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오 나의 에스메랄다
* * *
미리타엔은 내륙의 국가다. 그것이 초래하는 문제점은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문제라고 한다면 단연 식수의 수급이다.
강 하나도 흐르지 않는 미리타엔의 척박한 토지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다.
어찌저찌 파낸 우물과 타국에서 수입하는 물이 용수의 대부분을 전담하고 있다.
그렇기에 미리타엔은 상하수도 시설이 상당히 잘 구축되어 있는 편인데,
물을 빠르게 정수하여 재보급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업은 크레마르 공작이 담당하고 있다.
크레마르는 기이하고 변태같은 잔혹성으로도 유명한 자임에도
미리타엔이 그의 행태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배경에는 이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시여, 그 길을 뚫게 되면 지하에 묻은 수도관이 노출되게 됩니다.
그 수도관이 제거되면 동부 지역에는 물이 공급되지 못하게 되옵니다."
크레마르가 그렇게 말하게 된 계기에는 내 말실수가 있었다.
어제쯤의 일이었을까, 상담소 일을 하던 와중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발레리아에게 가게를 맡긴 후
가게 앞에 의자를 펴고 거기 앉아있으면 삐삐가 제 몸만한 의자를 질질 끌고 나와서
내 옆에 놓고 그 위에 앉아서 날 따라 눈을 감고 볕을 쬐는 것이다.
"하... 좋다..."
"삐삐두~"
"바람도 시원하네."
"삐삐두~"
그러던 와중에 내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에 눈을 뜨면 내 앞에는
다크서클이 한층 늘어나 피곤에 쩔은 것 같은 표정의 해백이 있었다.
"어머, 해백씨 뭔가 일이 많으셨던 모양이네요."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죠?"
"네, 저야 잘 지내죠. 삐삐? 인사해야지."
"안뇽! 나 앨리쑤!"
삐삐가 그렇게 인사를 하면 해백은 애써 웃어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하하... 다른게 아니라, 길을 잃었습니다. 그러다가 익숙한 길이 보여서 찾아왔죠."
"길을 잃으셨다고요?"
"네. 제롬이라는 꼬마의 집을 찾는 중입니다. 혹시 아시나 해서요."
"제롬이라면... 젤렌지 저택이네요."
"젤렌지요?"
"아뇨, 신경쓰지 마세요."
해백은 흥미로운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안내해드릴까요?"
"아, 그래주시면 감사하죠. 괜찮으십니까?"
"뭐, 안될 건 없으니까요."
"마자! 안댈꺼 업서!"
삐삐는 내 말을 따라하며 주먹을 하늘을 향해 쭉 뻗는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이제는 당할 일도 없을 것이고,
이전보다도 내가 더 강하다는 확신이 있었으니 행선지만 밝히면 괜찮을 것 같았다.
"삐삐도 갈래?"
"갈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삐삐도 폴짝 뛰어 의자에서 내려오고는 의자 두개를 낑낑대며 겹치더니
겨우 그걸 안아들고 뒤뚱거리며 가게로 돌아간다.
"마마 여기 이떠! 삐삐가 금방 다녀오께!"
그렇게 말하고 낑낑대며 들어가는 삐삐를 보고 발레리아가 화들짝 달려나와
의자를 받고는 삐삐 대신 옮겨놓았다.
나는 발레리아에게 젤렌지 저택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해백에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언제든 위험 요소에 대비를 해두시는게 좋을 거에요.
워낙에 이상한 사람이라 집에 무슨 장치가 되어 있을지 모르거든요.
살면서 자기 집 지하실을 수술실 겸 도피로로 개조한 사람은 처음 봤다니까요."
"네...?"
"그냥 그렇게만 알아두세요."
"준비는 해 두겠습니다..."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끝내고 나서 나와 삐삐, 그리고 해백은 젤렌지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러나 저택에 도달한 우리를 맞이한건 조용한 하녀 하나 뿐이었다.
하녀는 얼굴을 가리는 검은 천의 면포를 쓰고 있었다.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하녀는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인지
이쪽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제롬은 안에 있나?"
"후작은 현재 부재중입니다. 데레코즈 대공가에 방문한다고 들었습니다.
무령님께서는 그곳을 찾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너는 이 저택에 배정된 하녀니?"
