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오 나의 에스메랄다
* * *
해백은 콜로세움을 나와 걸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와중에 그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연구소였다.
정확히는 클론의 복제가 진행되고 있는 연구소의 캡슐이었다.
어린 아이가 그곳에 자신의 유전자를 팔아넘기고 말았다는 이야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한차례 엉망이던 것을 확인한 이후였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꺼림칙한 기분이 떨쳐지지 않았다.
"여긴가..."
그가 연구소를 다시 찾았을 때 이전의 그 허술하던 보안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보이는
굳건한 문에 해백은 잠시 주춤했다.
"자네는 누구인가?"
나이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돌아보면 나이가 지긋한 잿빛의 엘프 하나가 거기 있었다.
"연구소 내부를 견학하고 싶습니다. 들여보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그런 거였나. 미안하네. 그건 지금 허가되지 않아서 말이야.
난 연구실에 침입할 생각인 도둑인줄 알았지 뭔가.
얼마 전에 연구소에 습격이 한차례 있었다네. 덕분에 보안이 강화되었지."
"아... 그럼 일단 지금 견학은 어렵다는 말씀이신거죠?"
"그렇다네. 나도 위에서 내려온 명이니만큼 지켜야 하거든."
"그럼 혹시 제롬이라는 아이가 사는 곳을 아십니까?"
"제롬? 아, 연구소의 표본을 제공한 그 귀족 말인가?
미안하지만 잘 모르네. 나도 이곳을 담당하게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이야."
"그렇군요..."
"그나저나 자네도 별나구만. 이 나라 사람들은 그 귀족을 상당히 싫어하던데 말이야."
"싫어한다...는 말입니까?"
"그래. 싫어하지."
점점 더 의아함이 번진다.
대체 왜?
무엇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이 나라의 뒤틀린 문화에 적극 동조한 아이를
왜 싫어하는가에 대한 기이한 의문이 섞인다.
"나는 잘 모르지만은, 그 데레코즈였던가? 그 대공은 상당히 좋아하는 모양이더구만.
아마 무언가의 비밀이 있겠지만, 자세한 사항은 나도 잘 모르네."
"그정도면 충분하겠죠. 감사합니다."
이 나라를 구성하는 대공 셋이 이 사건에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는 것이
유레크로스 소속의 그에게는 너무나 수상하게 보였기 때문일까.
해백의 의문은 점점 커져갔다.
결국 그는 기억의 미로로 향했다.
기억의 미로로 가는 길은 이제 꽤 평탄한 길이 되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로막은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재앙이라고 불리는 뱀파이어였다.
"여기는 한동안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돌아가시죠."
"엘 블로프니거 에스트로..."
"요즘은 어딜 가나 제 이름을 알더군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기는 합니다만.
돌아가세요. 개방되지 않았습니다. 공사중이거든요."
"공사라고요?"
"그래요. 미로가 있던 건물을 부수고 그 공간으로 국경을 이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버려진 자들과 새로 받을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서 국가를 확장한다는 생각인 것 같더군요.
저는 일단 한동안 여기서 일하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국경의 확장과 더불어 블러드엘프의 훈련을 그곳에서 담당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기도 했기에 주변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헤집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성장하는 엘프군은 상당한 속도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 과정을 외부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전력으로도 큰 손실이다.
히든카드는 그 존재를 아무도 모를때 비로소 가치가 높다는 걸 에스트로는 잘 알고 있었다.
"여기고 저기고 죄다 봉쇄되어 갈 곳이 없군요."
"궁금한 점이라면 제가 대신 답해드리죠. 아는 선에서만 가능하지만요."
"당신이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건지가 제일 궁금하네요."
"그건 저도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비밀 유지에 대한 계약이 있었던지라.
저보다는 이곳에 더 관심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후.. 그것도 그렇군요. 이 미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까?"
"그건... 알려드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군요."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면서 해백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이마를 짚는다.
"제가 도서관을 거쳐서 이곳으로 온 표류자라고 해도 말입니까?"
"....."
그 침묵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답변보다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자신에게 일러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분명 도서관과 관련된 무언가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해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가 발을 뗄 때 에스트로는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어떤 걸 말이죠?"
"대체 제롬의 저택이 어디입니까?"
그의 말 한마디.
얼핏 보면 아무 연관도 없을 것 같았던 그 말에 에스트로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위치를 가르쳐준다. 에스트로 역시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연관점을 명확히 증명해내는 것이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결코 이어질리 없을 것 같던 종교와 사건의 연결점이
고개를 들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제롬이 있었다.
제롬은 이 국가에서 사랑받지 못했다.
그건 그 아버지의 행적 때문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것이라고는
비난과 혐오의 시선,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무거운 짐 뿐이다.
그의 어머니는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한평생 아버지에게 시달리고서도
어딘가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던 것인지 종종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정신적으로 심히 불안정했다.
진통제를 주기적으로 맞아오던 몸은 이제 약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고통을 호소했다.
