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어머니의 이름
* * *
"아니 엄마! 아니라니까! 나 쪽팔려서 안된다고!"
아침부터 그런 소리가 가게 앞에서 들렸다.
"나가볼까요?"
발레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내게 물컵을 건넸다.
"아냐, 됐어. 뭘 나가봐. 가게나 보자."
"알겠습니다."
그렇게 적당히 너기려고 했는데 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가게에 발을 들인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일행인데 같이 들어와도 괜찮죠?"
"어... 네..."
내가 벙 찐 표정을 짓고 있으면 웃으며 손님이 물었다.
"오랜만이네요. 수소문해서 찾았어요. 이렇게 미리타엔에서 가게를 내신 줄 몰랐네요.
무령? 그런 직책에 있으신 분인줄도 몰랐고. 아닌가? 들었었나요?
제가 기억력이 안좋다보니까 종종 이런답니다."
"오랜만...이에요... 얼굴이 많이 펴셨네요."
"그럼요. 요즘은 하루하루 살 맛이 난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손님은 재클리나 베일슨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시선을 피하는 헬렌이 있었다.
"뭘로 드시겠어요?"
"음, 저는 밀크티로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밀크티요?"
"네, 우유가 아무래도 입에 맞는건 어쩔 수 없나봐요.
출신이 또 그렇다 보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옆에 앉은 딸을 톡톡 건드려 무얼 마실 것인지 물었다.
"나...나는 헬라레소."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여기요."
미리 준비해둔 음료를 건네면 머뭇거리다 잔을 받는 그 얼굴은 왠지 모를 어색함이 있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오셨어요?"
내 질문에 재클리나가 살짝 눈가를 닦아보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은은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그냥 고마워서요. 이렇게 잘 지낸다는걸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덕분에 딸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고요.
다시 모녀관계로 돌아가는데 시간도 많이 필요했어요.
어색할 때도 있었고 떨어져 지낸 기간의 공백은 메우기 어려워보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다시 같이 살게 된 요즘이 행복해서요.
그래서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거든요."
"아...그럼 같이 서지스에서 사시는 건가요?"
"네. 서지스에서 둘이 같이 살고 있고요.
아빠가 원조를 해 주긴 하니까요. 아무래도 여자 둘이 살기에는 좀 팍팍하잖아요?
그래서 이제 저도 딸에게서 일도 이것저것 배우고 있는데 역시 대장간이 괜히 있는게 아니더라구요.
너무 어렵고 무겁고 해서 말이에요."
"그렇군요. 확실히 철같은걸 다루기는 어려우실 수 있죠. 성인들에게도 힘든 건데요."
"그래도 심적으로는 얼마나 편안한지 몰라요. 엄마가 되어서 얹혀 사는 것 같아
늘 헬렌에게 미안하죠. 이제껏 찾지도 않았다가 갑작스레 얹힌다는걸 받아주기도 했고.
그래서 참 여러모로 고맙기도 하고. 사실 저한테야 사랑스런 딸이지만,
이 아이에게 좋은 엄마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살짝 닦는 재클리나의 눈시울은 붉었다.
"그런 소리 하지 말라니까 엄마!"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낸다.
눈물을 슥슥 닦아낸 손수건은 녹물같은 것이 지지 않게 스며있었다.
"훌쩍... 그래서 한동안 딸과 함께 여행이나 할까 했어요."
"여행이라고요?"
"네. 그래서 미리타엔을 한번 와 보고 싶었거든요. 이 근방에서 가 보지 않은 곳은
여기 뿐이니까요. 유레크로스나 대장간은 단체 이동때 많이 가 봤고,
엠페레스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아... 그래도 여기도 썩 좋은 곳은 아니에요."
"어느정도 각오는 했었답니다. 괜찮아요. 길거리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저도 나쁜 사람이 다 된 것 같더라구요. 그냥 엮이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인것 같아서 굳이 말려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제 막 행복해졌는데. 무슨 말인지 아시죠?"
