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 마녀의 각성
* * *
단 1초. 셰릴 린이 에리아를 바라본 시간이었다.
그녀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리고, 무엇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눈은 에리아를 쫒고 있다.
기이한 감각이 이어진다.
뺨에 날아온 주먹. 분명 약한 주먹이다.
아프긴 하더라도 생명에 위협이 될만한 파괴력은 없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다. 뺨에 닿는 감각.
시큰한 통증과 함께 무언가가 움푹 파이는 것 같은 착각이 맴돈다.
자신의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끼면서 셰릴 린은 생각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뭔가 이상하지? 마력이 저렇게 흐를리가 없을텐데.
이 공간의 짙은 안개가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데.
근데 말이야. 이 안개는 기억을 건드리는거지, 마력에 간섭하는건 아니거든.
그리고 그 기억에 간섭하는 안개 말인데,
난 면역이야 이 씨발련아!"
떨어지는 삐삐를 잡을 때는 너무 순간적이라 마법을 사용할 겨를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에리아는 마력을 한가득 모은 손으로 셰릴 린의 명치를 가격한다.
아무리 단련해도 강해지지 못하는 급소를 가격한다.
명치에서 퍼지는 뜨거운 감각에 셰릴린은 바르르 떨었다.
감각이 증폭되는 느낌이 들었다.
몸의 세포들이 붕 떠서 마치 몸이 분해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포 하나하나 그렇게 분리된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어지러운 감각이 부유한다.
그런 셰릴 린의 명치에 꽂힌 주먹은 작은 균열을 만들었다.
그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미로의 안개가 더 그녀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사고같은건 정지하고 그저 통증만이 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셰릴 린은 혀를 깨물며 참아냈다.
그러나 이미 벙 찌는 감각속에 그녀는 무언가를 잊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녀 스스로도 그게 무엇인지 아직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에리아는 그런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멱살을 부여잡고 따귀를 후려치는 소리가 쫙 쫙 미로를 채운다.
"이건 널 찾는다고 개고생한 대공이들의 몫!"
무거운 주먹이다. 마력이 몸을 관통하고 등 뒤에서 폭발하며 터져나간다.
거대한 충격파에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셰릴 린은 어떻게든 참아냈다.
아니, 이제는 참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저 이 흐름에 저항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인지하지도 못한 채로 그저 당하고 있을 뿐이다.
"이건 너한테 맞고 납치당한 삐삐의 몫!"
다시 한번 주먹이 날아든다.
아랫턱, 왼쪽 광대를 연속으로 맞고 머리가 띵해지는 걸 겨우 참아낸 셰릴 린은 휘청거리며 자리에 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눈 앞이 핑 돌고 시야가 좁아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셰릴 린은 쓰러진채로 질게 늘어지는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불시에 습격당해 쓰러진 시도라의 몫!"
에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중지와 엄지를 이용해 셰릴 린의 미간에 딱밤을 놓는다.
따악 하고 울리는 청명한 소리가 경쾌하다.
원래라면 그닥 아프지 않았을 텐데, 왠지 지금은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사사건건 너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내 몫이다!"
철썩 하는 소리가 크게 울린다.
붉게 물든 뺨을 부여잡고 그제서야 당황한 얼굴로 눈을 흘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우욱...!"
쏟아지는 구토감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토악질을 뱉은 셰릴 린이 울컥거리고 있으면
에리아는 그 앞에 서서 말했다.
"넌 그냥 네가 틀렸다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거야."
"후...후후... 맞아요. 그 말대로에요..."
바닥에 쓰러진 셰릴 린이 그렇게 웃으면 에리아는 불쾌한 기분에 마력을 담아
셰릴 린의 몸을 더 강하게 바닥으로 짓누른다.
"근데 그거 아세요? 전 이미 의식을 성공했다는거..."
"뭐?"
셰릴 린은 조용히 고개를 치켜들고 웃었다.
입이 씨익 벌어지는 기이한 표정.
"제단을 모두 부수지 않아도 되더라고.
이미 도서관을 통해 누군가 넘어왔고, 난 그 통로를 이용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그렇잖아? 난 이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건데,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하는 그곳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섞여 행복해지는 법이 있었는데..."
"미친년..."
"미친년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난 이제... 다 이루었으니까."
그녀의 이가 이죽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나 미로의 안쪽으로 도망치는 셰릴 린.
"에스트로! 잡아!"
