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변수
* * *
오랜만에 찾은 그의 가게는 이전보다 더 북적거리는 것 같았다.
사람이 더 많아져서인지 대기줄이 꽤 길었다.
어쩌다 앞에서 예약을 도와주던 매니저가 나를 발견하고 안쪽으로 안내해준 것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일단 미리타엔을 대표하기도 했고,
삐삐가 배고프다고 하기도 했으니 그냥 받았다.
아마 퓨어하트씨도 오랜만에 삐삐를 보면 반가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은 자리가 하나 있었는데, 소형 테이블에 의자가 마주보고 있는 창가측 자리였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음, 주방장특선으로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손님. 오늘도 꽤 씀씀이가 크시군요."
"절 기억하시나요?"
"당연하죠. 다른 분도 아니고 무령님이시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웨이터가 주문을 받고 빙그레 미소지은 뒤 사라지면 나는 살짝 이마를 짚었다.
종종 올 생각이었는데 괜히 나 때문에 대기줄이 또 늘어나면 골치아플 것 같았다.
그러다가 곧 너무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털어냈다.
"삐삐야, 여기 기억나?"
"몰라!"
"그래? 그럴 수 있지. 여기 밥 되게 잘 먹어놓고 기억도 못하네."
"밥 마시써?"
"응. 엄청나게."
"우왕!"
삐삐는 기대되는듯 양 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집고 테이블을 콩콩 내리쳤다.
"삐삐, 그러면 안돼. 주변 사람들한테 민폐야."
"아라떠."
그렇게 말하면서도 삐삐는 눈이 초롱초롱해져서는 기뻐하고 있었다.
음식은 과연 유명 셰프의 세 번째 분점 답게 빨리 나왔다.
나온 요리를 보면 따끈따끈하게 익어 나온 삼겹 오븐구이였다.
꿀과 계피를 사용해 끈적하게 졸인 소스가 끼얹어져 있었는데,
그 위로 어쩐지 진하게 풍긴 묘한 박하같은 향이 났다.
고기는 푹 익어 물크러질 정도로 부드러웠고, 큼직했기 때문에
나는 그 큰 덩이를 잘라 삐삐의 접시 위에 옮겨주었다.
"또 다 묻히고 먹으면 안돼 삐삐. 밖에서 밥 먹을때는 어떻게 해야한다고 했지?"
"예이 바르게 안자서 포크랑 나이푸로 짤라서!"
"그래. 잘 알고 있네."
"잘먹게뜸니다."
그렇게 말하고 삐삐는 큰 조각을 포크로 찍었다.
푹 들어간 포크는 고기를 그대로 뭉텅이째로 덜어냈다.
그런데도 안쪽은 촉촉한 연분홍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안쪽에서 기름기가 주륵 흐르며 소스에 섞인다.
삐삐의 포크가 입 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입에 저 큰 고기가 어떻게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부드럽게 들어간 고기를 오물오물 씹은 작은 입에서 작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시떠!"
신이 나서 고기를 자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 고기를 잘라냈다.
연골이나 근막을 일일이 다 쳐낸건지 꽤나 두껍고 덩어리진 고기임에도
이에 씹히는게 없었다.
꿀의 달콤한 맛은 과하지 않았고, 거기에 계피가 은은하게 섞여있었으며
기름기가 녹아 그 안에서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느끼해지려고 할 쯤 들어간 박하의 맛이 시원하게 끝을 잡아주었다.
"진짜 이 집은 나날이 발전하는구나."
"칭찬해주시니 기쁘네요."
내가 오른쪽을 돌아보면 여전히 순박한 오크가 한 손에 티포트를 들고 서 있다.
"오랜만이에요 에리아씨."
"아, 퓨어하트씨. 오랜만이네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야 늘 잘 지내죠. 덕분에요."
"정말 맛있네요. 개인적으로 고용하고 싶을 정도로요."
"감사합니다만 지금은 개인 가게를 낸 걸로 만족해서요."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나와계셔도 괜찮으신거에요?"
"네, 다행히도 지금은 테이블이 만석이라서, 다음 대기까지 시간이 꽤 남거든요.
