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오 나의 에스메랄다
* * *
하나 둘씩 맞춰지는 기억을 더듬어가며 해백은 의자에 앉았다.
모든 인간은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 생각이 자꾸머리에 남는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 당당해지고 자꾸만 죄책감이 옅어진다.
분명 악마와의 계약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악마라는 그 소수 종족이 이렇게나 강하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이
어물쩡하게 그 자리에서 도망을 선택하지 않아서 휘말린 사고였다.
어느새 해백은 원인을 제롬이 아닌 자신에게서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 조차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그는 멍 하니 앉아 있을 뿐이다.
아마 모든 시작은 그것이었을 것이다.
제롬이 처음 황제 플로라를 찾아 갔을 당시에 플로라는 거절했다.
"왜 너같은 아이를 대량으로 복제해달라는 거지? 더 성능 좋은 유전자가 있다.
하다 못해 킬레리를 복제해도 원판은 네리 M 모귀드이니 조금 손상된 부분을 제외해도
기본적으로는 무리 없이 뽑아낼 수 있을 거란 말이다.
돌아가라. 넌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구나."
"그...화...황제폐하께서... 그렇게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저는 나이가 어리고... 그러니까... 각 귀족의 취향에 맞춰서... 출고된 이후에도...
커스텀이 가능하니까... 그... 대부분의... 클론은 성욕 처리용으로... 팔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가... 그 부분에서..."
"미친 소리."
자신을 역겨워하던 눈으로 보던 플로라의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 또 멍하니 한숨을 내쉰다.
"저...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지위도 많이 필요합니다...
제가... 제 인생에... 영향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어요..."
"네 얼굴을 걸고 클론이 학대당할 것이다."
"괜...찮아요... 대외적으로는 숨겨질테고... 저는 마침 체구도 여리여리해서...
그런... 쪽으로도 수요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확신하지?"
대답 대신 열어보인 상의의 내부에는 이미 손자국과 희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오는 길에... 많이 당해서... 이미 이 나라에 제 편은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제발 절 그냥... 클론으로... 차라리 클론이 제 대신 당하는게...
더 편할 것 같아요..."
플로라는 그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데레코즈가 지켜본 것이 그의 호의의 원인이었다.
"그래도 다른 소원이 있다면 말해보아라. 들어주마."
플로라의 최후의 호의에 제롬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제롬은 저택에 하녀 하나를 데리고 왔다.
"제롬...무슨 짓을 한거냐..."
해백은 덜덜 떨었다.
"죽은 자신의 어머니를... 클론 하녀로 만들었다고...?"
충격에 떨리는 손을 아무 것도 모르는 하녀가 마주 잡는다.
"저는 행복합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고 모실 수 있게 되어서..."
동공이 멈추지 않는다.
바르르 떨리는 손이 진정되지 않아 해백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그 충격은 단순히 행위와 사건에 대한 경악만은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도 너무나 차분하게 상황을 납득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공포이기도 했다.
마치 제롬이 자신의 사고를 더럽히고 자신의 뇌를 잠식해가는 것 같은 감정에
해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수명을 절반을 바친다고 한 제롬을 생각하면서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완전한 존재는 수명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니
수명이 다하기 전에 완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제롬의 생각을 읽었다.
"아무래도 애는 애구나... 사고방식이 아직 어려... 근데... 그게 이제 내 일이네.
싸지른건 어린앤데 왜 치우는건 엄한 나인지 모르겠다...하아..."
마른 몸은 너무나 가늘게 떨릴 뿐이다.
해백은 짐을 챙겨 도망쳤다.
더는 그 저택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에리아가 찾아올 것이다. 어쩌면 황제와 데레코즈도 찾아올지 모른다.
악마와의 계약은 단기적인 것이었으니 이대로 도망친다면 살 수 있다.
어차피 그들은 자신을 몰랐다.
제롬의 몸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기이하게 변형되었으니까.
이대로는 유레크로스로 갈 수도 없다.
그래서 그는 동부로 도망쳤다.
빠르게 더 빠르게 동부로 도망쳤고 북부 어딘가에 있다고 들은
젤렌지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피드 린은 해백의 몸에 갇혀 있었다.
얼결에 서 있기는 했으나 몸이 영 제것 같지 않았다.
피드 린, 그리고 체헤게의 육체보다 당연히 더 작고 왜소했고
어쩐지 꼭 끼이는 것 같은 답답함도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에리아와 데레코즈, 그리고 분명 염소머리를 하고 있었던 집사.
당했다는 생각이 귀를 때린다. 언제까지 자신에게 지옥을 선사할지 모르는 집사를 째려본다.
그러나 상대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아니 어쩌면 관심조차 없다는 듯 무반응이다.
데레코즈는 한마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누가 저 친구를 죽였지?"
"저...는 모릅니다. 못봤습니다."
그 대답에 데레코즈는 가만히 2초간 그를 응시하다 말했다.
"믿겠네, 정직하니까 도망치지 않은 거겠지."