==
"에스트로! 잡아!"
그렇게 말한 나는 멈칫 할수밖에 없었다.
에스트로는 이 미궁의 주인이 아니었다.
에스트로는 삐삐를 안으면서 어떻게든 삐삐를 치료하는데 주력하고 있었고,
안개에 휘말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삐삐처럼 기절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에스...트로...?"
"아, 미안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지금... 내 딸이... 아, 엘라..!
후우.... 여기가 어디... 딸...? 나는...."
"됐다... 다녀올게."
그 와중에 삐삐랑 나는 기억하는 모습을 보니 한결같은 남자구나 싶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인데 무슨 화를 내겠어.
"금방 다녀올게."
나는 운동신경이 없지만 그래도 두들겨 때린 여자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달려서야 겨우 셰릴 린을 발견했다.
그녀는 미로의 막다른 골목 끝에 막혀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이거야! 망각의 탈린이 지키고 있던 제단...!"
그제서야 미로 한 구석에 쓰러져있는 탈린을 발견했다.
구속복은 이미 다 해져 삭은 채로 흙먼지에 변색되어 터져있었고,
외상은 없었지만 무언가 특수한 방식으로 기절시킨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전에 왔을 때는 보지 못한 제단이 그 앞에 있었다.
탈린이 이제껏 미로를 움직이며 형태를 바꿔 숨겨오던 제단인 것 같았다.
"안돼..."
쾅.
셰릴 린은 그 오래된 제단을 밀어 넘어뜨렸다.
우수수 부서지는 돌 제단은 너무나 간단히 손쉽게 부서졌고
제단의 아래에는 반짝이는 암청색 차원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뭐라고 저지하기도 전에 차원문은 셰릴 린을 삼키고 이윽고 점차 작아지더니
눈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발을 돌렸다.
더는 그녀에게 벌을 주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 테니까.
내가 겨우 발걸음을 떼면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 아으..."
"탈린...?"
탈린이 일어나서 나에게 걸어왔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고 말했다.
"갸으으.... 아그르르...."
"같이... 갈래요?"
탈린은 내 말을 이해한건지, 아니면 그냥 우연의 일치였는지 모르지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탈린을 데리고 에스트로와 삐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탈린은 멍하니 서서 에스트로를 바라보더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삐삐를 슬며시 받아들었다.
그리고 삐삐를 꼬옥 껴안고 자리에 앉았다.
무릎꿇은 자세로 기도하듯 삐삐를 껴안은 그녀의 몸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하고,
기어이 눈이 부셔 앞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사그라든 빛에 다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탈린은 없었다.
그리고 날개와 뿔이 조금 더 커진 삐삐만이 거기서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로에 가득 차 있던 안개가 걷혔다.
"아침...이야...?"
어느새 저녁이던 시간은 아침이 밝아 있었다.
이미 하루가 지난 것 같았다.
"여기가 이렇게 밝은 것도 처음 보는데."
"아, 에스트로. 일어났구나?"
"그럼... 고마워."
"셰릴 린은 놓쳤어..."
"후우...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들 무사하잖아?"
"그러네. 이제 뒷정리만 하면 되나?
그런데, 그 녀석은 어디 있지...?"
"그 녀석?"
"응... 분명 둘이 한 세트일거라 생각했는데."
"그런가..."
나는 삐삐를 안아들고 에스트로와 미로를 나왔다.
"그나저나 어떻게 온건데?"
"너 피 냄새 맡아본 적 있어?"
"피 냄새?"
"확실히 외워뒀거든. 삐삐의 냄새 같은 것들."
"바쁜거 아니었어??"
"내 걱정 해주는거야?"
"기어오르지마."
"정말이지 이런 정도는 받아줘도괜찮지 않나?"
"후... 그래, 걱정 했어."
"어..."
"왜?"
"얼굴 붉히면서 그런 반응을 하니까 오히려 낯설어서..."
"어휴..."
그리고 쾅 하는 소리가 미로 밖에서 들리기 시작한다.
쾅 쾅 하는 소리. 돌이 부서지는 소리. 흙먼지가 일고 그 안으로 목소리가 섞인다.
"아니 대공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부수면 안된다니까요!"
"무령께서 지시하신 사항이다."
"아니 그래도 안에 무령님이 계시면 다치신다니까요!!"
"이정도로 다치실 분이 아니니 걱정말고 진행해도 되네."
