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 허가된 무기력
* * *
얼마나 싸운 건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해백은 무릎을 꿇었다.
잔상처부터 피가 흐를 정도로 심한 상처까지.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한 수준으로 다친 상태이면서도
그는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마찬가지로 검을 놓지 않은 젤렌지가 서 있었다.
"넌 틀렸다. 그러니까 내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는거다.
내가 너의 아버지가 맞느냐고 했나?
아니, 아니다. 나는 아들은 없으니까. 오로지 신에 도전하기 위한 재료였고
내 존재를 거기서 떨어뜨리는 오점이었지.
내가 생식으로 밖에 내 증거를 남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내 대가 이어지고 나는 언젠가 쇠한다는 것.
그게 두려웠다.
완벽을 추구하는게 뭐가 나쁘지?
넌 완벽한 이를 찾으려고 하면서 스스로 완벽해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너와 나의 구조적인 차이는 거기에 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구둣발로 해백의 목을 걷어찼다.
뒤로 나자빠져 몇 번인가 눈밭 위로 구르고 나서 해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롬, 너는 순서를 틀렸다.
내가 이 많은 이들을 등에 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 저들이 그 등 위에 나를 올린 것이다.
나는 누구도 등에 지지 않는다. 저들이 나를 떠받들고 나는 그 위에 선다.
리더와 신은 다르다. 너는 그들의 희망을 찾아주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욕망을 제시하는 자다.
너 역시 절반은 나였으니 이해할 거다. 하지만 나는 나머지 절반에 더럽혀진
나의 불안정한 창조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다.
왜 저들이 나를 따르겠나? 내가 더 위대해서? 더 완전한 인간이라서?
그럴리가. 저들이 원하는걸 내가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들의 명예? 믿지 않는다. 꿈? 관심도 없다.
다만 보이는 욕망과 힘은 그 누구도 거스르지 못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넌 아직도 반쪽짜리 쓰레기야."
"그 오크와는 다르군."
"오크... 짜증나는 종족이지."
검을 치켜든 젤렌지의 눈에 비치는 해백은 초라해 보였다.
힘도 없었고 이제는 총기도 없었으며 게비디처럼 이상을 지켜내지도 못했고
눈 앞의 젤렌지와 같은 욕망도 없었다. 그저 엔시온이 말했던 것처럼
어디에서 서지 못하는 머저리.
"후우..."
젤렌지는 검을 휘둘렀다.
분명 그 검은 해백의 몸을 반으로 찢어냈어야 했다.
그러나 그 검은 여성의 몸에 가로막힌다.
그리고 그 순간 해백은 멍하니 얼굴로 튄 따스한 피를 그저 바라보았다.
"에스메랄다..."
에스메랄다는 해백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젤렌지에게 말했다.
"저 사람은 당신보다 대단한 이상을 가진 사람이에요.
기어이 당신보다 고등한 변화를 만들어 냈다고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제약 없는.... 사람...."
점점 말이 끊기는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젤렌지는 그제서야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어쩐지, 그래서 마력이 통하질 않았나."
"아아...아아...."
해백은 피흘리며 쓰러진 그녀를 안아들고 말했다.
"안돼요... 에스메랄다...."
그러면 그녀는 그의 눈에 맺힌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주며 말했다.
"역시 그 이름은 저하고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당신이... 나의 에스메랄다... 구원이었으니까... 당신을... 사랑했어요...."
"내게도 당신이 구원이었어요."
"고마....워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발 사이로 보이던 하얀 입김이 사라지고 나서야
해백은 젤렌지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 눈. 그런 눈이 어울리는구나. 날 만나러 왔다고 했지.
좋다. 너도 이 변절자들의 무리에 합류해라. 너의 그 욕망을 돌아봐라."
"지금 말이지, 처음으로 자아 두개가 아다리가 맞은 것 같거든?
제롬이 그러네? 죽여버리쟤. 신기하지. 내 생각도 그렇거든."
"미친놈."
"나한테는 이제 그녀가 세계의 전부였거든.
여기는 이제 내 세계가 아니라는 의미지."
오히려 차분해보이는 그 말에 자리를 지키던 엘프들은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이전에 경험한 적 있는 공포.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광기는 이미 여러 번 겪었다.
시도라도 그랬었고, 그 이전의 엘프들 역시 그랬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자신들 역시 그랬다.
변한 것이 없는 초라한 남자가 왜 그렇게 두려워보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자리에 있던 엘프들 모두가 느꼈다.
위험하다고.
