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화 〉 어느 버려진 날들에게
* * *
"그래서, 내 후손이 너란 말인가?"
"그렇다고 봐야지 않겠나."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나에 대한 존중이 없다고 생각 안하나?"
"두집 살림 차려놓고 존중을 바란건가?"
병실 침상에 누운 피드 린을 내려다보며 데레코즈는 찬장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 램프에 가져다 대서는 능숙하게 불을 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담배가 다 부러졌다고 했나?"
"누구 덕분에."
"죽일거라더니 날 치료하는 이유가 뭐지?"
"치료는 무슨. 이미 그 몸은 죽었다더구만. 아까 의사가 말하는거 다 들어놓고선."
"그럼 치료할 것도 아니면서 대체 나를 왜 잡아두고 있냐는 의미다."
"나도 모르니까 일단 지금은 좀 쉬게. 식사를 준비해주지."
"하아... 필요 없다."
"아, 그것도 그런가."
"날 그냥 내버려 둬라. 원하던 대로 어디든 가서 죽어줄 테니까."
"무슨 일이지?"
"뭐, 할 일을 다 했다고 봐야겠지.
왜 그런 말도 있잖나. 토끼를 잡았으면 사냥개는 이제 삶아야 할 때지.
너무 오래 살았어."
"그래서 토끼는 잡았나?"
"그래."
그렇게 말하고는 피드 린은 입을 꾹 틀어막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데레코즈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중에 다시 오지."
그렇게 말하고 데레코즈는 지하실을 나왔다.
데레코즈의 저택 지하에 있는 작은 별실. 원래는 다르말록의 추종자들이 이 땅에 넘치던 시대에
그 선봉을 달리던 로드원 가의 응급 치료실이었다.
그곳에는 늘 의사들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드원의 사냥꾼들은 세계로 뻗어나가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사냥꾼이 남아있지도 않은 시대에 구시대의 사냥꾼이 그곳에 갇혀있었다.
데레코즈는 그런 모습에 괜히 우스워 픽 웃었다.
"많이 즐거워 보이십니다 주인님."
그곳에는 염소의 머리를 한 자가 집사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수하의 목숨을 가져간다고 했었지.
그래, 누굴 죽였나?"
"죽이다니요. 그분을 죽이신건 당신입니다. 계약을 수락하신건 주인님이시죠.
전 그저 대가를 받았을 뿐입니다. 기쁜 얼굴을 하고 한 손에 도시락 같은 것을 들고 귀가하고 있더군요.
머리가 터지는 순간에도 손에서 이걸 놓지 않더군요."
그렇게 말하고 마벨디르는 피가 묻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분명 아까 자신이 운전수에게 선물했던 도시락이다.
데레코즈는 말 대신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그래, 하나만 받은 거겠지?"
"네. 약속은 철저하게 지키니까요."
"그건 도시락이네. 상했겠구만."
"먹어도 괜찮습니까?"
"탈 날걸세."
"괜찮습니다."
"알아서 하게."
그는 도시락을 정갈하게 풀고 생선 회가 든 도시락을 게눈 감추듯 비워버렸다.
다행이라면 다행일지 아직 생선 회가 상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조금 숙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맛있군요."
"묻고 싶은게 있는데 말이야."
"뭐든 물어보시죠."
"자네는 말이야, 나와 계약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나?"
"뭐 계약이 거창한 별건 아닙니다. 인간 사이에도 계약이 있지 않습니까?
작게는 약속이라는 형태에서 크게는 국가적인 협약까지. 그 모든 범주의 계약을 따져보면
이것도 그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소 머리의 남자와 계약할 팔자는 3일 전까지만 해도 없었거든."
"그럼 여자가 좋으십니까?"
"굳이 변하지는 말게."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나저나 말이야, 자네가 분명 저번에 담당이 아니라고 했던 부분 말인데."
"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지요. 저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정하고 거래했던 겁니다.
그런데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는 도움을 드리기가 어려운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계약의 댓가로는 그정도 까지가 마지노선이었다는 의미입니다.
할 수는 있지만 까다로운 작업들 말이죠. 뒷처리가 골치아픈."
"악마로구만."
마벨디르는 웃는 얼굴을 하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악마와 계약하는 인간은 예로부터 많이 있었습니다.
