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42화 (242/303)

〈 242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 브리깃의 예술가

* * *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던 노트에 금빛으로 글씨가 쓰여지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 책은, 그래 슬픈 귀족의 이야기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테지만, 부디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그것이 기록, 그러니까 '도서관'의 서적이 되었음을 확신했다.

***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순간 내 앞에 싸늘하게 쓰러져 죽어있는 케이를 보고 나는 얼어붙어 있었다.

그를 흔들어 깨우려 했을때 그의 등 뒤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적셔지는것을 보면서 나는 놀라 그만 말없이 울어버렸다.

흐려진 판단력에 다만 무언가를 할 기운도 없이 이미 숨이 끊어진 그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어느새 양손은 말라붙은 피로 검붉게 칠해져 있었고 방은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내 옷도 또한 피가 묻은 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체온이 식어가는 것을 나는 그 손 끝으로 느끼며 그를 바닥에 고이 눕혔다.

케이의 눈은 마치 먼 곳에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본 것처럼 불안한 얼굴로 초점을 잃은채 흰자를 까뒤집고 있었고

그의 입에 피거품이 물려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전까지 부글대고 있었으리라.

나는 죽은 동료의 그 표정을 도저히 두고볼 수 없었고 조용히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눈물 한방울이 그의 뺨에 떨어졌다.

마치 그가 흘린 눈물같아 울컥한 기분을 애써 울음과함께 목뒤로 먹먹히 넘기며 몇번이고 그의 마른 뺨을 쓰다듬었다.

왜 그가 홀로 이 방에 쓰러져 죽어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피냄새에 취해서인지 혹은 상황을 견딜 수 없었는지 어지러움을 느낀것도 잠시, 곧 쓰러져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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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 처럼 나는 집앞 마당에 이젤과 캔버스를 준비해두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랜시간 함께했던 낡은 이젤은 이따금씩 멋대로 삐걱이고는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젤을 바꾸거나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것은 아니었다.

이젤이 본디 가진 그림을 올려둔다는 의미외에는 별다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저 그 위에 내 그림을 올려둔다는 것이 일종의 마음속 평안을 선물해 주곤 했다.

그림이 덧칠해져 가고 조용한 풍경이 캔버스에 담겨갈 쯤이었다. 나의 손 위로 툭 하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오는군. 오늘은 이쯤 해야겠어."

내가 자재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자 창밖은 흐린 얼굴로 일그러져 해를 가린채 다만 애꿎은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내리기 시작한 빗소리에 조금은 김이 샌 나는 이 그림을 괜히 정리하고 싶지 않았다.

방해받았다는 사실이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거실 구석에 아무렇게나 이젤을 세워두고는 수건으로 팔레트에 어지럽게 섞여있는 물감을 닦아냈다.

이젤옆 비스듬히 팔레트를 세워둔 후에 수건을 안쪽으로 반으로 접어 팔레트 옆에 겹쳐두었다.

그러고 나서 서재로 발걸음을 옮긴 나는 두꺼운 나무 문을 열었다.

오래된 나무문은 칠이 벗겨진 부분이 군데군데 보였는데 그만큼 오래된 집이라는 것의 반증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서지거나 휘어진 부분없이 잘 설계된 채로 남아있는 것은 수십명의 하인들이 이 저택을 관리했기 때문이겠지.

날마다 그들이 먼지를 털어내고 기름칠을 해 대며 가끔 판자를 열심히 사포질하던 그 모습들이 나의 어린시절엔 익숙하게 볼수있었던 광경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집자체가 굉장히 공들인 고급 저택인것도 있을것이다.

값도 값이지만 사실 무엇보다 굉장히 고급스럽기도 했고.

그러나 이제는 관리할 하인조차 없어 오랜시간 방치되었던 이 집의 삐걱대는 소리는

이제와서는 이 낡은 집의 어디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소리였기에 그저 그렇다는 듯이 떨어내고 불을 켰다.

전구는 조금 깜빡이더니 팟 하는 듯이 불이 들어왔다. 오래된 서재는 곳곳에 먼지가 쌓여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방치된 시간이 길기도 길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집을 다시 찾은건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번화가로부터 적잖이 떨어진 교외의낡은 가옥.

오래되었지만 목재와 철로 지어진 저택은 나의 아버지께서 이루어내신 전반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아버지가 별세하시고도 나는 한참동안 이 곳을 찾지 않았다. 아버지가 생전에 수기로 남겨두신 편지 한통이 내게 도착하기 전에는 말이다.

편지는 흰 봉투에 붉은 인장으로 찍혀 전달되었다.

아버지 다웠다. 몰락한 귀족이었음에도 그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다만 그 노력에도 무색하게 왕은 우리 가문을 버렸다. 버려진 가문이었음에도 아버지는 계속 왕의 서신을 기다리며 일평생 이곳을 뜨지 않았다.

재정 상태가 나빠져도 이곳 만큼은, 이 부지는 죽어도 팔지 않으리라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아버지는 기어이 이 집을 지켜냈다.

그 수하의 하인 하나마저도 더는 감당할수 없게 되어 비록 그 침소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 수십이 넘는 하인들중 죽어가는 그를 동정할 사람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죽고 난 이후에 그의 재산을 처리하면서 아버지의 유언대로 집과 부지를 상속하게 되어 편지 한통과 저택을 넘겨받게 되었다.

몰락한 귀족이라고 할 지언정 그 긍지라는 것을 일평생 부여잡고 살았던 그런 남자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온 편지는 귀족의 자세를 운운한 내용이었음에 나는 치밀어오르는 이제는 갈곳없는 분노를 토해냈다.

하지만 이제와서는 그마저도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던일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하던 일이라고 해도 도시 변두리에서 아이들에게미술을 가르치던것이 전부였다.

미련이랄것도 없었다. 경제적으로도 시달리고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까.

처음 이곳으로 이주하고 나서 내가 한 일은 넓은 토지의 대부분을 넘긴 것이었다.

아버지가 지켜내려고 노력했던 것 역시 나와는 맞지 않는 과분하고 사치스러운 그저 질릴대로 질려버린관습일 뿐이었기에

그저 저택과 그 주변의 조금의 마당정도를 남기고 모두 처분해 버렸다. 대다수가 포도밭과 밀밭이었다.

그 넓은 부지를 홀로 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략못하더라도 헥타르정도의 단위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그 토지를 팔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니 만큼 들어주기로 했다.

무슨 이야기냐고 한다면 그 토지는 원래 아버지에게 세를 내고 부지를 일구던 농민들에게 거의헐값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넘겨져,

형식상으로, 서류상으로는 여전히 브리깃의 부지였으나 토지의 실 소유주는 변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들이 가끔 가져다 주는것들로 만든 호밀빵과 포도주로 종종 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저택옆 밭을 끼고 흐르던 강은 내가 그림을 그리기에 썩 적합한 풍경을 제공했기에 그 부근의 토지만큼은넘길 수 없었다.

아버지가 아꼈던 큰 사과나무가 심어져 이제는 아름드리 열려있었다. 나는 이걸 그리는게 마음에 들었다.

풍경화를 제하고서라도 사과를 따서 언제든 정물화를 그릴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과나무를 꽤 사랑했다.

가끔 그러다 썩어버린 사과도 있었지만 그 모든걸 포함해서 나는 사과나무를 좋아했다. 저택은 넓었고 내가 모르던 공간도 많았다.

