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비가 오는 날
* * *
비가 오는 날에는 늘 그랬다.
늘 그는 누군가를 기다렸고, 결국 문제가 생긴다.
누군가는 울게 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생각에 잠긴다.
아마 오늘도 그런 날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창밖으로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마스터, 손님이 오셨습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에게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젊은 남자가 하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그렇습니다."
"날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
"묻고 싶은게 많아서요."
둘의 눈은 잠시도 마주치지 않는다.
한명은 상대의 얼굴만을 바라보지만, 다른 하나는 그저 바닥만을 쳐다볼 뿐이다.
"묻고 싶은게 뭔지, 말해보게나."
"카르고르를 아시죠?"
"모른다."
잠깐의 침묵후에 그가 물었다.
"킬레리를 총괄하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렇게 물으며 고개 숙인 남자는 처음으로 자신의 앞에 앉은 거구의 남자를 바라본다.
둘의 눈이 마주치면 그제서야 거구의 남자는 말을 고른다.
"그래. 내가 킬레리들을 총괄하고 있지.
현존하는 킬레리의 98% 이상을 소유하고 있고."
"유레크로스에서 나르딕 총리의 부인을 죽인 사건을 알고 있었습니까?"
"보고를 받았으니 알고는 있었는데 그게 어쨌단거지?"
"그럼 그 아들이 카르고르라는것도 알겠군요."
"아들의 이름이 카르고르였군. 그 아들이라면 알고 있지. 안타깝게 되었더구만.
보고 받은지 시간이 꽤 지나서 잊었던 모양인데."
"왜 그랬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왜 그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 겁니까? 좋은 사람일거라고 믿었는데."
"좋은 사람?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거 아니냐?
난 사람을 죽이는 이곳 콜로세움을 관리하는 사람인데 말이야.
나쁜 사람이면 나쁜 사람이지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
너한테는 더더욱 그럴텐데. 빈포드를 죽인게 누구인지 잊었나?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온 거냐? 이제와서 자수라도 하라고?
소시지라도 나눠 먹자고 온건 아닐거 아니냐."
"순순히 인정하십시오.
카르고르가 범인이 아니라고 유레크로스의 사람들에게 시인하십시오."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 유레크로스의 사람들은 이제 막 그 일을 잊어가고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던 것 아니었나? 그래 뭐 공동의 목표라는게 생길 수는 있겠지.
그럼 전쟁이 났다는 사실이 사라지나? 전쟁을 만들었던 나르딕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사라진 카르고르가 돌아오기라도 할까? 지금 네가 날 찾아온 이유가 대체 뭐든
좋은 판단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왜 그래야 되지?"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의자에 등을 기댄다.
"내가 웃고 있을 때 돌아가는게 좋을 거다.
이 정도 했으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는 못하겠는데요. 킬레리를 내어 주십시오."
"킬레리를 어쩔 생각이지?"
"죽일겁니다."
"내 앞에서 당당하게 킬레리를 죽이겠다고 하는구나.
너 킬레리가 그렇게 간단히 너에게 죽을 정도라고 약하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지?
난 그렇게 약한 녀석은 비서로 들이지 않아. 더욱이 킬레리라는 이름을 달았을 땐.
킬레리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나?"
"이름의 의미..?"
"레리엘이라는 천사가 있다고 하지. 밤의 천사라고 했던가?
자세한 유래는 모르지만 말이야.
난 적어도 콜로세움에 찾아오는 모든 도전자를 인도하는,
죽음과 밤의 천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킬과 레리엘을 합쳐 킬레리라는 이름을 붙인거다.
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지만 동시에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하고
동시에 천사로서의 고고함을 유지할 줄 알아야 했어.
그래서 천사로서의 가치가 없는 킬레리는 과감히 폐기했지.
그렇게 만들어낸 내 천사들이고, 내 비서들이다.
함부로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훈련받은 녀석들이 그리 간단히 죽을 것 같나?"
"그럼 킬레리가 죽인 총리부인은 왜 죽어야 했던 겁니까."
"태양보다 빛나려고 하는 것은 마땅히 타 죽기 마련이다.
굳이 자세한 내용을 알아야 한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걸 추천하지.
이제 그만 돌아가라. 비가 거세지는구나."
"....."
해백은 사람을 죽이고도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분노보다
그의 말에 왠지 납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도
반박 한번 하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이 더 싫었다.
