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학습된 불가능
* * *
오늘은 유난히 손님이 없었다.
나도 그렇고 발레리아도 그렇고 오전부터 커피를 마시며 가게를 열었는데도
어째 아무도 오지 않았다.
덕분에 발레리아는 삐삐에게 책을 읽어준다고 들어가버렸다.
삐삐가 요즘 세계 문학 같은 것들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여느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공주님이 나오는 책들에 흥미를 보이는 탓에
발레리아가 최근에는 공주님 옷을 사 입힌다고 했다.
에스트로도 저녁 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한동안은 평화로우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지나보니 또 마냥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가게 쪽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왠지 조금은 지친 것 같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마녀상담소입니다."
"아, 가게 일로 전화드린거 아닙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바로 요점부터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시간을 할애해서 이렇게 알려드리는 경우는 잘 없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상당한 요금을 청구해야 맞겠지만, 상황이 급한 만큼 이번에는 넘어가죠."
"그 목소리며 말투하며. 생쥐굴의 여왕님이시네요?"
"기억하고 있다니. 그래도 기본은 하는 분이시군요.
아무튼 정답이에요."
"그래서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아무래도 교국에 흥미가 있으시지 않을까 생각해서 준비해봤네요."
"교국?"
"어제 오후 6시경에 교국의 병원에서 큰 화재가 있었습니다.
용의자는 아직 불명이라고 하죠."
"화재 정도로 큰 일이라고 하지는 않았기를 바래."
"물론 아니죠. 하지만 화재 이후에 교회의 대처가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대처?"
"교황이 직접 병원의 불을 진화하고 내부의 자료를 지키라고 했다는군요."
"자료? 환자가 아니고?"
"그게 이번 사건의 흥미로운 점이죠. 병원 내부에는 소사한 환자는 한명도 없습니다.
더 흥미로운건 의사도 한명도 없습니다. 정확히는 피해자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죠."
"그거 이상하네."
"병원의 규모는 어지간한 대형병원에 조금 못미치는 크기입니다.
더 흥미로운건, 병원에 대해 물으면 화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럴 수가 없는 위치에서도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연구소' 라고요."
"뭘 연구하던거지?"
"그건 저도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극비리에 숨겨진 시설이었기 때문에.
연구소라는 사실은 알아도 그 내부에서 어떤 실험을 진행했던 건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다만 명백한 것은 일종의 세뇌실험을 자행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교육용 영상과
다량의 서적이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교국에 대한 사상교육인가?"
"아닙니다. 그 이상은 직접 알아보시죠.
이미 이정도면 충분히 드리지 않았나요?"
"충분하지. 아무튼 고마워요. 이 값은 어떻게 쳐주면 되려나?"
"그 이전에 의뢰한 사항을 실패한 데 대한 배상이라고 생각해요."
"실패?"
"우리가 알아내기 전에 먼저 피드 린을 만나셨더군요."
"아, 그랬지."
"여하튼 이번 사건은 꽤 큰 파장을 몰고 올 겁니다.
수고하시길."
그렇게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끊긴 전화를 잡고 멍하니 서 있으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손님이 없는 이유도 어쩌면 우연이 아니겠다는 생각.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쾅 소리를 내면서 거리 끝에서부터 무언가가 날아왔다.
보도블럭을 모조리 깨부수며 화려한 착지를 한 붉은 형체가 마침내 가게 앞에서 멈췄다.
"뭐야?"
"무령님 계십니까!"
그 말에 가게 밖으로 나가보면 엔시온이 상당한 피를 흘리며 그곳에 있었다.
"후우... 주셨던 엘릭서가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넌 교국에 갔었던 것 아닌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무력으로 해결할 일은 없을 거라며?
갑자기 너정도 되는 사람이 그렇게 말을 뒤집었을리는 없을텐데..."
"그 전사가 거기 있었습니다."
"전사?"
"성희 말입니다."
"그 사람도 아무나 먼저 때릴 정도로 앞뒤없는 사람은 아니었을텐데."
그렇게 말하면 엔시온은 품에서 타다 만 종이를 내밀었다.