기억속에 남아있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가면서 생활 반경 위주로 정리했다만. 그것만도 일주일이 족히 걸렸다.

그럼에도 이 처럼 정리하지 못한 서재같은 경우는 사실 손대지 못할 정도로 큰 방이었기에 정리를 포기해버린 것도 있었다.

이같은 방들을 날마다 정리하려면 분명 많은 일손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인들을 정리한 그날부터 아무도 청소하지 않은 이 방의 퀴퀴한 공기마저 날 환영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가 오기 이전부터 수년은 버려져 있었을 책들을 보면서 청소를 생각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너무 게을러 정리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아마 오래전에 어느 하인이 사용하고 버려뒀을 법한 걸레를 서재 바닥에서 주워들었다.

책을 한권정도 읽고 싶어진 까닭이었다. 제멋대로 굳은 걸레를 억지로 펴면 퀴퀴한 냄새가 없지않아 났다.

그러나 역하다 싶은 수준까지도 아니었다. 그저 오랜시간 빨지 못하고 방치해둔 것이 원인인 듯 했다.

나는 차마 그 넓은 기록의 소우주를 정리할 엄두는 나지 않아 그저 옆에 있는 작은 창을 열었다.

곳곳에 드리운 거미줄을 걷어내고 먼지쌓인 창을 닦아냈으며 책을 한 권 뽑아 들때마다 흩날리는 먼지에숨이 막혀 콜록거렸다.

그렇게 닦다보니 눈에 들어온 책이 한 권 있기에 그걸 읽기로 했다. 무언가 부자연스럽다고 할 수도 있을 다른 책과는 다른 느낌에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여유롭게 읽을 수준의 책이 아니었지만 시간을 보내는데는 최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독서를 생각하고 거실로 나와 큰 창으로 보이는 마당을 바라보면 밖에 내리는 빗방울 마저 조금은 반가울지 모르겠다.

나는 책 표지를 마른 걸레로 닦아내고거실로 들고 나왔다. 그러고 나니 목이 조금 건조했기에 주방으로 가서 와인잔을 들고 나왔다.

"주류 저장고가 지하에 있었지."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복도 끝 카펫이 넓게 깔린 아래에 조그마한 손잡이가 달려있는 바닥을 들어 올려야 나오는 구조였다.

위로 여닫을 수 있는 문은 내가 들기에 조금 뻑뻑하고 무거웠다.

술이 쉬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랬다던것 같다. 사실 이 집의 구조를 아직 잘 모르겠다.

마루의 카펫을 들어내고 그 밑에 난 다락문을 열었다. 습하고오래된 듯한 목재와 돌벽 냄새에 진한 포도주의 향이 지하에서 올라왔다.

축축하게 서늘해진 공기를 느끼면서 나는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의 등은 평소에는 꺼뒀다. 술맛이 변한다는 아버지의 일종의 지론이었다.

뭐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모르지만 이제와서는 괜스레 신경쓰여 잘 켜지 않는다.

불을 켜도 확 밝지 않아 그저 눈 앞이 보이는 수준의 빛만이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와인 저장고에 목재로 된 선반이 늘어서 있고 그 위에 누워있는 와인들이 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고급스런 와인들을 둘러보며 잠시 걷던 중 큰 선반의 두번째 층에서 나는 오래된 와인 한병을 꺼내 들었다.

낡아 빛바랜 종이 라벨엔 70년 전의 날짜가 적혀있었다. 술 이름같은건 관심도 없었다.

애초에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그냥 가볍게 마시려고 했을 뿐이다.

느낌만 내려고 한 것치곤 70년산 와인은 조금 진하긴 했지만.

잘 모르는 와인을 가만히 집어 바라보고 섰던것은 고급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거 먹어도 되는거겠지하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나는 병을 집어 지하실을 나왔다. 계속 있기에는 춥고 눅진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곳곳에 피어난 곰팡이가 눈에 들어온 것도 사실이었다. 습도의 차이가 만들어낸 것이겠지.

다시 계단을 걸어올라오면서 살펴보니 계단에도 축축한 습기가 어느정도 스며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숨쉬기가 힘들다던가 혹은 불쾌한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수준은 아니었으니 환기도 나름 되고있겠거니 싶기도 했다.

거실로 돌아와 와인을 개봉해 병에 조금 따라두고 거실의 난로에 장작을 적당히 재워넣고 불을 땠다.

잔을 가볍게 흔들어 입에 댔다. 기껏해야 포도주라고 생각했는데 향이 생각보다 좋아서 기분이 썩 좋았다.

아무래도 70년짜리는 꽤 고급품인 모양이었다. 혼자 사는 거실이 조금 훈훈해졌다.

혼자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 와인을 홀짝이자니구석의 흔들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릴적 아버지가 주로 앉아서 주무시곤 하던 의자였다만 이제와서는 주인을 잃고 종종 기울어져 흔들거릴 뿐이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흔들의자에 몸을 기댔다. 의자 자체가 편안하다기 보다는 그 의자에서 느껴지는 여유로운 분위기가 좋았다.

잠이 올 것 같았다. 나는 의자 옆 테이블위 무드있는 스탠드를 켜두고 손에 들고있던 와인을 한번에 목뒤로 넘겨버리고는 잠을 청했다.

굳이 찾아오는 잠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잠이 막 들려고 할 쯤 누군가가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잠이 들기 전의 그 나른한 기분을 방해받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가랑비였던 비가 지금에서는 꽤 세차게 내리고 있는데도 기어이 찾아왔다는 점에서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라도.

아니 그 얼굴이 궁금해서라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집에 만일 아버지가 있었다면 분명히 날 더러 나가보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젖는것이 싫어 우산을 챙겨들었다. 그냥 나가려다 내가 지금 입은것이 수면용 가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곧 굳이 나의 여유를 방해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문을 열고 나갔다.

대문 밖에는모건이 서 있었다. 그는 내가 전에 일했던 학교에서 종종 봤던 남자였다.

그는 신문사에서 일했는데, 내가 그린 작품을 종종 신문에 싣거나 했다.

나로서는 근근히 수입이 들어온다는 점에서 나쁜 기분은 아니었기에 그저 아는 친구 정도의 입지를 유지하던 그정도의 인간이었다.

내 작품에 대해서는 멋대로 해석하고 나름대로의 높은 가치를 붙이곤 했지만 그가 맞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그저 그림을 그리고 싶을때 그려냈을 뿐 그가 생각하는 정치라던지 왕이라던지 하는 주제는 담아내긴 커녕 잊고싶었기에 이 남자의 평은 그저 웃어넘기곤 했다.

남자는 스스로 나의 팬을 자처하며 가끔 나와 이야기 하는것을 즐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카페나 간단한 바로 불러내서는 내게 음료를 사 줬었다.

얻어먹은 것도 있고 한 지라 그를 그저 대문 앞의 불청객으로 남겨둘 수는 없었다고 판단했는지 나는 의외로 순순히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와. 이야기는 안에서 듣지."

그는 가볍게 웃어보이며 쓰고있던 모자를 들어올려 인사를 했다.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홀로 와인을 마시며 잠을 청하는 것보다야 유익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즐기던 순간의 여유를 방해받은 것보다야 유익한 무언가를 기대하며,

아니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나는 축축히 젖어 물을 흘리는 그를 현관에 잠시 세워두고 목욕탕에서 수건을 하나 가져왔다.

