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3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브리깃의 예술가
* * *
어느새 창밖은 보랓빛으로 물들어출렁이듯 여울지는 하늘은 나를바라보지도 않은채로 그저 흐르고 있었다.
나는 다리끝이 조금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다만 커피가 들어있는 컵은 어느샌가 차갑게 식어있었고 나는 그걸 한번에 들이켰다.
아직 뻐근한 몸을일으키자 허리는 두둑 소리를 내며 으그러졌다.
시원한 기분이 채 들기도 전에 욱씬거리기 시작한 허리를 왼손으로 두드리며 나는 커피잔을 들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불이꺼진 주방은 삭막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사는 집이었기에 뭐라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공허한 것은 어쩔수 없었다.
나는 이제 9시를 가리키는 괘종시계를 바라보며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았다.
덜그덕 하는 소리가 났다. 나는 부스스한 채로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내가 뭘 해야 좋을지 몰랐다.
거실의 의자에 앉아 전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리면서 몇번이고 번호를 적어놓은 메모를 확인한다.
덜덜거리는 다이얼은 조금 익숙한 소리를 내며 연결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밝은 소리가 들려왔다.
"에드?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아, 아저씨. 오랜만입니다. 다른게 아니고 3일뒤에 소집령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아, 이제 자네가 가주였군. 아직도 자네 부친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려버려서 말이네."
"괜찮습니다. 그 정도야.. 아저씨께서는 아버지와도 가까우셨으니까요. 어쩌면 저보다 아버지를 더 잘 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그런소릴. 자네 아버지는 자네가 더 잘 알걸세."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알고있는것도. 솔직히 관심도 얼마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덤덤하게 뒤통수를 긁어내리면서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아뇨. 저는 아버지에 대해 그닥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집을 나갔던 것도 사실이고."
"그런소리 하는것 아닐세 에드먼드. 비록 그렇더라도 아버지 아닌가."
"그렇습니다.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죄송합니다."
"음. 그나저나 자네 목소리가 왜 그렇지?"
"자다가 일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습니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다면야. 어디 아픈건 아니겠지?"
"네. 늘 건강하게 지낼수 있는것도 어쩌면 아저씨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뭘 했다고.."
아저씨는 내 말을 회피하듯 쳐내셨다. 그러나 이 아저씨는 단순한 50대가 아닌 시그릿 플뤼네. 6귀족의 한사람이다.
나의 근 10년 이상의 생활비의 70%를 무상으로 지원. 충당해주신 분이시다.
다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명목으로 도와주셨지만 언제나 감사하고 있다. 아마 나라면 불가능한 일일테지.
그렇지만 저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을 잘라내는 것을 보니 그에겐 분명 정말 별것 아닌 일이겠지.
"그래서 아저씨께서는 소집 이유에 대해서 알고계신것 있으십니까?"
"분명 브리깃의 복귀라는 이유에서였지. 자네한테 뭐라하는건 아니지만 좀 의아하긴 한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굳이 세대가 바뀐것을 이유로 추방했던 브리깃을 원상복구 시킨다는건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동감이야. 일단 혹시모르니눈에 띌만한 일은 삼가도록 하게. 아직 시간도 있으니 준비를 철저히 해놓고. 여차하면 귀족의 자리를 내놓을 생각도 해 두게."
"네. 이제와서 이런 자리에 미련은 없으니까요."
"내가 해줄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미안하게 됐어. 늦었는데 그만 푹 쉬게나. 3일뒤에 보세."
"예. 실례했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가만히 서있었다.
"아저씨도 모르신다는 건가."
정말 브리깃의 부흥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로서는 그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전화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또르륵 하는 연결음이 잠시,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굵고 째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아 안녕하십니까 에그니아 공작님. 저는 에드먼드 브리깃이라고 합니다."
"안다."
그의 단답에 나는 조금 진절머리가 났다. 성의가 없음과 동시에 느껴지는 적대감은 화를 치밀어 오르게 만드는데 아주 적합했다.
"다름이 아니라 3일뒤에 있을 소집건으로 연락을 드렸는데 혹 아시는게 있으신지요. 잠시 시간을 내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브리깃의 아들이 부탁이라. 난 바쁜몸이지만 특별히 시간을 내 주지. 짧고 간략하게 용건을 말해라.
추방당한 떨거지와 나눌 시간은 없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화가 나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선 소집의 목적에 대해서입니다. 짚이시는 점 있으십니까?"
"몰라."
"복귀건이 아니었습니까? 원래의 6귀족으로."
"브리깃. 그걸 어떻게 알고있지?"
