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화 〉 마지막 마운틴 엘프
* * *
내가 방에서 한참 신약의 대중화에 착수하고 있던 중에 연락을 받은 것은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순수의 폭포를 연구하며 알아낸 새로운 방식.
마력을 액체에 녹여 성질을 변화시키는 연구를 위해 시도라를 데리고
포션을 만드는 중이었다.
이전에 모건씨에게 전달했던 X#51g3 포션과 LzT2336D 포션은 이 방식을 채택했다.
플로라로부터 에스트로가 엘프들을 구해온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시도라는 내게 그들을 만나러 가봐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성으로 향하기 위해 삐삐를 씻기고 옷을 말끔히 입혀 데리고 나왔다.
삐삐는 어제부터 새로 받은 가방을 발견하고는 하루 종일 가방을 매고 있다.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고 좋아한다.
"마마, 이거바라~? 똑딱이도 이떠."
그렇게 말하고 삐삐는 가방의 자석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똑딱거렸다.
그러더니 시간이 좀 지나 자석이 질린다 싶으면 금새 나를 불렀다.
"마마... 삐삐 가방 이고또 댄다?"
그렇게 말하고는 이번에는 가방끈에 붙은 스트랩을 가지고
끈을 늘였다 줄였다를 반복했다.
"싱기하지? 마마꺼랑 똑가태!"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기도 했다.
"가방이라... 아이들은 가방에도 저렇게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거였나..."
시도라가 그렇게 말하며 삐삐를 바라보았다.
"왜? 가방이 뭐 문제라도 있어?"
"아니, 그런게 아니라... 혹시 내가 조금만 일찍 고집을 꺾었더라면...
자연을 강조하지 않고 문명 속에 섞여들었다면 혹시 우리 마을의 아이들도
저런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을까 생각했을 뿐이네."
"아.... 그래... 그럴수도 있었겠네..."
시도라는 그런 삐삐를 흐뭇하게 쳐다보지만,
삐삐는 그런 시도라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가방을 샥 뒤로 숨기며 으르렁댄다.
"삐삐꺼야!"
"아무래도 미운털이 콱 박힌 모양이구만..."
"업보려니 생각해~"
시도라는 그래도 괜찮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이제 우리 아이들을 마주할 수 있을테니까...
다들 무사한지 모르겠군... 체리메티, 신제르, 오이아르....애플팝...."
"일단 가서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고."
채비를 마치고 나서 삐삐의 손을 잡고 성으로 향했다.
시도라는 우리의 뒤를 그저 따랐다.
그 얼굴에는 숨기지 못할 미소가 있었다.
그 얼굴이 충격으로 얼룩지는 것을 보는 것은 한편으로는 낯선 것이었다.
"이...이게.... 무슨...."
회의실에는 조용한 분위기만이 깔린다.
대공들은 없었고 그곳에는 플로라와 에스트로, 그리고 마운틴엘프였던 자들만이 남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엘프의 말을 차분히 들었다.
팔라딘이 이미 그들을 습격해 동료들을 죽였고, 엘프들을 데리고 사라졌다고.
생존자들이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시도라는 떨리는 눈으로 한명한명의 얼굴을 살핀다.
"장로님...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늙은 엘프 하나가 앞으로 나선다.
그러나 시도라는 그를 손으로 가로막으며 말했다.
"됐다 오이아르.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고 그 이유를 나도 어째서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말거라. 우리가 약해서 생긴 일이니. 사과라면 이제껏 약했던 우리를 지켜줬던...
그래, 말라세에게 해야겠지."
"장로님께서도 블러드 엘프에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아니, 난 하지 않으련다. 먼저 떠난 아이들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고 싶구나.
그리고, 잠시 떠난 아이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난 여기 남아있어야지 않겠니.
그리고 그게 분명 말라세가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일 테니까.
너희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다만...?"
"선택한게 그거라면 강해지려무나. 누구에게도 지지 않도록."
"장로님..."
그녀의 분위기가 누그러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이제 이 부족의 미래를 그들에게 맡긴 것이겠지.
"애플팝은 떠났느냐, 아니면 먼저 돌아갔느냐."
"먼저... 돌아갔습니다."
"그렇구나... 순수한 아이였는데...
머리가 아프구나. 먼저... 쉬러 가겠다."