아마 그건 팔라딘이었던 이단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랬기에 서로 눈치만 보면서도 발 하나 떼지 못하는 거겠지.
욕망으로 모인 이들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제일 원초적인 욕망은 삶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걸 이겨내는 것은 사랑 뿐이었다.
젤라토가 그 뒤를 친 것은 예상 외의 일이었다.
아마 그녀 역시 그 정도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분명 몸이 먼저 움직인 거겠지.
"죽어!!"
그러나 젤라토의 단검은 닿지 않았다.
안개를 가르려고 한 것처럼 그저 허공을 가른 듯 아무 느낌도 없다.
눈밭에 착지하면서 젤라토는 그제서야 뒤를 돌아본다.
날아드는 반격의 충격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후속타는 없다.
그 침묵, 오히려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지조차 않은 눈은
젤렌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복수하고 싶은가? 내 소중한 것을 부수고 싶은가?
마음대로 해라. 나는 이미 나 외에는 그 무엇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나를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가능하다면 말이지. 네가 나보다 더 뛰어난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라."
우직한 박치기가 날아들었다.
복부를 노린 칼날이 젤렌지의 검에 막혀 바스러진다.
그 찰나의 순간조차 낭비하지 않고 즉시 옆에 있던 이단자를 앞으로 내세워 막은 검에
이단자의 복부 갑옷이 깔끔하게 깨져 부서지고, 플레이트 아머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른다.
그러면 해백은 바로 그 손에서 메이스를 빼내고 젤렌지의 머리로 휘두른다.
몇 번인가 오염된 탓일까 메이스에는 축성조자 없었다.
물론 굵기가 상당하다보니 검에 대번에 잘려나가지 않았지만,
점차 부식되어 검은 녹가루를 날리는 것은 날리는 눈발과 비교해
어딘가 대조적인 느낌이 들었다.
"너는 발전이 없다. 반쪽짜리의 좁은 시야에 내 계획이 들어오겠느냐!"
"사람이 없는 계획에 가능성이 있으리라 보는거냐!"
몇 번인가의 접전 후에 쾅 하고 부딫힌 메이스가 뚝 부러진 순간
젤렌지의 검 또한 부러져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루만 남은 메이스가 강타한 어깨에서는 뚝 하는 소리가 난다.
젤렌지의 팔에 큰 소리를 낸 메이스가 마침내 바닥에 떨어지면
젤렌지는 해백의 눈을 보고 물었다.
"그럼 너는 이 계획이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건가?"
"그래. 넌 틀렸다.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주제에 신이 된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지. 홀로 버려진 삶은 영겁을 즐겁게 만들지 못할테니까."
"너라면 어떻게 하겠나."
"몰라."
마침내 그 손이 젤렌지의 목에 닿는다.
"내가 여기서 힘을 주면 넌 죽는다. 알고 있겠지.
나는 너의 그 말뿐인 반쪽이 아니야. 씨발놈아."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대로 쓰러뜨린 후 마운트를 걸어 얼굴에 무차별적 주먹질을 해댄다.
이젠 이유도 모를 주먹질이 이어진다.
몇 번이나 빠악 소리를 내며 후려치는 주먹에 젤렌지는 평온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정정하겠다. 이 군단은 욕망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했지.
그 끝에는 내 욕망이 있었다. 모두의 위에 서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그 욕망은 인간의 위에 서는 것으로 도달하지 못한다.
넌 패배했다. 그리고!"
주먹이 그의 얼굴 중앙을 가격한다.
코뼈를 부러뜨릴 생각으로 내리친 주먹은 코피를 터뜨렸다.
"이젠 비루하지. 누구도 너를 돕지 않았다.
저 많은 이단자들도, 엘프마저도 너의 편을 들지 않는다.
저들에게 너는 수단이었다. 저들이 너에게 그랬듯."
"저들은 내가 저들을 지키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목표를 보고 있는데 어떻게 저들을 내 등에 진단 말이냐.
각자의 욕망의 근원에 닿는 것을 바라면서 왜 방향을 모은단 말이냐!
저는 아직 모른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누군가는 반드시 등을 치고!
누군가는 반드시 숨통을 조이며! 그 누군가는 반드시 칼을 꽂는다!
그렇게 간단히 통합되고 규합되어 평화롭게 살 거라면 분단의 존재는 없을 것이다!
국가는 통합되어 하나일 것이고! 영생이 가까웠을 것이다! 섹스는 단지 쾌락이었을 것이고!
모두가 우두머리여야 한다! 그럼 그 바닥에 깔리는 최소한의 희생은 어떻게 할 건가?
