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11화 (211/303)

〈 211화 〉 마녀의 각성

* * *

동시 다발적인 연락이 돌아온다.

"여기는 32가 거리 뒷골목, 다수의 동일 여성이 나체로 성교중입니다."

"여기는 19가 삼거리 후미진 길목, 내용 동일합니다."

"7번 도로 뒤 CAD로드 노예 집단 거주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비디는 그런 대화를 들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나라에서 어린 아이가 자라도 되는 건가..."

그렇게 말한 그의 눈에 든 것은 위화감이었다.

노예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처음에는 킬레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묘하게 다르다.

무표정하고 무정한 킬레리들과 다르게 왠지 표정이 어두워보인다.

"발레리아? 발레리아 맞나?"

"아, 대공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할리가 없잖나. 내가 자네를 처음 무령님께 보낼 때 까지만 해도

이런 얼굴을 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우린 아마 같은걸 찾고 있는 거겠지?"

"그럴겁니다."

"소득은 있나?"

"있었는데,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있었다라...?"

"아까부터 이 거릴 종횡무진하며 돌고있는 자가 있습니다.

불필요한 방향을 왕복하고, 같은 곳을 빙빙 돌고 있습니다."

"추적을 피하는 건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장발의 남성입니다."

"그럼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지?"

"비릿한 체취가 있습니다. 정확히는..."

"아, 됐어. 알 것 같네. 주변의 냄새에 섞여버렸다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혹시 다른 힌트 있나?"

발레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삐삐는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삐삐를 납치했다는 건, 어느 정도의 상처는 각오했을 겁니다."

"상처가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네."

게비디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무령님 곁으로 가봐라. 힘드실거다."

"네, 알겠습니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으신 거니까 분명 많이 혼란스러우실 거다.

내 아버지와는 다르게, 자식을 아끼시는 분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동시에 무서운 불쾌함을 느꼈다.

어쩐지 섬찟한 감각. 오크로 태어나서 두려울 것이 없던 그에게 느껴지는

불편한 떨림은 날카로운 감각에게 도망치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 지점은, 장벽 너머.

미친듯이 날아오는 인간 형체의 무언가였다.

그리고 마침내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하늘의 장벽위로 붉은 무언가가 튄다.

장벽에 부딫혀 터져버린 것 같았다.

"대체 무슨..."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건지 아니면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은 것인지

주변 사람들은 그것에 큰 관심이 없어보였다.

게비디는 그 자리를 떴다. 조심스레 빠져나가다가 깨달았다.

눈 앞의 여성에게 홀려 일련의 사건에는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노예들 사이로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장발의 남자. 옷도 후레한 축이지만 갖춰입었다.

게비디는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간다.

후레한 옷에 보이는 얼룩은 그가 높은 계급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섣불리 덮쳐서는 안된다는 느낌에 멀리 떨어지면 그는 주변의 시선을 피해 골목으로 사라진다.

곧바로 골목으로 따라붙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막다른 골목만이 있을 뿐이다.

"아무도 없다고?"

미리타엔의 거리에 '아무도'없다는 것은 그에게도 낯선 일이다.

노예 한 명, 혹은 거지 하나라도 있어야 할 골목이 비어있다.

그곳에는 오직 벽 뿐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바닥의 수상한 맨홀까지.

그가 맨홀을 열면 그 아래로 이어지는 통로가 보였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이 보이고 그 끝에 층이 나눠진 것이 보였다.

어떻게든 몸을 끼워넣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지만

그의 몸은 너무나 컸다.

맨홀 따위에 부드럽게 들어가기에는 그의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넓었다.

"참 요새 품위 없는 일을 많이 하는군."

결국 어떻게든 들어가는데 성공은 했다만 입던 정장의 팔 부분이 다 터져서 긁혔다.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몰랐지만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이런 규모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귀족인지 몰라도

사적으로 무언가의 사업을 하려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참... 이해가 되질 않는데..."

복도가 나타나고 나서야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어린 용이 뭐라고?"

"제단을 부술거에요. 그러려고 데려온 거니까."

"제단을 부순다라..."

"우선 이 나라를 빨리 떠야지 가능한 이야기지만."

"그러려고 블랙도 화이트도 보낸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이미 다 각오한 일이기도 하고."

"그렇겠죠."

게비디는 이야기를 정리하며 조용히 무전을 보낸다.

"4511, 3678번. 발레리아를 데리고 브론든 골목 3번 길 막다른 곳에 있는 맨홀 아래로 올 것."