분명 최근에 들어서는 그 빈도수가 많이 줄어들기는 했습니다만."
"줄었다?"
"뭐, 간단히 말씀드리면 인간들이 악마를 멀리하게 된 것도 있겠지만,
악마 자체를 잘 마주하지 못하니까요.
개중에는 악마의 존재 자체를 미신으로 치부하는 종류도 있더군요."
"미신이라... 종교의 영역으로 따질 수도 있다는 이야긴가?"
"음, 제 경험상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서 좋은 결말을 봤던 기억이 얼마 없습니다.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것은 어떠신지요."
"그렇게 하세나."
데레코즈는 그렇게 대답하고 자신의 집무실에서 담배를 물고 창밖을 바라본 채로
뿌연 연기만 하염없이 뱉었다.
"참... 당황스러운 상황이구만... 내 한 평생 이런 상황을 그린 적이 없었거늘..."
잠을 자면 나아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는 이마를 짚고 다시 한숨과 함께 연기만 뱉어냈다.
"왜 그 삐삐... 그걸 찾겠다고 해선.... 그냥 다 사라졌으면 좋겠군.
염소든, 해골이든, 좀비든..."
그렇게 말하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드 린은 홀로 남아 자신의 파인 살점과
뼈가 드러난 팔을 보았다.
이미 근육이랄 것들이 다 잘려나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는 팔이지만
그래도 아직 썩지는 않았다.
나름 붕대를 감기야 했지만 이제는 피도 얼마 나오지 않는다.
막 푸줏간에서 도축된 고깃덩이와 같은 팔에서는 이제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아서
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현실성을 주지 않는 것은 느껴져야 했을 미묘한 그리움이
마치 도려낸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분명 셰릴 린을 데리고 함께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걸 위해서 그녀를 보냈다.
운이 나쁘게 뒤를 잡히기는 했지만 금방 따라갈 생각이었고, 그걸 위해서 몇 번이고
이미 알고 있는 기억의 미로의 구조를 외웠다.
그러나 결국 자신은 그러지 못했고, 결국 그녀에게 받은 몸을 죽였다.
이제 남은 것을 돌아보면 오직 영혼 뿐이다.
그래도 동시에 그녀는 성공했다는 이야기였다.
애써 위안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본능적인 물음 하나가 남는다.
왜 그녀는 자신을 이곳에 놓아두고 그냥 사라져 버렸는지.
그 문을 그냥 넘어버린 그녀가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끝은 늘 뒤를 잡힌 자신의 실책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잊을만 하면 따라붙는 그 오크의 말.
분명 마르커스가 만들어준 철갑 기계 안에 갇혀 있을 때부터 몇 번인가 봤었는데
이름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조금은 우습기도 했다. 누구보다 많이 사람을 죽인 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거라고는
차마 생각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 반박하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보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다.
죽었어야 했다.
이런 죽은 몸에 묶인 모습이 아니라, 다시 죽어 쓰러지고 영혼은 거두어져야 했다.
"난 이제 뭘 위해서 여기 남았지?"
몸에서 힘이 빠진다.
허탈함에 피식피식 새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이 들어버린게 맞았다.
몸을 섞기도 몇 번이나 섞었고, 식사를 같이 한 건 또 몇 번이며,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같이 침소에 누우면서 꿈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 것도.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준 것도 너무 많았다.
피드 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손으로 낑낑대며 어떻게든 문을 열었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며 데레코즈를 찾았다.
"어이 골초! 듣고 있나! 부탁이 있다!"
그러나 대답은 다른 곳에서 돌아왔다.
염소의 머리를 한 집사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인을 데려와라. 할 말이 있다."
"제가 왜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그럼 비켜라. 내가 직접 들어갈테니까."
아무래도 어지간히 만만하게 보인 것 같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빙의체 하나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저는 당신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팔이 움직이지 않고, 무기도 없는 당신이 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누가 아니라디? 근데 난 너랑 싸울 생각이 없어서."
"그럼 병실로 돌아가십시오."
"어이! 골초! 들리나! 네 집사가 상당히 주제넘은 것 같은데!"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데레코즈가 나타났다.
"후... 그래, 무슨 일이지? 머리가 아픈데 오늘은 좀 쉬고 싶다.
용건만 간단히 말해주게."
"에리아를, 마녀를 만나게 해다오."
