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 후회는 아무리 일러도 늦은 것.
* * *
워커는 조용히 연구실에 혼자 앉아있었다.
이제 연구원들도 다 퇴근한 저녁이었기에
홀로 앉아서 화분에 거꾸로 꽂힌 기도하는 성자의 팔을 보며
그는 손가락을 튕겼다.
탁 소리가 나고 손에 들린 장미꽃은 봉우리 안에서부터 서서히 타오르다 불이 붙었고
워커는 그걸 연구소 한가운데 던졌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였다.
그는 연구소에 화재를 일으켜 모든 자료를 소실시킬 생각이었다.
이후 교회측에서 이 사건에 대해 캐물으면 자연히 그 안에서 발견되었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시중에 풀기만 해도 교국의 이미지는 복구하지 못할 정도로 훼손된다.
불타 사라진 연구소에서 어떻게든 주워 왔다는데 누가 그를 책망하겠냐만은
애초에 그걸 가짜 증거라고 의심할 수도 없다.
교황은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까.
워커는 조용히 돌아 연구소를 나왔다.
조용하게 또각이는 구두굽 소리만 들렸다.
불길을 목전에 든 워커의 발걸음이 돌연 멈추고 나면
그 앞에서 붉은 인영이 일렁이고 있었다.
"가짜 주제에 상당히 큰 일을 냈구나."
"누군가 했더니 이거 나방이 날아들었을 줄은 몰랐다네."
그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날아든 창은 콱 소리를 내며 그의 발 옆에 박힌다.
"이거 대리석 바닥인걸로 아는데..."
"다음은 머리다."
휘리릭 창은 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간다.
워커는 침을 꿀꺽 삼키고 자세를 취한다.
살짝 다리를 앞으로 빼고 두 손을 앞으로 뻗는다.
"엔시온 플라이트. 분가의 떨거지가 여긴 어쩐 일이냐."
능글맞게 웃던 미소가 얼굴에서 사라지고 워커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마땅히 나의 군주께서 지시하신 일을 하려고 한다."
제라드.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왔던 이름은
마법사 제라드의 후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독보적인 마법사도 아니었다.
그 시대의 마법사의 기준은 지금과 달랐으니까.
그저 약간의 의술과 약간의 연금술, 그리고 실험정신은
그를 마법사라고 불리게 했다.
마녀사냥이 시작되고 그 역시 표적이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도망쳐야 했고 쫒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잡히지 않았다.
그의 의술과 연금술은 마법사인 동시에 그를 의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행실이 그를 구원했다고 하던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마법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가 교회에 쫒기면 이들은 그를 숨겨주었고,
그가 붙잡히려고 하면 이들은 그를 풀어주었다.
마법사 제라드는 시간이 지나며 교회를 농락한 대마법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이 그를 직접 잡았을 때, 교황은 그에게 한가지를 제안했다.
"교회에 들어올 생각은 없나? 마침 고위 성직자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말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대마법사 제라드는 추기경이 되었다.
반대도 물론 있었으나 아무도 교황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시의 교황의 권력은 그야말로 신권과 같았기 때문이다.
추기경 제라드는 교국의 든든한 지지대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믿었고 그가 속한 곳이 안정을 가져오리라 생각했다.
제라드의 사후에 결국 그 위세가 사그라들기 시작하며 점차 제라드의 가문은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추기경에서 대주교로, 대주교에서 다시 주교로. 마침내 그곳에서도 잡무를 처리하게 된 것이다.
점차 권력다툼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자각했을때 그들은 두 부류로 분화되었다.
교국의 녹을 받으며 이대로 살아갈 것인지, 혹은 교국이 분화되기 이전의 버려진 땅,
미리타엔으로 건너갈 것인지를 선택하게 되었을 때, 결국 거리낌 없이 출사표를 내건
첫 번째 이주자의 이름은 플라이트 제라드였다.
플라이트 제라드의 분가를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고작 이런 위치에 만족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
미리타엔으로 떠나버린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바로 플라이트 가의 시조였다.
그는 단신으로 미리타엔에 정착했고 기어이 그 척박하고 잔혹한 땅에서 버텨 살아남았다.
그가 떠난 이후 제라드가는 급격히 몰락했고 마침내 교외로 방출되어 버리고 말았다.
교국 교외에서 교회에 대한 원망을 쌓았던 제라드가는 다시 과거의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의술과 연금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를 하면 할수록 알게되는 것은 불편한 진실뿐이었다.
왜 이런 간단한 연구를 했을 뿐인데 교회의 신성력을 웃도는 위력이 나타나는가.
그렇다면 어째서 저들은 이 당연한 치료를 마다하고 신성력에 기대는가.
점점 모르는 일들이 쌓여갔고, 교국의 근본적인 시스템에 의문이 쌓였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에서 제라드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기 시작했다.
거둬주었더니 교회를 배신하고 마도를 연구하는 자,
은혜도 모르고 교회의 등에 꽂을 칼을 가는자.
여러가지 이명이 붙었지만 대부분은 그들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것이었다.
