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 아웃사이더
* * *
헬라레소 한잔. 그리고 반쯤 마신 맥주캔.
그 사이에서 조금은 붉어진 얼굴을 한 그녀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애먼 머리 끝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그녀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알다시피 마르커스는 내게 단순히 선생님이 아니었어.
엄밀히 따지면 그래, 아버지 같은 분이었지. 내가 개기기는 했어도."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그녀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한 건지 계속 말을 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날 떠난 날에도 마찬가지였어.
난 아빠가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 빈자리를 채워주던 그 사람 덕분에 외롭지 않았거든.
알잖아. 엄마도 날 버렸다고 생각했으니까. 얼마 전에 엄마가 날 찾아왔을 때도
솔직히 누군지 기억이 안나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이해하지?"
"네. 저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녀는 헬라레소를 다시 한 모금 마시더니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술이 세네."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가 만든 헬라레소에 변화는 없었다.
"그만큼 오래 보고 살았어. 믿고 따르기도 했고. 그 사람이 뭘 하면 좋아하는지,
뭘 하면 기겁하면서 뜬 눈으로 나한테 기름때 낀 장갑을 벗어 던지는지.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알다시피 우리 엄마를 잊지를 못해서 결혼도 못하는 바보였잖아?
답답할 때도 있었고 바보같기도 했어도 한 번도 진심으로 미워해본 적도 없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피잔을 비운 후에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곧장 맥주를 손에 들었다.
"사실 그래서 너한테 고마웠어. 오래 전에 손을 놓았던 그 사람이 웃으면서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하고 뭔가를 만들고 있었거든.
아마도 그 콜린같은 작은 마을에서 보일러나 겨우 고치던 생활에 만족할 수는 없었을테니까.
그리고 마침내 마르커스는 괴물을 만들어냈어.
시대의 역작, 어쩌면 그 기술의 정수라고 할 군더더기 없는 작품을.
그리고 네가 그 물건을 받으러 오기 전까지 몇 번이나 그 앞에서 무릎꿇고 웃었어.
이제 여한이 없다고 하는 말을 내가 얼마나 들었는지 몰라.
넘겨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몰라, 어쩌면 그 마음을 꾹꾹 눌렀겠지."
"지금 돌아봐도 그 기계는 정말 정교했어요. 제가 쓴다는게 미안할 만큼."
"정교한 기계일수록 충격에 취약해. 그리고 강도도 약하지. 너도 알잖아.
그런데 마르커스는 그 두 가지 쟁점에서 뒤지지 않는 기계를 만들었고,
아마 대장간에 가지고 갔다면 장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
"사실 그 로봇을 완성시킨건 네 몫도 컸을거야.
그 기계는 동력을 반영구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 동력을 엔진에서 어디로도 뽑아낼 수 없었으니까.
말 그대로, 언제든 퓨즈가 금새 타버릴 차와 같은 형태라고 할까.
그래, 동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 전력량이 강하기도 했고, 변압도 어려웠을거야.
그것까지 추가했다면 아마 그 거대한 기계 뒤에 또 전선같은게 잔뜩 든 팩을 달아야 했을걸."
"그러면 불완전한 것 아닌가요?"
"아냐, 그게 마르커스에게는 결정적이었을거야.
자신이 끝내 완성시키지 못하는 기계였으니까.
너에게 전하지 않으면 결코 그 기계는 완성되지 않았어.
마르커스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할 아득한 수준의 기술을 목격하고
그 과정에 자신이 참여할 수 있다는 걸 진심으로 기뻐했어.
자신의 기술이 전기를 쓰는 기계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 셈이었으니까."
"그건..."
"이제 알겠어. 네가 말한 마녀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아마 그 기계에는 영혼이 들어간 거겠지.
아돌퍼스 씨도 그렇게 이야기했었고."
"그래도 당시에 제가 고를 수 있는 방식은 그것뿐이었어요."
"이제와서 그런걸 탓할 생각은 없어.
아무튼 너는 마르커스의 꿈을 이뤄준 거였으니까.
마르커스는 병사들의 손에 들것에 실려 돌아왔어.
표정이 편안해보였다고들 하는데, 그런건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
그냥 눈을 뜨지 않는게 좀 많이 원망스러웠어.
그렇게 보내지 않는 건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다 마신 맥주캔을 찌그러뜨렸다.
"그래서 말이야, 마르커스는 대장간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어."
"대장간의 방식이요?"
"그래. 뭐 요즘은 대장간 내에서도 잘 안한다고 하기는 하더라.
