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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27화 (227/303)

〈 227화 〉 오 나의 에스메랄다

* * *

해백은 결국 그날 밤 저택을 빠져나왔다.

본능이 이끄는대로 하녀를 데리고 도망쳤고 무작정 북쪽으로 도망쳤다.

밤길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험난했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릭 무엇보다 해백에게 어려웠던 것은 자아의 이분과 육체의 혼란이었다.

"어... 그러니까... 제가 어떻게, 아니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편한대로 불러요 나의 에스메랄다.."

확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머뭇거릴수만도 없다.

선택의 기회가 부여되는 것이 그에게는 난제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면...에스메랄다라고 불러도 되나요?"

"왜... 나같은걸... 저는 당신의 에스메랄다가 될 수 없어요.

제롬. 당신이 나의 에스메랄다인거에요. 내게는 거창한 무언가보다

당신의 사랑이 필요할 뿐이니까..."

"그 에스메랄다는 뭐죠?"

"버림받은 자의 마지막 사랑이에요."

"설마... 그 책이 여기에도, 이 세계에도 있습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흘러들어온 것이다. 아마 이전, 혹은 그 이전 차원의 도서관에서 넘어온 거겠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정신상태는 이미 붕괴된 것이다.

마침 우연히 그게 제롬의 사상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의지할 대상을 찾아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 사람과

완벽하게 홀로 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위에 서는 사람.

끔찍한 화합이었다. 더욱이 그게 모자 관계라는게 싫었다.

그러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상황에 순응하는 모습만 늘어간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에요?"

"이전부터 늘 아버지를 만난다고 하지 않았나요 에스ㅁ...제롬."

해백은 살짝 웃으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고맙다는 감정 때문이었다.

자신을 에스메랄다라고 부르겠다는 말에 순순히 그 호칭을 포기한 모습에

해백은 이 하녀를 더이상 단순한 하녀로 볼 수 없어졌다.

머리로 사고하던 내용이 감정의 영역으로 흘러오게 되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아버지라..."

기억에 섞인 아버지의 모습은 이제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하녀가 말하는 아버지와 자신이 인지하는 아버지는 분명 달랐을텐데.

그 아버지라고 하는 개념, 그리고 그 단어가 가지는 느낌이 섞여서일까.

빈포드? 아니면 젤렌지? 잘 모르겠다.

젤렌지라는 이름은 분명 듣기만 했었을 것이다.

만난 적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이상한 울림은 대체 뭘까.

그렇게 말하며 그들이 산속으로 숨어들고, 조용히 걷고 있다가

마침내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면 두 사람은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를 만들어 앉았다.

"너무 오래 걸었죠? 좀 쉴까요?"

"뭐라고 하시든 따를 뿐이에요. 저는 하녀일 뿐이니까요."

"킬레리...가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아마 평생 이해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그렇게 만드네요. 누군가에게 맹목적인 지지를 받는다는건... 꽤 따뜻한 일이군요?"

"오늘의 제롬은 뭔가... 상냥하네요."

"아..."

이 여자가 보고 있는 자신이 자신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며, 다른 누군가의 추억에 기생했다는 게

그의 마음에 조금의 앙금으로 남을 때, 하녀는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어떤 모습이어도 내게 에스메랄다는 당신 하나 뿐이니까."

"당신 하나뿐..."

"네, 당신 뿐이에요."

그건 무거운 비수와 같았다.

그가 대체하지 못하는 큰 빈자리를 떠안은 것 같아서 왠지 가슴 한구석이 서먹했다.

이런 그녀에게 자신은 어떤 말도 쉽사리 건넬 수 없을 것 같았다.

제롬이 선물했던 추억과 기억 하나까지도 자신이 덧칠하는 것 같아 미안했으니까.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하지만 내게는 유일한 사랑이라는걸 알아주세요.

버려진 나라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은 당신 뿐이고,

당신의 등을 의지하라고 말한 것도, 모든 것을 바치라고 말해준 것도 당신 하나뿐이에요."

"그 말은...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텐데..."

해백은 자리에 앉아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다.

