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 숙면
* * *
밤새 술을 마시고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하면
널브러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속풀이는 해야 하니까 일단 포션은 준비해 뒀지만서도
기분을 내는 것도 중요하니까 일부로 얼큰한 스프를 끓여두었다.
요리는 잘 못하지만 설마 데레코즈처럼 못먹을 요리를 만들지는 않겠지 하면서
고추를 썰어 불린 패패루 육포와 함께 기름에 볶다가 양파나 부추, 양배추 같은 것들을
넣어 매시키나 뼈를 우린 스톡을 넣고 끓였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게 골탕면 레토르트 박스였기에
사골을 부어넣고 면도 넣어 완성했다.
"맛이...있겠지...?"
그렇게 요리를 준비하고 있으면 어느새 일어난 발레리아가 내 옆으로 다가와 상차림을 준비했다.
"벌써 일어났네? 술 많이 마셨잖아. 머리 괜찮아?"
"네. 다행히도요. 술에 약한 편은 아니라서."
"다행이네. 이거 그럼 세팅 하고 애들 좀 깨워줘."
"네. 제가 할게요."
"난 잠시 삐삐 좀 보고올게."
"네..."
나는 삐삐의 방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곳에는 여전히 이불을 덮은 삐삐가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벌써 3일째네. 언제 일어나려고 그러는거야..."
삐삐의 침대 옆으로 놓은 가습기에는 꾸준히 UTUIQ67를 보충해두었다.
원래는 링거를 쓸 생각이었는데 삐삐의 비늘을 주삿바늘로 뚫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먹이기도 하고 가습기로 돌려놓기도 하는 중이다.
이렇게 팔을 만지면 아직도 금방이라도 손을 꼭 잡아줄 것 같은데
잠만 자고 있는게 마음이 아팠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삐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나서 나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밖에는 이미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사람들이 준비해둔 포션을 마시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가끔은 이런 얼큰한게 땡긴다니까요? 성에 있는 요리사들은 이런 요리를 안해주니까요."
"아, 그럼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필요하시면 제 것도 드시죠."
"아뇨아뇨, 그럴 수는 없죠. 발레리아, 남은 거 있어?"
"있긴 한데 무령님도 드셔야 하니까요."
내가 그 앞에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옆으로 자리를 비켜주는 플로라의 옆에 앉아서
나도 식사를 시작했다.
"나쁘지 않네."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다. 요즘 들어서 비싸고 좋은 것들을 자주 먹고 다녀서 그런가
큰 감흥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에스트로는 식사하고 바로 출발하는거야?"
내가 물으면 에스트로는 나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썩 탐탁치 않아 보이는 표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 나 아니면 갈 사람도 없다며.일단 그 팔라딘들만 몰아내면 되는 거잖아?"
"그렇다고 봐야지."
"혹시 문제 생길 것 같으면 그냥 제 이름 대고 밀어버리세요.
엘프들만 안전하다는 가정하에 솔직히 눈치볼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으니까요."
플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애니도 그 뒤에서 고로롱거리고 있었는데, 그때 보인 손등을 보고 나는 플로라를 째려봤다.
"플로라."
"네?"
"손 앞으로 내밀어봐."
"네...?"
"빨리."
"아하하... 괜찮은데..."
마지못해 내민 손등에는 어느새 또 숫자가 줄어 6이 되어있다.
나는 손등을 또 찰싹찰싹 때려줬다.
"누가 누굴 지켜주는거야 너희는 대체?"
"누가 누굴 지켜주다니요, 서로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할까요...?"
애니는 플로라의 품으로 뛰어 들어 맞은 손등을 핥아주고 있다.
"그래, 알아서 잘 하고 있는 모양이네. 애니도 크게 불만은 없는 것 같고.
서로서로 좀 그, 말 안해도 알지? 잘 챙겨."
"네..."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에스트로도 괜히 내게 손을 내민다.
"나도 여기 여기 좀 아픈 것 같은데. 나도 좀 봐줄래?"
"네~ 아무 이상 없네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말 대신 포크를 휘적이는 에스트로를 보면
괜히 놀려주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디 봐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에스트로의 손을 끌어당겨 확인해본다.
큰 상처는 없었다. 사실 아무 상처도 없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히 삐치지 말라고 간단히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손을 꼭 잡아줬다.
"너도 어디 가서 다치지 말고."
"....으..응...."
"해달라고 해놓고 얼굴 붉히는건 또 뭐야?"
"아니... 그냥..."
"애한테 질투도 좀 하지말고. 나이먹고 뭐하는거야."
"응..."
에스트로는 잠시 머쓱한듯 고개만 끄덕인다.
그제야 손을 놓고 식사를 마쳤다.