어떻게고 나발이고 내가 주인공인 상황에서 내가 모를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곧 나는생계가 편해진다는 거였으니까. 실제로는 어떨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떨며 전화를 굳이 걸었던 이유는 내가 당장 처형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기에 두려워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역시 아셨던 겁니까."
"어디까지 알고있나 너는?"
조금 다급해진 톤으로 묻는 그에게 성실히 대답하고 싶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무것도요.그저 들은 그대로를 알고있을 뿐입니다. 늦은 시각에 실례했습니다. 바쁘시다니이만 끊죠."
"기다ㄹ..!!"
통화를 끊어내고 다시 흔들의자에 앉았다. 다시 전화는 오지 않았다. 아마 그의 자존심의 문제일 것이다.
커피잔 밑에 깔린 두꺼운 책 한권이 보였다. 아까 꺼내두었던 것이다. 모건이 오면서 읽지 못했다.
이제와서는 읽고싶지 않아 그냥 그자리에 두었다. 나는 커피잔과 함께 마른 와인이 바닥에 고인 와인잔을 들었다.
주방의 싱크대로 옮겨 그것들을 물로 대충 씻어낸 뒤에 선반위에 다시 거꾸로 얹어두었다.
어차피 이 컵도 나 외엔 쓰지 않을 테니까. 그러고서 나는 복도로 나와 벽을 짚으며 걸었다.
지하실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 특유의 축축하고 침침한 어두운 공간은 불을 켜도 밝지 않은 어딘가 으슥함을 자랑했다.
주류저장고로 이어진 통로계단 구석에 곰팡이와 이끼가 핀 것을 보면 그간 정리해 닦았기에 이정도로 끝난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집은 혼자 살기에 너무 컸다. 일단 대저택이기에. 남들은 이런 집을 공동이 나눠쓰는 실정인데 그러지도 못했기에 가속된 외로움은 오롯이 나의 차지였다.
또각또각 울리는 발걸음만이 귓가에 울리고 그마저도 잠잠해질 쯤 주류저장고 뒤로 낡은 목재 문이 보였다.
목재 문은 열자마자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나 곧 먼지를 풀풀 날리더니 경첩이 부서져 떨어졌고 그 뒤에 있던 선반에 쓰러져 쾅 소리를 내며 무너져내렸다.
그 뒤에 있던 선반의 고기반죽과 짓이겨진 치즈덩이 사이로 퀴퀴한 액체가 흘렀다.
아무래도 상한 토마토같은 것이 터져난 것이라는걸 냄새로 알 수 있었다. 역겨운 냄새에 코를 막았다.
"어으..왜 토마토를 이런데에 둔거야.."
토마토와 널브러진 고기반죽의 살짝 녹아 지방에 섞여 흐르는 피는 육즙이 섞여 살짝 굳어가고 있었는데 그것이 훈제가 아닌 유일한 고기였다.
아마 패티용으로 구입한 것, 혹은 만든 것이겠지.
운이 좋았던것은 그 무너진 썩어가는 식재들 밑에 보자기가 미리 깔려있었다는 점이다.
꽤 두꺼웠으므로 무난하게 정리할수 있었으므로 주위를보고
구석에 상황좋게 있는 빗자루로 문과 선반의 자재를 함께 쓸어모아다가구석에 모아두었다.
나가면서 보일러실에 가져가 소각해 버려야지.
식량창고라는 이름답게 꽤 많은 식량이 있었는데 왜인지 토마토와 고기패티,발효되다 말아 썩어버린 우유와 치즈의 중간쯤 하는
그것의 콜라보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선반형식이 아닌 그저 쌓여있는 형태였고
포대자루에 담겨 밀가루, 보리, 진공포장된 훈제육, 치즈, 진공포장 바비큐, 건어물, 견과류등 장기보존이 가능한 식품이 주로 있었다.
굳이 왜 냄새가 나고 썩기 쉬운 식재만을 저런식으로 보관했는지는 알수 없었다.
그외에 다량의 향신료가 있었다. 후추를 보관한 통을 손가락으로 그어 한바퀴 돌려 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후추라기보다는 먼지가 묻어나와 어딘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식재는 많지는 않았으나 1인기준으로 약 몇달은 버틸 수준으로 쌓여있었다.
이정도면 아버지가 하인을 내보냈다고 하면 들어맞을 양이다.
나는 구석의 계피조각을 들었다. 이걸로 시나몬 슈가 브래드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다 나의 요리실력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어릴적 하녀중 한사람이었던 에제느씨가 아침 대용으로 시나몬 슈가 브래드에 꿀을 뿌려 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지나치게 달지 않았는가 싶기야하다만 오랜만에 다시 먹고싶어졌다.
