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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22화 (222/303)

〈 222화 〉 도서관의 표류자

* * *

"왔구나?"

엔시온은 그렇게 말하며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손에 든 작은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으며 자신을 찾아온 남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할 말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엔시온을 노려보는 남자의 이름은 류해백이다.

한층 더 지쳐보이는 그는 주머니에서 크레딧 동전을 꺼내 테이블 위로 굴린다.

"아무튼 네가 날 찾아온 이유를 나도 독자적으로 조사를 해봤어.

이름 류해백. 현직 유레크로스의 군인이고, 부친은 빈포드.

이게 세간에 알려진 정보라면, 진상은 도서관의 표류자 류해백이겠지.

네 이름은 그래서 이질적인 거고."

"도서관에 대해 얼마나 알아낸거죠?"

"그게 중요해?"

"중요합니다. 제일 중요하죠."

"아니지, 넌 돌아가고 싶었던 것 아니었나?

그럼 이 사건을 해결할 방법을 알아내는게 중요하지 않겠어?"

"그러면 뭔가를 알아냈다는 말인가요?"

"그럼그럼. 도서관은 새로운 사건을 제시하는 현상이니까.

도서관에서 기록이 제시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 귀환 조건이지.

그리고 아마 너는 그 결과가 카르고르의 살인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걸테고."

"카르고르는 살인 같은걸 할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좋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선량한 인간은 아니지만,

절대로 사람을 죽일 만큼 악하진 않아요."

"나도 알아."

엔시온은 차분하게 홍차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넌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어."

"놓쳤다고요?"

"킬레리."

"킬레리... 그래요, 그게 대체 뭐죠?"

"이 나라에서는 킬레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저 길거리에 널린 노예 새끼들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런데도 넌 킬레리의 존재를 숨기려고만 했지."

"킬레리가 대체 그래서 뭐죠?"

엔시온은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녀의 귀에 걸린 큰 보석이 박힌 귀고리가 흔들렸다.

"거리에서 노예들과 붙어먹고 있는 여자. 알지?"

"저번에 우리가 만났던 연구소에서 생산되고 있던 여자 말이죠?"

"그래. 그 망할 년이 들어앉아있던 캡슐에는 원래 네리 M 모귀드라는 여자가 있었지.

그 여자의 클론으로 만들어진 비서 부대가 킬레리야.

지금은 그 걸레가 끄집어낸 바람에 캡슐 안에 잠들어있던 모귀드의 본체가 죽어버려서

더는 만들지도 못하고 있지만 말이야."

"더러운 새끼들... 인간을 복제하고 노예로 부린다는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좋을대로 떠들어. 그게 사실이니까. 덕분에 이제 킬레리는 생산이 중단되었고

모귀드의 빈 자리에 들어간 것은 제롬이라는 꼬마야."

"꼬마...라고....?"

"그래. 부모를 모두 잃은 아이지.

국가를 상대로 거래를 하러 온 당돌한 꼬마야.

자신의 클론을 제공하겠다고 했어.

첫 클론이 완성되고 나면 그 클론을 복제하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의 작위를 후작으로 올려달라고 했지."

"그걸 받아들였다고..?"

"뭐 어때? 본체는 전혀 지장 없는 삶을 살고 있잖아.

클론도 여리여리하고 성별에 맞지 않게 외모가 곱상해서 인기가 많아.

물론 내가 보기에는 썩 역겨운 모습이기는 하다만."

"그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해백은 표정을 구기며 물었다.

"뭐긴, 아무튼 킬레리가 뭔지는 알려 줬잖아. 네가 찾는 사건의 범인도 아마 킬레리겠지."

"유레크로스의 사건에 킬레리가 개입할 요소가 있었다고?"

"기억 안나? 그 때 유레크로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인과관계를 생각해봐야지."

멍하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말했다.

"그래서 킬레리를 총괄하는 사람은 누구죠?"

"오크 게비디. 게비디야."

"아버지를 죽인 그 남자군요."

"뭐, 네가 말하는 아버지가 빈포드라면 그렇게 되겠네.