"거절하겠네. 집사, 그를 다시 지하에 데려가주게."
집사라고 불린 악마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말했다.
"그러지요."
"어이 골초! 후회할거다! 그 마녀가 나를 찾고 있을거다! 분명히 넌 후회할거다!"
"미안하지만, 그 분은 이제 무령이라네. 자네가 아는 그때 그 분이 아니실걸세.
그리고 말이야, 찾았을 때 자네가 자발적으로 나타나기라도 했던가?
말을 신중하게 가려서 하게. 이젠 자네가 말을 함부로 붙일 분이 아니시네."
"....."
침묵. 이어지지 않는 공백이 길어지지만 그럼에도 피드 린은 일어서지 않는다.
"일어나ㄱ...."
말을 하려다 말고 잘리는 데레코즈의 얼굴에 명확히 떠오르는 당혹감.
"자네... 우나...?"
"죄송합니다.... 죄송했습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무령님께... 데려다 주십시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사죄드리겠습니다.... 전 이대로는 안됩니다..."
"그건 내가 결정하는게 아니라네.
내가 자네를 모를 것 같은가?
꿈을 꿀 때는 행복했겠지. 깨고 나면 현실인 것을..."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하고 벌컥 일어서서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질질 끌며
어떻게든 데레코즈의 신발을 이로 물고 매달리는 피드 린을 보면서 데레코즈는 싸늘한 눈빛을 보일 뿐이었다.
"참, 그만하게. 내가 싸운 남자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니까."
"할 수 있잖아! 많은거 바라는게 아니잖아..! 한번만 만나게 해달라고!
그 다음에 죽이던 살리던 하라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이 개새끼들아!!"
"뭐하나 집사? 끌고 가라고 하지 않았나?"
"네, 끌고 가지요. 너무 흥미롭게 쳐다보시기에 그만."
피드 린은 이로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으나 신발을 물던 이는 집사의 발에
무참할 정도로 짓밟혀 뽑히고, 대리석 바닥에 질질 끌려 사라질 뿐이다.
신발 위에 박힌 이를 가만히 내려보던 데레코즈는 이를 주워들고 가만히 바라본다.
피드린은 그렇게 끌려가면서도 울부짖기를 반복했다.
지하실의 계단을 내려가며 질질 끌리는 몸이 계단에 턱을 찧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도중에 혀를 씹은 건지 중간부터는 발음이 새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잇기 위해 외쳐대는 모습에
집사는 슬쩍 바라보고는 피드 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그 입에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물린다.
"그렇게 분합니까?"
"으윽...! 흐읍!!! 흐그그!!"
전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말투. 오직 자신이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그 뻔뻔한 태도가 말이죠. 지금 밑바닥에 고개를 쳐박고 질질 짜면서 소리치는 모습이
당신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흐그윽!!!"
"전 보입니다. 당신의 상태가요. 혹시 기계에 대해서 아십니까?
기계는 구동회로와 전력회로가 있습니다.
흔히 구동회로가 망가지고 전력회로가 멀쩡하면 꼭 이런 모습으로 남게 됩니다.
전력은 꺼지지 않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래, 인간의 방식으로 말하면
식물인간인가요?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제서야 오래 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영혼 회로가 무사하면 너는 그 돌조각 안에 갇혀있는거야.
영혼 회로가 망가지기 전에는 나올 수가 없지.
만에 하나 구동회로가 있는 육체는 박살났는데 영혼 회로가 무사하다면
넌 아마 내 마력이 다할 때까지 갇힌 채로 존재하겠지.]
'마력....'
"아, 수명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틈틈히 채워 드리러 오겠습니다. 우후후..."
그렇게 말하는 염소얼굴은 자신을 내려다보며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불쾌한 미소를 띄우고.
"영혼 다르는데는 이골이 난 존재잖습니까 악마라는 놈들이요.
그 절망하는 표정만 있다면 전 그정도는 웃으면서 기쁘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쓰러진 남자는 깨달았다.
피드 린이 아니다. 이제 피드 린 같은 것은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 남은 것은 끝없이 고통받을 일만 남은 체헤게 로드원이라는 것을.
"인사하십시오. 당신이 버리려고 발버둥쳤지만 끝끝내 당신을 옭아매는 선택들에게.
어느 버려진 날들에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