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블러드엘프
* * *
"이게 엘프라고? 너무 이질적으로 생기지 않았나?"
"종이 다르답니다. 일반적으로 아는 하이엘프와 다르게 이 놈들은 마운틴 엘프라는
아직도 전통운운하며 산속에 쳐박혀 사는 병신같은 놈들이죠."
"아, 그래서 순수의 폭포를 점거하고 있다 이거구만?"
"네. 그렇습니다."
팔라딘 두 명이 그렇게 대화를 마치고 나서 장발의 팔라딘이 검은 빛으로 불길하게 빛나는
검을 휘두른다.
바닥에 짓밟힌채 컥컥대던 마운틴 엘프의 목이 또 하나 날아간다.
목이 날아가자마자 팔라딘은 그 몸에 손을 뻗었고, 마운틴엘프의 희미한 생명의 온기가 남아있던
그 몸이 천천히 변색하기 시작한다.
"야가벨!"
도망치던 마운틴 엘프는 몸을 돌려 죽은 엘프를 향해 달리지만 그것 역시도 수많은
팔라딘에 의해 가로막힐 뿐이다.
"그나저나 도망치는 것 하나는 정말 잘하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일부러 도발해서 끌려나온 엘프를!"
촥 하고 휘두른 메이스에 머리를 얻어맏고 또 한번 바닥을 구르는 엘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바들바들 떨다가 겨우 몸을 일으키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죽은 동료의 시체와 팔라딘 군단이다.
"잡는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게 말하며 팔라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운틴 엘프들을 죽여나간다.
숲 한가운데 군데군데 부패해 초목이 죽어버린 땅 위에는 엘프의 뼛조각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게 죽은 엘프는 벌써 열 여덟. 상당히 도망을 잘 다니고 있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죽은 이들의 빈자리가 결코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너희는... 너희는 성스럽지 않아... 이 쓰레기들..."
겨우 힘을 짜내서 그들을 저주하는 마운틴 엘프 하나의 팔이 다시 축 늘어진다.
그 등에 꽂힌 검은 마치 엘프의 생명력을 뽑아내려는 듯 일렁이고,
순식간에 변색되어가는 피부를 보며 경악하는 엘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무력함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잘 들어라 엘프 쓰레기들. 순순히 걸어나와 너희 본거지를 말해라.
그럼 말한 녀석은 살려주지. 동료를 팔아라. 그럼 살 수 있다.
그건 너희 일족을 구하는 길이다. 어차피 말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다고 하잖나?"
그 말은 마운틴 엘프들을 분열시키기에 충분했다.
"어떻게 동료를 팔아요..! 이 땅은 선조님들께서 지켜오신 땅인데,
이 땅 위에서 마운틴 엘프를 몰아내겠다는 이들에게 어떻게 놀아난단 말입니까!"
"하지만 저들은 정말 우리를 모두 죽일 겁니다. 조금이나마 동료를 남기고
그들이 다시 대를 이어주길 바라야 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숲을 다시 찾길 바라야 합니다!
물론 아프고 괴로운 일입니다만, 때로는 고통을 감내해야 할 필요도 있는 겁니다.
저를 저들에게 넘기십시오!"
"저들이 우릴 죽이지 못하도록 도망치면 됩니다! 굳이 가능성을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전우를 죽이고 살아남은 이가 과연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시도라님께서 계셨더라면 뭐라고 하셨을까요..."
"그분께서는 아마 이렇게 될걸 아셨는지도 모르지..."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뒤섞이는 목소리는 차마 그냥 흘려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영악하구나. 벌써 동료를 팔아넘기는 놈들도 나오고 말이다.
이 숲에 불을 지르겠다. 물에는 독을 풀 것이고 너희는 이제 단 한명도 살려보내지 않는다."
동료를 팔았다는 말. 누군가가 벌써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동료를 져버렸다는 말이 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때
뒤이어 이어지는 불이라는 말은 그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멸족. 그렇게 간단하게 연상될리 없었던 단어가 이토록 쉽게 체감이 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망할 거였다면 차라리 시도라님을 따라갈 걸 그랬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었는지도 모르지."