"그렇습니다. 이 저택에 배속된 하녀는 저 하나 뿐입니다."
"하나... 하나라...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그러나 어디서 들었던 목소리인지는 제대로 특정해낼 수 없었다.
"일단 알겠어. 고마워. 데레코즈 대공가로 가 볼테니까
혹시 그 이전에 후작이 돌아오면 내가 찾았다고 알려줄래?"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데레코즈의 저택 방향으로 돌아서면 해백이 내게 물었다.
"데레코즈가 제롬과 어떤 관계가 있어서 둘이 그렇게 밀접한 사이인 겁니까?"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들리는 이야기만 보면 데레코즈가 성격이 좋았다는 것 같던데요.
사실 정말 도와줄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그렇군요..."
"마마, 다리아파."
그래서 나는 삐삐를 태울 유모차를 가방에서 꺼냈다.
어찌 비주얼은 분명 유모차를 탈 나이는 이미 지난 것 같지만,
애가 타고 싶어하니까 버리지도 못하고 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천각룡의 발육상태가 인간과 비교해 비정상적인 수준이기에
아직 채 1살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아이기도 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 어린 아이한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지만 말이지.
삐삐는 유모차 안에서 얌전히 앉아있었다.
우리가 저택에 도착해 내부로 들어가면 이미 데레코즈와 제롬이 테이블에서 크래커를 꺼내두고
커피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령님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사실 이번에는 거기 있는 제롬에게 볼 일이 있다고 한 사람이 있어서 데려왔어."
이 네 사람의 조화는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조화이기도 했다.
데레코즈 옆에 서있던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가만히 해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흠.... 여기는 어떤 목적으로 오신 겁니까?"
단지 질문일 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적대감은 분명히 해백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냥 묻고 싶은게 있어서 왔는데 집사님께서는 무슨 문제라도?"
데레코즈가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집사는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하지만 주인님, 지금 이 남ㅈ..."
"비켜주게."
"알겠습니다."
집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제롬과 해백이 잠시 시선을 교환하는 찰나의 시간, 묘한 분위기가 떠오른다.
"데레코즈, 나랑 이야기 좀 할까?"
내가 그렇게 부르면 데레코즈는 순순히 둘을 남겨두고 나를 따라 나왔다.
"이렇게 갑작스레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무령님. 오늘은 대비가 되어있었다지만,
혹여 제가 저택에 있지 않았다면 헛걸음을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안그래도 원래 제롬을 만난다고 젤렌지의 저택까지 다녀오는 길이야.
이건 내가 정식으로 사과할게.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도 저 둘이 할 말이 있나봐."
"중요한 것입니까?"
"도서관에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아."
"도서관이라면 요즘 화제인 그 차원문 말입니까?"
"그런거지."
"그럼 그걸 왜 제롬에게 물어보고 있는 겁니까? 분명 제롬은 그 건에 관련해선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혹시 모르잖아.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니까.
아무 생각 없이 찾아오겠다고 하지는 않았겠지."
"그렇군요. 그나저나 그 유모차는 뭔지 여쭤도 괜찮겠습니까?"
"아, 내 딸이야."
그렇게 말하고 유모차 덮개가 올라가면 그 안에서 삐삐가 가방을 맨 채로 손을 바짝 들고 말했다.
"안뇽! 나 앨리쑤!"
"ㅇ...앨리스...?"
당황한 표정의 데레코즈에게 말했다.
"앨리스 삐삐 세리타인이야."
"그...럼 이전의 그 납치당했던 삐삐라는게..."
"얘야."
"오...오우..."
"그 반응은 뭐야?"
"아...아닙니다."
제롬과 해백의 대화하는 소리가 잔잔이 들리는 것이 전부였던 그 공간의 적막은
순간적으로 다른 공간에 떨어진 것 같은 낯선 감각이 들게 했다.
종종 왜 그런지 모를 순간적인 침묵같은. 그런 분위기에 나와 데레코즈는 고개를 돌렸다.
슬쩍 돌아보면 둘은 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제롬은 확실히 흥미로워보였고
해백은 당황한 얼굴로 항변하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마."
"응? 삐삐 왜?"
"배구파."