에제느는 요리에 시나몬을 넣는것을 좋아했다. 향이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버지는 이를 반대하거나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귀족으로서의 무언가가 아닌 그저 그가 시나몬을 즐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단 음식을 자주 먹었으니 그가 당뇨로 고생했던 것은 말할것도 없었으나 비만은 아니었던 점은 놀라웠다고 하겠다.
나는 계피를 다시 향신료 통에 넣고 훈제 로스트 치킨을 하나 꺼내들었다.
그리고 슬라이스 된 체다치즈를 세 장 빼어든 후 구석에 따로 빼두었던 쓰레기를 챙겨들고 식자재저장고를 나왔다.
주류 저장고를 기준으로 꺾어돌면 자그마한 컴컴한 기계실이 있다.
이번에도 문을 부술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문을 앞으로 밀었다. 열리지 않는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녹이슬어 굳은 손잡이는 밀기에 적합하지 않다는것을 무의식적으로 이해했다.
나는 천천히 문을 우측으로 밀어냈다. 그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쥐가 두어마리 도망치듯 빠져나가려는것이 보였다.
나는 그 쥐를보고 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그리고 쥐가 갇히 문앞에 그 부서진 잔해와 썩은 음식물을 두고 다시 문을 열었다.
쥐는 굶주린것인지 혹은 본능인것인지 그 역겨운것을 기어이 주워먹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그대로 들어 보일러 가마에 던져넣고 불을 지폈다.
보일러문을 닫고 연기와 그을음이 굴뚝으로 퍼져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그 안에 쥐가 있었다는건곧 생각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이유로 쥐를 태워 죽인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것이 도망치지도 않고 기어이 붙어있었다는건 일을 수월하게 만든 것이었다.
보자기로 싸버리기도 편했으니. 벽을 가득메운 목재와 쓰레기타는 냄새에 기침을 옅게뱉어낸다.
보일러실 벽은뗄감이 많이 쌓여있었는데 말라있었기에 불이 잘 붙었다. 거실에 넣기도 편한사이즈였다.
나는 뗄감을 두어개 들고 일어섰다. 장작사이에서 녹슨 철도끼가 반짝이고 있었다.
녹슨 부분은 검은 빛을 띄듯 붉은 산화철로 되어 있었는데,
보일러 화로가마의 불에서 나오는빛을 반사해 반짝였다. 나는 보일러실을 나와서 계단을 올랐다.
치즈와 훈제 치킨이 오늘의 저녁이 될 것을 생각하면 가볍게 오를수 있었다. 거실은 조금 따뜻하게 덥혀져 있었다.
보일러 덕이겠지. 거실의 난로에 장작더미를 또 얹어 올리고 타닥이며 타고있는 불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는 주방으로가서 식기를 준비하고 불을 올렸다.
치즈는 슬라이스된 것을 한장 훈제 치킨위에 얹어 오븐에 구웠고 프라이팬이 달궈지고 난후 올리브오일을 둘러 채소나 해바라기 씨앗, 그리고 설탕을 조금 쳐서 볶아냈다.
훌륭한 볶음요리가 된 것은 말할것도 없었고 그 위에 역시 체다 치즈 슬라이스를 올렸다.
갈아올리면 안성맞춤일 뭉텅이진 치즈도 역시 있었으나 지하실로 다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다만 냉장고를 열어발사믹 식초를 꺼내 볶음에 조금 뿌려봤다.
정말 티스푼 한 번 정도. 그러고나서 방어를 꺼내 양념을 시작했다.
방어는 구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서 볕에 조금 말려 겉부분만 꾸덕하게 굳은것이었고
거기에 후추, 소금, 바질조금을 곁들여 돼지 육수와 함께 삶듯이 구워냈다. 그리고 시간맞춰 오븐을 열어 치즈가 녹은 치킨을 빼냈다.
"이정도면 괜찮아. 아니, 훌륭해."
동시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이 자가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침착하게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그 앞에는 반가운 얼굴이 서 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칼에 적당히 살집이 잡혀 편안한 얼굴.
헤럴드 네빌리온 이었다. 저번에 편지를 전해주러 왔을때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었다.
"오랜만이야 에드먼드. 얼마나 지났지?"
"대략 5일 정도 지났을 거라고 생각해. 헤럴드. 요즘은 어떻게 지내?"
"저 도시는 평화로운 편이야. 가끔 도둑들이 좀 있지만."
"가끔?"
"그래. 가끔."
"거짓말은 좋지 않아 헤럴드. 악의는 없겠지만."
"하하, 티 많이 났어?"
"지쳐보이니까말야."