그들은 도망치면서도 누군가 혹시 이 곳을 아직 도울 수 있을 이를 위해
하늘로 무의미한 마력을 쏘아올렸다.
그건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함을 수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큰 결정이기도 했다.
"천신님... 저희 마운틴 엘프를 굽어 살피시고..."
하늘로 솟은 잿빛 마력은 은은하게 빛나다가 팡 하고 터져 신호탄과 같이 반짝여 떨어진다.
"저기군."
팔라딘은 신호가 터진 곳으로 군대를 몰았다.
이미 손에 든 횃불이 타오르고 잰 화살촉에 기름먹인 천이 묶였다.
그들의 백색 갑옷에 비쳐 보이는 불은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쏘시죠."
마침내 장발의 팔라딘의 지시에 맞춰서 날아들기 시작하는 화시들이 숲에 박히기 시작하면
작은 수풀, 건초따위가 타닥이기 시작한다.
불은 사그라들 것 같이 약하게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덜컥 크기를 키운다.
그리고 나무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그 뒤로 잿빛 엘프들이
도약하며 아직 살아있는 숲 사이로 숨어들고 있었다.
"대체 너희가 바라는 신이 너희에게 뭘 해주었기에 이렇게 까지 하는거냐?
너희의 신이 우리 신의 이름 아래 패배하고 굴복했다는 것이 아니냐?
어쩌면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 말에 누군가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나이가 많은 엘프였다.
"그대들은 신을 단지 전쟁의 수단으로 보고있는 것이 아니오?
신은 마땅히 우리가 지지하고 우리를 쓰러지지 않게 해 주시는 은혜를 내려주시는 분이시지
사욕을 위해 이용되고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거요..."
"아아, 좋은 말이지. 그런데 신이 그래서 뭘 해줬지?
인간은 신보다 위대할 수 있는데. 왜 신에게 집착하는 걸까?
신은 뛰어넘어야 할 존재다. 인간에게 늘 새로운 자극을 부여하는 존재이고
인간이 추구해야할 목표의 정점이며, 인간이 신이 부여하던 것들을 짊어지면
그제서야 우리는 깨닫게 될 거다. 그 전까지 신은 그저 동기와 영감일 뿐이지."
"뭐?"
팔라딘의 메이스가 순식간에 돌아선다. 그들의 옆에 서 있던 장발의 팔라딘은 웃으며 대답한다.
"이래서 종교쟁이들은 안된다니까. 야망이 없어.
신을 뛰어넘을 능력이 있는데도, 그 가능성을 폄하하고 스스로 구속되기를 원하지.
개 밑에서 자랐으니 사자마저도 야성이 없는거다. 그게 좋기는 했어.
그저 신이라는 이름 몇 번 팔고 회개한다고 말하면 나같은 버러지도 팔라딘에 덜컥 들여주잖아?
잘 봐라. 내가 하려던 짓과 너희가 한 짓이 뭐가 다르지?
숲을 불태운 것도, 죄없는 엘프를 같잖은 이유를 들어 학살한 것도 똑같다.
그런데 왜 너희는 신을 위해서라는 궤변으로 그걸 정당화하려고 하는건가?"
"닥쳐라 이단자! 널 이곳에 들이는게 아니었다!"
"이미 늦었어. 난 이미 충분히 부패를 진행시켰고 힘을 길렀으니까.
잘 들어라. 신의 이름을 빌려서 너희가 채우려고 한건 신앙이 아니라 탐욕이다.
그저 저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고,
집단을 이루기 위해서 신이라는 큰 틀을 만들고 거기에 억지로 스스로를 끼워맞춘 것 뿐이야.
사실 신이 아니더라도 큰 무리에 소속되어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했겠지.
뭐가 다르지? 신이 이곳을 불태우라고 했던가? 아니, 내가 말했다.
신이 엘프들을 죽이라고 했던가? 아니. 그것 역시 내가 명했다.
그럼 다시 잘 봐라. 너희가 따른 신은 나인가?"
"미친놈...!"