그 최소한의 희생이 줄어들수록 우두머리의 가치가 줄어든다!
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실패했으니까!
모두가 서로를 짊어져? 미친소리! 그럼 그 혜택은 누가 받아가지?
모두가 공산해내는 것도 불가능하며 모두가 동등히 배분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위도 아래도 없고 그저 타인의 불행을 자신에게 배당해 불행을 공유하고 자위하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모두가 희생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나? 누군가는 누려야 하고 누군가는 굴러야 한다!"
"그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한 다른 수단이 있었을 거다!
모두가 능력에 맞는 일을, 모두에게 동등한 자격과 환경을 맞출 능력은
신이 아니라도 가능할텐데! 욕망은 수요를 흐리게 만든다.
그걸 완벽하게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지 못하더라도 불행한 이들이 없는 세상이 더 이상적이다!
그리고 리더는 모두가 불행하지 않도록 조율하며 협력을 이끌어내는 이다!
의탁하는 자가 스스로 마땅히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당연해지고
이를 자랑스레 여길 수 있어야한다!
그래서 완벽한 이가 지배하는 것은 결코 무력에 의존하거나 재력을 통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모든 구성원을 위험에 빠뜨려서도 안된단 말이다. 넌 자격이 없다!"
해백의 머릿속이 오래된 퍼즐을 맞춘 것처럼 개운해진다.
리더, 그리고 이상향. 정당한 지배와 마땅한 복종의 근거.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조화된 세상에서 마침내 평화를 논할 수 있으리라는
그런 깨달음이 떠올랐다.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말을 부정하는 이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두 개의 자아, 그 생각이 하나로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한 명의 하녀가 있었다.
"후후...흐....흐하하하하!!"
젤렌지의 웃음에 해백은 픽 웃었다.
젤렌지는 그 얼굴에 음습한 미소를 띄우고 말했다.
"모두의 불행이 사라지면 만족할거라 생각하나?
불행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지?
능력을 우선시한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리석다.
그렇기에 신에게 의지한다.
하지 못하는 것을 더 강대한 존재에게 의지하려 한다.
그를 위해 스스로 제약을 걸고 행복을 통제한다.
병신같은 생각이지.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을 포기한다.
시키는 것도 아닌데 서로 통제하고 규제하며 타인의 행복을 질시한다.
본인이 하지는 않으면서 남이 하는 일은 부러워하지.
그러면서 뒤에서는 그를 욕하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인간이다.
왜 행복을 선사한다는 신은 규제만을 더하는데
그대들은 행복하지도 못하면서 남아있던 쾌락을 포기하는가?
손에 쥔 파랑새를 숲으로 날려놓고 왜 파랑새가 돌아오기를 기도하는가!
난 다르단 말이다. 모두가 윤리를 배제한 쾌락을 얻는 것이다.
쾌락으로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야 말로 불행을 망각하기에 최선의 방법이다.
중독을 이유로 마약을 배제하고, 타락을 이유로 오염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건 최적의 행복이 되겠지.
내가 널 반쪽짜리라고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넌 이상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보지 않는다.
그 이상이 결국 현실을 망가뜨리고 나서야 후회하게 되겠지.
난 알 수 있다. 내가 그랬으니까! 너처럼 병신같이 방황하고! 너를 만들고!
그 모든 순간순간속에서 후회했다! 내 욕망이 처음 나를 불렀을 때 느꼈다!
살아있단 것에 희열을 느꼈고 삶을 놓고 싶지 않아졌다!
나의 쾌락을 우선하는 것이 뭐가 나쁘지? 거짓된 규율로 인간을 묶고
대가없는 찬양을 받으며 인간에게 돌려준 것 없는 저 신들이 과연
어떤 가치가 있어서 저 자리에서 숭배를 받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자리에 내가 서겠다! 나는 그대들에게 규율 대신 희열을 내리겠다!
그대들을 구속하던 모든 것들을 나의 이름 아래 벗어던지고 모두가 원초적 쾌락을 추구하게 하겠다!
오직 쾌락이 평등하다! 인간은 쾌락의 재생산에서 차등이 생기겠지.
그러나 그들 모두가 그걸 바라게 될 것이다! 그 불행이 자신에게 쾌락을 돌려줄테니까!"
"책임없는 쾌락이 모두를 편하게 할 거라고 보는거냐?"
"편안하게 만드는게 중요한가?
역으로 묻지. 왜 편안하기를 바라는가.
서서히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과 쾌락의 파도에서 허우적 대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나?