그리고 주방장 특선을 점심부터 주문하시는 분은 잘 없어서 직접 얼굴도 뵐 겸 찾았어요.
직접 차를 따라드리려고요. 아무래도 주방장 특선인데 얼굴 한번 비추지 않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그 차는...?"
"에리아씨가 만드신 것보단 못할지도 모르지만, 특제 자스민차에요.
제 오리지널 메뉴죠. 남부 지역의 자스민중에 상태가 좋은 것을 엄선해서
둥글레, 오레가노, 그리고 칠리한 허브같은걸 살짝 섞어 어레인지 한 차죠.
온도는 62도에서 오랜 시간 숙성시켜 우린 거고요."
"제 것보다 맛이 없을 수가 없겠는데요."
그는 빙그레 웃으며 나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삐삐도 잔을 내밀었지만 그는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우리 공주님은 다른 거 마실까요? 이건 조금 매울수도 있어요."
그의 부드러운 접대는 정말 그 덩치와 맞지 않는 친절함이었다.
삐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는 바로 다른 티포트를 꺼냈다.
"이건 공주님들이 좋아하는 라벤더에 레몬, 당도높은 몬탈 복숭아와
테베말, 그리고 알코올을 날린 셰리와인을 오랜 시간 침출한거에요."
"그거 마시써?"
"마음에 들거에요."
삐삐는 그 음료수를 잔에 받았다. 붉은 색으로 반짝이는 음료는 살짝 차갑게 식혀둔 것 같았다.
한입 마시더니 눈빛이 바뀌어서 또 잔을 내미는 손을 보고 퓨어하트는 다시 삐삐의 잔을 채워주었다.
"혹시 에리아씨도 한 잔 드시겠어요?"
"부탁드릴게요."
음료는 시원한 맛에 연하고 풍부한 포도의 맛, 그리고 거기 은은하게 뜨는 라벤더향이 입에 돌았다.
그리고 산뜻한 레몬의 맛이 연한 단맛에 감겨나왔다. 가볍고 산뜻하면서도 적당히 연한 당도,
왠지 모르게 입에 착 감기는 중독성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와..."
"좋아하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실 호불호가 꽤 갈리는 편이거든요."
"이게요?"
"네. 아무래도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왜 그 술을 그렇게 낭비했느냐는 말도 하셔서..."
"이 술이 뭔데요?"
"몬티 블랑 셰리 28년식이에요."
"그거 분명 못해도 7델 정도는 하는 고가품 아니었나요...?"
"술을 못하시는 분께도 그 풍미를 좀 전해드리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제 어레인지를 가미한."
그때 그가 찬 손목시계에서 삑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그러면 그는 웃으며 티포트를 테이블에 올리고 말했다.
"요리가 준비된 모양이라 다시 주방에 가봐야겠네요.
식사 맛있게 하셨으면 좋겠네요."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가 주방으로 사라지면 다시 몇 자리 테이블이 순환했다.
팀이 바뀌고, 그 사이에 두번째 메뉴가 나왔다.
듣기로는 주방장 특선을 주문하면 메뉴 3가지를 차례로 내 주는 형식이라고 한다.
육류, 어류, 후식류로 구성된 세트라고 하는데, 그 사이사이 서브로 샐러드를 비롯한
각종 채식메뉴가 곁들여진다.
그리고 다음 메뉴로 나온 것은 또 어디서 보기 힘든 메뉴였다.
상당히 특징적인 지느러미를 가지고 있는 생선의 찜이었는데,
특징적인 찜 옆에 접시에 일렬로 그 동일 어종으로 보이는 생선회가 있었다.
찜은 간 참깨와 올리브 오일, 그리고 마늘과 바질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소스 위에 찜이 얹어져 나왔는데, 자세한 소스의 재료를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다.
생선의 아랫쪽은 기름에 튀겨진 것 같이 바삭한 껍질이 있었고,
뚜껑을 덮어 익힌건지 스팀과 같이 쪄진 듯 부드러워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뼈를 미리 제거해 두고 데코레이션으로 사용해,
그 위에 살을 얹은 모습은 먹기도 편하면서 고급스러웠다.