"난 사과하지 않는다. 모든 판단은 합리적이어야 하며 그 당시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그걸로 더 나은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과하는 것은 그 선택을 했던 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 스스로를 긍정하며 내 아래에 있는 자들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냐 꼬마야?
강해져라. 강해지지 않으면 무엇도 지키지 못하고
약한 이의 발언은 힘이 되지 않는다. 네가 원하는 것, 지키고 싶어하는 것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그에 걸맞는 지위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위치에 발을 올려놓게 되면 이해할거다.
그때부터는 단 한번의 패배가 많은 것을 뒤바꿀 거라는걸.
절대 스스로를 부정해서는 안된다는걸."
그렇게 말하고 게비디는 킬레리를 불러 그를 밖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류해백의 양 팔을 붙들은 킬레리 둘이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가려고 하면
해백은 억지로 버티며 팔에 붙은 킬레리들을 힘으로 밀어낸다.
"난 틀리지 않았어. 킬레리는 사람을 죽였고 그걸 은폐하려고 했어.
난 적어도 네가 사람을 존중할 줄은 아는 남자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최소한의 신뢰는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확신했어.
넌 그냥 비겁한 쓰레기일 뿐이야.
사람이 죽었어! 사람이 죽었다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정신차려! 부정하고 긍정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그렇게 생각하는게 더 나을 수도 있을거다.
유레크로스로 돌아가서 뭐라고 말하든 신경쓰지 않겠다.
다만, 나는 함부로 목숨을 뺏는 그런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그걸 은폐할 생각도 없다.
네가 정말 그 건에 대해 억울하고 내가 원망스럽다면 덤벼라.
킬레리의 상관으로서 널 상대해주마.
그게 아니라면, 네 할 일을 해라. 그 정도는 응원해주마."
그렇게 말하고 나면 충격받은 표정으로 질질 끌려나간 류해백은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 표정은 어쩐지 익숙하고 불안해보였다. 자신을 위협하는 표정이 아니다.
오랜 경험상 미루어 보건대 그건 스스로를 위협하는 표정이다.
빈포드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 아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그에 대한 나름의 존중이 없었다면 해백을 방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직 어리고 미숙한 남자였다. 그래서 일부러 더 그렇게 말한 것도 있었다.
이래서 비는 좋아하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은 꼭 기분이 더럽다.
책임질 일이 늘어갈수록 자신의 위치를 통감한다.
거부할 수 없는 것들이 쌓여갈 수록
그는 자신에게 오래 전의 어느 날 빈포드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도 언젠가 책임을 질 날이 생길거다. 그 무게를 알게 되면 말이다.
다른 사람이 짊어질 짐을 가끔씩은 몰래 들어주고 싶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너도 알다시피, 그건 꽤나 무겁거든. 너도 그러니까 지금 여기까지 온 것 아니냐?
죄를 짓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가 중요하지.]
방에 홀로 남은 게비디는 조용히 책상에 앉아서 말한다.
"과거 유레크로스에서 커리나 모빌세오 암살팀으로 책정되었던 킬레리 전원,
지금 내 방으로 오도록."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방 문을 열고 등장한 킬레리 세명은 엄중한 분위기의 게비디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그래, 커리나 모빌세오를 전담한 인원은 너희가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다른 킬레리들은 수명이 다했습니다."
"보고서에는 커리나 모빌세오를 암살했다는 내용만 적혀 있지 않았나?
누구 짓이지?"
"제가 그랬습니다. 차후 활동에 지장을 줄 것을 염려하여 위장공작을 지시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약품을 사용해 카르고르의 간살로 위장했습니다.
약품은 귀족들 사이에서 저가로 매매되는 위장 정액을 사용했고,
사후 암살을 담당한 킬레리 61호의 신원을 파악하기 어렵게 했습니다."
"내가 지시한 사항과 많이 다르군?"
"그렇습니다."
"옆에 있는 너희는 알고 있었겠지?"
"그렇습니다."
게비디는 책상 서랍에서 리모컨을 하나 꺼내 툭툭 건드리다가 싫증이 난 것 처럼
다시 서랍 안으로 넣어버린다.
"이건 아무래도 맛이 살질 않는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킬레리의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한다.
가죽 터지는 퍽 하는 소리가 나고, 등이 터져 피가 번진다.