시도라는 그렇게 말하고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걸음과 오늘따라 더 작아보이는 초라한 등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외에 그 누구도 먼저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오이아르라고 불린 엘프가 말했다.
"다시 정식으로 미리타엔 제국의 황제께 청합니다.
저희 블러드엘프를 거두어 주십시오."
"조건은 단 두가지다. 받아들이겠는가?"
플로라는 어느새 고압적인 모습으로 표정을 굳히고 싸늘한 표정으로
옥좌에 앉아서 애니를 쓰다듬고 있었고, 애니는 가만히 아래를 내려보며
조용히 오이아르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엇이든."
"하나, 이시간부로 너희의 절대적인 충성은 오로지 나로 한정한다.
이 의외의 변수는 차단하겠다. 단, 이 경우 그 누구에게도 무릎꿇지 않을 것이다.
둘, 이 시간 이후, 시도라와의 접촉을 일절 금한다. 이견은 받지 않는다.
불만 있나?"
"없습니다."
플로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지었다.
"호출이 있을 때까지 일러준 장소에서 쉬도록."
그렇게 말하고 플로라는 하녀 하나를 불러 그들을 데리고 나갔다.
그들의 거처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에반제인의 저택이었다.
원래 그곳에서 일하던 사용인은 왕성에 취직했고,
시간이 지나서 플로라는 차기 연구소장으로
시도라를 추천했다. 시도라는 머뭇대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소장은 연구소 옆에 따로 숙소가 배정되기 때문에 거처의 문제도 없었다.
"마마."
"응?"
"아까 뾰족기 아찌들 파파 반짝반짝이야."
"그렇겠지. 블러드라고 하는걸로 봐선."
"그리구 마마!"
"왜?"
"삐삐 가방 이거또 댄다?"
삐삐는 아직도 가방을 꼭 안고 손톱으로 가방을 슥 긁는다.
가방에 난 흠집에 내가 놀라기도 전에 스스로 수복해
흔적도 없이 말끔해지는 가방을 보고 나는 감탄했다.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삐삐."
플로라는 어느새 얼굴이 다시 순둥해져서 말을 건다.
"안뇽!"
"가방은 마음에 들어?"
"삐삐꺼야. 안져!"
나는 삐삐를 안아들고 말해주었다.
"그거 여기 있는 플로라언니가 준거야. 고맙습니다 해야지?"
그 말에 삐삐는 가방과 플로라를 번갈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가방을 어깨에 매고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딸기사탕을 하나 꺼낸다.
"고마쯈니다. 사탕 주께!"
플로라는 사탕을 받아들고 웃어보였다.
"축하해 플로라. 딸기사탕 아무나 안주는건데."
"어... 고마워."
플로라는 사탕을 받아 입에 넣고 내게 묻는다.
"삐삐가 이 사탕 좋아해요?"
"집에 많다."
"아... 그래요...?"
플로라의 머쓱한 표정. 오랜만에 봤다.
삐삐는 나를 올려다보다가 입을 샐쭉 내민다.
"안 마나!"
"많아."
"푸우우!"
삐삐는 입을 댓발 내밀고 푸푸푸 하는 소릴 낸다.
그러면 플로라는 웃으면서 말한다.
"자주 놀러와 삐삐야. 사탕 많이 줄게."
그 말에 등에서 날개가 뿅 돋아나더니 파닥이기 시작한다.
감정에 따라 통제를 벗어난 것 같았다.
그걸 보고 플로라는 웃음을 참는데 실패해서 풉 하고 흘러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는다.
"삐삐 사탕 많이 먹으면 이썩는다?"
은근히 겁을 줘도 삐삐는 코빼기도 들은체 하지 않았다.
"이 썩으면 사탕이고 쥐포고 아무것도 못 먹을텐데 괜찮아?"
그제서야 삐삐는 살짝 되묻는다.
"꼬기도?"
"고기도."
"꼬기 쪼금만 머그께."
"아니 조금만 먹어도 이빨 아야한다니까?"
"아야해?"
"응. 아야해."
삐삐는 현실을 부정당한 표정으로 플로라를 쳐다보지만
플로라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말에 동조했다.
"맞아. 언니도 이 썩어서 많이 아파봤어."
"사탕 마니 머것써?"
"초콜릿..."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삐삐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쪼꼬도 이 써거?"
"응..."
나는 그런 삐삐를 바라보며 웃음을 뒤로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엄마랑 발레리아 이모가 주는 것만 먹어. 알겠지?