뼈를 기준으로 양쪽으로 뜬 필렛을 사용해, 한 면은 찌고, 한 면은 회로 나온 것 같았다.
"어째 생긴건 꼭 성대나 쏠배감펭같네."
불안함이 급습하는 것 같았지만 강제로 그 긴장감과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냄새에
나는 결국 살점을 크게 떼내 소스에 푹 적셨다.
그리고 한입 베어물자 부드러운 살이 탄력있게 씹혔고, 고소한 맛과 은은한 바질이 섞였다.
퓨어하트씨는 식자재의 원래의 맛을 유지하며 간이 강하지 않은 소스를 주로 사용하는 것 같았는데,
확실히 아까보다 더 원래의 맛에 집중하며 살짝 맛을 띄워주는 느낌이 좋았다.
부드러운 흰살 생선임에도 껍질은 바삭했고 촉촉한 기름기에 섞인 마늘 풍미와
깨의 고소함, 그리고 바질의 향이 기름에 젖어 피어올랐다.
내가 연금술을 배운 이래로 상당히 오랜 시간 포션을 만들어왔지만
퓨어하트씨가 나보다 몇 십배는 더 잘 할 것 같았다.
"삐삐도! 삐삐도 줘!"
삐삐도 덜어 줬더니 금방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생선 요리와 함께 나온 것은 감자와 치즈를 사용한 샐러드였는데,
신선한 느낌이 물씬 나면서 푸어하고 산뜻한 생선요리에 풍미를 더해주는 훌륭한 가니쉬였다.
회는 그 샐러드와 함께 먹으면 상당히 맛이 좋았는데, 기본적으로 식감이 특징적이지만,
맛이 그다지 강하지 않은 회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았다.
그리고 웨이터가 우리에게 다가와 친절하게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회로 드시는 것도 좋습니다만, 그 그릇이 기본적으로 돌로 만들어져 열을 오래 보존할 수 있고,
찜과 함께 나온 소스는 가열을 해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소스에 회를 잠시 담가두시면 샤브샤브로 즐기실 수 있습니다.
찜과는 또 다른 식감이 나기 때문에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원하신다면 버터를 준비해드리죠."
"고맙습니다."
정말 게눈 감추듯 처리한 두번째 디쉬를 보내면서 나는 삐삐에게 물었다.
"삐삐, 배 안불러?"
"갠차나!"
"그래? 그럼 쥐포가 좋아 이게 좋아?"
"이거!"
"쥐포는 별로야?"
그렇게 물으면 삐삐는 동공을 떨며 내게 물었다.
"ㅇ..왜애...?"
"그냥, 궁금해서."
"이게 더 죠은데.... 지뽀도 죠아..."
"그렇구나, 다행이네."
"이제 지뽀 안사줄꺼야?"
"먹고싶으면 사줄게."
그렇게 말하면 다시 얼굴이 편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걱정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마지막으로 나온 메뉴는 꽤 소박한 아이스크림이 얹어진 와플이 두 조각 나왔다.
이전의 메뉴에 비해 상당히 작은 크기에 적은 양이었기에 살짝 당황했지만
만든 사람을 생각하면 신용이 간다.
삐삐와 나눠 한 스쿱 아이스크림을 떴다.
아이스크림은 차가운 맛에 바닐라, 그리고 순수한 것 같은 우유의 맛이 났다.
여기까지는 그저 평범하다고 생각했는데, 와플은 달랐다.
고소한 와플 사이사이 씹히는 해바라기 씨앗과 포슬포슬하게 부드러운 빵,
그리고 그 사이에 격자로 뿌려져있던 크림치즈와 화이트 초콜릿이 특징적이었다.
과하게 달지 않게 잡아주는 것이 도리어 아이스크림이었다는 점이 좋았는데,
와플 반죽을 분명 직접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어디서나 먹는 반죽과 다르게 쫀득한 느낌이 상당히 강했는데,
그러면서도 아이스크림과 닿은 면이 눅눅하지 않고 바삭했다.