사람들은 내부의 자세한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가시적인 사항으로 물어뜯으며
고통속에 빠져 몸부림치는 자신과 어머니를 조롱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는 어머니의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다.
어머니는 제롬에게 늘 한결같은 말을 했다.
사랑이라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늘 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잘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오 나의 에스메랄다... 넌 시들지 않는 꽃이 되어야 해..."
아버지가 사라지고 나서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다.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고 집 안에서 부패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면
결국 제롬은 어린 나이에 무엇도 스스로 하지 못해 결국 그 시체를 방에 넣어
문을 걸어 잠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집이 싫었고 자신이 싫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떠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남았다.
그러나 기억이 풍화되어가고 미화된 폭력은 추억으로 각인된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의지할 수 있는 어른으로서 변해가면
홀로 남은 제롬은 '아버지가 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의 형태로 사고가 이어진다.
아버지는 자신을 늘 클론이라고 말했다. 당신의 복제품으로서 불완전하게 남겨진
반쪽짜리 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제롬에게 깊이 박힌다.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이유. 그것은 자신이 반쪽짜리였기 때문이다.
온전한 무언가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게 자신이 불행한 이유라는 확신이 들면
제롬은 곧장 황제를 찾았다.
자신을 클론으로 만들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더 훌륭한 귀족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제롬은 행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버린 그 작은 실패에서 원하던 성공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의 낡은 서재에 발을 들인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서재에는 각종 책이 꽂혀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책들이 한가득이었다.
읽을 수 있는 범위가 차차 늘어나면서 제롬은 자신이 복제품이라고 했던 말을 이해했다.
창조란 무엇인가. 그리고 모방은 어떤 가치를 갖는가.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메우고 있었다. 피는 이어지고 삶은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롬의 첫 집착은 존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흥미였다.
나 자신이 불완전함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완전한 것을 찾아야 했다.
지금은 그게 아버지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이상으로 완전한 존재가 나올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완벽에 가까운 존재는 분명 자신이 거스르지도 못할 강대한 존재일 것이며
이 세상이 포용하지 못할 존재일 것이라고.
물리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이 세상의 규율을 거부할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렇기에 신은 위대했고 그렇기에 인간이 신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런 제롬의 눈에 들었던 것은 미리타엔 뒷골목을 지나다니던 해골이었다.
어쩌다 발견한 그 해골은 불쾌한 것 같은 목소리로 이곳저곳을 지나다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똑똑히 본 그 해골의 묘한 느낌을
제롬은 잊을 수 없었다.
그 느낌을 다시 마주한 것은 홀로 남은 자신을 걱정해 찾아온 데레코즈라는 남자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아이가 부족함이 없도록 돌보기 위함이라며
자신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 남자는 하루 종일 집에 냄새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독한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그런 모습이 썩 달갑지는 않았으나 그의 뒤를 따르는 남자들의 모습을 보고 느낀 감정은
이 남자가 적어도 현재의 자신보다는 완벽에 가까울 것이라는 확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린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한 것은 맞으니
데레코즈는 어쩌면 제롬의 그 시선을 성공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순간 서로 교차한 눈빛은 추구하는 바가 극명히 나뉘어져 있었고
둘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시작한 것이었다.
제롬에게 어른, 그러니까 성인 남성은 닿을 수 없었던 벽이었다.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고
동시에 추구할 목표이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을 혐오하는 시선들에게는 질렸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더라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그 남자에게서는 묘하게 그 해골과 비슷한 느낌이 묻어나왔다.
처음 만났음에도 괜히 그를 의지했던 것은 그런 이유인지도 모른다.
하루 이틀 만나는 시간은 늘어났다. 그리고 그 관계를 주도적으로 이용하고 진척시키는 것이
그 작은 제롬의 계획일 것이라고 데레코즈는 전혀 의심할 줄 몰랏다.
꽤나 익숙해진 그 남자의 말투와 인상까지도 편안해질 정도로 만났다.
어딘지 잘 모를 그 감각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까지도 느끼면서
제롬은 그 기이하고 불길한 기운을 흡수해가고 있었다.
흡수.
음침함, 어두움, 절망, 고통. 그것들의 이름을 제롬이 깨달았을 때
이미 그는 그 한가운데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나올 생각이 없었던 것처럼 그 아래로 파고 들었고
어느새 사람들이 그를 기피하기 시작한 데는 그 아버지의 영향도 물론 있었으나
그 스스로의 불길함이 더 컸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 지독한 악연이 끊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랬기에 살아남은 피인 것인지. 학습된 절망이 낳은 또 다른 불안은
그렇게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크기를 키운 불안을 마침내 터트리게 된 것은 한명의 표류자였다.
이곳에 속하지 않은 자를 만남으로서 비로소 개화된 그 절망이
어떤 사고를 불러일으킬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고 일이 터지기까지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그것을 마주한 이후에는 너무나 늦어버렸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남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얼굴에 미소가 남아있는 것은,
다만 그것을 아직 서로가 마주하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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