그런데 왜 너는 빈포드를 아버지라고 부르는거야?

네 친 아버지도 아니잖아?"

"그분이 날 아들로 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해백은 그녀의 방을 나갔다.

엔시온은 가만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쉬워. 참 아쉬운 인재야."

엔시온은 가만히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이야기는 분명 이 미묘한 사건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걸 벌써 말하기는 아쉬워서일까. 엔시온은 일부러 그 사실을 묵살했고

사건이 해결되지 않게 만들었다.

벌써 시간이 상당히 지난 카르고르의 살인사건은 이미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지고

범인이 누가 되었다고 한들 카르고르의 명예는 이미 실추된지 오래일 뿐이다.

정작 그 본인 마저도 실종된 후이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불타죽은 유해만이 남았지만 말이다.

즉 이 사건은 해결된다고 해도 그 어떤 의미도 남지 않았다.

엔시온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즉, 카르고르 사건이 해결된다고 해서 변하게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은

류해백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카르고르의 사건이 아닌

다른 모종의 사건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해결하기엔 늦어버린 후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미 무령 에리아에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도서관으로 이어진 모종의 차원으로

모든 일의 주모자였던 여자가 넘어가버렸다고 했다.

그걸 떠올리면 엔시온은 웃음이 새어나올 뿐이다.

괜히 다른 이야기를 하며 살을 부티고 시간을 끌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가지고 놀기 좋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해백은 그녀와의 대화에서 불쾌함만을 얻을 뿐이었다.

그저 그녀는 넌지시 지나가는 말로 던졌을 뿐이었던 말이 그에게는 크게 다가온다.

"제롬이라..."

새로운 클론의 제공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건 작은 아이의 몸이다.

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작은 아이가 자신의 클론을 두고 국가와 협상을 하겠는가.

게다가 조실부모라는 일은 아이가 겪기에 상당히 버거운 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게비디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제롬이라는 소년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고민끝에 발을 옮긴 곳은 한 술집이었다.

떠들썩한 분위기의 주점은 이미 대낮부터 술에 취한 남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가 들어서면 나이든 여주인이 턱살을 출렁이며 크게 웃었다.

"어서오라고. 그래, 무슨 일로 대낮부터 이런 술집을 찾았는지 말해보련?

혹시, 아줌마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왔다거나? 하하하하!"

"아하하... 맥주 큰 잔 부탁합니다. 닭다리 훈제도 하나 해서요."

"닭다리 훈제? 많이 큰데 괜찮겠어?"

"아, 네. 그걸로 부탁합니다. 아직 식사를 안해서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닭다리를 기다리며 맥주를 마셨다.

그가 푸념섞인 한숨을 내쉬고 있으면 그의 옆으로 젊은 여성 하나가 앉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좀 앉아도 되겠죠?"

"아...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큰 맥주 한잔과

소시지 모듬구이를 주문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대낮부터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실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을 보면 왠지 감정이 옅어보이는 눈빛 사이로 싸늘하고도 묘한 색기가 흘렀다.

"이런 곳에서 대체 뭘 조사하시는 건지 여쭤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여성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 해백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넘겼다.

긴장으로 인한 옅은 떨림이 느껴진다.

"그런게 왜 궁금하시죠?"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제가, 킬레리이기 때문입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고 해백은 적잖이 당황했다.

"저에게 접근한 이유는 그게 목적입니까?"

"네. 마스터께 접근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발견, 먼저 접촉하기로 했습니다."

"마스터라고 하는건 그 오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정확합니다. 게비디 대공님께서 킬레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모든 킬레리는 그분의 명령대로 행동합니다."

"대체 왜죠?"

"당연하지 않습니까? 노예는 복종한다. 그리고 주인은 명령한다.

단순한 상명하복의 논리입니다.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미친... 당신은 그럼 행복이라는 걸 느낀 적이 있습니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업무에 필요합니까?

그만 본론을 말씀하시지요. 대체 킬레리와 대공님의 뒤를 캐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후우... 전 카르고르의 살인 누명을 벗기기 위해 킬레리를 찾고 있습니다."