그렇게 말하고 다시 이야기가 들리던 곳으로 집중하면 그곳의 분위기는 달라져있다.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그리고 여자의 손에 들린 기절한 어린 용 하나.

"그게 들리던가?"

멋쩍게 웃으며 게비디가 안으로 들어가면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고 묻는다.

"따라붙은 사람 없었다고 했으면서..."

"미안, 몰랐지."

뚜둑이는 팔. 근육을 푸는 소리가 매섭다.

"그래, 대화들은 다 하셨길 바라고. 여기로 나오시지."

게비디가 그렇게 말하면 여자는 우드득 소리를 내고 벽에 붙은 나무판자를 뜯어낸다.

그러면 그 안에 사람 하나는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왔는데,

아무래도 오랜 기간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았다.

"지하에 이런 시설까지 만들어 둘 정도였나?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들 하셨는지는 몰랐는데.

이러니 찾을 수가 없었군."

"튀어!"

남자가 그렇게 말하면 여자가 미끄러지듯 그 안으로 들어간다.

한쪽팔에 들쳐안은 삐삐를 데리고 사라져버린다.

그 크게 뚫린 구멍 안으로 빠르게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허어... 참... 그래, 고르라고. 노예로 팔릴지, 여기서 죽을지."

자신을 향해 달려온 남자에게 게비디는 여유롭게 물었다.

"이름은?"

"피드 린이다."

오른쪽 가슴 윗부분을 가격하는 주먹에 내색 없이 상대를 내려다본 오크는

그 팔을 잡아 앞으로 휘둘러 던진다.

쾅 소리가 나게 바닥에 부딫힌 피드 린이 그제서야 게비디를 마주한다.

"과연 괴물이군. 언젠가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었지."

"날 아나?"

"그럼, 알지. 넌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죽일 각오로 상대해 줘야 후회가 남지 않겠군. 맞나?"

"그래, 그래야지."

피드 린은 권총을 꺼내 들고 게비디를 향해 발포했다.

네 번의 총성이 났다.

가슴에 한 발, 복부에 두 발, 머리에 한 발.

그러나 그 정도로는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다만 낮은 목소리로 '흐음..' 하고 맞은 부위를 손으로 문지를 뿐이다.

"총... 총이라, 좋지. 목숨을 걸겠다고 말했으면 어떤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는 그런 모습.

비난할 수 없는 부분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네."

도약인지 아니면 그저 부딫힌건지 모를 속도로 피드 린에게 부딫히는 거체는

그대로 피드 린을 벽에 들이받았다.

쾅 소리가 나고 몸이 떨어지면 철퍼덕 소리가 나게 피드 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목숨을 걸겠다는 기개는 좋은데, 아무데나 걸 만큼 많다면 말이야, 가치가 없다고."

"걱정 마라... 이길거니까. 방금 막 그런 확신이 생겼어."

"확신이라고?"

"고통이 느껴진다는걸 오랜만에 느꼈거든. 위대한 인간이 말이야...

고작 커다란 괴물새끼한테 질 수는 없잖아?"

피드 린은빠르게 발을 돌려 복부를 노린다.

이번에도 허망하게 막힐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게비디가 그의 발목을 붙잡자마자 곧장 몸을 돌려 반대쪽 발로 머리를 걷어차 고정시키고 그 이마에 권총을 쏜다.

그러나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고개를 돌린 것 만으로 마력탄은 무엇도 뚫지 못한다.

오히려 잡은 발목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는다.

다시 쾅 소리가 나고 딱딱한 돌바닥에 얼굴을 맞댄다.

피드 린은 머리가 띵 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면서 상대를 겨우 올려다본다.

그러나 상대는 곧장 그런 자신을 들어올리고는 여러번 바닥에 내다 꽂는다.

쾅 쾅 소리가 나고 벌써 몇 번이나 바닥에 내리 꽂힌건지 모를 정도로

이마가 깨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바닥에 튄다.

빠진 이가 바닥에 굴러다니면 그제서야 상대가 괴물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후회할 여유가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셰릴 린이 삐삐를 데리고 도망치는것에는 성공했다는

안도감에서였을까, 그는 슬며시 웃어보였다.

"왜 웃지?"

"웃기잖아... 내가 널 못 이긴다고 하더라도, 이미 우리 편은 도망치는데 성공했으니까.

그것도 모르면서 미련하게 나나 두드려 패는 꼴인데, 안웃기냐?"

"걱정 마라. 그 복수는 내 몫이 아니거든.

난 그저 목숨을 걸고 내게 덤벼오는 상대를 최강자의 자리에서 상대해줄 뿐이다.

