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15화 (215/303)

〈 215화 〉 음주클럽

* * *

삐삐는 상담소로 돌아오고서도 한참을 깨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새근새근 들리는 숨소리가 약간 정도는 걱정을 덜어주었다.

그동안 나는 꾸준히 에스트로와 교대로 삐삐를 돌보면서 지내야 했고,

그런 와중에도 게비디와 플로라는 꾸준히 찾아와 안부인사를 건네며 선물같은 것들을 두고 갔다.

덕분에 발레리아는 내 대신 가게를 보아야 했다.

"UTUI­Q67 만들어놓은 거 있었을텐데, 에스트로. 책상 위에 약병 못봤어?"

"지금 몇 병째 쓰는거야? 부작용은 없어? 그렇게 막 먹여도 돼?"

"괜찮아. 내가 만든건데 그정도는 알지. 벌써 삐삐가 깨어나지 않은지도 이틀이야.

뭐가 아깝다고 그런걸 아끼겠어."

"그것도 그렇지만, 일단 좀 쉬지 그래. 삐삐 간호한다고 잠도 제대로 안 잤잖아."

"괜찮아. 이틀 정도로는 안죽어. 익숙하기도 하고."

"내가 볼게. 조금이라도 자."

"영 못미더워서 말이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깨워줄게."

"후... 그래 그럼. 부탁 좀 할게."

나는 삐삐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소파에 누워 잠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몸 위에 이불이 덮여있고,

에스트로는 삐삐를 바라보다 꾸벅꾸벅 졸고 있었으며

삐삐는 여전히 새근거리고 자고 있었다.

"난 이런 그림은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어나셨어요?"

어느새 발레리아가 따뜻한 차를 내어왔다.

"아, 응... 좀 쉰 것 같네."

"다행이네요. 벌써 오후 6시가 넘었어요."

"삐삐는 별 일 없고?"

"네. 잘 자고 있어요. 아직 어린 아이니까 푹 자는 것도 도움이 되겠죠.

이전에 저에게 주셨던 책들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보았는데,

거기 나온대로라면 어린 용은 숙면을 취하는게 단순히 휴식의 의미가 아니라고 하더라구요.

rebuilding, 그러니까 재구축의 의미가 있다고 했어요."

"재구축이라고 하면 신체적인 요소?"

"그것도 물론 없다고는 못하겠지만요, 아마 마력관련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해요.

요 며칠간 삐삐가 경험한 일이 그런 것들이니까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에요. 강한 아이니까요."

하긴. 누구딸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걷고 다시 약품을 끓이고 있는 기구 앞으로 갔다.

"또 만드시려구요?"

"그럼. 좋다는건 다 먹여봐야지. 삐삐도 그렇고,

저기서 진빠져서 졸고 있는 애아빠도 그렇고.

나 아니면 누가 얘들을 챙겨 먹이겠어."

"이제 정말 어머니같으시네요."

"뭐 언제는 안그랬니?"

"솔직히 조금은 자매같다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나도 많이 성장했거든? 신장 면에서도, 흉부 면에서도."

"아, 네 가슴이요?"

"그래. 흉부 지방."

발레리아는 그런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왠지 또 진 기분이다.

"너 왠지 짜증나."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대공이들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기껏 회의는 하겠다고 불러놓고 고생만 시켰네."

"성과로 보여주셔야하지 않을까요?"

"그래야지. 분명 시도라의 마운틴엘프 부족을 와해시킨 팔라딘도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말이야."

"아, 그 부패의 마력을 다룬다고 했던 팔라딘 말인가요?"

"어. 살짝 아귀가 들어맞잖아. 백색의 고원 어딘가에 숨어있던 사람,

종교적인 요소에 관심이 많고, 부패에 적성이 있으면서도 팔라딘에 가입이 가능하면서

교회에서 정체를 공개할 수 없는 사람."

"젤렌지군요?"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대체 교회에서 쫒기던 사람이 어떻게

팔라딘으로 들어간 건지는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자세한건 몰라도 일단 확인하실 생각이시죠?"

"그래야지."

"이제 막 평화같은걸 좀 보나 했더니 또 떠나시네요."

"정리할건 해야 하니까. 왜 하필 이 시기에 셰릴 린이 쳐들어온건지는 몰라도

이쪽은 덕분에 일거리가 많이 밀렸잖아."

"결국 저도 덩달아 피곤해졌고요."

"너 어째 점점 나를 은근슬쩍 놀리는 것 같은데?"

"그럴리가요~"

"그래,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할게."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할래?"