"유레크로스의 카르고르 말씀이시군요.

그 모친을 죽인 것은 킬레리가 맞습니다. 저는 그 사겅의 사후처리를 담당했습니다.

나르딕 총리의 부인을 살해한 것은 그 자리에 죽어있던 킬레리가 맞습니다.

죽은 킬레리의 얼굴을 훼손했고, 타인의 흔적을 배제했으며 작업 후에 소란을 피워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역할까지 했습니다."

"그럼 죽은 마부가 킬레리였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순순히 자백하는 이유가 또 뭐죠...?"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요. 마스터께서 본 건에 대해 발언할 것을 허가하셨습니다."

해백은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힘이 과하게 들어간 주먹은 뚝 하고 맥주잔의 손잡이를 부쉈고,

맥주잔은 바닥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꽉 쥔 주먹에서는 유리 파편에 찢긴 피가 흘렀다.

"왜 죽였습니까?"

"당시 귀국에 잡혀 계셨던 에리아 무령님의 사형 집행일을 늦추기 위해서

다른 방향으로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씨발..."

"여기서 계속 이야기 하시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나가서 계속 이야기하시겠습니까?"

"닥쳐..."

"원하신다면 죽이셔도 괜찮습니다. 이 목숨은 현재 폐기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기에.

본래 권장 수명 및 평균 수명보다 6일이 초과된 상황이기 때문에

본 개체의 사망에는 일체의 손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미쳤어. 미쳤다고..."

그러나 킬레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나이든 여주인이 다시 돌아와 소시지와 닭다리 훈제를 내려놓는다.

"그 컵은 나갈때 달아둘게 꼬마야."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여주인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음 접대를 이어간다.

이 분위기 속에서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이었다.

그 사실에 해백은 묘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게비디를 만나고 싶다."

"전달하죠."

잠시 기다리면 그녀는 무전에 대답하는 것 같이 허공에 대답을 마치더니 말했다.

"40분 정도 뒤에 시간이 난다고 하시는군요. 그때까지 콜로세움으로 찾아와달라고 하십니다."

"이 상황에서 그런여유를 낸다고...?"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이 곳에서 할 일을 마쳤기에.

아, 소시지는 드셔도 괜찮습니다. 본래 드리기 위해 구입한 것이기에.

계산은 마스터께서 마치셨습니다."

그렇게 말한 킬레리는 맥주 한 컵을 벌컥이며 비운 후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은 해백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 일어서려다

덜컥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다.

"대체 이 나라는, 이 세계는 뭐가 잘못되어있는거지...?"

그러나 분명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있다.

이게 과연 정답이 맞는지조차 그는 확신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후덜거리는 다리를 일으킨다.

문득 의문이 든다. 자신이 처음 들었던 키워드는 분명 종교였을 텐데.

종교. 과연 이 사건의 어디에 종교적인 문제가 담겨 있는지 의혹이 든다.

아직 이 사건의 뒤에 풀리지 않은 비밀이 있는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길을 잘못 든 건지 잘 모르면서도 그는 한숨섞인 자조를 뱉었다.

자기 앞으로 나온 훈제 닭다리를 집어들고 거칠게 뜯었다.

짭조름한 맛이 강한 닭다리는 맥주 안주용으로 만들어진 건지 그냥은 먹기 어려웠다.

"일단 가 보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그 제롬이라는 아이를 조사해봐야겠는데."

해백은 결국 그렇다할 결론조차 내지 못했다.

그는 이 넓은 세계에 갇혀버린 표류자에 불과했다.

오히려 자신이 지내던 좁은 방보다, 더 작은 책 속의 넓은 세계는

그저 감옥과 다를 바 없었다.

"시발..."

"어머, 꼬마. 가게? 계산은 아까 다른 손님이 다 하셨어. 그냥 가봐도 돼.

그런데 이거 남기려고? 우리 가게 소시지는 맛있는데.

안 먹고 가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그럼 포장해 주시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꼭 데워 먹으라고! 생각나면 또 들러줘."

해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포장된 소시지를 받아들고 가게를 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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