기어이 메이스가 날아든다. 그러나 그 메이스는 장발의 이단자에게 닿기도 전에
산화하여 녹이슬고 기어이 삭아 스러져버린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붉은 녹가루가 날리며 메이스는 사라진다.
"너희가 바라던 신이 너희에게 뭘 줬지?"
엘프들의 눈이 흔들린다.
"우리는... 평화와... 마력을..."
팔라딘은 멈춰서서 말했다.
"신성력과.... 용기의 근간을...."
결국 그것 뿐이다. 그렇다면 그건 내가 주지.
그럼 날 따를 생각이 있나?
"웃기는 소ㄹ...!"
쾅
그 말을 꺼냈던 팔라딘은 그 즉시 날려져 나무에 쳐박히고 불타 쓰러지는 나무에 깔렸다.
고기 타는 냄새가 잠시 풍기면 그는 미동도 없이 빛나는 갑옷만, 찌그러진 갑옷만 남긴채 누워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주는 충격은 그게 아니다.
그 팔라딘을 공격한 것이 이단자가 아니라 그저 그 옆에 서 있던 동료 팔라딘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오, 신자가 생긴것 같은데. 더 없나?"
하나 둘 뒤로 물러서는 팔라딘과 앞으로 나서는 팔라딘이 나뉘기 시작한다.
"무슨.... 이단을 따른다니 제정신이냐?!"
"사실 너희도 알고 있었잖아? 우리가 무고한 사람들을 몰아내고 있다는걸.
신의 이름아래 그런 일을 해 온 자들이 신의 뜻이 아닌 일을 해왔다면
결국 그게 가장 큰 이단 아닌가? 그럼... 난 뭐가 되는거지?"
제일 부정하기 힘든 것, 내가 알고 믿어온 모든 것들을 부정해야하는. 그 순간이 올 때
진실에서 눈을 돌리느냐, 그게 아니라면, 내가 해온 것을 정당화하고 선택을 바꾸느냐.
그도 아니라면 결국 진실을 마주하고 참회하느냐.
진실은 가혹하고 냉정한 것이고, 결코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인간은... 결코 자신이 틀렸음을 간단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 다시 묻는다. 팔라딘이 아니었던 자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합당한 명분을 제시하겠다.
신을 위해서라는 궤변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인간의 탐욕을 위한 길을 제시하겠다.
너희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수치로 보여주고 증거로 보답하겠다.
그리고 또한 기다림을 배신당한 엘프들이여.
내가 너희에게 살 길을 제안해주겠다.
이제껏 모멸감 속에 핍박받던 나날을 탈피하고
이제 너희 손에 칼자루를 주마. 타인을 피하고 배척하던 너희에게
억압의 규율 대신 선택할 자유를 선사하지. 그 첫 선택이다.
죽는 자가 될지, 죽이는 자가 될지 선택해라."
그의 말은 묘한 끌림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돌아갈 길이 없었다.
엘프들에게 고향과 같았던 숲은 불타고 있었고,
이미 자신들을 팔아넘긴 배신자는 나왔으며
항복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말.
오히려 항복하지 않으면 죽을 뿐이다.
엘프들은 하나 둘 무기를 내려놓고 불타는 숲에서 나왔다.
"엘프들은 이렇게 하겠다는군?"
이단자의 말 한마디에 팔라딘들 역시 상당수가 걸어나왔다.
이미 교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보장조차 되지 않는다.
돌아가도 자신들은 이미 생겨버린 의구심을 안고 교회에 대한 불신을 품어야 한다.
이전처럼 순수하게 메이스를 휘두를 수 없다.
그리고 제안을 거절했던 팔라딘은 이미 찌그러진 갑옷에 짓눌려 안식조차 얻지 못했던 것을
그들 스스로가 눈으로 마주했다.
엘프 부족 인원의 40%, 그리고 따라 나왔던
팔라딘 부대 100인중 사망한 1인을 제외한 99인 모두가 그를 따르기로 했다.
그는 웃으며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늙은 엘프에게 말했다.