너무 구식 문화인지도 모르지.
인골을 사용해 인장을 만들고 그걸로 비석을 깎는거야.
그리고 그 인장을 거기 걸어주지. 비스듬히 세워주거나."
"저는 익숙하지 않은 감성이네요."
"그렇겠지. 마르커스는 워낙 옛날 사람이니까 좋아했겠지 생각만 하고 있어.
마음 같아서는 널 찾아내서 그 로봇을 받아내고 싶었어.
그리고 그 무덤 옆에 그 로봇을 세워두고 싶었거든. 그런데 이미 늦었지,
사람들은 네가 마르커스를 죽였다고 하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그래서 아마 더 지쳤던 것 같아."
"그 로봇은 저와 함께 미리타엔을 여행했어요.
대장간도 마찬가지고요. 기억의 미로에 다녀오기도 했고요.
그리고 마지막에 저도 친구를 보내주게 되었죠.
결국 남은 기계 몸체는..."
"이야기 들었어. 도토크 장로님께 드렸다면서."
"네."
"그 영감도 하여간에 되게 명줄이 길어. 분명 나 막 들어갔을 때도 하고 있더니.
아니, 결국 좋은 결말은 아닌가..."
"전 잘 모르겠네요."
"에리아. 무슨 말을 해도 성에 차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어.
그런데 만약에 괜찮으면 말이야, 날 용서하지 않아도 되고, 날 친구로 여기지 말아도 되는데
내가 널 믿는게 아니었다고, 마르커스를 배신했다고 했던 말은 잊어줄래?"
"배신...이죠. 어찌 되었건, 결국 제가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으니까."
"지고 갈 생각이야?"
"그래야죠. 한동안은."
헬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침묵하더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얼마인지 세어보지도 않고 내민 돈은 명백히 음료 값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는 못 받아요."
"너 주는거 아냐. 네 딸 주는거야. 그냥 딸이 귀여워서.
잔돈은 네 딸 용돈이야."
"네..."
나는 그 돈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돈을 삐삐에게 건넸다.
"삐삐야. 넌 외면받지 않는 유년기를 보내는구나. 다행이야."
삐삐는 돈을 받아들고 나를 멍하니 받아들고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더니 헬렌에게 말했다.
"쟈! 빠나나 사탕!"
그 작은 손에는 노란 사탕 하나가 있었다.
헬렌은 그 사탕을 집어 포장을 뜯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오물오물 입 안에서 굴리는가 싶더니 씩 웃었다.
"저는 사실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누군가와 친해질 용기를 내는건 꽤 어려운 일이거든요.
사실 언젠가 잊혀지게 될거고, 사라지게 될 테니까.
그러면 남는건 이쪽의 기억 뿐이에요. 남는 기억은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었고요.
그래서..."
"그러면 안대!"
삐삐가 빽 소리를 질러 중간에 말이 끊겼다.
"마마! 칭구랑 사이조캐 지내야지!"
"어....어...?"
"빨리 미아내 하구 악쑤해!"
"아니 삐삐야..."
"아나면 나쁜 아이야!"
"풉!"
헬렌이 그 모습을 포고 픽 웃음이 터졌다.
나는 삐삐와 헬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휴 하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 한숨은 곧 허탈하게 풀린 긴장과 웃음으로 이어졌다.
"하...하하...하하하...."
"그... 보고 싶긴 했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하면 헬렌은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훔치고 말했다.
"솔직하지 못하긴. 늘 그랬지 참. 자기 이야기 잘 못하고, 안한 건가?"
"...."
"그래도 이젠 정말 거짓말하지 않은 너를 본 것 같아 좋네."
"아...."
나를 드러내지도 않았으면서 너무 많은 걸 바랐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도 욕심이겠지.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벼운 악수를 했다.
헬렌은 웃으며 삐삐를 쓰다듬었다.
"네가 엄마보다 솔직하구나?"
"앨리쓰 차칸 아이!"
그 말에 둘 다 웃음이 터졌다.
그러면 태연하게 삐삐는 가방에서 쥐포를 꺼내 입에 넣고 내 옆에 의자를 질질 끌고와
걸터앉은채로 빵실 웃었다.
그리고 발레리아가 일이 해결된건지 재클리나를 데리고 돌아왔다.
"어휴 정말 나는 그런 위험한 사람들인줄도 몰랐네.
정말 엠페레스보다 더하면 더하다더니 그런 사람들이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조심하시는게 좋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는 사람 뿐입니다.