요령이 없어서 시간이 꽤나 걸리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피워낸 불은

주변을 따뜻하게 만들고도 남았다.

"개념은 대상에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해백의 말에 하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죠?"

명확히 정의하지 못하는 개념을 하나의 대상에 못박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에요.

마치 우리가 아무리 가족이나 사랑, 슬픔, 분노 따위의 설명을 해도,

그게 온전히 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거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롬."

"나의 눈에는 내 앞에 앉은 당신이 조금 여리고 헌신적이며 때로는 차분하고

때로는 감정적인 여성으로 보여요.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또 다를테고,

당신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은 또 다르겠죠. 어쩌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선,

다른 차원의 어느 세계에선 다르게 말할거고, 다르게 정의하게 되겠죠.

내가 보는 당신은 과연 정말 내가 보는 그대로의 당신이 맞을까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보는 그대로, 제롬이 원하는 그대로의 여자가 될테니까."

"못 당하겠네요."

나는 당신이 보는 제롬이 아닐텐데도. 그럼에도 당신은 내게 맞춰준다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원하는 제롬의 추억에 모든것을 맞춰가기를 원하는 건가요.

그런 말을 할수는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울적했다.

이 관계는 제롬으로 인해 형성되었고 제롬으로 인해 유지되는 관계지만

이미 이 사이에 제롬은 없었다.

사실은 제롬과 뒤섞이지 않기를 바라고도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과 이 현실에 남은 미련을 저울질하는 것은

해백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는 왜 한 건가요 제롬?"

"그냥 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해 봤어요.

나를 낳은 아버지, 가슴 속의 아버지, 그리고 기억 속의 아버지 말이에요.

셋은 전부 다른 존재거든요. 그런데 같은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서 무언가가 변해가고 있어요.

내가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품었던 생각이, 감정들이 섞여가고 마침내 알 수 없게 되어가죠.

아버지라는 개념을 이제와서 하나의 대상에게 돌리기라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그건 아직 제롬, 당신의 선택을 짊어질 사람이 없어서라고 했잖아요.

정답을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었죠."

"그래서 나보다 완벽한 사람을 찾는...거고요..."

말해놓고서도 해백은 멈칫 손을 떨었다.

자신의 사고가 아니었다. 그런 사고방식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기억속에 묻혀있을 뿐이고, 그걸 꺼내볼 생각도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죽은 제롬의 사고였다. 그러나 자신은 위화감 없이 자연스레 그것을 말했고

순간적으로 거기에 자신의 감정이 담겨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날 사랑해주겠다고 했었죠.

그때가 되면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완벽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완벽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그렇게 말했죠.

미숙한 사람들끼리 살자고."

"그랬...죠."

해백은 대답을 길게 끌지 않았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그들은 다시 출발했고, 미리타엔 북쪽의 만데라파 호에 도착했다.

만데라파 호는 산맥 가운데 홀로 존재하는 호수였고, 그곳의 물이 얼마나 깊은지 가늠할 수 없다고 했다.

호수는 청명하다 못해 검푸른 암청색으로 반짝였다.

햇빛을 받아 빛났을 터인데도 그 깊이는 바다와 같아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물 하나도 살지 못하고 있다.

물고기를 비롯해 식물 하나, 그리고 벌레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예로부터 그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고대의 호수라고 했었고

그곳에 함부로 접근하는 이들도 잘 없었으나

해백은 그 사실을 잘 몰랐다.

다만 호수 깊은 곳에서 물이 끝없이 솟아나는 그 모습에는

산뜻한 반짝임 같은 것이 스며있었다.

해백은 그곳에서 식수를 보급했다.

가지고 있던 수통에 물을 잔뜩 채워넣고 나서

자신을 따르는 하녀, 에스메랄다와 그곳에서 목을 축였다.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제롬?"

"일단은 백색의 고원으로 가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롬, 백색의 고원으로 갈 거였다면 길을 한참 잘못 들었답니다.

북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갔었어야 해요. 미리타엔 북부에는 만데라파 호와 사칼바레 뿐입니다."

"어... 그래요?"

그렇게 묻고 나면 그제서야 그랬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돌아갈래요 제롬?"