제라드가에서 마법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이들은 신성력을 빼돌리는 더러운 가짜들이라고 욕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소문들을 반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더 많은 증거를 바랐다.
신성력보다 더 뛰어난 성능을 증명해도 믿지않았고
가벼운 마법은 기술로 대체할 수 있다며 업신여겼다.
결국 그마저도 하나 둘 포기하고 지쳐가는 사람들 속에서 태어난 것이 워커 제라드였다.
그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던 아이였다.
모든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왜?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알때까지 공부했다.
그러나 알아낸 지식을 결코 허투루 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성격이 독이었을지 축복이었을지 조차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가 8살이 되었을 때, 그는 계단에서 굴러 크게 다쳤다.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회복마법을 사용한 것을 그는 처음 보았다.
사람들이 저주하고 교회에서 욕하던 그 마법은 결코 타인의 눈 앞에 보일 것이
못되었기 때문에 아껴오던 것을 그 아들을 위해 사용한 아버지를 바라보며
워커 제라드는 새로운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날부터 마법을 연구했다.
당연히 가짜라는 꼬리표는 떨어지지 않는다.
발전하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마법의 넓은 영역을 모두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접는 것은 어불성설이니까.
가벼운 불꽃을 만드는 법부터, 손기술, 그리고 가벼운 마력 운용.
연금술. 모든 것들은 선조에게서 받은 그대로 물려왔고, 그대로 배워갔다.
마법사라는 이름이 희미해지고 마술사라는 이름과 영기술이라는 명칭이 더 흔해질 쯤
그는 19살이 되었다.
그의 인생에 다시없을 첫 선택이 막 시작되었던 것도 19살의 여름이었다.
교회는 가문을 생각하지 않는다.
가문도 이제는 교회에 의탁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교회와 가문을 연결지을 방법도 없다.
그 빈틈을 교묘하게 파고든 것이 교국의 정부였다.
정권에서 종교를 떼놓고 분립을 주장하는 모습에 워커는 별다른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감사관이 된 이유였다.
"왜 불태운거냐."
"여기에는 있어선 안될 것이 있으니까."
"뭐가 있었지?"
"기도하는 성자의 팔."
"순순히 대답하는구나."
"숨기고 싶지가 않아서."
엔시온은 가만히 물었다.
"교국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이제 곧 끝낼거다. 내가... 어쩌면 네가.
자, 잘 들어라. 지금 보르드예프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려고 하는 이들이 있다.
단순히 대치만 하더라도 벅차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보르드예프, 젤렌지, 어쩌면 미리타엔.
이 국가는 먼저 먹는 쪽이 정복하는 것과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끝난다?"
"돌아가서 전해라.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했다고."
엔시온은 현명한 여자다.
개인의 감정은 접어두고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미리타엔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때, 그들이 모르는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설원에서 서쪽으로 나아가는 길, 경계초소를 세우고 이들이 거주하는 골목에서
산길에 눈발이 흩날린다. 요리를 준비하는 이들 앞으로 나타나는 검은 남자.
그리고 그 주변으로 흩날리는 눈이 어째서인지 휘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젤라토는 그 남자의 분위기가 마치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맞닿은 눈빛에 젤라토가 물었다.
"너 누구야?"
"글쎄, 이제 나도 잘 모르겠어."
남자는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고, 조금 마른 것 같은 몸에, 왠지 모를 강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왜소해 보이는 체구임에도 팔다리는 길었다.
머리는 언제부터 기른 것인지 모르겠으나 눈을 가릴 정도로 길어서 뒤로 묶었고,
그런 뒤를 종자로 보이는 여성이 따르고 있었다.
"돌아가. 여기는 젤렌지의..."
"알아. 비켜. 나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볼일이 있으니까."
"검다고 모두 우리 일원인 건 아니거든. 그렇게 말한다고 비킬 거였으면
여기 섞여 있지도 않았을거야."
그렇게 말하며 젤라토가 단검을 빼들어도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터덜터덜 걸어 다가갈 뿐이었다.
"더 다가오면 벤다. 내가 누군지 모르나봐? 성제 젤라토라고 몰라?"
그는 대답이 없었다. 젤라토가 마침내 그를 그어버리기 위해서 도약해 가까이 가가갔고
그의 목을 베려고 했을 때, 그녀는 멈칫했다.
"너 누구야."
"나도 모르겠어. 비켜."
젤라토의 목에 날아든 손날에 곧장 얻어맞고 뒤로 나가떨어져 구른다.
눈밭에 굴러 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곧장 그 뒤에서 쾅하고 무언가 튀어나간다.
그리고 바닥에 큰 충격을 내며 쌓인 눈을 흩날리는 사이로 두 사람이 보였다.
침입자의 목을 잡고 바닥에 내리 꽂은 젤렌지와
젤렌지를 똑 닮은 검은 머리의 남자.
"찾았다."
"넌..."
"너를 만나기 위해 왔다."
"제롬인가..."
"몰라."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 숨을 쉬기 힘들텐데도 그는 가만히 젤렌지를 바라보고만 있다.