단 한 대였다.
"다음."
또 하나의 킬레리는 뺨을 주먹으로 맞았다.
목이 돌아가 목뼈가 부러져 죽었다.
"다음."
"남은 하나의 킬레리는 그대로 집어 던져져 벽에 부딫혔고
쾅 소리가 나선, 그대로 흘러내렸다.
주르륵 소리가 났고, 그게 전부였다.
"후우... 난 천사를 만들고 싶었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이 나온다니까."
그리고 한편 쫒겨난 해백은 멍하니 주저앉아서 생각했다.
'정말... 말 그대로다. 저 사실이 알려지면 과연 뭐가 변하지?
변하는게 없으면 결국 결과는 그대로일 텐데.
그러면 나는 왜 이곳에 갇힌거지?
왜 나가지 못하지?'
'이게 맞나? 난 나가기 위해서 이걸 조사하는 건데,
왜 자꾸 아버지와 그 오크의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는지.
그리고 왜 카르고르 사건에 미련이 남는지 모르겠네.'
의문이 이어지는 그의 머리위로 빗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종교.
종교라고 말했던 그 작은 실마리 하나가 떠오른다.
처음 자신이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발견했던 그 작은 책의 도서 분류 넘버.
분명 종교였던 것을 기억한다.
눈 앞에서 놓친, 그리고 촉발되어버린 종교의 사건을 그는 알지 못했다.
"우선 카르고르를 찾아봐야 하나."
그렇게 주저앉아 비를 맞는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진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은 정장을 입은 마른 남자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동차에 탄 채로 창문만 내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엔시온이 있었다.
"천둥벌거숭이, 재미 좀 봤어?"
"....."
"표정을 보아하니 실패한 모양이네. 바닥에 개새끼마냥 비맞고 있는 얼굴이 볼만하네."
"......"
"뭐, 나름 애썼네."
"알고 있었어?"
"뭘?"
"이렇게 될 거라는걸..."
"대강은."
"미리타엔은 반드시 멸망해야 한다...
이런 쓰레기들의 나라는... 존재해선 안된다...
대체 도서관은, 책은 나에게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
이 시대에서 내가 이뤄내야 할 게 대체 뭐지...?"
"나름 진지하게 말하는 와중에 미안한데, 아. 예의상 한 말이야. 딱히 미안하지는 않거든.
어쨌든, 넌 왜 킬레리가 그 사건의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당연한 근거가 뭘까? 빈포드가 킬레리 짓이라고 말하기라도 했었나?"
"...."
"어머, 정곡이야?"
해백의 일그러진 표정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엔시온은 픽 웃음을 흘린다.
"너 이제 보니까 아주 병신이구나?"
"난... 나는...."
"네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기억의 미로에 가 보면 어때?
이제는 다 부서지고 터만 남았지만 네가 찾는게 남았을지도 모르지.
네가 그랬잖아? 종교라며. 이 나라에서 종교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우습긴 한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말을 가려서 해라. 높은 분이시다.
너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마른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발로 그의 머리를 짓밟는다.
진흙이 묻어 질척한 구두에 밟히는 느낌은 아주 쓰라리고 떫은 맛이었다.
해백은 자신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만을 몇 번이고 곱씹어야 했다.
"병신. 겁쟁이가 되지도 못하고, 미치지도 못하면서
어정쩡하게 착한 척 하는 새끼들. 재수없긴.
난 저런 새끼들이 싫어. 자기가 옳다고 믿거든.
그렇게 바르게 살아봐 어디."
그렇게 말하고 차의 유리창은 올라간다.
마른 남자는 우산을 픽 던지고 차의 조수석에 탄다.
비를 맞는 해백의 옆으로 우산이 굴러다니고 차는 점점 멀어진다.
자리에서 겨우 일어난 해백이 뒤로 돌아 콜로세움으로 향한다.
콜로세움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가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리면 저지하는 가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스터께서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잠깐, 하나만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확인할 시간이라면 아까 지겹게 드리지 않았습니까?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리광을 받아드릴 수는 없습니다.
설령 당신이 도서관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죠."
"다 알고 있었다고...?"
"이 나라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도서관을 넘어온 표류자라고
홍보할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마십시오.
돌아가세요. 이곳은 이제 당신에게 허락된 곳이 아니니까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