"일단 물기 부터 좀 닦아. 내 집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는건 보고싶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브리깃씨."

"에드먼드가 편해. 그쪽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알겠습니다. 에드먼드씨."

"아, 존칭도 빼자고. 번거로우니까 말이지. 언제부터 우리가 격식을 차렸다고."

"뭐, 그럼 각설하고. 내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건 어찌됐건 좋아. 부디 쓸모없는 소리만 아니길 빌지. 차 한잔 할건가?"

"기꺼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는 그를 뒤로 하고 나는 주방에서 다기를 꺼냈다.

찬장에 오래 있어 먼지가 쌓여 있었다.

혼자서 차를 마실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로 헹궈내다가 가운 소매에 물이 튀었다. 안하던걸 하려니까 피곤한 일이 생겼다.

티포트에 물을 담아 끓여두고 다기세트를 대충 준비해둔 후 차가 준비되는것을 기다리며 다시 거실로 나왔다.

모건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내면서 들어왔다.

"그래. 일단 잘 왔어. 환영하지. 하지만 우선 그전에 내 현 주소는 과연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물어도 될까?"

"어렵진 않았어. 신문사로 온 그림의 발신지만 알아내는 정도였으니까."

"그림을 보내지 말걸 그랬어."

"잘 살고 있는것 같아 보이는군."

"뭐. 그렇지."

"듣자하니 '브리깃' 가문의 마지막 남은 혈통이라던데. 나는 설마 자네가 정말 그 '브리깃'인 줄은 몰랐는걸?"

그렇게 웃고는 능청스럽게 갖다붙이며그가 이쪽을 흘끔 쳐다본다.

그 꺼림칙한 기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브리깃이라는 사실 또한 몰랐던 눈치가 아니다.

다만 무언가의 의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모르는 척 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보다 제일 나를 불쾌하게 만든 것은 다른 것이었는데,

몸에 두른 수건이 꽤 젖어 물이 떨어질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미 바닥은 빗물이 늘어섰다. 나는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뭐야."

"신문도 안보고 사는가봐.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이젠 읽을 필요가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거든. 특히신문은 자꾸 누가 생각이 나서말이지."

모건은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어쩐지 호쾌하다기 보다는 비열함이 묻어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품 안에서 노트와 펜을 꺼내들고는 무언가를 끄적였다.

"이게 예술가들 사이에선 유행인가보군? 하나같이 신문을 거절하다니.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조차 모두 역사의 파편으로 남긴다는 건가?

하긴 뭐 그럴수 있다고 생각해. 어찌되었건 간에 내가 여기 온건 왕의 포고 때문이야."

그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나는 그의 말을 애써 무시하면서 끓인 물로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어째서인지 왕이라는 말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평화로운 일상이 방해받을 것만 같았다. 모건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미소를 띄고 있었다.

내 얼굴과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노트에 계속 적어가는 것은 아무래도 기사거리 같았다.

이제는 기사 소재로 쓰이는 것도 익숙해진 지라 별 감흥은 없더라도 그가 자연스레 나를 돈벌이의 소재로 팔았다는 느낌에 불쾌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홍차에 우유를 조금 흘려넣고 저었다.

블렌딩 밀크티를 만들어 맛을 한번 봤다. 나쁘지 않았다.

"난로 앞으로 가지. 옷부터 말리라고. 자. 여기 밀크티.

난 입구에서부터 네가 흘린 빗물을 닦고 갈테니까 말야."

"그렇게 하지."

물기를 닦아줄 가정부 하나 정도는 남겨뒀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라면 급료도 지불할수 있는데. 썩 나쁜생각은 아니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물기를 닦으며 현관으로 가자 모건의 낡은 신발이 보였다.

관리를 성실하게 했는지 구두약 냄새가 미묘하게 났다. 닳아있었음에도 구두코가 광이나고 있었다.

앞뒤 굽이 닳아 진흙이 묻어 있었다. 현관에서 그의 구두를 들어 털어내고 신발장에 정리했다.

구두약과빗물냄새외에는 악취랄 것도 없었다. 나는 수건을 세탁실에 던져넣고 거실로 돌아왔다.

그의 마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콧수염이 전에 봤을 때보다 길어 있는것이눈에 들어왔다.

필시 면도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빠졌으리라. 구두에 광이 남에도 진흙을 묻혀서 온 것을 보아

평소에 관리를 철저히 했겠지만 최근에는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진흙이 묻는 도시 외곽을 걸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대충 이해했어. 네가 날 찾아온 이유."

그가 밀크티를 홀짝이다 날 쳐다본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다시 밀크티를 마신다.

나는 다시 흔들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기대듯 누웠다.

테이블 위 마시다 만 와인을잔에 부었다.

밀크티를 입에서 뗀 모건이 이쪽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 실적의 저조로 힘든 상황이지. 미리 특종이 될 법한 곳을 찾아다니는 실정이야."

"그리고 나는 또 좋은 이슈거리라는 거군."

"그렇게 된 거야. 어쨌든아까의 연장선에서 말하면 왕이 6가문의 귀족을 모두 불렀다네. 물론 '브리깃'도 말이지."

"이제 와서는 관계없는 이야기야."

"아니, 그게 또 그렇지 않을걸. 에드먼드.

왕은 이미 에스트릭스 공작의 죽음은 알고 있어.

동시에 에드먼드 브리깃이 새로운 가주가 되어 저택으로 복귀했음을 알지."

"그가 내쳐버린 가문이다. 그렇게 관심이 있을 리가 없어."

"그래. 왕이 내쳤기에 오히려 감시가 붙었지. 쿠데타의 방지와 역모의 사전차단등의 명목으로.

아니 애초에 역모혐의로 인해 물러난 거였지 에스트릭스 공작은?"

"닥쳐 모건. 역모는 없었다. 무고했단 말이다. 우리 아버지는."

"물론. 그걸 조사한것도 밝혀낸것도 왕의 업적중 하나였으니 말이지."

화가 치밀었다. 와인을 한모금 했다. 축인 목은 보람도 없이 바짝 말라갔다.

그가 다 마른 수건을 옆으로 치웠다. 취한건지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왕이 이번 기회에 브리깃을 다시 6귀족으로 복귀시키고

이를 맞아전 국민을 대상으로피로연을 연다고 했어.

그래서 날짜는 3일후 버크레이엄 궁전."

"사양하고싶다만.

애초에 6귀족이 아니더라도 '브리깃'은 귀족임에 변하지 않아."

"그러지 말자구.

6귀족은 일반 귀족과 다른것.

이해하고 있잖아.

직접 왕과 소통하는 수준이라고."

"그 녀석도오는거겠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쥔 손에서 바르르 떨려온 진동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회전했다.

능글거리며 웃고있는 모건을 후려치고 싶었다.

애써 턱밑까지 차오른 화를 꾸역꾸역 집어삼키면서 심호흡을 했다.

손에 든 와인잔을 다시금 기울였다. 차분함을 조금 되찾은 나는 모건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래. 알겠어. 오늘은 이만 돌아가. 자네도 일이 있을것 아닌가."