충분히 쉬었나?"

다시 쾅 소리가 난다.

쓰러진 피드 린의 다리를 붙들고 채찍 휘두르듯 벽에 이리저리 때려박고 있었다.

피드 린의 시야는 붉게 흐려졌고 이미 어지러운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지경이다.

"포기하겠다고 말해도 좋다."

"개소리 하기는. 무섭냐?"

"맘에는 드는군."

콱 하고 두꺼운 손이 피드 린의 목을 붙잡는다.

"그래, 나는 괴물이고 너는 인간이라고 하자. 그럼 말이다, 뭐가 변하나?

네가 아이를 납치했다는 사실이 변하나? 네가 패배했다는 사실이 변하나?

내가 널 존중해주는건 말이다, 네가 나에게 최소한 목숨을 걸고 도전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 잘난 인간이 결국 괴물을 이길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보고싶군."

다시 탕 하는 소리가 들린다. 또 마력권총이다.

귀에 스치듯 날아간 마력탄은 생채기 이상의 상처를 내지 못했다.

허무하게 벽에 부딫힌 마력탄을 보고 피드 린은 눈을 감는다.

다시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쾅 쾅 소리가 익숙해질 쯤, 잠깐 몸에 통증이 멈춘다.

그제서야 지긋이 뜬 눈에는 오크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비춘다.

"네가 선택한 결과다. 네가 건 목숨이다. 선택한 결과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왜 네가 죽어가는지, 왜 맞고 있는지 느끼길 바란다. 그래야 이런 개싸움에 버린 목숨이라도

그나마 조금의 값어치는 하지 않겠나?"

그 말이 끝나고 나면 목을 붙들린 자신에게 날아오는 큼지막한 주먹.

그냥 보기에도 자신의 주먹보다 두배는 큰 주먹은 돌처럼 날아와 자신의 복부를 찍는다.

퍼억. 가죽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속이 울린다. 피드 린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다시 바닥에 내던져졌다.

"쿨럭...! 커억...! 우욱... 우웨에엑!!!"

날아가 벽에 부딫히고,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토악질을 하고 쏟아낸 토사물은

하수도를 따라 흘러간다.

"딱...대 이 새끼야... 속이 비었더니 몸이 좀 가볍거든...?"

"만용이다."

피드 린은 비틀대면서 상대에게 달려든다.

그러나 허탈할 정도로 간단히 붙잡혀 바닥에 머리부터 메다 꽂힌다.

목이 뚜두둑 소리를 내며 꺾인다.

다시 어떻게든 부여잡은 목을 천천히 들면 뚜두둑 소리가 난다.

귀에서는 앵앵대는 소리가 울린다.

"와라."

다시 달려든 피드린은 한번도 유효타를 넣지 못하고 뒹굴어졌다.

"넌 강하다. 네 주먹이 아프다는 걸 의미하는게 아니다.

쓰러지고 일어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 자세는 아무에게서나 나오지 않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서까지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집념과 악착같은 의지는

죽음으로서 배울 수 있는 값진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평생 배우지 못하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좀 치지?"

"하지만, 그건 너 자신의 이야기다. 하물며, 어린 아이를 그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한 건,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을 거다."

"아 그래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거 아닌가? 죽을 각오로 덤비라면서 말이 많아."

"참... 한결같은 남자구만.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나?"

"뭐?"

"네가 옳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든 발악하는 모습.

그리고 수틀리면 어떻게든 거기에 대해서 책임은 졌다고 변명하려고 하는 모습.

그러면서 인간성을 강조하는 모습. 그게 인간성인가?

내가 아는 인간을 그렇지 않았는데. 하긴, 이런 음침한 공간에서 아이나 납치하는 놈이

뭘 얼마나 알겠냐만은. 그냥 넌 콜로세움에 왔어야 했다.

그저 그 집착이 관객들의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될 수 있는 정도의 장소에서

네 생명이 제 값을 칠 수 있는 정도였다면 만족할 인생이었을거다.

그리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너는 인간일지라도 도구의 용도로밖에 쓰이지 못한다는 거다.

널 인정해주는 사람이 있었나? 있었다면 그 사람은 왜 널 이곳에 버리고 갔지?"

"닥쳐."

"도구로 살고 싶었던 건가? 하긴, 말이 길긴 했군.

잘 생각해봐라. 다음 생에서는 뭐가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다시 몇 번의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 폭력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어~ 이런 어둑한 곳에서 싸우고 그러면 쓰나?

이거 허가는 받고 지어진건가?"

게비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잡담은 이쯤 해야겠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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