이십니까?"
"보이는군요. 이건 대체 뭐죠?"
"그게 우리 일족을 이어주는 근원입니다.
그걸 따라간다면 분명 제가 쫒고있는 추적자에게 닿겠지요.
제 사냥을 도와, 그를 죽여주시면 됩니다.
당신에게 그럴 수 있을 힘을 드렸습니다."
"힘..?"
"당신은 마력에 적성이 없어요. 오로지 연성술과 마법진, 그리고 영창으로 단점을 커버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마력 자체만으로는 무엇도 이루지 못하는, 그래. 무능력자입니다.
그런 당신에게 제 기술을 전수했습니다. 단 두 가지 뿐이지만요.
유용하게 쓰시길 바라겠습니다."
"잠시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 괜찮습니까?"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데릭이 그에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저에게 왜 그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그냥, 원래 그런 겁니다. 후대의 후손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 조상님의 마음이랄까요?
농담입니다. 제 대신 꼭 그를 죽여주십시오."
"왜 직접 하시지 않고..."
"직접 하려고 했는데 말이죠.
아무래도 제가 높으신 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같아서요.
제가 이 세계에 남아있는걸 더는 용납하지 못하시는 것 같더군요.
협상이... 대 실패로 끝났거든요. 아, 당신은 기억하지 못해도 좋아요.
들어봐야 골치아프고 새로운 일에 엮일 뿐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데릭은 벽면으로 걸어가 사라진다.
벽을 넘는 것은 그의 순수한 뼈 뿐, 인간으로 의태하고 있던 가죽은
벽을 넘지 못하고 허물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참... 정말 괴물들이구만."
그렇게 말한 데레코즈가 눈을 감았다가 뜨면 어느새 암시장의 어느 골목이었다.
헛것을 본 건가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그와의 만남과
언제 배운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머리속에서 울리는
기억에 없던 주문 두 가지는 분명 그가 헛것을 본게 아님을 말하고 있다.
"결국 살아있을 때 봐야하지 않겠냐고 한건 뭐였지..."
그렇게 투덜대며 그가 다시 지팡이를 짚고 나온다.
떠오르는 주문들을 복기한다.
[오퍼링] [서먼]
"거 옛날 사람 아니랄까봐 있는 척은..."
그렇게 말하고 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보라색 마력이 그리는 실을 따라 걸었다.
어딘가로 향하는지 모르면서 걷다보면 어느 작은 골목의 지하에 있는 하수도로 통한다.
"이런 곳까지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 불쾌함을 표출하며 그가 맨홀을 열면 그 아래는 하수도는 온데간데 없고
사다리로 이어진 통로만이 나왔다.
빗물은 들어오지 않도록 경사로로 만들어진 통로 끝에는 진짜 하수도와 통하는 수로가 있고
그 위로 다시 긴 복도가 이어졌다.
"미리타엔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얼핏 보더라도 건물 세 채 정도는 이어둔 것 같은 공간에서는 묵직하고 둔탁한 주먹질하는 소리만 들린다.
퍽 퍽이 아니다.
빠악, 퍼억 같은 살벌한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간간히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 실은 그곳으로 이어진다.
"여어~ 이런 어둑한 곳에서 싸우고 그러면 쓰나? 이거 허가는 받고 지어진건가?"
그리고 그가 그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는 익숙한 오크가 반쯤 헤져 터진 정장을 입고 싸우고 있었다.
"여어, 데레코즈인가? 늦었구만 그래. 이미 맛있는 부분은 내가 다 먹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게비디의 앞에는 말 그대로 피떡이 된 채로 서 있는 남자가 있다.
몸이 군데군데 터지고 그냥 봐서는 서 있을 수도 없을 것 같은 몰골을 하면서도
남자는 게비디에게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게비디에게 몇 번이고 유효타를 넣으려고 하지만, 그의 두꺼운 피부는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뚫어낼 수준이 아니다.
"전력차가 다르다니까 전력차가. 무리하지 말게. 충분히 잘 했어.
그러니까... 그만 쉬게."
뻐억 소리가 난다.
위에서 아래로. 그저 내리친 주먹에 날려오던 남자는 그 등을 얻어맞고
그대로 바닥에 쳐박힌다.
쾅 소리가 나고 바닥에 피가 튀지만 남자는 다시 일어선다.
끈질기게 일어서며 악의담긴 눈빛을 보내온다.
"참, 이런 놈이 콜로세움으로 들어왔으면 참 좋았을 것을.
그 기개는 정말 높이 산다만은, 나이 어린 아이를 그렇게 납치하고 그러면 쓰냐는 말이지."
게비디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여유롭게 데레코즈에게 말을 건다.
"아쉽지만 삐삐와 주동자는 놓쳤다네. 저 앞에 홀 보이나?
저 안으로 도망쳤어. 삐삐는 기절한 것 같더군. 이곳은 내가 맡을테니 따라가 줄 수 있나?"
"아,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네 오크. 그 남자는 내게 양보해 줄 수 없는가?"