나는 그가 옷을 말리기도 전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원래는 그정도 여유는 좋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은 그냥 내 눈앞에서 그를 치워버리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하고픈 말이 남은 것처럼 보였지만 말없이 내 눈빛을 바라보더니 포기한 눈으로 한숨을 쉬고는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공책에 주섬주섬 뭔가를 간단히 적어넣고 마침표를 붙인뒤에 외투 안주머니에 그걸 넣고 마지못하다는 듯이 일어섰다.

"아, 그렇군. 실례했어.

아무래도 내가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은데. 사과하지.

나쁜의도는 없었어. 믿어줄런지는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다음에 다시보지. 가능하면 3일뒤 버크레이엄 궁이었으면 싶은데."

그는 등을 떠밀려 문밖으로 쫒겨나듯 나간다.

아직 비가 세차다. 기분이 꺼림칙했다.

녀석을 몰아내고 나는 평화를 유지할 틈도 없이 흔들의자에 쓰러졌다.

나의 오랜만의 안식이라는 것은 왕명으로 짓이겨져 버린것이다. 거부권은 없었다.

솔직히 집을 통째로 물려받은것을 제하면 나에게 실질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6귀족이 된다고 하면 내게 떨어지는 것은 지역의 징세권과 왕권의 교류.

그리고 명예와 명성정도가 되겠지만 나는 그 어느것도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그랬기에 아버지와도 결별하고 도시로 나간 것이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건 그저 이 정도의 안식과 휴식이 가능한 공간 뿐이었다.

별도로 추가하자면 그럴 여유겠지만. 이제와선 아무래도 좋았다.

한바탕 소란스러웠기에 집을 정리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보면 분명히 생각도 조금은 정리되리라 생각했다.

일손이 부족하긴했으나 그것 조차도 혼자서 느긋하게 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았다.

"우선은 안쓰던 방부터 한번 정리할까."

이 나라는 너무나도 일차적이고 단순한 상명하복의 왕정체제를 유지하는 국가였기에 아래에 있는 계층일 수록 지치고 힘들 뿐인 국가다.

물론 노예제는 사실상 폐지되었고 여러 개혁을 거치면서 성장한 형태가 지금의 국가지만 여전히 절대왕정을 추구하는 왕족과 귀족체제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내 모국의 정치 체제라고 한다면 자랑스러운 일이기때문이다.

그렇다고 딱히 노예나 하층민을 걱정했던 것 역시 아니다.

그들의 입지는 낮았지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또한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적어도 브리깃의 가에서 종사하는 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비 인륜적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노예라고 하더라도 죽이거나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한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왕이었던 엠페리어 국왕이 백성을 끔찍이도 박애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던간 그런 모습에 나는 노예라도 나쁜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개 일반 백성이 맡기 싫어하는 하인으로의, 혹은 청소나 배관공등의 하부 직종을 맡아서 처리하던 사람들이었고

공식적인 월급이라던가 수당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 고용주로부터의 일정금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걸 사람들은 월급과 구별해 원조금이라고 불렀다.

경제적으로 수당을 벌 수 없는 계층에게 주어지는 일종의자비라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게끔 만든 엠페리어 국왕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고용주의 의지에 달린 것이기는 했다.

그래서 노예라기엔 굳이 따지면 기피직종의 하층민정도가 맞겠다.

하지만 그런 그는 7년 전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다. 왕궁 화단의 장미꽃밭 한가운데에 자는 듯이 누워있었다고 한다.

그때 까지는 6귀족에 포함되어 있었던 아버지는 왕궁에서 1달을 거류하며 왕을 추모했다.

그 뒤로 즉위한 것이 엠페리어 국왕의 아들인 페테이어 국왕이다. 당시 나이 18살의 소년이었다.

즉위하자 마자 왕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정원에서 장미덩쿨 사이로 편지를 한 통 발견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일이었다. 그때 나와 어머니는 신문으로 이를 접했고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 약 한달을 거류하다 왔었다.

아버지는 이 사건으로 인해 6귀족에서 실각당했고 거액의 재산을 압류당했다.

발견된 편지는 엠페리어 국왕으로부터 6귀족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내용은 단순했다.

자신의 개혁정치로 노예의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었음에 반발하는 인원들의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페테이어왕은 크게 격노하여 6개 각편지의 현주소를 조사했다.

아버지는 유일하게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이것이 아버지가 왕을 죽였다는 실질적 메시지가 되지 않았기에 왕은 아버지를 처형하지 않는대신 권력을 실추시켰고

아버지는 그 이후 나의 기억에 남아있던 상태로 정신을 잃고 부흥을 이뤄낸다며 침소에서 하루하루 말라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귀족으로서의 품위는 잊지 않았다. 지금 돌아봐도 무서울 정도의 집착이었다.

그런 왕이 어째서 지금에서야 나를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애써 떨쳐내며 나는 걸레를 빨아다가 물을 짜냈다.

가운에 물이 튈 것 같아서 걸레를 내버려 두고 옷을 갈아입는다.

가운의 세번째 단추가 떨어져 있다. 언제 떨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떨떠름하다. 새로 사야 하는 건가.

단추를 달아줄 수 있는 사람이 집에 없다는점에 아쉽다는 생각이든다.

들어가지 않은 방은 아직 많은데 청소할 사람도 단추를 달아줄 사람도 내 무료함과 외로움을 달랠 사람도 혼자 뿐이라는게 착잡하다.

첫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넓은 방에 무드있는 캔들과 커다란 사이즈의 침대.

아마도 부부의 방이었으리라. 아버지는 이 방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잊어버려야 했을 존재였기에.

어머니는 환영받지 못했다. 적어도 이 저택에서는 말이다.

어릴적 종종 책을 읽어주시며 웃었던 어머니는 간단히 말해서 아버지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의 까다로운 귀족으로서의 몸가짐을 충족시키지 못한 어머니에게 돌아온 것은 책망과 멸시였다.

그는 권력에 치중했고 왕에게로부터의 신임에 인생을 걸었던 남자였다.

추악하다고 해도 할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오른 어깨의 푸른 멍은 지워질 쯤 하면 다시 생기기의 반복이었다.

나는 차마 그꼴을 볼 수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10살이 되어 어머니와 집을 나왔다.

어머니는 집을 나와 자그마한 목집을 샀다.

그 뒤로 나는 굳이 숨길 생각은 아니었지만 브리깃의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나의 아버지를 잊기위해.

적어도 그와 같은 인종으로 자라고 싶지 않았기에 브리깃의 장남임을 밝히지 않았다.

그의 재산은 필요로도 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아이러니할 뿐이다.

나는 그의 재산을 상속받아 지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나는 그가 싫다기 보다는 그의 어설프게 썩어버린 그 같잖은 '귀족'에 질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집을 나와 시내에서 일을 하려고 했던것 같다.

하지만 이미 얼굴이 너무나도 알려진 탓에 결국 집에서 나올 수 없었다.

이렇게 갇혀있느니 브리깃의 저택에서 쉬는게 낫지 않겠는가 생각도 했지만 그럴때마다 애써 웃어보이는 미소는 내 억장을 세계 후려쳤다.

어머니는 나의 미술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그림들을 어머니께 선물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생일날에 어머니를 그린 그림 한 장만이 내가 어머니에게 해 줄수 있는 모든것이었고

내가 그 그림을 어머니께 안겨드렸을때 어머니는 내 품안에서 부서졌다.