그리고 목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면 마침내 쾅 소리가 나고 돌벽이 무너져내린다.
아까까지 제단이 있었던, 탈린이 감추던 벽이다.
그리고 흙먼지를 뚫어내고 그 안으로는 다 터진 정장을 입은 게비디가 압도적인
끈뉵을 자랑하며 걸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런걸 물어본 놈이 이걸로는 안다친다고 벽을 밀어?"
"아, 들으셨군요... 하하...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밥 사겠습니다!"
"각오해. 비싼 걸로 먹을 거니까."
"하하... 골탕면 레토르트 제품이 많이 남아있는데 말이죠..."
"됐네요."
그리고 그 대화속에 머쓱하게 끼어드는 에스트로.
게비디는 에스트로를 보고 거리낌 없이 인사를 건넨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 안녕...하십니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뵙는건 처음이군요.
게비디라고 합니다."
"아,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입니다.
그... 제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난 에스트로의 표정을 보았다.
딱 그거다.
'들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태연하게 인사를 한다고?'
하는 그런 낯선 얼굴.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다.
"일단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그, 이거 다 철거하려면 얼마나 걸리나?"
"업자 말로는 한나절은 족히 걸린다더군요.
워낙에 넓은 미로다보니."
"그런가... 돌아가자."
나는 그렇게 상담소로 돌아가 발레리아와 재회했다.
발레리아는 나를 보고도 물론 반가워 했지만, 삐삐를 보고는 정말 안도한듯 눈물을 흘렸다.
정말 이래서는 이모 다 된 것 같단 말이야.
==
무엇인지 모르겠다.
뭔가 아프다.
여긴 온통 어둡다.
눈에 마침내 빛이 보이고, 내가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매우 빠르게.
점멸하던 빛이 내 앞으로 쏟아진다.
눈 앞이 환하다.
눈을 부스스하게 비비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깨어난다.
"여기는..."
위화감이 든다. 뭐지?
오래 된 거리 한복판인 것 같다.
날리는 종이 조각에는 뭐라고 쓴 건지 모를 언어가 제멋대로 적혀있다.
"새로운... 세상인가...?"
어딘가 모르게 느껴지는 위화감. 점점 가속해간다.
그제서야 기억들이 하나하나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떤 고생을 해서 얻어낸 새 쉴 곳인지, 그리고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그제서야 눈물이 왈칵 차오른다.
"성공했어..."
그런데 이상하게 어딘가 답답하다.
아주, 아주 소중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느껴지는 건 그 사람이 내게 줬던 것 같은 따스함과
왠지 모르게 느껴진 동질감 뿐이다.
그제서야 느껴지는 빈자리.
"나... 왜 여기 있지...?"
그 사람이 없는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내가 선택한 결과가 결국 이렇게 돌아온다.
이게 아닌데.
그 사람과 함께 있기 위해서 이렇게 먼 과정을 준비하고는 결국 혼자 남겨졌다.
이럴 거라면 차원문 같은거 넘지 않았을텐데.
스스로 자책하는 머리 위로 비가 떨어진다.
올려다본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결국 여긴 또 어딘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떨어진 이방인일 뿐이다.
땡그랑. 내 앞으로 금속조각이 떨어진다.
내가 주워들면 나보다 어쩌면 더 비루한 몰골을 한 사람이 나를 가엾게 쳐다본다.
그런...눈으로 날 보지 마...
난.... 아니.... 아니야....
자리에서 겨우 일어났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할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먹먹함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비릿하고 씁쓸한 기분은
영원히 나를 죽음으로 이끌것 같다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벌이다.
나에게 주는 벌.
영원히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혼자 죽어갈 것이라는 기이한 공포감이 내게 불안을 안긴다.
할수 있을 거란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괜찮다. 난 이전에서부터 악착같이 살아남은...셰린느니까...
그런 내 어깨를 누군가 두드린다.
돌아보면 젊은 여자가 내게 말을 걸고 있다.
왜 들리지 않았지? 어...? 말소리가... 들리질 않는다.
"어...?"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내 목소리 마저 들리지 않는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아마 맞는 와중에 잘못된 거라고 생각한다.
아, 누구의 목소리도 듣지 않으려 했던
오직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내가 제일 잘못된 사람이었구나.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제서야 내 처지가 너무 비루했다는 게 느껴져서
나는 누구와도 두번 다시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