"어떤 술로 꺼내드릴까요?"

"음, 글쎄."

그리고 똑똑 들리는 노크소리.

내가 문을 열면 그 앞에는 헉헉대며 숨을 고르는 플로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 위로 애니가 뿅 솟아올랐다.

"어쩐일이야?"

"하아...하아... 자꾸 놀러 가겠다는걸 못하게 막잖아요.

그 대머리가..."

"시종장?"

"네. 몰래 빠져나왔다구요."

"놀러 왔다는 이야기네?"

"헤헤..."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격식을 차리도록 만들어진 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고

한결 편해보이는 옷만 남긴 채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삐삐는 아직 안일어났죠?"

"그래. 좀 잘 자네. 얼마나 미인이 되려고 저러는지."

:분명 무령님을 닮아서 예쁜 아이가 될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네 나도."

그나저나 얼마 전부터 제쪽으로 보내신 그 늙은 엘프 말인데요."

"아, 시도라?"

"네, 시도라요. 지시한대로 처리하면서 정보를 얻어내고는 있는데,

일단 군대를 보내는 것도 일이라서 엠페레스 쪽에 협조도 구해봐야할 것 같고

걸리는게 한두가지가 아니던데요."

"그래서 나도 삐삐 일만 정리되면 직접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어.

문제는 삐삐가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는 거고."

"네, 일단 저희도 그 문제는 파악하고 있었기도 해서 엔시온 편으로 몇명 사람을 보내두긴 했는데요.

교국쪽에서 일방적으로 연락을 차단하고 있어서 소통이 안되네요.

팔라딘을 물려달라고 말이라도 해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거야. 혹시 오늘 업무 남은건 있어?"

"아니요? 있어도 오늘은 더 안할거에요. 그러려고 도망친 거니까요."

"그럼 너도 술이나 한잔 할래?"

"그럼 좋은 술을 가져올까요?"

"됐어. 그냥 있는대로 마시려고."

발레리아는 나와 플로라의 앞에 잔을 한 잔씩 놓고 투명한 화주를 따랐다.

그 옆에는 토마토 카프레제가 놓여있다.

"죄송합니다. 상담소도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번 뒤집어진 상태여서 안주가 마땅히 없었어요.

냉장고고 창고고 싹 다 전력도 나가고 깨지고... 어휴... 업체를 불렀어야 하는건데."

"괜찮아. 카프레제 정도면 충분하니까. 그렇지 플로라?"

"네, 저도 카프레제 좋아해요!"

우리는 가볍게 잔을 맞부딫히고 술잔을 기울였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은 목구멍을 긁고 지나가며 심장을 데우는 것 같았다.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는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뭐야, 언제 일어났어 에스트로?"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모를 수가 없지.

늑대들이랑 그닥 친하지 않아서 술에는 민감해."

"늑대? 그 교국에서 파견한다는 노예 해방집단?"

"그건 또 뭔지 모르겠네. 내가 말한 늑대는 맥다이어야."

"맥다이어?"

내가 되물으면 에스트로는 술잔을 살짝 바라보고는 진지한 얼굴로 입은 다문채로

한숨 비슷한 것을 뱉었다. 그리고는 술을 한모금 마시더니 인상을 팍 쓰고 잔을 내게 돌려준다.

"역시 이런건 나랑 안맞아. 혈압이 오르잖아."

"너 나한테 술 먹지 말라는 이유가 혹시?"

"응. 피맛이 안좋아."

"너한테 줄 생각 없거든?"

"언젠가는 또 모르잖아?"

"마실 생각 없으면 들어가서 자. 헛소리 하지 말고."

"후우... 저도 한잔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발레리아가 에스트로에게도 한잔 건네고 나서 넷은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술잔을 들고 대화를 시작했다.

"애초에 그래서 시도라를 제국에 편입해오기 위해서 대공을 소집하셨다는 말씀이시죠?"

"그런거지."

"그런데 이제 저희 쪽에서는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인원이 많지 않아서

엔시온을 통해서 보낸 인원이 전부고, 그마저도 비전투인원이고요?

그러면 안정적으로 마운틴엘프를 규합해서 데려오는 것보다 교국에서

먼저 마운틴엘프를 없애는게 빠르지 않을까요?"

"그렇기야 하겠지. 나도 살짝 불안해. 그래서 빨리 합류하려고 하는 거기도 하고.

근데 그렇다고 아직 저렇게 누워있는 삐삐를 놔두고 갈 수도 없고, 삐삐를 데리고 가기도 애매하잖아.