행복의 기준을 보편화하려는 태도는 이해한다.
하지만 더 간단히 추구할 수 있는 쾌락을 두고.
그 욕망을 배제하며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건 허구의 이야기다.
넌 결코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하고 있다."
"제롬은 너를 존경했었단 말이다..."
힘 없이 떨어진 주먹은 눈이 쌓인 바닥에 주먹 모양의 흔적을 남겼다.
"내가 완벽해지겠다.
난 신이 될 것이다. 모두가 스스로의 방식으로 쾌락을 추구하게 하겠다.
거기에 분명 너도 만족할 방식이 있겠지.
내 세상에서 너의 의견에 동조하는 이들을 모아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욕망은 절대적이며 동시에 상대적인 쾌락이다.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생을 포기해야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너야말로 어떤가. 존재하는 인간을 네 욕망에 휩쓸려 복제했고
그 과정에서 엘프와 이단을 죽였지.
마침내 그 복제품마저 지키지 못했고.
네 쾌락에 충실했던 네가 정말 모두를 불행하지 않게 만들 수 있나?"
"....."
"나를 따라라. 너의 그 쾌락마저 수용하는 세계를 가져다주겠다.
너의 그 순수한 쾌락에서 죄악을 배제해주겠다는 말이다.
사회의 통념, 법, 윤리, 도덕 모두를 배제해주마.
네가 어미의 클론을 만들고 그걸 범해서 딸을 낳고
다시 그 딸을 범하더라도 너의 쾌락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게 해주마.
우리는 오직 우리를 위해 존재하고 우리를 위해 살아간다.
모두에게 평등할 수 없기에 오직 자신을 위해 극도의 이기주의와 자유주의를 열망한다.
다른 누군가를 밑바닥까지 짓밟으면서도 나 자신을 위해 정당화하는 이들이다.
거기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왜 간단한 쾌락을 거부하는가?
평등을 추구해?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건 자신이 불행하지 않은 것에 쾌감을 느끼고 저들을 구제한다는 착각속에서
그 차이를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이기주의와 선민사상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왜 능력주의라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그 차이를 능력의 탓으로 돌리며 정당화하기 위함이다.
또한 어째서 모든 것에는 등급을 나누며, 그를 위한 기준 단위를 책정해두고 평가하면서
노력이 부족하다고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노력한 만큼의 성과라고 말하면
성과가 적은 자는 노력하지 않았나? 오히려 노력하는 자들을 짓밟았기에 그 위에 선 것 아닌가?
네가 바란 평등이 이들을 바꾸는 거라면 그것조차 누군가에겐 강압이라는 생각은 못했나?
너는 모두가 평등하길 바란다면서 높은 곳에 있던 자들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그런 위선을 주장하지 말고 솔직해지자는 말이다. 솔직하게. 씨발 그게 꼴려서 그랬다고 하자고!
너의 행복을 막은 생명윤리에 답답하다고 느낀 적 없나?
인간이 아닌 고작 클론일 뿐인데 희생자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불행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 자위하며
나를 찾아온 것 아니냐는 말이다."
"내가 사랑한건 클론이 아니었다.
에스메랄다였어. 네가 버린 여자가 아니라, 나를 사랑해준 여자였다고."
"그럼 너를 사랑하는 클론을 새로 만들면 되겠군?"
"미친소리...."
"그런데, 넌 그렇게 했다.
널 사랑하는 여자를 만들었고, 기어이 그 본체가 어미임을 알면서도 사랑했다.
이미 넌 자각하지 못했을 뿐, 충분히 쓰레기다.
착한 척 위선떠는 병신. 그런 쓰레기인 너를 내가 거둬준다는 거다.
알고 있잖나. 너는 반쪽이지만. 난 완벽하다. 그리고, 완벽해 질 예정이다.
내가 짊어지는 것은 나 뿐이다. 저들은 스스로 길을 찾는다.
나는 그들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자유주의자들일 뿐이야."
"씨발...."
해백은 조용히 에스메랄다의 싸늘한 주검을 눈밭에 묻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욕을 내뱉는다.
반박하지 못하는 그의 말이 해백을 쓰리게 했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세상이니까. 넌 그저 병신인 것 뿐이다. 세상을 볼 눈도 없었던 병신 말이다.
그냥 따라라. 이제껏 해온 것처럼.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대가리가 깨진 것처럼...
다만 그 주체가 나로 변하는 것 뿐이다."
"언제라도 반박할 수 있게 된다면 떠날거다."
"그렇게 하시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