그의 어깨가 조금 지쳐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기운을 내고 킁킁거리며 나의 요리의 냄새를 맡은것으로 보였다.
"일단 앉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구."
"그래. 그럼 일단은."
"자고 갈 거야?"
"어. 아무래도 늦을 것 같으니까."
"식사후 방을 준비하지."
나는 훈제 치킨의 다리를 크게 잘라 베어물었다.
치즈가 늘어나 고소했다. 적당히 잘 맞게 익어 기분이 좋았다.
헤럴드는 머뭇거리던 사람이 맞는지 궁금할 정도로 빠르게 적응해 채소볶음을 한입 가득 넣더니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발사믹?"
"어. 조금."
"미리 말해줬더라면 좋았을걸. 아니, 음식자체는 나쁘지 않아.
내가 그저 못먹을 뿐이니까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돼."
"발사믹 못먹던가?"
"엄밀히 말해서 술계열은 다 그렇지만."
"발사믹은 와인이라기보단 식초인데?"
나는 물을 한컵 떠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말없이 물을 받아 마시는 그는 한 결 편한 표정으로 돌아와 어느새 방어를 뜯어내고 있었다.
"그건 그렇긴 하다만."
나는 남은 닭의 다리를 크게 썰어 그의 접시에 올렸다. 그가 이걸 먹고 무슨 반응을 할지 궁금했던 것이다.
나의 일종의 자신작이기 때문이었다. 헤럴드는 말없이 나이프로 다리를 썰어 들어올렸다.
치즈가 주욱 늘어나 느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동시에 그가 고기를 입으로 옮겼다.
그의 입이 분주하게 움직이는것을 보고 나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헤럴드의 나이프는 다행히도 열심히 일했고곧 음식은 빠르게 동이났다.
"먹을만했나봐?"
"그러게나 말이다."
나는 그를 거실 소파에 앉혀두고 빈방을 찾았다.
그러다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1층이 편하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목이 접혀 살이 흔들렸다. 나는 끝자락의 침실문을 열쇠로 열었다.
먼지 정리를 해야했다. 곧바로 창문을 열고이불을 걷었다. 마른수건으로 침대를 닦아내고 베개를 털었다.
장롱을 열고 새 이불을 꺼냈다. 먼지가 뭉친 수건은 빨아도 더러울것 같았으므로 걸레로 쓰기로 했다.
이불을 털기에는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나는 이불을 잘 개어 침대 옆에 깔아두었고 수건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헤럴드가 나를 돌아보며 묻는다.
"에드먼드, 여기 화장실은 어디지?"
"따라와."
나는 수건을 빨아야 했기에 화장실로 그를 안내했다.
화장실 문을 열고 화초가 늘어선 광경을 본 헤럴드가 놀라는 것은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내가보낸 화초구나."
"그렇지 뭐."
그의 표정이 묘한 감동으로 차오르는것을 본 나는 괜스레 뿌듯해졌다.
"하나 더 선물해 줘야 되겠는데?"
"사양하겠어. 지금 이걸로도 충분히 벅차니까 말야."
그가 경쾌하게 웃었다. 화장실 구석의 양동이에 물을 받아 수건을 걸어두고화장실을 나왔다.
"거실에 있을게."
나는 거실에 돌아와흔들의자에 기댔다. 굴러다니던 책을 주워든다.
언제 서재에서 꺼냈는지도 모를 책이 그곳에 있었다.
책의 표지에는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듯이ELlMANE 라고 쓰여있었다.
그것 외에는 책에 적혀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나는 이것이 누군가의 일기나 자서전일 것이라 생각했다.
"엘리마네..?"
그러면서 한 페이지를 넘겼을 때 그 책의 속지가 부자연스럽게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겉표지가 뜯겨나간것을 다시 붙인 것일테다.
본드라던가 점착제를 써서 개인이 붙여놓아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났지만 사실 그것도 책을 펼쳐보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표지가 두껍기도 했고.
속의 목차를 보았을 때 나는 그 책의 진짜 제목을 알 수 있었다.
겉표지의 엘리마네라고 쓰인 것과는 관련이 없는 사뭇 낯선 제목이었다. 책의 제목은 「종 치는 자들의 기억」이었고,
내용을 보니 조금 오래된 소설이었다.
책 페이지를 넘기자 머릿말에 푸른 글씨로 이 책을 그대에게 바침 이라고 쓰여있었다.
누군가에게 선물받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 바래서 누래진 책장을 넘기자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저 종치는 자들이 말없이 선 묘지에는 빛 하나도 없는 밤을 그저 비추는 그들의 종소리, 그리고 광인들의 눈물만이 어울릴 뿐이다.」
내가 그쯤 읽었을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종에는문드러진 사자의 비명소리와 헤메는 자의 신음소리와교회의 찬가가 있을지니."