발레리아는 바로 설거지를 시작했고,
플로라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얼굴을 잔뜩 붉히고는 화들짝 돌아갔다.
어쩐지 애니의 표정이 조금 한심한걸 보는 표정이기는 했는데, 뭐 괜찮겠지.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는 내가 옷장에서 정장에 붙어있던 무령 뱃지를 떼서
에스트로의 멀끔한 옷에 달아주고는 어깨를 두드려주는 걸로 오전 일과를 마쳤다.
"그... 좀... 이러고 있으니까..."
"왜, 부부 같아?"
"좀 그러네..."
"잘 다녀와 여보."
"...!?"
"뭘 그렇게 놀라. 빨리 다녀오기나 해."
"....."
에스트로는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도 그런 말 하는 것 치고는 얼굴이 생각보다 빨간데?"
"안하던 짓을 하니까 그렇잖아..."
나는 적당히 일축하고 에스트로의 등을 떠밀어 내보냈다.
그러면 설거지를 하면서도 이쪽을 보던 발레리아가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신혼이네요."
"가게나 열자..."
오랜만에 연 가게의 첫 손님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냥 겸사겸사 와 봤지. 늘 마시던 걸로 줄래?"
"늘 마시던 거라고 해봐야 우리 가게 많이 오지도 않았잖아?"
"고화수 시키는 사람은 나밖에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는 아르간티아는 가게 의자에 앉았다.
"겸사겸사 온 것 맞아?"
"좀 신기해서. 원죄의 반지의 기운이 두 개가 겹치는건 흔한 일이 아니잖아?"
"아, 그것 때문에 온거야?"
"그렇긴 했는데, 간 모양이네?"
"잠깐 나갔어."
"그렇구나. 그러면 둘이 왜 같이 있는거야?"
"애 엄마랑 애 아빠랑 같이 사는게 뭐가 이상해?"
"그렇ㄱ....뭐? 둘이 결혼했어? 애가 있다고? 왜? 언제부터?"
"놀라네?"
"놀랄 일이니까!"
"놀라기도 하는줄 몰랐는데."
"워낙에 말이 되는 이야기여야지. 애초에 번식 활동이 전혀 필요가 없는 두 사람이잖아?"
"너도 딸 키워봐. 그러면 이해가 좀 갈거야."
"아직은 먼 이야기네."
"그렇겠지."
"딸을 좀 봐도 될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발레리아에게 가게를 맡기고 그를 집으로 불렀다.
삐삐의 방 문을 열어주면 아르간티아는 안으로 들어와서 삐삐를 바라보고 놀라워했다.
"천각룡이네? 방에 가득찬건... 회복효과가 있는 약품인가?
아무리 봐도 간단한 수준은 아닌데. 딸이라는게 이 꼬마야?"
"응. 이름은 앨리스 삐삐 세리타인으로 지었어."
"가운데 삐삐는 뭐야?"
"애칭이지."
"어디서 이런 귀여운걸 주워온건지... 나도 그럼 선물을 하나 해야지.
권능중에 쓸만한게 있었던 것 같은데."
"많이 쓰는구나?"
"그럼."
"아픈 애한테 너무 부담가게 하지 말고. 3일째 일어나지도 않고 있으니까."
"걱정마. 괜찮을테니까."
"참 우리 딸은 여기저기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라서 부러울 지경이야.
누가 일부러 하려고 해도 이렇게 많이 받지는 못할텐데."
"과연 이게 단지 이 아이만 생각해서 주는 거겠어?
그동안 마땅히 받아야 했던 것들을 이제서나마 나눠주는거지.
이건 네 몫이었어."
"그렇구나."
"대화에 막힘이 없는 걸 보니 너도 여러모로 많이 알아낸 모양이네?"
"어쩌다 보니까."
"이건 원래 아버지께 받을 생각이 없었던 권능이야.
원래 내가 쓰라고 하신 거였는데, 아무래도 좀 성미에 맞지 않아서 남겨두던건데.
높은 미소라고 하는 권능이야."
"요즘 말로 풀어서 설명해줄래?"
"매력."
"어쩌자고 이런걸 여태 안썼대?
이런걸 썼으면 사람들한테 배신당할 일도 없었을텐데."
"글쎄. 아무래도 손에 잡히질 않았달까. 나랑은 안 맞아.
아무래도 이 꼬마한테 주려고 아껴둔 모양이지.
그리고 말이야. 너 그 말투. 예전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네.
이제 정말 내가 알던 그 시절의 느낌이 나."
"많이 편해졌나봐. 이 공간이며, 사람들이며."
"성격나오는구나?"
"그런거지."
"아무튼 오랜만에 얼굴 봐서 좋네. 네 집에 얹혀 산다는 그 원죄한테도 이야기 전해줘.
이름이 뭐였더라..."