산산이 깨져 사라져 버렸다. 나는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고 수중에 가진것도 없었기에 장례조차 치를 수 없었다.

나는 편지를 써아버지에게 보냈고 곧 어머니는 저택뒤 공터를 개간한 가문 공동 묘지에 안치되었다.

이 일이 있고 얼마뒤 왕이 죽으면서 어머니의 죽음은 깔끔하다 못해 없던 일처럼 묻혔다.

나는 그 모든 기억들을 부부의 침대에서 떠올렸다.

아버지는 이 장소를 싫어해서 따로 집에 잠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결국 그곳에서 쓸쓸하게 사라졌다.

텅 비다 못해 먼지가 쌓인 침대를 손가락으로 쓸어본다.

손 끝에 먼지가 묻어난다. 이불을 들고 털어볼까 하다가 우중충하게 비가 쏟아진다는걸 생각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대충 접어 침대 위에 두었다.걸레로 주변의 캔들과 스탠드만 가볍게 닦아내고 방문을 닫았다.

아무래도 들어가고 싶은 방은 아니었다.

청소를 하려 했는데 더 어지러워진 나는 머리를쥐고 멍하니 서 있다가 비틀비틀 거실로 걸어간다.

마시다 만 와인을 이제는 잔도 없이 통째로 입으로 가져간다.

속이 쓰릴 것이라 생각해서 식탁위의 호밀빵도 뜯어 먹었다. 진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이 집에 얽힌 추억이 이리도 많았는데 그 모든 것들을 잊어버린채로 살고 있었다니.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역사의 파편으로..."

모건. 잘도 이런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구나.

아무도 보고있지 않은데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신건가.

정신을 차리고 다음 방문 앞에 섰다. 문을 열려다가 문고리를 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기억에 없는 방이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커다란 원탁과 고급스런 의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응접실이라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작은 선반들이 늘어서 있고 최상석에는 아버지의 파이프가 있었다.누구를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나는 다만 파이프를 들고 책상과 의자만 훑고 난 뒤에 방을 나왔다. 어쩌다 들고 온 파이프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작게 쓰여있었다.

디자인으로 보아 주문제작품이라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담배라는 고급품을 피운다니. 사치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부분이 조금 구부러지듯 휘어져 있었다. 분명히 무언가를 타격했거나 피격당했을 것이다.

그부분에 조금 붉은 무언가가 묻어있었다만 굳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담배를 피우기 위한 물건으로서의 본분은 다 한 것이다.

파이프안에 남은 재를 손가락으로 그어보았지만 말라붙은 재와 먼지가 묻어나올뿐 깨끗해지지는 않았다.

손가락을 후 불어낸 뒤 걸레로 닦았다. 파이프는 서재로 가져다 두기로 했다.

아마 이방의 용도는 귀족들을 상대로 회의같은걸 했던 방이겠지.

나에게는 필요없는 방이지만 일단 이렇게 되었으니 남겨두기로 할까. 나는 방을 나와 열쇠로 문을 잠궜다.

나중에 들어가게 될 지는 몰라도 지금은 나와 관계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그랬고.

나중에 화실 대용으로 사용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청소라는 명목으로 돌아다녔지만 정작 먼지털이 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추억이랄것도 없었으며 방에대해 파악하는 것이 전부일 뿐이었다.

나는화장실로 가서 걸레를 다시 헹궜다. 짙게 묻은 먼지덩이는 물에젖어 검었다.

축축하게 들러붙어 있었기에 손으로 떼어낼 때마다 역겹다는 기분이 들었다.

비누로 손을 2번이나 씻어낸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 손은 미술을 위한 손이었고 아름다운 것을 이뤄낼 손이었기에 오물을 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싫었다.

거세게 물을 털어내자 화장실에서 기르는 화초에 물이 튀었다.

저택 밖에 있을때부터 내가 기르던 화초들을 가져왔다. 차마 버려두고 올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택에 마땅히 두고 키울 장소가 없었기에 화장실에 두고 물을 편하게 주고있다.

브리깃 대저택은 화장실과 목욕탕이 구별되어 지어진 덕에 화장실은 급수와 하수를 포함해서 간단한 변기등의 시설이 준비되었을 뿐이다.

화장실은 저택안에 층마다 하나씩 총 세군데가 있었으므로 부담없이 1층의 화장실에 장식했다.

나의 생각보다 화초는 화장실에 잘 어울렸다. 화장실이 고급인 탓이었을까 아니면 그 넓은 공간이 비어지지 않고 채워진 탓이었을까.

화초는 총 4종으로, 카틀레아, 아이리스, 칼라데아, 산세베리아였는데 생각없이 그리기에 좋은 아이들이었다.

꽃말은 우아한 여성, 좋은소식, 당신과 함께, 관용 으로 각자 의미가 있었다.

사실 카틀레아는 내가 어머니께 선물할 목적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선물하기도 전에 카틀레아는 주인을 잃었고 내 눈물로 꽃을 틔웠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칼라데아를 구입했다.

아마 내가 칼라데아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본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였던 헤럴드에게서 아이리스가 도착했다.

내가연인이 생긴줄로 알았다는 그의 말에 나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한동안 죄책감에 젖어 아무말도 하지 못한 헤럴드에게 내가 산세베리아를 선물하자 그는 내게 동종의 화초를 선물하며 사과했다.

현재 그는 도시에서 경관으로 일하고 있는 사내이다.

어째서 그와 처음 친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저택으로 이사하면서 유일하게 친필로 주소를 적어 편지로 부친 남자이기도 했고 동시에 내가 브리깃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예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나 이상한 쪽에서 섬세했는데, 대개 꽃말이나 별자리, 카드점등을 좋아했다.

나는 이때 헤럴드에게서 꽃말을 배웠다.

사실 그 전까지는 관심조차 없었고 지금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지식이 늘었다는 점은 좋게 생각하고 있다.

헤럴드의 카드점은 귀신같이잘 맞아들었다. 단 그는 본인 스스로의 결과만은 맞추지 못했다.

나의 그림들을 종종 보고 감탄하는 그 순진한 모습에 어딘가 괜스레 순수하게 힘이나곤 했었다.

내 저택으로 찾아왔던 첫번째 손님이기도 했는데 저택의 웅장함에 당황했는지 혹은 그냥 갑자기 달라진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곧 돌아가 버렸다.

악의는 없었으리라 생각하고 또 본인도 그럴것이다. 종종 내게 편지를 전해온다.

하지만 그마저도 본인이 직접 말을 타고 전해주러 오는 바람에 편지는 그가 돌아간 후에 읽는 소일거리가 되었다.

그의 순수함에 나는 내심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사람은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그 나름대로의 지론이었다.

그런 그가 내게 선물한 것이 아이리스와 산세베리아 였기에 아직도 나는 이들을 기르는지도 모른다.

내가 브리깃으로 돌아오고 많은 사람들이 내게 편지를 보내왔음에도 나는 그들의 편지에 짧고 간략하게 답장했다.

내가 조용히 살기위해 노력한 것들을 알아주었으면 싶었으나 부질 없는 일들이었다.

그럼에도 성의있게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왕과 일부 귀족. 그리고 헤럴드. 마지막으로 에그니아 가문으로부터의 편지였다.