삐삐의 그 말을 듣고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곳이라면 상관 없었을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내 앞에 있는 남자의 귀에만 들어가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말이다.
"배고프구나?"
데레코즈는 온화하게 웃으며 묻는다.
"어떤 요리 좋아하니? 아저씨가 해줄게."
"지뽀 이써?"
"지뽀..? 아... 있긴 한데 너같이 어린 아이가 왜 그런걸...?"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라이터 말하는거 아니야."
"제가 그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데레코즈는 그렇게 말하더니 조금은 실망한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앨리스야, 쥐포면 되니? 다른 요리 안 좋아해? 스테이크라거나,
볶음요리라거나, 아니면 네 나이대 아이들이 좋아하는 케이크라거나...튀김이라거나...?"
"아찌 지뽀도 업써?"
".... 금방 가져다주마."
데레코즈는 상당히 실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발걸음을 제롬이 멈춰세운다.
"아저씨, 다른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 하고 싶은데, 잠시 다른 방을 좀 빌려도 될까요?"
"그러렴."
그러면 제롬은 해백을 데리고 다른 방이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잠시 후에 데레코즈는 쥐포와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생선 조림을 만들어왔다.
"이거 모야?"
"쥐포랑, 쥐치를 조린 음식이란다. 꿀과 라즈베리를 사용했지.
맛있을 거란다. 혹시 괜찮으면 아저씨가 만들었는데 먹어보렴?"
삐삐는 잠시 데레코즈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라쪄!"
"ㅈ..잠깐 삐삐야...!"
그러나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삐삐는 포크를 푹 찔러넣는다.
그러고는 조린 쥐치를 입에 넣고 잠깐 씹다가 턱을 멈춘다.
도도도도 달려가는 삐삐는 빠르게 주방의 싱크대로 향했다.
"퉤."
음식을 싱크대에 뱉어버리고 삐삐는 혀를 내밀고 말했다.
"마덥쪄..."
기어이 저질러버렸다.
꼬마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데레코즈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른 채로 표정을 살피면 데레코즈는 의외로
태연하게 껄껄 웃으면서 너그럽게 말했다.
"그러냐? 미안하구나. 그래,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는 법이지.
쥐포 많이 먹으렴."
"응!"
삐삐는 쥐포를 두 손 가득 들고 유모차에 폭 올라타선 덮개를 내리고 오물오물 먹기 시작했다.
"미안해 데레코즈. 저럴 줄은 몰랐거든."
그리고 지금 또 거짓말을 해서 미안해... 데레코즈...
그런 말을 조용히 속으로 넘겼다.
"아이들은 예민하니까요."
나는 그제야 데레코즈가 제롬을 일부러 찾아가 챙겨준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은 좋은 것만 보고 자라도 모자랍니다. 어른이 되면 그러기 어려우니까요.
저만 하더라도 이런 모양이니 왠지 아이들은 바르게 키우고 싶더군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시가를 한 대 꺼내 문다.
시가를 잘라내고 불을 붙여 천천히 연기를 빨아당기고 나서야
그는 여유로운 자세로 소파에 앉았다.
"요리 연습을 더 해야겠군요."
그냥 하지 말라고 소질이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기껏 면전에다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다만 성격이 좋아서 삐삐의 말에 상처받지도 않고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아서 다행이었다.
==
"그래서 절 만나고 싶다고 하신 이유가 뭐죠..?
나쁜 짓은 ㅇ...안했는데..."
제롬의 말에 해백은 멈칫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클론 샘플을 제공했다고 들었는데."
"네... 했...어요.... 돈이 필요했고... 지위도... 필요해서..."
"원치 않는 클론제공을 했다는 거지?"
"아...그건 아니고... 그게... 제 클론같은건 별로 가치도 없을거고...
애초에 그... 클론이 수가 많으면... 관찰도 편할거고..."
"관찰?"
"아...네... 그런데 아저씨는....?"
"아니, 그냥 혹시 네가 부당하게 묶였던건가 해서 조사하러 온 거였어."
"아... 늑대...군요?"
"늑대?"
"늑대...는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아요..."
"무슨 오해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난 늑대 같은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은 있지만..."
"다른 점... 아, 느껴져요. 이질적인 느낌... 혹시 말해줄 수 있어요?"