이도 잘 닦고."
고개만 끄덕이는 삐삐.
가만히 플로라를 바라보다가 말한다.
"그럼 언니 이빨 아야해?"
"나? 나 왜...?"
"삐삐가 사탕죠서?"
플로라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냐, 괜찮아. 하나 정도는 먹어도 돼."
"휴..."
그제서야 삐삐는 안심한듯 가방을 닫고 꺄르륵거리며 웃는다.
"아, 그나저나 무령님. 엘프들 관련해서 말인데요."
"블러드 엘프들?"
"네. 아무래도 마운틴엘프가 둘로 분화되었다는 점도 그렇고,
그 팔라딘에 관한 것도 그렇고. 결코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감이야. 그리고 아마 내 예상대로라면..."
"젤렌지...겠죠."
"그래."
"아마 언제든 다시 그 엘프들과 분열된 팔라딘을 이끌고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겁니다.
그걸 저지할 수 있는 방어선으로써 엘프를 활용하려고 해요.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엘프를 미리타엔 왕실 근위병으로 사용한다고 하면..."
"팔라딘에 대적할 마도병이 생기는 거구나."
"네. 교육을 할 인원을 뽑아야겠죠. 근위대장에게 무술적인 측면은 가르치라고 할 수 있지만,
아직 저들은 마력을 다루는데 미숙할거라 생각해요."
"네 말은 그럼 에스트로를 빌려달라는 말이네?"
"아무래도 그게 제일 좋으리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서 저 엘프들을 기사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기사는 정직하니까."
"네. 그런건 미리타엔 스타일이 아니니까요.
어떻게든 이기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래, 알았어. 물어는 볼게."
내가 그렇게 대답하면 에스트로가 말했다.
"다 들렸어. 당사자가 옆에 있는데 왜 너희끼리 묻고 답하는건데?
그렇게 작전 안세워도 난 저 엘프들 이미 가르치기로 했어."
"언제 그런걸 결정하셨죠?"
"그러게 에스트로. 언제 정한거야?"
"데려오기 전에. 딱 봐도 눈이 변했잖아. 그럼 가르쳐줘야지.
진짜 비열하고 더럽게 싸우는 법."
에스트로는 그렇게 말하고 왼손으로 오른팔의 손목을 잡고 풀어주더니
손가락 마디를 뚜둑인다. 손등에 혈관과 뼈가 도드라진다.
"뭐, 다른건 모르겠는데, 가르치는건 내 권한이지? 아무도 훔쳐볼 생각 마."
"아무도 그러지 않을 거에요. 애초에 블러드 엘프를 공개할 생각도 없고요."
"그래, 드디어 네가 뭘 좀 제대로 해보겠다는데 방해할 생각은 없어."
에스트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걸어나가며 먼저 실례하겠다는 말을 했다.
플로라와 나, 그리고 삐삐만이 남았다.
삐삐는 회의실 빈 의자위에 앉아서 가방을 열고 닫느라 정신이 없었다.
회의실 원탁 테이블 위에 준비된 주전부리 따위를 가방에 집어넣으면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저번에 회의하려고 하신 부분이 이거였죠?"
"그렇지 뭐. 결국 블러드 엘프로 미리타엔에 편입 시켰으니까 된 거 아닐까?"
"아마도요. 따로 대공을 부를 필요는 없겠네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늘 이렇게만 풀리면 좋았을 텐데요."
"내 팔자더라고. 엮이고 화내고 사고치고."
"더는 그런일이 없도록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러기 위해서 있는 미리타엔이고 그러기 위해서 얻어낸 황제니까요.
제가 꼭 그렇게 만들거에요."
"듬직하네."
나는 그렇게 말하고 플로라를 안아주었다.
"고마워. 그리고 고생했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플로라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얼마 지나지않아서 어깨에 뜨거운 것이 똑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떨리는 목소리. 플로라는 조용히 그렇게 내게 안겨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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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말 하지 않겠다. 그 자리를 이제 내게 넘겨."
"오랜만에 얼굴 비추나 했더니 고작 그딴 생각없는 소리나 하려고 부른거야?
하여튼 여전히 쓰레기네. 뒤에 저 사람들은 뭐야?"
"널 죽이지 않길 바라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 데려온 이들이다."
"협박도 하셔? 어이고, 누구 아들 아니랄까봐 더러운 꼴은 그 새끼를 빼다박아선.