내게 헤럴드는, 그의 화초는 그정도의 의미였다.

화초를 날마다 가꾸고 먼지를 닦고 영양제를 사서 채워두는 이유도 이때문일 것이다.

화초를 수건으로 닦아주고 난 후에 화장실을 나왔다. 파이프 끝부분이 젖어있었다. 버려버릴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거슬리기도 거슬렸지만 버리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빈파이프만 남아있지만 분명 집 어딘가에는내용품도 남아있겠지.

나는 파이프는 피운적이 없었다. 대신 시가를 피웠었는데 그것도 곧 그만두었다. 시가는 자주 피우지는 않았다.

사치품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회가 잘 없었는데 종종 친구들에게서 선물받은것이 다였다.

그걸 입에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노라면 차분한 마음으로 진정할수 있었다.

그러나 보관 방법이 너무나도 까다로운 탓에 여유와는 거리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내가 시가를 멀리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었다.

파이프를 식탁위에내려놓았다. 이걸 쓰려면 담뱃잎이 필요하다. 나중에 나오면 한번에 처리해야지.

다음 방의 문은 조금 밝은 색의 원목으로 가공되어 있었다.

접객용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서 오며가며 자주 본 방이었지만 실제로 들어가 본 것은 적다.

아마 아버지의 초상이 크게 걸려 있었던것 같다.

문에는 문고리나 손잡이 대신 사슴을 조각한 장식이 달려있는데 뿔 부분이 손잡이의 역할을 대신했던 고급품이다.

사슴의 눈에 박혀있는 것이 진주라는것을 알게된것은 이사오고 나서의 일이다. 어릴적은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사슴뿔을 잡고 천천히 문을 당겼다. 밀어서는 열 수 없는 구조라는것을 아버지에게 어렸을적에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문은 오랜기간 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게 열렸다. 아버지가 생전에 얼마나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타인에게 드러나는 부분에서는 꼼꼼히 관리해 온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나의 이 감정을 설명해낼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허영심이라기엔 부족했고 자부심이라기에는 심오한 그 만의, 그 나름대로의 처신이었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큰 카펫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의 조각상이 하나씩 있었다.

돌을 깎아 만들어 낸 소들은 금방이라도 찌를듯한 뿔을 하늘로 과시하며 목을 치켜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역동적이고 화려한 소의 모습은 예술가의 시선으로도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소의 등부분의 곡선과 뿔의 조형미, 눈부분부터 코 앞부분까지의 라인 처리.

소의 가슴부분에서부터 앞다리의 살집까지 근육을 미세하게 조각해낸 굉장한 작품이었기에 나는 조각가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졌다.

이런 작품을 두개나 보란듯이 두다니. 먼지가 쌓였음에도 아름다웠다.

정면에서 소들의 가운데를 따라 벽을타고 올려다본 곳에는금으로 수놓은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천으로 딴 깃발.

그리고 그 위에 커다랗게 아버지의 웃는 얼굴을 그려낸 유화가 걸려있다.

분명 하나하나 대단한 수준이다. 아버지의 얼굴이 온화하게 웃고있다.

세로로 긴희고 마른 얼굴. 얼굴 근육이 얇게 웃듯 깔려있고 그 위에 피부는 주름이 졌음에도 품격이 있었다.

희끗한 흰머리 두어가닥을 머리뒤로 넘기듯 웨이브를 한 가르마.

내 기억속에 있는 아버지와는 나이차가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아버지. 에스트릭스 브리깃 공작이었다.

청소를 하려고 온 것이었으나 청소를 할 만한것은 없었다.

그저 소의 등과 머리위 먼지를 닦는것이 고작이었다.

벽의 왼쪽에는 구시대적 갑옷이 늘어서있었는데 아버지가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때 입었던 물건이라던가의 잡다한 설명이금박으로 새겨진 패가 앞으로 걸려있었다.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베어나왔다.

오른쪽 벽에는 왕으로 부터 받은 훈장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끝에 왕으로 부터 하사받았다고 하는 검이 한자루 손질되어 보관되어 있었다.

유리케이스에 보관되어 있는 검은 검신에 붉게 사슴의 뿔이 그려져있었고 세밀한 파도무늬가 날부분에 새겨져있었다.

손잡이에 쓰여있는 문구는 Vivat gloria. 영광은 영원하리 라는 뜻이었다.

가문의 영광정도로 생각했던 거겠지.

그럴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6귀족에게만 특별히 하사된 물건이기도 했으니. 듣기로는 6자루의 디자인이 모두 다르다고 했던 것 같다.

나중에 케이를 만나게 되면 물어보게 되겠지만. 일단 그것도 3일후의 일이 되겠지.

이 방만큼은 다른방과 다른 구조였다. 메인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1,2,3층의 천장을 뚫어서 이어놓았고

2층과 3층에서 각각 오페라 극장의 상층좌석과도 같이 테라스 형식으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천장은 3층의 천장에서 막혀있고 그 앞에 정말 거대한 5층 구조의 샹들리에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말 그대로 연회식과 같은 모습이라고 해도 좋았다.

2층과 3층의 테라스 구조가 가능하려면 상층부는 더 넓게 뚫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볼수록 대단한 저택이었다.

도시에 있었더라면 분명 더 다양한 쪽에서 이점이 있었겠지만. 왜 이런 저택이 도시 외곽에 떨어진 것인지의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의 부지는 과거부터 밭으로 이용했기에 개척을 아버지 스스로가허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저택과 도시는 못해도 헥타르단위로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과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도시가 그곳에 있기전 왕도에서 부터 마을 몇개를 지나 저택으로 오는 시대에서는 분명히 이곳도 하나의 중심이 되었으리라.

다른 귀족의 저택이라면 부지를 일정부분 개방해 도시권 내부에 저택을 포함시킨 곳도 있었으나 그들은 아버지만큼 귀족의 명예를 중시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나는 차라리 그편이 속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노예였던 자들이 해방되고 평민으로 살아가는 지금에 와서는 아버지의 선택은 실패뿐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지도와 저택 내부 설계도를 축소시켜 조각해 놓은 테이블이 소의 조각들 사이에 있었다.

저택 지하 1층부터 3층까지의 방에대한 설명이 있었다. 나는 몰랐는데 지하에는 물류저장고와식품저장고가 따로 있었다.

주류 저장고를 기준으로 좌 우로 하나씩 꺾어돌면 문이 있는 모양이다.

이제와서 식품들은 다 썩었겠지만 치즈같은 것이 있으면 좀 건져둘까. 나는 1층의 방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입구부터 좌 우로 뻗어있고 그 가운데로 바로 이어진 큰 방이 지금 내가 있는 메인홀. 정말 메인홀이었구나.

그리고 오른쪽은 끝 쪽부터 부부의 침소와 회의실이 차례대로 있었고 그 뒤로 주방이 있었다.

그리고 왼쪽은 서재. 그리고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침소로 쓰던 개량된 방. 원래 방이 신설되었을 때의 목적은 개인실이었다.

주로 아버지가 그곳에서 업무를 보거나 편지를 쓰곤 했다. 지금은 그곳을 내가 이용한다. 흔들의자와 난로가 있는 바로 그 방이었다.

나는 흔히 거실이라고 부르는데 내 생활 대부분은 그곳에서 보냈다. 그 다음으로 목욕탕이 있었고 끝으로 서재가 있었다.