조금 뜨거운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아이스크림이 크게 녹지 않고
균형있게 올라가 있었다. 아이스크림 사이에도 느껴지는 아몬드가
얇게 썰려 들어가 있었다.
"마마."
"왜?"
"이거 가져가구시퍼."
"맛있지?"
"응. 반네리 이모도 줄꺼야."
"발레리아?"
"응. 이모두 조아하게찌?"
"그러게... 그 생각을 안했네."
나는 멍하니 삐삐의 말에 동의하고 식사를 마친 후에 계산을 했다.
한끼 식사에 2인분 기준으로 2델 하고도 32페킷이 나왔지만,
지금의 내게는 크게 무리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혹시 모르니까 에스트로와 발레리아도 가져다 줄 심산으로 포장을 요구했다.
원칙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물어 보겠다며
웨이터가 내게 잠시 기다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수긍하면 웨이터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약 5분 정도가 지나고 그가 돌아와 말하기를,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단다.
"그게, 저희 셰프께서는 상당히 요리에 프라이드가 있으신 분이라,
요리도 그 순간에 따라 최고의 순간이 있으시다고 자부하십니다.
소스의 온도, 음식의 상태, 그리고 분위기와 시간의 조화까지도
음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시고, 저희 레스토랑에서 최고의 식사를 선물하시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포장으로 인해 밖으로 반출되면, 셰프께서는 온전히 그 한끼의 만족감을
고객께 선사해드릴 수 없다고 하십니다. 대신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주신다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아, 그런 거라면 이해하죠."
"그리고 셰프께서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오신 그 소녀분은 누구신지 여쭐 수 있겠냐고 하셨습니다."
"아, 딸이에요. 알에서 태어난."
"네?"
"그렇게 전해주시면 알거에요."
"알겠습니다."
웨이터가 사라지고 채 1분이 지나지 않아서 퓨어하트는 화들짝 놀라 뛰어나왔다.
덕분에 가게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다.
"너구나... 너였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을 훔쳤다.
"그렇구나, 닮았네요. 이제보니."
"그렇죠?"
"아, 역시 이렇게 알고 보니까 또 감동이 샘솟습니다.
참... 이런 인연이... 그때 그 아이가 이렇게 빨리 컸다구요?"
"그러게요. 애들은 금방 자란다잖아요?"
"참... 다른건 못드려도 아까 오리지널 드링크는 따로 담아드릴게요.
아까 잘 먹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예쁘던지 정말..."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았다.
"되도록이면 빨리 드시는걸 추천할게요. 저온 보관이 중요하기도 하고요.
아무래도 셰리 와인이 기반이다보니, 쉬어버리면 맛이 변하니까요."
"명심할게요."
"다른 음식은 고온을 유지해야 하고, 재가열하면 육질이나 맛이 변하지만,
이 음료수는 상대적으로 그런 부분에서 자유로우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엠페레스에 오셨나요?"
"아, 교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길이 막혔네요."
"아, 교국으로 가시려고 하셨군요. 어렵죠 아무래도.
저도 지금 그것 때문에 재료 수금이 어려워져서 하루에 정해진 테이블만 주문을 받습니다.
선착으로 50팀까지만 주문을 받고 나서는 그날 장사를 접거든요.
다른 식당들도 대체로 비슷할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말이죠."
"아닌 곳도 있나요?"
"이상하게 식당도 어렵고 카페도 잘 안되는 시국에 술집은 멀쩡합니다.
특히 호프집이 아닌 펍 같은 곳들이요."
"펍이...잘된다?"
"네, 자세한 사항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사람들이 잘 찾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장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밤이 되면 불이 들어오고, 이상하리만치 소란스럽더라구요.
상권의 모임에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낮에는 가게에서
고급 술을 열어놓고 마시는 것도 보면 장사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렇군요. 아무튼 여러모로 오늘은 감사했어요."
"아니에요. 저도 얼굴 뵙고 해서 좋았는걸요. 안녕히 가시고 다음에 또 찾아주세요."
"그럼요. 당연하죠."
언제나 그는 치유가 되는 사람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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