"뭘... 내 이야기?"
"네... 듣고 싶어서요... 안...돼요?"
해백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아이의 신뢰를 위해서 이야기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는건 어렵지 않은데, 주변에 보는 눈이 많으면 말을 해줄 수가 없어.
아무래도 나한테도 중요한 이야기라서."
"아...그렇...군요... 그럼 제가 물어볼게요."
제롬이 잠시 물어본 이후 흔쾌히 승낙한 데레코즈 덕분에
둘은 방을 옮기기 위해서 계단으로 향한다.
해백은 여전히 제롬이 아직 순수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이 아이를 지켜줄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계단에 발을 들이면 어째서인지 음습하고 불쾌한 기운이 느껴진다.
퀴퀴하고 습한 냄새. 어딘가 부패한 냄새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묻는다.
"제롬, 이 앞으로는 가지 않는게 좋아 보이는데."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 아래에는 뭐가 있는 걸까 생각하면
궁금해지지 않아요?"
해백은 그제서야 자신의 추측을 확신으로 굳혔다.
이 꼬마는 데레코즈에게 붙잡혀 있는 거라고. 그래서 이 지하실에 묻힌 증거를 찾으려 하는 거라고
멋대로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와줄게. 여기서 확실히 증거를 잡아서 나가는거야."
"늑대... 같은데... 일단 가요..."
지하의 복도는 길게 늘어섰는데, 그 내부 깊은 곳에서부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왔다.
해백이 곧장 그곳까지 걸어간 후 문 앞에서 무장을 준비했다.
원래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전투를 각오하라고 했던 에리아에게 감사하며
그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문고리를 잡으면 왠지 모를 서늘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그가 긴장으로 침을 넘기는 순간, 뒤에서 제롬이 말했다.
"열어주세요.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내 이야기도, 아저씨 이야기도..."
제롬의 눈. 그걸 해백이 잠깐이라도 봤더라면 해백은 문을 열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새 아까와 같은 순수함은 온데간데 없고
불안함이나 두려움을 담았던 눈은 오직 흥분과 일그러진 희열을 담고 있었다.
그건 이제껏 누르고 숨기며 이곳으로 도달하기 위해 품었던 열정이었다.
해백이 마침내 문을 열면 안쪽에서는 악취 섞인 서늘한 바람이 풍긴다.
[또...인가...]
안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이끌린 것은 해백도 마찬가지였다.
"시취군. 제롬, 뒤로 물러나 있어."
"싫어요..."
어느새 자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안쪽으로 뛰어들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리며
미친 것처럼 알수없는 소리를 쏟아내는 제롬에게 해백은 공포를 느꼈다.
"뭐야...?"
그러나 이미 들어와 버린 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 너도... 같은 운명이구나...]
"허가받지 않은 자. 그리고 세계에 속하지 않은자...
넘어온 자와 숨어드는 자. 분명 둘이 만나게 되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대체 뭘 알고 있는거야?"
"말 안해도 알아요. 소문이 다 났다고 아저씨.
도서관에서 건너온 사람이라고 말야.
다시 말하면 여기 묶인 이 허가받지 못한 존재랑 아저씨는 아주 닮았다는 거야.
닮은 존재.... 닿으면 재미있을걸..?"
"씨발... 함정이라고?"
"말..했잖아... 헤헤... 늑대는 싫어한다니까..."
제롬이 웃는 모습, 그리고 딱 보기에도 양 팔이 파여 썩어가는 시체까지.
해백은 도망치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질적인 목소리가 하나 더 끼어들었다.
"역시 이렇게 됐군요. 말 안듣는 애새끼, 멍청한 방문자 하나, 그리고...
하아... 장난감에게는 죄가 없군요. 말을 안듣는 애새끼가 하나 더 있었을 뿐이니.
아, 지금은 주인이었군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염소의 머리를 한 남자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위를 올려다본다.
"일단 방해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으니 관여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여튼 멍청한 놈들이 주도적으로 뭘 하려고 하면 꼭 이런 결말이 발생하거든요."
"대체 뭐야?!"
해백이 외치는 것도 무색하게 제롬이 앞으로 걸어와 말했다.
"나랑 계약하죠? ㄴ..내...내 수명의 절반을 줄게요.