손틈에서 스멀대며 기어나오는 검은 마력에 목이 휘감겨도 그는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몸이 썩지도 않았고, 부패하지도 않는다.
"넌 뭐냐?"
"마땅히 지배해야 할 자는 그 아래에 있는 자를 거두어야 하고,
그 무게를 등에 지는 자는 고개가 가벼워서는 안된다.
내 뒤에 진 짐이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꾸드득 소리를 내며 손을 억지로 풀어낸다.
젤렌지의 손이 풀려 그 안에서 태연하게 일어난 검은 남자는 분명 해백이었다.
"자격 없는 자에게 패배해서도 안되고, 땅에 등이 닿게 해서도 안된다.
내가 쓰러지면 제일 먼저 바닥에 짓눌리는 것은 내 등에 진 짐이기 때문에.
나는 내 등에 짊어진 자들이 의지하는 지지대요, 나는 그들이 재탱하는 거성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그들의 위에 서는 자에게 나를 의탁하고, 그 이름이 내 위에 있을 것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찾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더 위대한 존재를 따르기 위해서.
이미 이단자의 무리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달려들지 못했다.
해백의 손은 젤렌지의 머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손에 힘을 넣는다.
꾸드득 하는 소리가 나면 젤렌지는 검을 뽑아 해백에게 찔렀으나
그 검은 닿지 않는다.
젤라토의 암습 역시도 허탈할 정도로 간단히 막혀버린다.
"내가 너를 그렇게 버려두고 온건 최고의 선택이었다.
너는 내 클론으로서 최고였고, 기어이 나를 능가하는 선택으로 이 자리에 섰구나.
제롬... 제롬....제롬!!!"
젤렌지가 검을 휘두르면 해백은 주변에 있던 엘프를 집어 앞으로 끌어당긴다.
젤렌지의 검이 애먼 엘프의 복부를 가른다.
찢겨 피가 튀는 엘프를 옆으로 휙 던지면 그제서야 눈이 돌아간 엘프들이
단체로 그를 향해 덮치기 시작했고 그 뒤를 변절자들이 따른다.
"이 많은 이들을 발 아래 둔다. 그러나 짊어지지 못한다.
내가 따르고자 했던 자는 고작 이정도의 사람이었나?"
반대다, 내가. 내가 이자를 구원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해백은 주먹을 꽉 쥐고 바닥에 죽은 엘프를 휘두른다.
엘프들에게 튀는 오염된 검은 피에 그들이 머뭇대면 즉시 다른 엘프를 집어
또 다시 그들에게 던진다.
두터운 갑옷을 입은 엘프는 그 무게만으로도 훌륭한 충격을 전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거냐."
"제롬. 넌 합격이다. 나에게 와라. 내가 널 거둬주마.
내 존재의 양산으로서 너를 허가하겠다."
"내가 너의 아들인가?"
해백은 혼란스러웠다.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머리와 가슴이 기억하는 것이 달라지고
미칠 것만 같았다.
두 명의 기억은 그렇게 섞이고 있었다.
"난....나는...!"
그렇게 절규하는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은 그를 가만히 껴안은 것이 그의 종자였던
에스메랄다였다.
엘프들이 그 순간을 덮치려 했으나 젤렌지는 그것을 한손으로 저지했다.
"아아... 가족 상봉인가... 눈물나게 반가운 상황이군..."
젤렌지는 그렇게 말하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 에스메랄다가 작게 속삭였다.
"마음가는대로 해요. 난 당신을 믿으니까.
괜찮아요. 내겐 당신이 전부라는걸 믿어줘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편이 될테니까 존재에 집착하지 말아요.
그저 원하는 욕망을 말해봐요. 상황에 집중하고 행동하세요."
그렇게 해백은 일어났다.
일어난 해백은 젤렌지에게 말했다.
"너의 목표는 어디까지냐."
젤렌지 역시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신이 되는 것이다."
해백은 눈을 감고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받은 젤렌지의 손이 검은 빛을 서서히 뿜어내고 있었다.
"반대인 것 같다."
"뭐...?"
"내가 너의 클론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가능성의 말살이다.
네가 나의 클론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내 위에 서는 자는 내가 스스로 정한다.
넌 아버지도 아니고 위대한 자도 아니었으니까."
젤렌지의 검. 그 검이 어느새 바닥에 툭 떨어진다.
어느새 젤렌지의 마른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있는 그 손에
단번에 느슨해졌던 긴장이 조여진다.
엘프들과 이단자들이 전투태세를 마치고 침입자를 노려본다.
이제는 그 존재가 누구인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아. 그런 큰 이상도, 이런 많은 짐도. 너는 질 수 없는 사람이다.
패배하고 길바닥에 얼굴을 묻고 맥주 한잔에 소시지나 씹는게 어울리겠어."
쾅 소리가 연이어 난다.
바닥에서 서로 검을 주워들었다.
죽은 엘프가 들고 있던 검을 주워든 해백이 검을 털어낸다.
눈발에 검은 피가 튀었다.
"원하는 곳으로. 이상향, 고향과도 같은 그곳으로... 나는 반드시...
그곳에는 내 구원이 있을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