"네. 사실 그게 현명하죠.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정부에서 거리의 노숙인을 위해서 대량으로 생산해낸 클론이거든요.
목적의식이 있는 행위가 아니에요. 서로 즐기는 것 뿐이죠. 갠히 끼어들어서 좋을것도 없고요."
클론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보였다.
애써 마른 목을 진정시키려는 것인지 밀크티를 마시는 그녀는 뜨겁지도 않은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잔을 비워냈다.
"클론이라... 그런 목적으로요?"
"네. 남성형 개체도 제국 곳곳에 퍼져 있기는 한데... 괜히 엮이지 않는게 좋죠.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 클론의 보급으로 인해서 성범죄 발생률은 눈에 띄게 줄었죠.
클론들은 애초에 저 행위를 위해 생산된 개체들이라 자발적으로 저러는 거고요."
"놀랍네요."
"저도 처음에는 어떻게 저런게 나왔나 했는데, 클론 제공자가 범죄자더라고요.
게다가 저런 행위에 눈이 돌아간."
"이런 행위를 국가가 장려한다고요?"
"바꿔나가봐야죠."
"그렇군요..."
"아, 숙소는 정하셨나요?"
"네. 여기저기서 좋은 숙소가 있다고 저렴한 가격에 해준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던걸요?
길거리에서 호객행위를 하시기에 괜찮은 방을 잡았어요."
나는 이마를 탁 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발레리아."
"네?"
"이분들 아무래도 브로커에게 잡히신 것 같은데.
적당히 처리해줄래? 그리고 나서 괜찮은 숙소로 잡아드려."
"네. 알겠어요!"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여기는 미리타엔 제국이다.
나야 이제는 이곳의 지배권력에 섞여들어왔으니 위험요소가 배제된 편이라고 해도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달랐다.
"호텔 뉴 이스트로 보내면 될까요?"
"그렇게 해줘."
발레리아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재클리나 베일슨을 데리고 갔다.
호텔 뉴 이스트는 젤렌지의 저택이다.
그곳에 거주하던 인원이 마침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
플로라의 명으로 그 저택의 가구를 빼내고 호텔로 개조한 것이다.
내부 공사는 없는 편이었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테리어도 깔끔한 축이었다.
다만 지하실은 아직 개방되지 않았고, 수술장비나 톱따위를 배제해서
비품 창고를 포함해 지배인 숙소 정도로 사용한다고 했다.
플로라는 이번 일로 일자리가 대거 창출되었고 주변 상권이 활성화 되었다고 좋아했다.
어차피 건물은 철거만 해도 상당히 비용이 나가기 때문이었다.
플로라는 공식으로 젤렌지와 그 일가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공식적으로 미리타엔 내에 그들의 재산은 없다는 의미였다.
아무도 반색을 보이지 않았다.
주로 귀빈이나 여행객을 대상으로 개방된 호텔은 이제 막 개업 2일차였다.
발레리아를 딸려 보냈으니 분명 잘 해결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다시 눈 앞의 여성에게 집중했다.
"미안해."
나는 설거지를 하면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난 몰랐어. 그냥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속이 답답하고 머리가 하얘서
아무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말이야... 고마워.
우리 엄마한테 그 가습기... 아니, 방향기를 준건... 정말..."
"전 딱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요. 더욱이 헬렌을 위해서도 아니에요.
그냥 제 앞에서 우는 사람을 두고보지 않았던 것 뿐이에요."
"그래. 그럴수도 있겠지. 우리 엄마는 마르커스가 왜 죽었는지 몰라.
그건 정말 다행이었고,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도 고마워.
엄마는 그랬다면 무너졌을지도 모르니까.
때로는 모르는게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우리 엄마는 여전히 궁금해하셔.
물론 나도 그렇고. 가르쳐줘. 난... 듣고 싶어. 왜 그렇게 된 건지.
그리고 내가 너한테 뭘 잘못한건지."
"잘못은 없어요.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거에요. 알잖아요.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다시피 마녀니까요."
"아냐... 그건...!"