"이 남자를? 이유를 듣고 싶군."
"내가 꼭 찾아 죽여야 할 사내라서 말이지.
그러기로... 약속을 했어."
"그렇다면 비켜주지 못할 것도 없지.
다만 조심하게. 악취가 나니까 말이야."
"악취라고?"
"어디서 붙어먹다 온건지 온 몸에서 정액 쩐내가 진동을 하네.
비릿한 냄새 말이지."
"아, 아까부터 나던 이 비릿한 악취가 하수도 때문이 아니었군?"
"그래, 먼저가네."
"그러시게."
"이거 쓸텐가? 그 권총인데 말이야, 총알은 없어."
"장난하나? 자네나 쓰게."
"난 이런게 그닥 필요가 없어서... 에헤이... 구멍이 작구만, 지상으로 올라가야겠어."
게비디는 그렇게 말하고 한 손으로 권총을 으스러뜨리고 지상으로 올라가버렸다.
데레코즈는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친놈, 대체 뭘 한거야?"
압도적인 차이로 이기고 있었다.
심지어 죽이려고 했던 흔적이 벽에 남아있다.
그런데도 상대는 기어이 살아서 자신 앞에 서 있다.
데레코즈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이름이 어떻게 되나?"
"이름... 피드 린이라고 한다."
"아니 그거 말고 말이야. 혹시 다른 이름은 없나?"
상대의 눈빛이 변한다.
"너 뭐하는 새끼야?"
"데레코즈 로드...아, 브라이어라고 하네."
"로드원... 로드원이구만... 그래, 끈질기게 따라붙는 그 해골바가지?"
이미 몇 차례 만난건지 지친다는 기색을 보인다.
그런데 뭔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눈 앞으로 달려온 피드 린은 빠르게 자신에게 주먹을 날린다.
체구에서 나오는 묵직한 주먹이 지팡이에 꽂히면 둔탁한 진동이 울린다.
이상했다.
분명 저렇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하고도 저렇게나 날렵하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결국 로드원에 네메시스! 아무리 새로 시작하려고 이름을 바꿔도...
과거가 끈질기게 따라붙어... 떨쳐낼 수가 없어..."
눈을 치뜬 피드 린은 달려와 자신의 뒤로 체중을 싣고 그대로 목을 꺾어 뒤로 넘긴다.
쿵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진 데레코즈가 쿨럭대며 일어서면 이미 자신의 목을 잡고 꺾는
피드 린이 자신의 움직임을 봉쇄한다.
"오크에게는 통하지 않아도 말이야... 인간은 이걸로..!"
"그...커어억... ㅇ..오퍼ㄹ...링..."
꾸드득 하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억지로 꺾었던 데레코즈의 목이 원래대로 돌아간다.
동시에 짙은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목을 꺾고 있는 피드린을 그대로 풀어내고 그의 목을 한손으로 조이며
짜증이 난 어투로 말했다.
"담배가 다 부러졌잖나."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피드 린의 손에 한발. 다리에 한발 쏜다.
탕 하고 발포된 총에 맞은 손바닥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튄다.
오른 다리도 마찬가지다.
주르륵 피가 흐르는데도 피드 린은 일어선다.
"재밌지? 몸에 피 대신 기름이 새던 날이 있어서 그런가, 자극이라면 그저 좋은가봐.
몸이 그래."
데레코즈는 주머니에서 부러진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그리고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이미 라이터는 찌그러져있었고, 불도 틱틱대며 잘 붙지 않았다.
목을 꾹 눌러 조이고 있었는데도 피드 린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고통이... 느껴지긴 하나?"
"아아."
"확실히 어느 쪽도 사람이 아니라던 말 그대로군."
"사람이 아니다? 네가 보기엔 난 사람이 아닌가?"
"그래, 사람이 아닌 것 같군."
피드 린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사람이야. 누구보다 인간다운 사람이라고...
그러기 위해 살았는데. 패배하고, 성장하고, 완벽하지 못해서 실수하고,
날마다 살아있다는걸 증명하기 위해 섹스도 했는데...
아무도, 아무도 날 부정할 수 없어..."
"인간은 그런 걸로 증명되는게 아니야."
데레코즈는 또 한번 오퍼링을 사용한다.
수명 한시간. 그가 수명 한시간을 바치고 그 대가로 필요한 작은 기적을 행하는 마법.
흑마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수명을 사용하는 마법이기에 금술로 지정되던 것이다.
어떤 생각으로 이 마법을 전해준 건지는 몰라도 아마 데릭은 자신이 저 자와 공멸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이 솟는다. 서로 다시 달려들어 엉킨다.
이제는 정액의 비린내보다 피비린내가 더 익숙해진 공간에서 피드 린은 주먹을 돌려
데레코즈의 배를 가격하고 그대로 데레코즈를 돌려 다시 메친다.
몇 번이고 등이 바닥에 내부쳐지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데레코즈는 일어선다.