서재옆에 작게 화장실이 있는데 그곳은 지금 내가 화초를 키우는데 사용하고 있다.화장실 옆에 2층으로 올라갈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붉은 카펫이 깔린 넓은 계단이었다.

난간도 달려있었다. 1층에 대해 추가로 설명하면 메인홀을 나가서 정면으로나가면 저택 입구가 있고 문을 열면 저택의 사유지중 마당으로 이용하는 장소가 나온다.

내가 기르는 개가 한마리 있다.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는데 그를 본 모든이가대니라고 부르는 탓에 입에 붙어버려서 그의 이름은 대니로 굳어졌다.

대니가 화초를 뭉개버릴까 두려웠기에 그곳에 화초를 둘 수 없었다.

대신 커다란 전나무가 한 그루, 사과나무도 역시 한 그루. 그리고 연못이 하나. 그곳에 잉어들을 풀어 기르고 있는데 그 위에 수련을 기르고 있다.

오리를 좀 키울까 고민도 했었는데 역시 대니가 걱정이 되어 포기했다.

대니는 리트리버라는 대형견임에도 불구하고 물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목욕을 시킬때마다 나를 피곤하게 했다.

하지만 역으로 마음놓고 잉어를 기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대니에게는 평범한 대형견종의 집보다 세 배정도 큰 집을 지어 주었는데 전나무의 밑에서 자는것을 더 좋아했다.

실망감이 컸다. 그리고 마당을 크게 또 빙 둘러싼 돌담이 있고 강철 펜스가 있으며 대문이 있다.

대문부터 저택입구까지는 바닥에 대리석을 깔아두었다. 아버지의 작품이었다. 불만은 없다. 마당이 있기에 종종 바비큐를 해서 대니와 먹기도 한다.

손님으로는 케이와 헤럴드가 유일했다. 2층의 경우는 계단을 오르자마자 화장실이 배치되어있고, 그 바로 다음 나의 어릴적의 전반을 보내던 나의 방이 있다.

10대의 초반기까지를 보낸 장소이니 만큼 아이에게 맞는 물건이 있었다.

다수의 책이 어지럽게 쌓인 책장과 나의 침대와 책상. 그러나 이제와선 의미없는 물건들일 뿐이다.

옷가지들은 발견하자마자 태웠다.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작은 옷을 입을 일도 없을테다.

근 시일내에 마저 태워버리거나 해야지.방의 사용처를 고려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 옆방은 하인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장소였다. 모르고 있었다. 과거의 저택은 16명의 하인이 있었다.

그중 7명이 가정부였고 2명이 정원사였다. 3명은 접객을, 한 사람은 아버지의 비서역을 맡았다.

남은 인원이 하인으로서 저택에서 일했는데 그중 다수는 아버지가 그들의급료를 더이상 지불할수 없게 되었을때 떠나갔으나

아버지의 비서역을 맡던 제라드씨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내가 쓴 편지를 처리하고 어머니의 장례를 아버지대신 주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나의 이사를 도왔고 내가 정착함과 동시에 내 옆에서 나를 도우려고 했다.

원래는 타국에서 오래 살다가 아버지에게 고용되어 엠페레스로 넘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다.

얼마 전에는 고향에서 아들이 손자를 낳았다고 말하며 편지로 이름을 정해달라고 하기에 적당히 워커는 어떠냐고 제안했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인망이나 가치관에 감화된것이 아닐까 했지만 그저 6귀족의 밑에서 일한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진 것이었다.

부차적으로는 충성에 대한 것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결론적으로 그의 과분한 관심에 지쳤다.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저택의 부지를 매매한 돈의 일부를 섭섭치 않게끔 쥐어주고 그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말과 함께 그를 떠나보냈다.

그럼에도 그는 저택 근처 농가에 자리를 잡았다. 종종 놀러와도 괜찮겠느냐는 그의 대답에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의 나이는 이제 80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는 날마다 내게 편지를 써온다.

대개 배달이 늦어 3~4개의 편지가 동시에 오게 되는데 나는 그 편지한통의 분량만큼도 적어서 돌려주지 못했다.

내가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그의 편지는 한통한통이 장난아니게 장편이었다.

한통의 편지에서 17장의 편지지가 튀어나왔을때는 읽는데 10분이나 걸렸었다.

아무래도 현재 근황은 백수인듯 하다. 여유롭기도 하겠지. 아마 그는 내가 기억할몇되지 않는 하인이 되리라.

하인들의휴게실다음으로는 메인홀과 이어지는 테라스가 있었다.

눈을 들어 2층을 보자 설명과 합치하는 테라스가 있었는데 유리로 세공한 것을 돌 을 깎은것과 조합한 모습이 아름다웠다.

다만 어릴적 내가 실수로 부순 유리세공품이 아쉬웠는데 아버지는 유리를 부쉈다는 점 보다 어째서 품위를 지키지 못했는지를 먼저 따졌다.

유리파편은 바닥에 퍽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하지만 그 덕에 나는 다치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은 후로 아버지는 나를 테라스로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메인홀의 존재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타인에게 소개하지 않았는데

아마 자신의 완벽한 귀족으로서의 무언가에 어긋나는 것이었겠지. 성격상 그랬으리라 판단했다.

솔직히 이제까지 그덕에 편하게 살았던건 부정할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부순유리 세공품은 다시 사람을 불러 제작했지만 전에 있던 그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부서진 부분의 접합부의 경계가 육안으로 확인되는 수준의 차이였기에 나는 이 일을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작품은 거의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테라스를 빙 돌아서 다음으로 가면 세탁실이 있다.

귀족이다 뭐다 하더니 세탁기는 또 제대로 사 두었다. 본인이 산게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그 뒤로 2층은 예비실을 비롯한 방들이 늘어섰는데

주로 하인이나 손객들이 사용했다. 3개의 방이 있었고 그 뒤로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이어져 있었다.

3층은 천체 관측이 가능한 망원경이 설치된 구조실이 있었고 테라스에 이어진 라운지가 있었는데

그 옆을 끼고 이어진 것이 1~3층을 잇는 지금 이 메인 홀의 상층테라스. 그곳에는 여신을 조각한 상이 벽에 있었는데

그 여신이 든 항아리에서 물이 흐르는 구조의 분수대이다.

3층에 설치된 분수대로부터 물이 흐르고 그것이 2층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져, 벽 측부를타고 내려와 바닥에 이어지는데,

그 위를 유리막으로 덮어 바닥에 운치를 더했다. 이는 다시 상하수도관을 지나 위로 끌어올려져 3층에서 흐르는 구조였다.

꽤 흡족했다.3층의 벽에 조각된 분수의 여신상의 물이 갈라지는 2층의 수로바로 밑에 1층까지 이어진 길다란 깃발.

깃발 좌우로 흐르는 물을 젖지않게 둘러싼 유리관. 소들의 옆으로 벌어져 둥그렇게 돌아 합쳐지며 가운데로 흐르는 물.

고급스런 대저택의 홀에 어울리는 광장이라는 느낌이었다.

이러고있자니 정말 내가 브리깃의 마지막 남은 혈통이라는것을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

3층의 홀과 연결된 테라스 이후에는 언제든 가용가능한 방들과 무기나 귀중품을 저장해둔 금고가 있었다.