고개를 돌리자 헤럴드가소파에 앉아있었다.
"이 책 읽어본 적 있어?"
"남는게 시간이었을 때도 있었으니까."
나는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창피한건지 열등감인지 모를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듯이 생겨나 귀가 따뜻해진것을 스스로도 눈치챌수 있었다.
나는 아무말 하지 않고 속으로 초를 세고 있었다.
"오랜만에 카드나 한장 뽑아볼래?"
헤럴드가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모를 카드뭉치를 내밀었다. 금색으로 칠된 얇은 카드는 푸른색으로 시계무늬가그려져있었다.
나는 잠시 그의 눈을 주시하다가 한 장을 뽑았다. 거기엔 붉은 보석을 쥔 사내가 그려져있었는데 어두운 분위기의 카드였기에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이거. 좋은건가?"
카드를 뒤집어 헤럴드에게 건내주었다. 복잡미묘하게 입꼬리가 일그러진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쎄한 공기의 흐름을느꼈다.
그의 눈에서불안이 흘러내리는것을 안 이상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헤럴드. 그거, 안좋은거지?"
그의 고개가 기울어지고 무언의 긍정이 되돌아왔다.드디어 그는 입을 열었다.
"네 주변에서 누군가 크게 다칠것 같은데?
어차피 재미로 보는 카드니까 그냥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조심해.
이 카드는 너에게는 큰 길조가 되지만 주변인에게는 이 만한 카드가 없을 정도로 안좋은 카드니까 말야."
조금 경직된 분위기에서 말없이 그저 입술을 물고있는 그에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봐야 카드점이 미신이지, 별일 있으려구."
"그랬으면좋겠다만."
사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고 애초에 좋은일이라 부를만한 껀덕지가 없었기에 당장 내일모레 입궁건만 하더라도 처신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매정하게 뽑혀나온 카드는 불운일 뿐이었고 나는 등뒤로 식은땀이 비적이는것을 느꼈다.
헤럴드에게 카드를 돌려주고 머쓱하게 앉아있으려니 옷이살에 붙어얽히는 기분이다.
압박감이라는것 보다도 그저 혐오스러운 감정이 꾸물거리는 것을 떨어내며 나는 부엌으로 돌아갔다.
쌓여있는 접시에 굳어붙은 치즈와 고인 발사믹을 물에 씻어 닦아내기 시작했다.
훈제로 포장되었던 닭이라 그런지 기름이 범벅이었기에 미끄러운 기름을 닦는 것 말고는 무난하게 설거지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헤럴드는 소파에서 무언가를 계속 끄적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날 걱정해준다는 거겠지만 저렇게까지 해준다면 이쪽에서도 미안할 지경이다.
그릇은 일단 슥 닦아서 세제를 썼는데 닭에서 나온 기름이 미끄러워서 순간 놓칠 뻔 했다.
설거지는 저택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했던 일이라 그나마 조금 익숙했다만 저택에서의 설거지는 아니었기에 변명으로 들릴수는 있겠지만 조금은 낯설다.
처음 이곳에서설거지를 한 것이 선물받은 칠면조가 담긴 접시였는데 크기가꽤나 거대했기에 고생했었다.
사실 저택의 크기가 커서 수세미를 찾을수 없어서 새로샀다. 일주일쯤 지나서 위치를 알아냈지만.
그때쯤 되면 굳이 낡은 수세미를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접시가 고작 5개라 무난하게 해냈다.
튀는 물기를 닦아내고 손을 씻었다. 피곤함에 하품이 나왔다. 나는 아직도 노트에 무엇인가를 적어내는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바빠?"
"아, 아니."
그가 쓰고있던 종이를 찢어 구겼다. 내가 볼수 있었던건 어지럽게 쓰인 숫자들이었다. 분명 1800이라고 써있던것을 봤다.
전체적인 내용은 볼 수 없었지만. 굳이 그 내용이 무엇인지 그에게 묻고싶지는 않았다. 득이될것은 없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가 나를 걱정해서 그렇게 고민하던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그랬더라면 조금은 죄책감이 들 뻔했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색해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그에게 들러붙어 마냥 어색함을 표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른스럽게 여유를 즐기자는 생각을했다. 나는 다시 책을 들었다.
헤럴드의 눈이 슥 빛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넘기기로 했다. 시간이 11시를 향해서 가고있었다.
"먼저 씻어. 옷은 준비해줄테니까. 사이즈는 105면 되나? 집에 있는것 중에 그것보다 큰건 없어서."
"어. 그정도면 돼. 그나저나 자네는 안가나?"