명심하시는게 좋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발레리아 양. 혹시 우유 좋아하나요?"
"우유, 가게에서 사용하고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취향이 아닙니다."
"그래요? 우유 못드시나?"
"마실 수는 있지만 썩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아쉽네. 좋아한다고 했으면 좀 줬을지도 모르는데."
재클리나는 그렇게 말하고 살짝 웃어보였다.
그녀의 울음이 오랜동안 머물렀던 얼굴에도 웃음이 배어들기 시작한 모습이
썩 예뻐보였다.
다크서클이 아직 남아있었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편안해보이게 웃었다.
"최근 들어 잠을 잘 주무셔."
"그런가요?"
"응. 너 뚫어져라 눈만 보길래 말한거야."
"늘 우셔서 얼굴에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아... 나도 알아 그거. 자국 지운다고 나도 고생 좀 했지.
까딱하면 열받아서 이시대 참된 효녀가 불타버릴지도 모를 상황이었거든.
살얼음판 모녀였어. 조금만 불타도 둘다 허우적댔을걸?"
"재클리나씨가 화를 내시는 모습은 전 상상이 가질 않는데요."
"나도 잘은 몰라. 죄책감이 크신가 내게 화를 내신 적이 없거든.
다소 무리한 요구를 밀어붙이시기는 했어도 말이야."
"무리한 요구요"
"그냥 뭐 그런 것들. 좀 꾸미고 살라던지 나가서 남자도 좀 만나라거나,
아니면 오늘같이 막무가내로 뭔가를 하자고 조르시거나.
그래도 거기서 순순히 말을 듣는게 좋아. 할머니까지 오시면 정말 골치아프거든."
"아, 그 분도 대단하셨죠."
"알아?"
"술 잘하시던데요."
"할머니는 그렇지. 어쩌면 할아버지보다 강한게 아닐까 싶은 때도 있고.
할아버지도 아주 꽉 잡혀 사시거든. 난 그 비고 베일슨이 할아버지가 맞나 싶기도 해."
"그런 이중성 저는 귀엽다고 생각해요."
"그래?"
"저는 어머니 아버지가 다 없었으니까요."
"어... 아, 그렇지 참. 엄마니 할머니니 한 이야기는 네 이야기를 꾸민 거라고 했지..."
"나이가 좀 되다보니까요..."
"이거 반말을 해도 되는 거였나 모르겠네. 지금이라도 무령님이라고 불러줄까?"
"됐어요..."
둘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재클리나를 바라봤다.
발레리아와 재클리나는 빠른 시간에 꽤나 친해졌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서는 재클리나로부터 엠페레스보다는 심적으로 편하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도우려는 모습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얼굴에
진심이 보였다. 한 평생 친구가 없었던 여자들만 다섯 모여서 이런 이야기나 하고 있으려니
참 이게 뭔 짓인가 싶다.
"식사는 하셨어요?"
"이제 점심 먹으러 가야죠."
"같이 드실래요?"
"어머, 그래도 되나요?"
"네. 어차피 저희도 아직 안 먹어서요."
그런 가벼운 대화이후 발레리아는 곧장 차분히 걸어 주방으로 향한다.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진 것 같았다.
점심메뉴는 어디서 구한건지 모를 닭을 동으로 오븐에 구운 요리였다.
간단한 향신료 조금과 샐러리, 당근 정도를 가니시로 곁들인걸 빼면
정말 하나도 다른 재료는 찾아볼 수 없는 간단한 요리였다.
다만 간을 잘 맞췄고 오븐에서온도 유지를 잘 해서 껍질이 바삭한 닭에서
포크를 찍기만 해도 기름진 육즙이 주르륵 흘렀다는 점은 가공할만했다.
"자, 맛있게 드시길."
삐삐는 잽싸게 포크를 날려 다리 한 쪽을 집어 먹는다.
어린애는 어린애라고 맛있는걸 홀랑 먹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실력으로 깔끔하게 뼈만 톡 뱉는다.
톡 토톡 하나씩 뼈가 쌓여가면서 발레리아도 놀랄 정도의 뼈가 쌓인다.
"삐삐, 배 안불러요?"
"갠차나!"
"식비가... 모자라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나중엔 공간도 협소해지겠지."
그러나 그게 지금은 아니라는 듯 적당히 넘겼다.
재클리나와 헬렌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식사를 이었다.
삐삐도 오늘은 알게 되겠지.
억울하고 서운한 감정. 손님만 다녀가시면 혼이 나는 어린 아이들의 기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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