"이정도면 나름 만족스럽군. 너희는 선택을 했고, 패배자로 남았다.
이미 승리자가 된 엘프들도 있겠군? 뭐. 그 선택이 너희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길 바란다."
그렇게 말하고 이단자들의 무리는 숲을 떠나갔다.
숲이 더는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떠나오고 나서
한 팔라딘이었던 이단자가 다른 이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하나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뭘 말이지?"
"왜, 엘프들에게 배신자가 나왔다는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그래, 아무도 동족을 팔아넘긴 자는 없었지.
난 그냥 숲에 불을 질렀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를 따라나온 이 엘프들을 봐라.
숲에 남은 이들이 동족을 팔아넘긴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생각해보도록. 동료를 팔아넘겨 숲에 불을 지르게 만든 이가 우리에게 섞여들거라고
저 자들이 생각하겠는가? 내가 입이라도 한번 잘못 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바로 이곳에서도 그는 버려질텐데. 저들의 사고로는 동료를 팔았던 이는 숲에 남을 수밖에 없는거다.
그토록 전통과 숲을 사랑했으니 동료도 팔지 않았겠나? 그렇게 여기는 거지.
정작 배신은 본인들이 했지만 말이다."
"그...럼...!"
"숲에 남은 이들은 우리를 따라 나선 자들을 배신자로 여기고
우리를 따라 나선 이들은 숲에 남은 이들을 배신자로 여길 것이다.
서로를 증오하며 정당성을 주장하겠지. 즐겁지 않나?"
"대체... 당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글쎄, 내가 오랫동안 신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했다고 말했던가?
깨달았거든. 신이 생각보다 별게 아니더군. 그래서 난 신을 이긴 인간이 될 생각이다."
"하지만 그건..."
"혹시 알고있나? 애시당초 신이 노리던 것도 바로 그거였단걸.
인간이 신이 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언젠가 어떤 의미로든, 역사책에는 내 이름이 적힐거고.
잘 기억하라고. 젤렌지를 말이야..."
에스트로가 숲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숲의 73%가 손실되고 나서 마운틴 엘프의
생존자들이 겨우 터를 이룬 이후였다.
에스트로는 그들을 제국으로 포섭했다.
이미 그들은 어딘가 망가진 고철인형처럼 이전부터 꾸준히 주장하던 전통이니
자연이니 하는 것들은 일언반구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저 그를 따라 체념한 눈을 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가지만을 물었다.
"그곳에서는 더이상... 도망치며 살지 않아도 되는 거겠지요...?
당하고 살지 않아도 되겠지요?"
에스트로는 그들의 질문에 잠시 벙 쪘다가도 대답했다.
"네, 여러분들은 잘 해내실 겁니다. 이곳에서도 살아남았고
목표를 위해 고통을 감내하셨습니다. 그 각오와 적응력이라면
분명 여러분들께도 기회가 올 겁니다."
"당신에게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집니다. 고순도의 붉은 마력.
아주 불길하지만 동시에 강함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제 마력은 여러분들과 맞지 않을 겁니다. 생명을 중시하고 자연을 지켜오던 여러분들께는
추천드리기 어려운...."
에스트로는 그들의 눈을 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 강하고 또렷한 적개심과 분노만을 담은 눈.
"상관 없습니다."
"......"
"당신의 마력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는 약한 자신을 저주합니다.
강해졌어야 했고, 신에 의지해서는 안되는 거였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다시는 지지 않게. 두번 다시는 냐약한 엘프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에스트로는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피에 마력을 한방울씩 섞어주었다.
진하고 붉은 피의 마력은 그들의 마력회로의 근본부터 몸을 바꾸어갔다.
잿빛이던 그들을 상징하던 머리칼과 눈은 붉게 물들었고 피부는 검게 변해갔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무기 하나조차 잿빛 마력이 담겨있던 것은 모조리 바스라진다.
마침내 그들이 다시 정렬했을 때 그들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대체...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에스트로의 질문에 늙은 엘프 하나만이 답했다.
"모든 마운틴 엘프가 죽었을 뿐입니다."
블러드엘프의 시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