"뭐가? 문제될게 있던가?"
"목욕탕이 넓잖아. 혼자선 외로울것 같아서."
"자네 알몸을 보고싶은 취미는 없는데."
헤럴드가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것으로 보아 꽤 즐거웠던것 같다.
"그래, 그럴수 있지. 아쉽게 됐어. 기껏 자랑하려고 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말야."
"그거였나? 난 또 뭐라고."
"그거라니? 나는 체중관리때문에 스트레스라고!"
"그래도 결국 탕에 같이 들어가자는 소리잖나. 자네 옷도 준비해야되고 수건이라던지 챙길게 많다고.
몸은 씻고 나와서 언제든 자랑하게 해 줄테니 씻고 나오시지."
그가말없이 복도로 향했다. 그의 앞에서서 그를 목욕탕으로안내해주고 나는 다시 돌아왔다.
곧 물소리가 들렸고나는 의자에 앉으려다 문득 휴지통 앞에 잘못 떨어진노트를 발견했다.
구겨져 있는 노트를 진지하게 숨기던 얼굴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왜인지 그 구겨진 종이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다.
필요이상으로 궁금해 나에게 득이 될 것은 없을 테지만 본성인 것인지 그저 변심일 뿐인지 나는 떨어진 노트를 주워 펴보았다.
나는 노트의 내용을 보고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 웃었다. 쓰여있던 내용은 그에게 참으로 진지한 것이었다.
[체중97kg]
달걀프라이120kcal
베이컨300
우유60
통밀빵2개500
햄버거+콜라600
치즈올린치킨1800
방어 튀긴거400
운동한거800
계2480
살 더 빼야함.
끝...
방어..구이였는데...실망을 금치못했다. 나는 종이를 다시 구겨 휴지통에 넣어두었다.
배가당겨 아플 정도로 웃어버렸기에 안면 근육이 경련한다.
분명 거울로 나의 얼굴을 본다면 일그러져 있겠지.
참아내는데도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뒤로하고 나는 접어둔 책을 꺼내들었다.
책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변하지 않았다.
「때는 교회가 몰락하고 정치가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국가의 깃발을 휘두르며 폭정을 시작하는 어리석은 지도자의 발 밑에서
저항조차 하지 못한채로 죽어가는 이들의 묘는 지키는 자 하나없이 무성한 풀들이 쌓일 뿐이었다.」
나는 이를 적잖이 놀라며 읽었다. 아버지의 이야기와 흡사하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이제와서 죽은자를 동정할 생각도 없긴 하나 사실 이제와서 보더라도 별반 달라질것도 없었다.
다만 변명을 굳이 해야 한다고 하면 아버지는 부당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아직 나는 믿는다는 것이었다.
「묘지기란 무엇보다도 정직하고 우직한 사내중 가족이 있고 기혼한 자 중에서
자식이 성인이 된 자들만을 선정해야 했으며
그들은 날마다 묘지의 경비와 명복을 빌었으나 그들의 업은 쌓여갈 뿐이고
손은 저주받은 흙과 썩은 시체의 냄새만이 흩어질 뿐이다.
그들이 오직 할 수 있는것은 자정이 지나고 망자의 안식을 기리는 종을 울리는 일 뿐이었기에
그들을 종지기라고 부르는 자 또한 적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하는 이야기였구나.
종치는 자들이라는것이 묘지기의 이야기인줄은 몰랐다.
속이 쓰렸다. 책의 묘사는 적나라했고 뼈와 피. 그리고 압사한 인간, 뜯어진 사지와 찢어져터진 살덩이에 대해 드러냈다.
어딘가 적적이 아리는 감각에 등뒤로 쎄한 소름이 돋아 나는 몸을 떨어냈다.
그래도 삽화없이 글밥만 나열된 서적은 토악감을 부른다기보다는 그저 혐오감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책장을 넘겨 이야기를 진척시키고 있을 쯤 흥얼대는 소리가 잔잔히 들렸다. 헤럴드의 콧노래소리가 퍼진다.
이 노래는 분명히 조금 오래된 곡인걸로 알고있었다.
간간히 섞이는 클래시컬한 사운드가 매력적인 노래였지만 헤럴드의 노래는 단조롭다는 이미지가 섞여서 그저 아쉬웠다.
그럼에도 곡조에 따라서 몸이 둥실 뜬다는 이미지가 섞이듯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입은 옷은 가운 한장과 속옷이 전부였고 그대로 나는 가운의 끈을 잡아 풀었다.
곧 멋지다고는 할 수 없을 배가 드러났다. 태닝한적 없이 흰 배에 복근은 없었다.