어머니께 죄송하지도 않아?"
"말장난은 됐다. 칼이나 뽑으시지."
"이 미친놈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기어이 혈육한테 칼을 겨눠?"
"성제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검을 빼드는 젤렌지와 그를 상대하며 사복단검을 꼭 쥐는 젤라토.
몇 합이나 싸웠을까. 채 5분을 넘기기도 전에 휘두르던 사복단검이 삭아 바스라지고 나서야
젤라토는 손을 들었다.
"항복. 미친 새끼. 기어이 더러운 수를 쓰는구나."
"순순히 자리를 넘기는 걸 보니 목숨이 아깝기는 했나 보구나."
"그게 지금 사랑스런 동생한테 할 말이야?"
젤렌지는 그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묶어라."
일이 이렇게 될 거라는걸 알고 있엇던 것처럼 팔라딘은 무기를 잃은 젤라토를 구속한다.
그리고 마운틴엘프들은 그녀를 업어들고 젤렌지의 뒤를 따랐다.
젤렌지는 젤라토의 거처로 그녀를 업어들고 돌아왔고 그녀의 작은 침대에 그녀를 던져놓았다.
"미친새끼...! 뭘 하려고!"
"더 강한 힘, 그걸 위한 좋은 유전자. 그게 전부다.
난 깨달았다. 더 순도높은 씨앗을 남기는것이 우리 가문을 일으키는 길이라고."
"잠...깐만... 야! 미친새끼야! 그게 여동생한테 할 말이야?
아 성제 안한다고! 안한다고 씨발새끼야!!"
"그건 이미 들었다."
"야! 너 결혼 했잖아! 아들도 있잖아 이 개또라이 새끼야!!"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젤라토는 젤렌지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다음날부터 젤렌지는 젤라토에게 눈에 띄게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말 그대로 손에 물 한방울 묻히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다.
날마다 허락되는 조금의 여가시간에 운동을 가볍게 하는 것 외에는
젤라토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녀는 점차 전선에 서지 못할 정도로 유약한 여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메이스를 든 이단자들과 배신자 엘프들은 그 사이에서 서로 뒤엉키며
어쩌면 서로 금기로 여겼던 일들을 거리낌 없이 해댔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는 젤라토 역시 나름대로 그 상황을 순응해버렸다.
여전히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름 자신을 합리화 하고 있던 것이다.
"내 끝이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얼룩질거라는 생각도 했고,
편안한 삶이 아닐거라 생각은 했는데. 이런 결말인줄은 몰랐어.
하고 싶었던 것도 많았고, 이루고 싶었던 것들도 많았다고."
"내가 이뤄줄테니 넌 그저 유전자를 보존하기만 하면 된다."
"됐어. 내 자유가 없는데 무슨."
"노후대책까지 다 준비해 뒀다. 넌 그냥 생각하지 않고 따르면 된다.
자본도 충분하니까 여유금 정도는 준비해주지.
원하는걸 사고, 원하는걸 해라. 몸을 혹사시키는 일만 아니면 허가하지."
"그런건 이미 알아. 지난 일주일간 그러고 있었으니까.
이 몸으로 뭘 어딜 가겠어.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편하기도 하고."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던건 아니겠지? 알고 있었다. 날 좋아하는거.
그걸 부정하겠다고 일부러 내 성격을 부정하고 내 사상을 부정하고
끝끝내 나라는 인간 자체를 혐오하려고 한 것도."
"뭐...?"
"내가 왜 미리타엔에서 도망쳐나와서 널 찾아갔을까.
왜 너는 날 거부하지 못하고 쉴 곳을 내어줬을까.
이제 생각할 것도 없었지. 그런 핏줄인거다."
"다 알고 그랬다고...?"
"결국 넌 나의 자식을 낳게 될 거고, 난 너를 동생 이상의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잘 된 것 아닌가?"
"그때...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딴 궤변은 듣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그랬으면 이딴 말도 안되는 궤변에 억지로 납득하려고 하지 않았을 거고,
그랬다면 이렇게 묶여있는 일 없이 자유로웠을텐데.
아니, 애초에 이런 사람인걸 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죽이지 못했고 마음을 접지 못한 자신의 패배였다.
"하아..."
"자라. 아직 네가 할 일은 없으니까."
그녀는 눈을 붙이고도 한참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