"저도 아무 소득 없이 돌아온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 그렇게 화제거리는 아니겠지만, 불타는 교국의 연구실에서 빼온 자료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해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지금은 몸 상태가 조금 그렇군요."
나는 그 자료를 받아들었다.
"고마워. 고생했네. 일단 들어가서 쉬어. 발레리아가 치료해 줄거야."
"아닙니다... 저택으로 돌아가서 쉬겠습니다."
"괜찮겠어?"
"어떻게든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터덜터덜 걸어 돌아갔다.
거리의 뒤집어진 바닥을 다시 복구시키고 나서 나는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리고 긴 말을 하지 않은 채로 조용히 종이를 다시 덮어 불에태웠다.
교국에서 연구소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과학의 발전을 교회에서도
주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교회는 예로부터 과학과 어긋나는 일들을
정론으로 밀곤 했었으니까.
그 자율성을 보장하고 과학의 필요성을 확립한다면 긍정적인 효과를 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편 종이에서 본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죽은 용의 마력연구 보고ㅅ
용은 용골과 안티움, 그ㄹ
마력을 보존하고 이는 연구를 통ㅎ
가용 가능한 마력원으로 환원 할 수 ㅇ
이를 가공하고 정제수와 화학 반응을 통ㅎ
성수를 제작하기에 제일 적합한 것은 ㄷ
순수한 마력을 보이던 생물체로ㅆ
천각룡의 비늘 및 골각ㅇ]
"미친 새끼들."
어떻게든 엔시온이 그걸 내게 전해주려고 했던 이유는 잘 알았다.
예로부터 마력이 많은 생물에게서 마력을 뽑아내 성수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부족한 신성력을 대체하고 있었다면 분명 적지 않은 수의 생물이 희생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이제 자체적으로 신성력을 생산해내는데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이고,
교국의 교회는 이단이라는 말이 된다.
신성력이 없는 교회, 신이 떠난 교국. 그리고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운 것은 연구소에서 자행된 실험.
그리고 연구실에 사람이 없을 때 일어난 방화. 분명 계획된 범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사실 그 종이가 있었다면 교국을 무너뜨리기에 좋은 열쇠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거기에 신빙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국에서 부정할 경우 더 파고들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사심을 조금 더하자면
이 건은 정치적으로 말려죽이는 것보다 가서 때려부수는게 좋을 것 같았다.
원래 안 해본걸 무리해서 하려고 하면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정치는 나랑 맞지 않는다는건 이미 질리게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에스트로는 맡은 일이 있었고, 이제 막 찾아온 평화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가만히 서서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교국으로 찾아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만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결국 그날 저녁 나는 교국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아는 이제 익숙한지 고개를 끄덕여주었지만 에스트로는 반대했다.
"꼭 가야겠어?"
"그래야 할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주고 싶은데 나도 일이 있다보니까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는 가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지켜줬었다고. 별 일 없을거야.
대신 이번에는 삐삐를 데려가기가 애매할 것 같아."
그 말에 삐삐가 화들짝 놀라서 내게 안겨들었다.
"시러!"
"그래도 가야 해 삐삐. 나도 마물 지을 일이 있으니까."
"가치가!"
"위험할거야. 삐삐가 다칠 수도 있는 문제라구."
"갠차나!"
그렇게 말하고는 삐삐는 자기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서는
빨간 가방에 사탕이며 쥐포 같은 것들을 이것저것 챙겨넣었다.
"준비 다 해써!"
"그래, 같이 가자. 어쩔 수 없네."
그렇게 말하고 삐삐를 무릎에 앉혔다.
"언제 출발하려고?"
에스트로의 말에 나 역시도 잠깐 고민을 하다가 답했다.
"내일 엔시온 만나서 이야기 좀 해보고 플로라한테 바로 결재받아서 출발하려고.
이번 일은 아무래도 개인으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미리타엔 소속으로 가는게 좋아보이거든.
혼자라면 또 모르겠는데 삐삐도 간다고 하니까."
"그래,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을게."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그래."
"혹시 심심하거나 외로울 때 불러도 돼."
"알겠다니까."
"심심할때 불러도 돼?"
"아니."
"너무하네."
그러더니 에스트로는 고개를 돌려 삐삐에게 묻는다.