"괜찮아요. 그런 시선 익숙하니까. 모르는게 나을 때도 있다는거 동의해요.
그리고 때로는 차라리 솔직한게 나을 때도 있어요.
마르커스는 나 때문에 죽은 거고, 로봇은 어쩌다 보니 대장간에 두고 왔어요.
그것 뿐이에요."
"그럼 왜 엄마를 도운거야? 왜 나를 엄마랑 만나게 한거야...?
정말 그냥 죄책감같은 거였어? 최소한의 양심? 아니잖아.
넌 진실을 알고 있잖아 에리아."
"죄책감같은건 없어요. 미안해요. 내 잘못이에요. 그냥 그렇게 끝내주면 안될까요?"
"역시 그럴 줄 알았어."
"...?"
그녀는 한숨을 내쉰다.
"다 알고 왔어. 아돌퍼스씨를 만났으니까. 그리고 공방에 찾아온 손님중에
그날 숲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도 만났고.
결국 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이유만 아직 모르겠다고."
"그걸... 모르겠어요?"
"아니... 알 것 같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녀는 커피를 한모금 마셨다.
"내가 뭐라고 너한테 그런 모진 소릴 했을까."
"아무도 자기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남을 헐뜯지는 않아요.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헤프닝으로 넘기고 말죠.
그냥 잊어도 돼요.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고. 나도 잊을테니까."
"아냐... 그런 말이 아니라... 나와 엄마는..."
"두 분은 두 분의 삶과 평화를 즐기시면 돼요.
저는 저의 일상과 행복이 있으니까. 아시잖아요."
"그 행복에 내가 도움이 되고 싶어."
"그럴 수 있었죠."
말 대신 커피를 마신 그녀의 고개가 떨어진다.
"난 아무 것도 몰랐어. 그러면서 널 상처줬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표정을 하는 헬렌을 보고싶지는 않았다구요.
그냥 넘겨주세요."
"왜...?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그녀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방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자그마한 아이가 도도도 달려와서는 스케치북을 편다.
"마마! 이거바! 삐삐 그림 그려써!"
나는 스케치북을 가만히 보다가 빙그레 미소짓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쁘게 잘 그렸네. 사탕 하나 줄까?"
"응!"
삐삐는 사탕을 받아들고 다시 도도도 제 방으로 들어가서는
가방을 가지고 와서 그 안에 사탕과 스케치북을 넣었다.
"삐삐 그림 그리는거 죠아!"
"그래? 그럼 커서 화가 할거야?"
"아니!"
"왜?"
"반네리 이모가 하가 하면 꼬기 못머근다고 해써!"
"어? 왜?"
"돈 업서서. 하가 하면 돈 업대."
"애한테 뭔 소릴 한거야..."
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 헬렌이 말했다.
"그렇구나. 엄마들은 다 비슷비슷한건가봐. 너도 그렇게 사는구나.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워. 내가 억지를 부렸나봐."
헬렌이 애써 웃어보이며 일어났다.
그런데 삐삐가 그런 헬렌을 보고 가방을 열더니 그 안에서 쥐포를 한장 꺼냈다.
"우러? 울지마. 지뽀 주께."
헬렌이 멍한 표정으로 쥐포를 받아들고 자리에 다시 앉았다.
"지뽀 안조아해? 사탕 주까? 쪼꼬사탕 죠아해?"
삐삐는 그렇게 순수하게 되물었고 헬렌은 멍하니 받아든 쥐포를 보다가 툭 눈물 한방울을 흘렸다.
그리고 쥐포를 입에 베어물었다.
"고마워. 맛있다..."
나는 그녀에게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를 건넸다.
"어...?"
"쥐포만 먹으면 목막혀요. 재클리나씨 보기도 뭐할거고."
"아..."
"그리고 그렇게 꽁해있지 말고 웃는게 어울려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지 말해볼래요? 여기 상담소니까.
손님과 점원의 관계로 다시 이야기 해보죠."
"아...응..."
"헬라레소 한 잔 더 드려요?"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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