"그래야겠네요."

해백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최근 정세를 보면 분명 길이 평탄하지는 않을 거에요.

아마 팔라딘이 그 앞에서 막아설수도 있고요.

조심하세요 제롬. 무기는 있나요?"

"당연히... 아."

해백의 가방에는 검과 빈포드의 갑옷이 있었지만 제롬은 아니다.

그리고 제롬의 소지품만을 가지고 있는 해백은 검도 갑옷도 소지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 왔습니다.

제 물건을 팔아서 구입했습니다."

"물건?"

"당신께서도 아시겠지요. 제게 미련만 남겨준 그 책입니다.

도서관을 통해 넘어온 것이라고 했더니 고가에 팔리던데요."

"그건 분명 에스메랄다 씨에게 중요한...거잖아요."

"말씀 드렸잖아요. 당신보다 제게 소중한건 없어요 제롬."

해백은 손을 떨었다.

이 사랑과 헌신에 도저히 답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게 원하는걸 난 들어줄 수 없을 거에요."

"아무도 이미 손을 떠난 재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이제 당신이 원하는대로 하면 되는 거에요.

말했잖아요. 하녀라고. 스스로의 위치는 자각하고 있어요.

내 사랑하는 제롬, 그리고 나의 에스메랄다.

어머니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의 전 나이도 다르고

기억도 다른 그저 당신의 하녀 에스메랄다일 뿐이랍니다."

해백은 그 말에 체념해버렸다.

"내가 뭔 짓을 해도?"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에 섞인 제롬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해백은 그냥 다 놓아버릴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아니 이미 가졌는데 뭘 하지 못하겠느냐는 생각.

어우러지며 천천히 검은 색으로 뒤섞여가는 탁한 생각들에

그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으면 하녀는 그의 손을 꼭 잡는다.

"확신을 가져주세요. 주인님."

"그렇지만 전..."

"알고 있어요. 이미 내가 알던 제롬이 아니라는 건."

"....!"

"아무리 그래도 제롬은 제 원형의 아들이니까요. 모를 수가 없죠.

전 그런 당신을 포함해서도 받아들이고 있는 거에요 제롬.

그게 제롬이 바랐던 거니까. 그리고 그게 제롬을 따르는 나니까.

그리고 그게. 당신의 욕망이 될 테니까."

"내 이름은 해백이에요. 류해백."

"아, 오전에 저택을 찾았던 그 분이시군요."

"네. 이제서야 밝히게 되어 미안합니다."

"하나만 약속해주실래요?"

"뭐든요. 저도 당신에게 되돌려드리고 싶네요."

"당신의 말은 곧 제게 상식이 될 거에요.

제롬이 원한 것은 이뤘어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

그리고 더 완전해지는 존재. 그런 존재로서 내게 명령해줘요.

물러서면 안되는 거에요. 당신은 언제나 굳셀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들에 저항하지 말아요.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완전한 존재로 평가받을 수는 없는 법이에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주인이 되어주세요. 당신 스스로가 불완전을 싫어하는걸 알아요.

그러니까 좀 더 나를 짓밟고 올라서세요. 내가 불완전하다는걸 납득시켜야 하고

제롬은, 아니 해백 당신은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다는걸 증명해주세요.

당신이 내뱉은 주장을, 스스로 정답으로 만들어주셔야 합니다."

"내가 부정하던 것들이 제롬의 염원이었군요."

"아아... 불쌍한 사람."

"난 불쌍하지 않아요.

불쌍한건 그런 사상에 빠져버릴 정도로

그를 동정하고 사랑했던 당신이에요."

"그래요. 맞아요.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이에요. 그런 나를 이끌어줘야 해요."

해백은 멍하니 눈을 감았다.

비를 맞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빈포드의 기억, 그리고 젤렌지의 기억을 지나 흩어진 소시지,

그리고 게비디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가 했던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한 건지

묘하게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개념이었구나... 같은 걸 본 기분이야."

언어로 가려져있던 것을 치워내고 마침내 그 개념의 본질을 마주한 기분을 느끼면서

해백은 조용히 에스메랄다를 끌어안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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