그제서야 숨통이 트이듯 다리에 힘이 풀린다.
"해백이라고 했나...? 이만 돌아가게."
데레코즈는 그렇게 말하고 그를 내보냈다.
피드 린이 밖으로 나갈때까지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제껏 집중되던 이목과 관심이 사라진 것이 그에게는 달콤했다.
지하로 내려오면서 에리아가 삐삐를 데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삐삐는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
다만 자기만 쏙 빼놓고 내려갔다는 것에 조금 삐쳤을 뿐이다.
데레코즈가 쥐포를 미리 주지 않았더라면 빼액 울었을지도 모른다.
삐삐는 그저 유모차 안에서 덮개를 내리고 쥐포만 주워먹었다.
피드 린은 터덜터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조차 알지 못하고서 길 위에 우두커니 서면
왠지 옅은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절망과도 같은 작은 울림.
그건 그의 기억 속에 셰릴 린이 무사히 떠났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생긴 것이었다.
셰릴 린의 부재로 절망한 남자의 심정에 애달픈 목소리가 섞인다.
돌아갈 곳을 영영 잃어버린 불안감이 증폭되는 것 같은 기분에 그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가 멍하니 걸으며 중얼거린 말은 그저 옛 노래처럼 어딘가 아련하게 잊혀졌다.
이제는 정해야 한다. 욱씬거리는 가슴을 잡고 굴렀다.
이제껏 해 온게 뭐가 있었던가 돌아보면 인간답게 살기를 바란다고 해놓고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섹스. 오로지 섹스. 그리고 때때로의 폭력.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쯤이었을까.
"너구나? 탈주자라는거?"
흠칫 놀라 돌아보면 금발의 남자가 서 있다.
머리가 상당히 길고 찰랑이는 남자는 건장한 체격이지만 거구는 아니었다.
본 기억이 전혀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리고 경험상으로 알게 된다.
"아르간티아..."
"에헤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안돼.
알다시피 여기저기서 이름이 불려서 좋을 게 없거든."
"왜... 날 찾은거지..?"
"거래를 제안하러 왔어. 너도 원치않게 휘말린 거잖아?"
"...."
"이 세계에 네 자리는 없어. 알다시피. 그리고 네 존재는 그녀를 자극하거든."
"그녀...에리아인가?"
"그렇지 뭐. 다 알면 이야기가 빠르겠네. 아버지께 여쭤봤어. 네 처우에 대해서.
너를 네가 원하는 그녀가 있는 세계로 보내줄게.
원래는 그건 네메시스에게 거스르는 행위야.
용서받기 힘든 일이지. 그래서 말인데, 넌 그저 심부름만 하면 돼."
"심부름...?"
"이제껏 해 온 것처럼 사냥만 좀 하면 되는 일이지.
아무래도 그쪽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레귤러가 있어서 말이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아듣지?"
"배제해달라는 건가?"
"그래. 익숙하잖아?"
"아니, 차라리 네메시스로 보내다오. 돌아가게 해 다오.
나에게는 이곳이 지옥이다. 나는 괴로워서 살고 있고
이걸 표출하고 싶었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이제 그만하고 싶다..."
"아직 파악을 제대로 못한 모양이네.
내가 너에게 거래를 제안하면서 네메시스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건,
이미 거기에 네 자리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해."
"뭐라고...?"
"데릭도 그 건으로 협상을 하러 왔던 것 같은데, 너는 흑마법으로 강령한 상태잖아?
그 근원이 다르말록인것 몰랐어? 우리 관할이 아니게 된 거라고.
뭐 탓할 생각은 없는데 일단 그렇다네?"
"이런..."
"아이러니하지만, 넌 지금 다르말록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 된거야.
그래서 네메시스가 널 배제하려고 하는 거고. 엄밀히 말하면
이 세계에서 널 추방한다는 의미라고."
"그렇다면 그 말은 나는 강제로 네메시스로 끌어내릴 수 없다는 이야기군?"
"맞아. 선택은 네 몫이야. 어쩌면 데릭의 길을 고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넌 분명..."
"그래. 거래를 수ㄹ..."
"잠깐!!!"
서늘한 마력의 창이 날카롭게 주변을 둘러싼다.
바닥에 연이어 박히는 빛의 마력을 보고 아르간티아는 고개를 돌린다.
"왔구나?"
그곳에는 금발의 마녀가 숨을 허덕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곧장 눈을 치켜올리고 말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꺼림칙해서 말이지. 분위기가 변했거든.
절대로 못 넘겨. 아르간티아. 거래는 이쪽에서 파기하겠어."
"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게 아니야."
"결정하자고 하는게 아니야. 중간에 난입해서 훼방 놓는거지.
말하자면, 하이잭이지?"
"하아...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으실텐데. 아니지, 사람이 사람이니 좀 다르려나?"
"당사자랑은 내가 잘 말해서 합의 볼게."
"못 말리겠군. 고생해야겠네 로드원. 어지간히 집착하는 마녀한테 걸린 모양이야.