그러나 본 조형물에는 가용의 방들만이 나와있었다. 즉 보일러실이나, 감옥등의 방은 나와있지 않았다.

내가 실제로 지하실에 가서 본 것은 길다란 굴뚝으로 이어진 보일러실과 감옥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조형물을 슥 다시 보고 청소를 포기했다.

시간이 5시를 느긋하게 넘어가고 있었다.

창밖에 내리던 비는 어느샌가 그쳐 아직 흐린 하늘만을 축축히 적셔내고 마당에는 축 늘어진 강아지가 나무 밑에서 젖은 줄도 모르고 쉬고있었다.

보고 있노라니 무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듯한 게으름이 느껴져 나는 걸레를 빨러 화장실로 돌아갔다.

걸레를 다시 빨아 들고 나와 난로앞에 널어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포트를 다시 끓여낸다.

어제까지의. 아니 방금전까지의 어딘가 어수선한 감정이 다시 포트와 부글부글 끓어갈때 차분함을 애써 가장하며 포트만을 가만히 응시했다.

곧 서늘한 기분이 들어 벗어뒀던 가운을 다시 걸쳤고 슬리퍼속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3일뒤. 어쩔수없군. 오랜만에 플뤼네아저씨께 인사나 드리러 갈까."

나는 그러면서 끓여낸 커피를 잔에 담았다.

거실로 돌아가 흔들의자에 앉았다. 나는 이 의자를 어쩌면 이 집의 무언가보다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나는 귀족들에 대해 다시금 정리하기로 했다. 혹여나 헷갈려 실수라도 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 실책이 되기 때문이다.

가주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렸다.

6귀족이란 이 나라의 귀족의 상위중의 상위.

최상위의 6귀족을지칭하는 것이며 전쟁중 공을 세운 귀족이나 개국 공신등이 이에 들어간다.

우선 제일먼저 우리 가문인 브리깃은 초대왕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잡는것에 지대한 기여를 한 가문으로,

긍지와 품격을 상징하는 사슴의 문양을 쓰는 가문이다. 가주는 내가 되었지만 현재 실질적으로 실추된 상황이다.

그리고다음으로플뤼네 가문이다.

지혜의 상징으로 여우의 문양을 사용하는 가문으로 초대왕의 즉위 후 법을 비롯해 왕권의 강화에 공헌했고

동시에 국가의 교육척도를 다시쓴 가문으로 내가 가문을 나와 예술활동을 했을때 금전적으로 지원해주신 시그릿 플뤼네 아저씨가 가주로 계신다.

아직도 감사하고 있는 분이다.

에그니아 가문의 경우 제일 까다로운 가문이었다. 3대 국왕의 목숨을지켜내고 적의 정예부대를 격퇴해 6귀족으로 발탁되었다.

본래는 서쪽의 제국이라는 곳에서 장군으로 있던 사람이라고 했던것 같다. 그 딱딱한 군대식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문의 문양으로 독수리를 사용하는 가문이었는데 종종 아버지와 다투곤 했었다.

아직도 어릴적 밤까지 응접실에서 아버지와 대립하다 아침에 붉은 눈으로 돌아가는 아저씨를 자주 봤던것을 기억하고있다.

가주는 놀란드 에그니아로, 나이 60이넘었음에도 183cm,84kg의 거구를 자랑하는 사내였다.

아버지가 죽고난 이후 종종 편지를 써서 내게 본인의 의견을 제시했는데 강요와 다를바가 없는 굉장히 저돌적이고 직접적인 문체를 주로 쓴다.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그의 방식은 알게 모르게 정치적으로 나의 입지를 줄여나가겠다는 것을 표명하는듯 했다.

그리고 다음이 케이 겔데어스가 가주로 있는 겔데어스 가문이다.

겔데어스는 4대 국왕때 막대한 부를 국고에 바치면서 6귀족으로 들어온 무역과 상거래의 큰손인 가문이었고 국고의 30%를 지원하는 가문이다.

케이 겔데어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어린나이부터 경영을 가르쳤고 현재 가주가 된 그는 가주가 되고 나서 무역으로 전대 가주대비 25%의 이율을 추가로 냈다.

나와는 예술을 이해하고 구매해준 고객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친구로 자리매김한 남자로,

나와는 한살 차이로 동생이다. 가끔 해외의 물건을 건네주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에게 조각품을 가볍게 만들어주거나 했다.

겔데어스의 문양은 코끼리였다.

케이의 굉장한 프라이드는 언제나 그 코끼리를 빛나보이게 했었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인간적이고 어째서인지 편했다.

5번째 귀족이 바로 반 가문이다. 이 나라에서왕 다음으로 높은 남자. 그레고리 반 데어믹스경이 가주였는데 사실 반 가문은 데어믹스 라는 가문이었다.

3대국왕이 직접 반 이라는 미들 네임을 하사했으며 그것이 굳어져 반 가문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데어믹스라고 부르는 사람또한 존재했다. 3대 국왕 즉위 기간중 언제부턴가 귀족의 자리에 올랐고 왕이 하는 일들을 보좌하는것에서 올라온 가문이다.

주로 외교나 혹은 잡무랄만한것들. 왕의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사설부대를 고용형태로 지원했고 동시에 계승자의 호위를 담당한다.

문양으로는 악어를 쓴다.

사실 나는 5가문의 귀족 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6번째 귀족인 에네도르가문은 잘 알지 못한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가주라고 들었다. 이름은 안나. 안나 에네도르라는 여성에 대해 나는 아는것이 없었다.

그것이 불안했다.문양은 뱀이었다. 그리고 현 국왕 페테이어 엠페레스.

엠페리어 엠페레스 선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며 현재 8대 국왕이다.

왕가인 엠페레스의 직계손이며 성격이 불같으나 계획적이고 치밀하다는 모순적인 성격이었다.

생각을 마치고 얼굴을 기억해낸 나는 조용히 젖어든 여유로움에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불을 껐다.

창밖의 여유로운여울이 밝지않은일광과 넘어들어왔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전과 달리 여유롭지만 동시에 또한 언제 내 목이 위험할지 몰라 긴장도 되었다.

나는 결국 거실 구석에 아무렇게 던져놓은 이젤을 다시 꺼내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낮에 그린 그림은 밝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곳에 주황빛으로 노을지는 금빛 물결을 자아냈다.

밀밭에서 출렁이는 바람결에 기분이 좋았다. 그 감정을 그려내고 싶었다.

손이 옅게 떨렸다.그림에 힘을 실어 바람을 표현해냈고 실개울과 늘어진 개를 그렸다.

보이지 않는 포도나무도 그렸으며 산세베리아와 카틀레아, 아이리스와 칼라데아도 그려넣었다.

구름을 찢어내듯이 흘리고 얼어붙은 강을 녹여내듯 민들레를 피워내고 아직 흐르듯 굳은 고드름을 만져냈다.

내 그림은 어느샌가 혼잡해져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알수 없는 어지러운 풍경화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왜인지 그 그림이걸작이라고 느껴졌다.

나는 그림을 완성시키고 몸에 힘이 빠지는걸 느꼈다.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며 나는 커피를 마셨다.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과같은 편안함에 나는 왕과 귀족을 잠시 잊고 잠을 청했다. 잠시간의 휴식은 지겹게도 달콤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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