"에스트로."
"그래.. 걔."
"벌써 가게? 아직 고화수 다 안됐는데?"
"물이나 마시고 갈게. 돈은 다음에 줘도 되지?"
"돈은 무슨."
그는 빙그레 웃고 손을 흔들더니 가버렸다.
그가 떠나는 길을 간단히 배웅해주고 나서 나는 삐삐의 방에서 멍하니 누운 삐삐를 바라보았다.
꼬물. 왠지 꼬물거린것 같은 작은 손을 가만히 잡아준다. 착각일 수도 있었지만
왠지 기분이 좋았다. 느낌이 좋았다. 일어날거라는 생각. 그 순간의 떨림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한번 더 꼼지락거리는 손길과 온도가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삐삐는 작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암...마마..! 아치미야?"
"삐삐야...!"
"잘자떠."
"그래, 잘 잤으면 됐어."
나는 삐삐를 쓰다듬어주었다.
삐삐는 일어나자마자 기지개를 쭉 펴더니 배가 고픈지 폴짝 뛰어 바닥을 박차고
도도도도 달려서 냉장고를 열고 패패루 육포 같은 것들을 꺼내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삐삐가 너은 지뽀 어딧서?"
"아... 그건 버렸어. 못먹게 됐거든. 다음에 새로 사줄게."
"웅..."
"오늘은 공부 안해도 돼. 엄마랑 같이 푹 쉴까?"
"구래! 근대 삐삐 배구파."
나는 바로 유모차에 삐삐를 태우고 가게 문을 나섰다.
발레리아가 그 모습을 보고 멈칫 하더니 눈물을 살짝 글썽이고 웃었다.
"무령님, 그 유모차는...."
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떤 의미인지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삐삐를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다.
식당가를 지나면서 코를 간질이는 냄새에 삐삐가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고
유레크로스식 쇠고기 볶음, 통돼지 구이, 연어 스테이크같은 것들을 먹었다.
오랜만에 깨어나서인지 삐삐는 질리지도 않고 먹어댔다.
"맛있어?"
"마시떠..."
어쩐지 좀 더 크기가 커진 기분도 들었다.
결국 나중에는 삐삐의 크기가 감당이 되지 않게 되면 집을 옮겨야 할 텐데.
그때쯤 되면 어떻게 할지도 벌써부터 고민이 되었다.
그렇게 식당가를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내 앞으로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나를 의식하지는 못한 것 같았는데, 내 앞을 스쳐가는 것을 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해백씨."
발걸음을 멈춘 남자는 나를 돌아보고 인사를 되돌려준다.
"안녕하세요."
"어디 가는 길이세요?"
"아, 저 사람을 찾고 있어서요."
"사람을 찾으신다고요?"
"금발머리의 삐삐라는 아이를 찾고 있습니다."
"삐삐 차자? 왜?"
유모차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빼꼼 바라보는 삐삐와 눈이 마주친 해백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의 눈 같은 퀭한 눈빛 속의 작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마 한동안 삐삐를 찾겠다고 고생을 한건 분명해 보이는데
어쩌다 저렇게 된 건지, 무슨 고생을 한건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저 눈빛이 살짝 두렵기도 했다.
살짝 그의 눈을 경계하며 유모차를 잡아당긴다.
유모차에 이중으로 결계를 걸어 보호마법을 새기면서 그를 주시하면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의심받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표정을 풀었다.
"하하... 그냥 흥분해서 그런 거에요. 말이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위해를 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묻는다.
"혹시 이 애 이름이...?"
"삐삐에요."
그제서야 해백은 멍하니 중얼거리다가 허탈하게 말했다.
가만 놔두면 금방이라도 울 것도 같은 얼굴이었다.
"드디어 찾았...네요...."
나와 삐삐는 영문도 모른 채로 우리 앞에서 길을 막고 혼자 독백을 시작한 남자를 바라보며
괜히 말을 걸었던 걸까 하는 후회를 했다.
해백은 뭐라고 중얼대다가 의지결연한 눈으로 엔시온을 찾아가겠다고 말하더니
그녀의 저택쪽으로 달려가버렸다.
여전히 바쁘고 정신없는 사람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이전번에 만날 때 까지만 해도 저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다 사람이 저렇게 변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마마, 삐삐 꽉이야."
"답답해?"
"응. 삐삐차 문 여러두 대?"
"반짝반짝하면 열어도 돼."
"장깐만...."
그러다가 잠깐.
"근데 삐삐야, 너 옷 안입지 않았어?"
"안니벗서."
"그럼 안돼. 조금만 참아."
"아라떠... 그럼 언제 여러두 대?"
"집에 가서. 금방 갈거니까 좀만 참아."
"응..."
그렇게 삐삐의 짧은 마실은 끝이 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