앞으로 몇년이나... 나...남았는지 모르지만.
난 힘이 필요해요. 아..버지처럼...되기 위해서...완전해지기 위해서."
그러면 염소머리의 악마는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수명의 절반을 바치면서 완벽을 꿈꾼다고요?
뭐 그런 어리석음도 인간이죠. 뭐 좋습니다. 내 이름은 론 체르모니아 마벨디르.
단 그 계약은 대가가 부족하군요. 위층에 있는 주인과의 계약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요."
"그정도는 ㅈ...조사해 왔습니다. 단발성 ㄱ...계약으로 하죠."
"잘도 그런걸 조사하셨군요?"
"집에 그런 책이 ㅁ...많던데요."
"단발성 계약을 얹어서 '제 방식대로' 한다면 단가가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 줘요... 나...난.... 이 자리에... 세명이 모두....이...이질 적인 ...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질적이라... 그렇게 하시죠."
악마는 웃으며 박수를 쳤고 유유히 방을 떠났다.
"당신과의 계약은 단발성이며 이후로는 제가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이만 가보죠. 위층에 모자라지만 착한, 짜증나는 주인이 있거든요."
방에는 널브러진 시체 한 구와 두명의 남자가 남았다.
"아, 대체 몇 번이나 개고생을 반복하는거지..."
그렇게 말하며 일어난 것은 제롬의 몸이었다.
그러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진 상태였고, 불쾌할 정도로 깡마른 팔은
뼈 위에 겨우 가죽이 덮인 것 같았다. 핏줄이 드러난 손에 종양이라도 퍼진 것 같은
울긋불긋한 피부는 도무지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를 바라보는 것이 해백의 몸이었다.
"어...? 내가 왜...?"
둘은 마주보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널브러져 죽은 시체를 발견했다.
"왜... 내 몸이 저기..."
그렇게 질문을 반복하던 둘은 하나의 의문을 품고 서로에게 묻는다.
"너 누구야?"
"너 누구냐?"
해백이었던 육체에서 차갑고 불쾌한 피드 린의 목소리가 흐른다.
생기 없는 갈라진 목소리에 뒷걸음질치는 제롬의 마른 육체에서는 해백의 얼빠진 소리가 흐른다.
"결국 둘 다 뒤섞인 것 같은데."
"애새끼는 어디 갔지?"
"아마... 저 시체에..."
"수명이 그렇게 짧은 줄은 모르고 계약한 모양이군."
"그런...가...?"
그들의 짧은 대화가 끝이 나게 된 것은 억지로 쾅 하고 열린 문 때문이다.
"이 미친 새끼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마녀였다.
그 앞에 선 둘은 멍하니 마녀를 마주했다.
그리고 마녀 역시 그들을 둘러보다 널브러져 죽은 시체를 발견했다.
"....얘 누가 이랬어?"
낮은 목소리로 묻는 마녀에게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데레코즈."
"예, 무령님."
"피드 린이 왜 너희 집 지하실에서 죽어있지?"
"이전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것을 치료해 주고 있었습니다."
"후우... 내가 찾고 있다고 말 안했던가?"
"들은 바 없습니다."
"그래... 알겠어..."
그리고 공기가 날카롭게 모여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며 기괴한 미소를 띄고 있는 마벨디르만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입을 쭉 찢은 채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해백은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도망쳐야 한다. 판단이 들면 바로 마녀를 밀쳐내고 달렸다.
그러나 그 상황의 공포보다도 어딘지 모를 희열과 쾌감이 느껴져서
스스로가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느끼고 있다.
자신이 가진 기억과 감정에 자신의 것이 아닌 게 섞여 있다.
아마 그게 제롬의 것이라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닌 척 그는 도망쳤다.
이질적인 존재가 되길 바란 꼬마는 그렇게 죽고 그 잔념만이 자신에게 섞여든다.
아니, 어쩌면 그 꼬마의 영혼에 자신이 섞여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게 아니라면 이상하게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며
익숙하게 제롬의 저택으로 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눈 끝에 욕망이 담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그가 저택으로 돌아와 문을 벌컥 열어 젖히면 하나뿐인 하녀가
그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어서오십시오, 나의 사랑스런 에스메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