상처하나 없이 또한 얕게 말라 그저 살을 덮은 피부가 흐르지 않게 고정되어 있었다.
앞선을 따라 가슴이 있고 근육이 조금 있었으나 그저 최소한의 살이 찌지 않은 수준으로 펼쳐진 것이고 곧 살에 비집고 파고들듯 사라졌다.
등근육 같은건 볼수도 없었고 마른 다리에 이어지는 종아리에 상처가 이제는 흉터로만 남아있었다.
쓰러진 나무가 찍어버린 것이다. 근육을 찢어내고 박힌것을 뽑아내고 한동안 걷지도 않았다.
약 한달이 지나 무리해서는 안된다는 의사의 권고를 한귀로 흘려내고 비집어 무리해서 걸었던 것을 종아리는 받아내지 못했고 그대로 거꾸러져 무릎을 찢어냈다.
그것도 5년도 전의 이야기다. 나무가 왜 종아리를 찍었느냐에 대해서 물은 이는 많았다.
다만 그들중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했다. 육체적인 것보다도 정신적인 면에서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나무의 부러진 가지가 종아리를 찍어내고 그 피가 흐른 나무는 잘라내어 붓과 팔레트로 만들었다.
5년전이었다. 폭풍우가 치는 날이었고 나는 조금 이른 퇴근을 했다. 마침 그날이 어느날이었는지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집에 없었다. 이는 큰 일이었고 어머니의 부재는 내가 불안함을 느끼게하는 소재였다.
나는 그길로 뛰쳐나갔다. 어머니가 갈 법한 곳을 찾아 뛰었다. 어머니는교외변두리의 솔길을 따라 걷고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걸었다. 벼락이 친것은 거의 동시였고 나는 벼락에 쓰러진 나무에 깔렸다.
놀란 어머니가 달려왔고 나는경관들의 손에 끌려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는 그 결과물이었다.
나는 그럼에도 어머니가 그저 단순한 산책을 무사히 끝내셨음에 안주했고 잊지못할 그리고 지우지 못할 흉을 남겼다.
이제와서는 별반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여길 수준이 되었고 트라우마라고 남은것은 그저 가끔씩 종아리가 없는 통증을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피범벅이 되어 흐르듯 느껴지는 통증 어디에서도 상처는 찾을 수 없었다.
마른 손으로 흉터를 더듬다 문득 쓸어내리던 다리에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거실에 그저 내가 벗은채로 다리 종아리를 어루만질 뿐이었고
그 행위에 이제는 아무런 의미조차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문득 돋아오는 기억은 무자비하게도 머리를 어지럽히곤 한다.
마른 복부를 그저 바라보면 잔털이 나있는것을 제하면 그 무엇도 없었다. 성적으로도 어필할 거리가 없어 썩 볼게 없었지만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주방으로 가 물을 한모금 마셨다. 식도를 따라서 차가운 물의 감촉이 흘렀고 나는 그걸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배로. 장으로 흘러가는 차가운물이 어느새 속을 뒤집어 긁더라도 말이다.
속옷을 말없이 잠시 주시하다가 계단으로 향했다. 2층에 있는 나의 방. 반쯤 열어둔 문을 열고 실내화를 벗었다.
발에 한기가 오르기 전에 들어섰다.그 방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열려있는 캐리어 백.
그리고 그 뒤에 원래는 아동복을 넣었을 옷장이 있다. 아동복이라면 이사오고 바로 모조리 빼서 태워버렸지만 아직 그 방의 주인이 어린사람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수 있을 배치다.
침대위 곰인형을 발견했다.
문득 들어서 곰인형의 복부를 누른다. 내장된 스피커에서녹음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직거리는 잡음이 섞인 소리는 희미하게 어린시절의 나의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이제는 무슨소리인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지직이는 소리가 너무 커서일까. 곰인형을 다시 침대위에 올려두고 옷장을 열었다.
내 옷들이 들어있다. 저택에 오기 전부터 입던 옷들이라 헤진것이나 낡은것이 있다.
그렇지만 입는데엔 아무 지장이 없었기에 가지고 온 것이다. 나는 내 옷을 두어벌 꺼냈다.
어차피 잠옷이었기에 무리없을 널널한 사이즈. 가운은 오늘 하루 종일 입었기 때문에 더 입고 있기가 싫었다.
물이튀고 비에 젖은 가운을 굳이 더 입고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축축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넓은 잠옷을 두 벌 꺼내들고 수건도 장사이즈의 물건을 두 장 챙겼다.
속옷도 두장 챙겨들고 다시 방을 나왔다. 대리석 바닥에 깔아놓은 유아놀이용 매트가 꾸적하게 발바닥을 쥐었다 놓으며 소리를 낸다.