그럼 삐삐를 얘한테 맡겨? 나 출발 못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플로라는 내 옆에 앉은 에스트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플로라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는 듯 바라본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제 생각에 딱 최적인 사람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뭘?"

"마운틴엘프의 구역으로 보내서 팔라딘을 정리하고 엘프들을 제국으로 데려오기에 적합한 사람이요."

그렇게 말하는 플로라의 표정을 보면 누구를 말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내 옆에 앉아서 아직도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방황하는 눈빛.

분명 나도 이 남자가 최적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모습을 보면 영 못미더운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생각해 에스트로?"

"나도 삐삐 걱정되는데? 여보야, 나 진짜로 그냥 보내려고?"

"너 아니면 누가 가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발레리아씨. 그래도 우리 이제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하는데

발레리아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뭐... 집이 조금 좁기는 했어요."

"발레리아씨 마저도..."

에스트로는 배신당한 표정으로 약간 침울해하다가 고개를 든다.

플로라와 눈이 마주친다.

에스트로는 술잔을 든 손을 어떻게든 입가로 옮기고 태연한 척 목 너머로 넘긴다.

그러나 확실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어디서 이런 식으로 긴장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어. 이게 우리 동네야.

"왜...왜 절 그런 눈으로 보시죠?"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시면 좋잖아요."

"점수를? 누구한ㅌ...."

에스트로는 고개를 돌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물었다.

"다녀와?"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어?"

"네 부탁이라면."

"대체 왜 그러는거야? 나 일부러 창피하라고?"

"너도 나처럼 오래 기다리고 찾아다니면 주변 시선같은게 좀 무뎌질거야.

표현할 수 있다는게 얼마나 좋은건데."

"됐어 플로라. 내일쯤 출발시킬게. 어휴 이 화상..."

내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억지로 돌리면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술잔을 들고

벌컥벌컥 술을 마시고 있는 발레리아와 애니를 꼭 끌어안고 얼굴이 빨개져서는

이쪽을 바라보고 입을 떡 벌린 채로 '우와...우와.....'만 반복하는 플로라가 보였다.

탁 하고 술잔을 내려놓고 발레리아가 말했다.

"술을 좀 더 가져와야겠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발레리아는 신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레리아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면 나는 에스트로에게 말했다.

"자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반성할게."

"그래."

플로라는 카프레제를 집어 입으로 넣으면서 애니의 몸 뒤로 얼굴을 살짝 묻는다.

그러면서도 곁눈질로 나와 에스트로의 시선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게

꼭 보면 안될걸 몰래 훔쳐보는 사춘기 여자아이 같았다.

머쓱해져서 괜히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면 잔이 따라붙는다.

쨍 하는 소리가 나고 괜히 허공을 보면서 술을 비웠다.

"쓰다..."

"난 그래도 좋다..."

에스트로는 술이 몇 잔 들어가더니 금새 얼굴이 붉어져서 헤실한 미소를 띄우고

내게 기댔다.

"술이 왜 이리 약해...?"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깨닫는 사실.

생각해보니 뱀파이어인데, 혈중 알콜 농도가 상당하겠구나.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며. 술도 약한게."

나는 에스트로를 눕히고 무릎베개를 해준 후에 이불을 덮어주었다.

"얘는 신경 끄고 우리끼리 좀 더 마시자."

술병을 들고 돌아온 발레리아는 돌아오자마자 내 무릎 위에 누운 에스트로를 보고

곧장 술병을 반쯤 비우더니 내게 흐뭇한 얼굴로 말 대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리고 새로 연 술병은 어째 이전에 마신 화주보다 더 독한 술 같았다.

"너 이거 어디서 가져왔어?"

"파혼주라고 아시나요?"

"안돼, 기각. 다시 연구실에 가져다 둬."

"네..."

"재도 취한건가 애들 상태가 영 이상하네..."

하나는 누워서 별 애교는 다 부리고 있고, 하나는 술을 엄청 마셔대고.

다른 하나는 사춘기 여자애도 아니고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근데 플로라, 술을 마시기는 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잔을 들면 옆으로 짠 하는 잔이 따라붙는다.

"건배!"

"건배!"

"건배!"

"건배~"

"에스트로, 넌 그냥 누워있어. 술 마시지 말고. 박자도 안 맞잖아."

"히히... 좋당..."

에스트로는 그렇게 웅얼거리며 꼼질거렸다.

아마 잠꼬대 혹은 작은 뒤척임 같은 거겠지.

에스트로... 내가 얘 데리고 술을 또 먹나 봐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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