차라리 네메시스에 남아있는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아니... 내 의사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아르간티아는 손을 붕붕 흔들고 사라졌다.
"인사는 됐지? 피차 이제 와서 그런거 할 사이는 아니잖아?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는게 좋을 거야.
나 상당히 오래 참았어."
"할 말은 없다. 이제와서 무슨 말을 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이제 너도 그만 날 포기하는게 어떻겠나?
너무 어긋나버렸다는걸 모르진 않을텐데."
"내 관계 어긋나는건 익숙하니까 괜찮은데, 너 말이야 너.
넌 괜찮겠냐고."
"잘못은 마땅히 죗값을 치르게 되는 법이다."
"허세는. 그래서 대체 지하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모르겠다... 류해백이라고 했던 남자는 아마 도망쳤을거다.
날 보고 자기 몸이라고 놀랐으니까."
"...."
에리아는 잠시 침묵하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피드 린의 얼굴을 후려친다.
아마 그녀의 여린 힘으로는 제대로 된 충격이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마력은 담기지 않았다.
"왜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하지 않지?"
"뭐가."
"마력을 담아서 쳐도 된다. 네가 고작 그렇게 때리자고 이제껏 참아온건 아닐거 아니냐."
"그런건 내가 정해."
"기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된다. 대신 이제 그걸로 끝을 보자."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애초에 그렇게 풀어줄 거였으면 아르간티아를 떼내지도 않았어.
이제껏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몇대 때린걸로 끝낼거라고 생각해?"
한번 더 뺨으로 날아드는 손이 짝 소리를 내도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인
피드 린은 이제 스스로의 뭔가를 체념한 것 같았다.
"내가 워낙에 미친년이어서 네가 그렇게 증오스럽다거나 싫지가 않았어.
그렇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널 옆에 두고 부려먹었던 거기도 하고.
그래서 난 내가 그런데 무감각한 줄 알기도 했었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미쳐버릴 것 같더라. 내가 그냥 익숙하지 않았던 거였는데
사람들이랑 지내다보니까 알겠더라. 그냥 난 네가 잘되는게 보기 싫은 거였더라.
옆에 두고 갈구고 싶었었네. 근데 이제와서 또 도망가겠다고? 놔두라고?"
"그만해라."
"개소리."
또 한번 날아든 손날은 허무할 정도로 가볍게 막혔다.
손을 쳐내며 팔을 빼낸 에리아가 뒤로 주춤하면
피드 린은 뒤로 돌아섰다.
"그런 이야기를 할거면 울지는 말아야지.
이미 얼굴이 눈물 범벅이다. 애가 보기 전에 눈물은 닦고 가라.
이제와서 이기적인 말일수도 있지만, 넌 좋은 친구였다."
"후우..."
"솔직히 널 만나려고 했었던 것도 사실이고, 널 이용해서 네메시스로 돌아가려고도 했다.
하지만 모두 무산되어 버렸어. 이제 내가 네 옆에 남을 이유는 없다.
넌 이미 가족이 생겼고 내가 필요하지 않다. 넌 나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
내가 너를 볼때마다 불행해지는 것 같아서 내 열등감이 날 더 초라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이제 만나고 싶지도 않다. 말 없이 떠난건 우연이었지만 널 떠난 순간이 행복했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열중할 수 있었던 모든 순간들이 좋아서 날 그렇게 열정적으로 만들어준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네가 모든걸 망쳤다. 지하에서 썩으면서 생각했다.
이제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난 떠날거고 이제 너도 나를 찾지 못하겠지.
이제 찾지 마라. 마지막으로 너한테 사과를 하고 싶었다. 고마웠고 미안했다.
그리고 사랑했다."
"개새끼가..."
그러나 에리아는 일어서지 않았다.
죽지도 않았고 웬만한 상처는 바로 회복할 수도 있었던 그녀는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만이 번져갔다.
그런 그녀의 소문은 나라 전체에 퍼졌고,
하루 쯤 지나 플로라의 귀에 들어갔다.
플로라는 에리아에게 왜 거기서 울고 있었느냐고 물었고
에리아는 고개를 돌리며 시큰해진 코를 숨겼다.
"그냥... 어.... 옛날 생각이 나서."
길거리에서 옛 생각이 난다고 운다는걸 그다지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플로라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어떤 일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
"플로라, 앞으로 오고 싶을때 언제든 와. 한동안은 빈자리를 좀 채우고 싶으니까.
대신 넘치지도 않게, 그리고 마르지도 않게 강처럼 와줬으면 좋겠네."
"네..."
그리고 그날, 플로라는 왕성에서 상담소까지 직통으로 운하를 파기로 했다.
비효율적이고 어려웠으며 인력도 많이 소모되는 일이었지만
플로라는 기어이 3시간의 계획으로 성공률이 84%에 육박하는 계획을 세웠다.
아예 미리타엔 국경 주변 토지를 다 파내고 해로와 이어버리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대공들과 크레마르의 격렬한 반대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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