분명 때릴 때 마다 전해지는 묵직한 타격감은 피드 린에게 고통이어야 했다.
하지만 어딘가 다르다. 이 고통은 오직 자신만 가진 것 같은 느낌이다.
"허억...허억..."
얼마 싸우지 않았음에도 숨이 차는 데레코즈는 두번째 마법을 시전했다.
소환술. 더 간단히 말하면 악마의 소환계약이다.
"누가 절 부른거죠?"
바닥에서 검보랏빛 번개가 일고 염소의 머리를 한 생물이 검은 정장을 입고 나왔다.
"반갑습니다. 저는 악마 론 체르모니아 마벨디르라고 합니다.
계약에 따라 당신을 돕는, 조금 나쁜 친구지요.
무엇을 도와...음, 일단 저 괴물같은 놈을 쓰러뜨리는게 목적 맞으십니까?"
"그렇다네."
"많은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계약한다고 한마디만 해 주시죠."
"대가는?"
"당신에게 일절의 해도 가하지 않습니다. 단, 당신 수하의 부하의 목숨을 받아가겠습니다."
"내 수하의 부하라고?"
"네. 오~ 빨리 결정하십시오, 저 괴물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하게. 계약하지."
"감사합니다 고객...아니, 주인님."
염소의 머리를 한 그는 너무나 가볍게 피드 린의 공격을 피했다.
눈 앞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뒤에서 나타나 속공을 넣는 모습은
그의 속도를 감히 짐작할 수 없게 했다.
그럼에도 승부가 나지 않은 것은 기이할 정도로 얻어맞고도 끝끝내 일어서는
피드 린 때문이었다.
"후우... 그.. 뭐라고 했더라.. 염소?"
"그냥 염소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이길 수 있겠나?"
"솔직히 이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소모전으로 이어질 뿐이지요. 승패가 날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팔다리를 모두 떼내면 이야기가 다르겠지요."
"그럼 그렇게 해주게."
"그래도 되겠습니까? 인간들은 살인을 금하는 걸로 아는데요."
"신경쓰지 말게."
"분부대로 하죠."
마벨디르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그리고 동시에 피드 린의 팔다리에서 피가 튀었다.
어느새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이처럼 손질되어 사지가 파여 뼈가 드러난 피드 린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저대로 죽을 겁니ㄷ... 이런, 이제보니 제가 잡을 수 없는 유형이군요.
정말 죄송합니다만, 이 이상은 도움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군요.
먼저 대가를 받아가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다시 언제든 불러주시죠."
그렇게 말하고 마벨디르는 천천히 돌아 나가버렸다.
"이 이상은 도움을 줄 수 없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데레코즈의 눈에 비친 피드 린은 다시 꾸물대며 일어서고 있었다.
근육과 힘줄까지 모조리 잘려나갔는데도 어떤 이유에선지 꿈틀대고 일어서는 모습.
팔도 휘두르지 못하고 축 늘어져 핏물이 빠질 뿐인데도 눈은 이곳을 노려보고 있다.
"마지막인가."
그는 오퍼링을 사용했다.
데레코즈의 오퍼링은 무엇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단지, 피드 린이 제 발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
피드 린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던건가... 그래서 그 악마도 날 버린 거군...
숨이 차지 않았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도 짐작만 했다.
몸은 죽었음에도 억지로 영혼이 들러붙어있다는 걸.
아무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해도 결국 그 뿌리가 죽은 영혼이라는 건가..."
"그 뿌리가 자네를 찾는다네. 이제 편히 쉬게."
데레코즈는 허덕이며 앉아서 그렇게 말했다.
"후우... 담배는 피우나? 자네 때문에 다 구겨졌지만, 피울만은 할텐데."
이 팔로는 피우지도 못해. 아까 그 괴물같던 놈은 이름이 뭐지?"
"뭐, 마벨디르였나? 그랬던 것 같은데."
"그놈 말고. 그런 악마는 많이 봤었다.
내가 생채기 하나도 내지 못했던 그 미친놈 말이다.
죽일 생각으로 날 공격하면서도 날 인간으로 마주하려고 했던
그 배려심 가득한 기분나쁜 눈... 오랜만에 받아보는... 불쾌하고... 뜨거운 기분이었다...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피드 린은 뒤돌아 누운 채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근육도 괴사, 과다출혈, 팔다리도 잘리고 몸뚱이만 남았는데,
죽지도 못하는 괴물같은 삶은 포기하고 싶다고 버려지는 것도 아니어서...
난 끝끝내 바랬던 인간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는게 너무 와닿아서...
그래서 눈물이 날 뿐이다. 언젠가 너도 이렇게 되지 않기를..."
그렇게 말하며 피드 린은 피눈물을 흘렸다.
데레코즈는 그제서야 자신을 바라보았다.
찢어지고 터진 옷을 바라보며 그는 피드 린을 업어들고 밖으로 나갔다.
"제사는 서운하지 않게 지내주지."
그 말에 피드 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