"삐삐야, 아빠 보고 싶을거야? 안보고 싶을거야?"
삐삐는 멀뚱히 에스트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따오께!"
에스트로는 조용히 터덜터덜 걸어가더니 발레리아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조금 이르지만 술이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사양하겠습니다. 업무에 지장이 가면 곤란하기때문에."
"내 편이 하나도 없어!"
나는 삐친 에스트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종종 연락할게."
"그래..."
그리고 다음날, 나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병실에 누워있는 엔시온을 마주했다.
"오셨습니까?"
"그래, 교국으로 가봐야할 것 같으니까."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이죠.
그러나 아무래도 무령님을 보낸다는 것은... 조금 걸리는군요. 제 선에서 처리했어야 할 일인데."
"괜찮아. 뭐 나도 소속이 미리타엔인데 뭐라도 해야지 않겠어?"
"그렇군요. 그럼 어제에 이어서 계속 말씀드리지요.
교국은 현재 재판이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재판?"
"교국 북쪽으로 존재하는 보르드예프라는 국가가 있습니다.
넓은 부족국가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주로 수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국가인데,
마법사와 마녀가 많고 아르간티아교를 거부하는 국가라고 합니다.
제가 들은 부분은 거기까지 였습니다. 그 이상은 정보가 지나치게 한정적입니다.
왜 그런 종족이 있는지도, 그리고 왜 마법사가 많은지 조차도요."
"그 보르드예프가 재판과 무슨 상관이 있는거야?"
"보르드예프는 이제껏 미리타엔을 포함해서 엠페레스, 유레크로스와는 교역이 없었습니다.
교류 자체가 전무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지요. 이제껏 교국과 전쟁 중인 상황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혈전이라기보다는 정보전, 그리고 종교전에 더 치중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건에 관련해서 재판이 일어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의도적으로 교국에서 통제한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로서는 그 보르드예프의 수인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다만?"
"보르드예프의 수인들은 기본적으로 마력량이 높았다는 것 같습니다."
"마력량이 높아? 설마..."
"네, 연구소에 함께 있던 일지였습니다. 성희에게 어쩔 수 없이 빼앗긴 부분입니다.
필시 그 내용으로 보아 마력을 추출해내는데 사용되었거나
전쟁에 유리하게 이용할 목적으로 아이들을 빼돌렸던 것 같습니다."
"그게 퍼지면 교국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겠네."
"화재 사건이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빠르게 대처한 것이 성희였습니다.
진화 작업을 시작한 것도 있었지만, 그 앞에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인원을 통제하고 동시에 내부의 자료를 색출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걸린거고?"
"그렇습니다. 화재 직후에 연구소 내부에 침투해 정보를 얻어낸 것은 성공했지만
즉시 들이닥친 성희 탓에 우선은 피하는데 급급했고, 그 과정에서
연구소의 무너진 잔해가 등을 찍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타박상과 찰과상이 새겼습니다.
이때 골절된 뼈도 있는 것 같더군요. 갑옷이 찌그러지는 탓에 빠르게 후면으로
돌아보기가 어려워져서 기습을 허용했습니다. 물론 그 부상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습니다만."
"성희가 거기출몰했다는 건..."
"네, 분명 다른 사성도 이번 건에 관련해서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불길하네. 너무 불길해."
"분명 그 보르드예프가 이번 사건의 중심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짐작가는 부분이 있어서 다행이네. 원래대로라면 플로라한테 들렀다가 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바로 출발해야겠다. 미안한데 플로라한테 말 좀 전해줄 수 있어?
무령 자격으로 다녀오겠다고."
"허가가 나지 않으면 어쩌실 겁니까?"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은 하는데,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하면 내가 직접 부탁했다고 해서
어떻게든 허가를 받을 때까지 버텨줘."
"막무가내시군요. 알겠습니다. 회복되고 나면 다녀오지요."
"회복까진 오래 걸려?"
"의사는 아마 이대로라면 이틀 정도 더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답니다."
나는 가방에서 포션을 적당히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필요하면 쓰고. 잘 추스리라고. 난 간다."
"아쥼마 잘이써!"
삐삐도 손을 흔들고 방을 나섰다.
어쩐지 길이 더 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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