곧이어 다시 저택 바닥을 밟을 수 있었다. 차갑게 식은 돌바닥을 피하듯 슬리퍼로 발을 옮긴다.
1층의 거실이나 안방을 비롯한 대다수의 방들은 목재로 마모된 바닥을 주로 썼다.
그러나 2층은 심미적 요소에서인지 대리석을 그대로 사용한 방이 꽤 있었다.
꺼내든 옷은 흔히 가오리를 연상케하는 넓고 얇은 천 재질의 물건이었다.
가운이라면 가운일 그 옷은 잠옷 대용으로 목부분 위까지단추를 채우게 되어있다. 다시 계단을 내려가 욕실문앞에서서 그를 불렀다.
"오래걸리냐?"
"아니. 곧 나갈것같은데."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안에 있는 탈의실에서 바구니를 둘 꺼내서 그와 내가 사용할 옷가지를 나누어 담아두었다.
그리고 벗어놓은 옷은 들고 나와 벗어둔 가운과 함께 들고 2층으로 향했다. 그의 옷은 조금 축축하고 때가 타 있었다.
나처럼 실내에서 편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현장직을 선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이라는 직종에 스스로 후회는 없는 모양이다. 늘 그랬던 것만도 아니었던 것 같기야 하지만 이제와선 의미없는 일이리라.
그의 바지주머니에서 카드뭉치와 지갑을 꺼냈다. 지갑이나 카드를 일단 챙겨들고 계단을 올랐다.
슬리퍼가 미끄러웠다. 대리석 바닥은어쩔수 없다지만 슬리퍼를 벗기에는 차가운 한기가 싫었다.
익숙한 한기는 다리를 타고 올라와 종아리를 건드리듯이 날카롭게 쑤셔박힌다. 그 꺼림칙함은 더는 싫었다.
2층은 왕복하기에 피곤할 높이였다. 아까 올라오면서 한번에 할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씁쓸한 기분을 삼켰다.
테라스를 지나 계속 걸어가며 세탁실을 찾았다. 세탁실의 낡은 나무문을 열고 들어섰다.
휘청이는 문은 곧 멈췄다. 세탁기 세 대가 늘어선 일반 가정집에서는 볼 수 없을 광경.
지금은 쓰는것도 한 대 뿐이지만 원래는 꽤 많은 양의 세탁물을 커버해야했을 이 방은 세제또한 쌓일만큼 있었다.
섬유유연제는물론 두말할것 없었으며 선반에 놓인 섬유탈취제 및 방향제등은 거리에서 볼 법한 웬만한 세탁소라고해도 무난할 것 같았다.
아무 세탁기나 대충 문짝들고세제를 넣었다. 가운이며 옷가지를 넣고 문을 닫았다.
마르려면 대략 3일인가. 경찰 제복이라던가 하는 옷이었다면못하겠지만집에서 편히 챙겨입을 옷이었기에 편하게 세탁기에 넣었다.
뭐,소집이 끝나고 가져다 주기로 할까. 너털웃음을 지으며 세탁기를 조작했다.
60분이라고 타이머를 띄운 세탁기를 보고 다시방을 나왔다.소음같은건 거의 없다.
방에 설치된 방음재가 꽤 성능이 좋았다. 설비과정중에 벽 사이에 뭔가를 넣었다던가 하는 문제였다.
일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니 어느새 씻고나와 옷을 입은 헤럴드가 서 있었다.
"자. 이거."
그에게 카드뭉치를 내밀었다. 아크릴케이스 안에 카드가 반짝였다. 빛이 반사되어 빛나는 카드는 아름다웠다.
"어..옷은?"
"빨았어. 자. 이것도 받어"
지갑을 건네자 받으면서 말을 이어가는 그의 표정은 읽기쉬웠다.
그저 가벼운 감사. 그리고 편안함이었다.
그에게로서는 오랜기간 입었을 조금 때가진 그 옷은 분명 빨아줄 사람도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불철주야 뛰어다니는것이 또 그의 일이기도 했으니까.
"이거 고마운데. 뭐라도 해줘야되는거 아닌가?"
나는 웃어보이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느껴져서 이제서야 그를 편안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감정이 들었다.
원래부터 불편한건 아니었지만서도 어딘가의 한줌의 애매함이 있던 공간을 메운 그 편안함이 나는 썩 좋았다고 말할수 있었다.
덩달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제서야 그를 웃게 만들수 있었다는 일종의 묘한 쾌감이 있었다.
"씻고올테니까 거실에서 앉아서 좀 쉬고있어."
"아 혹시 괜찮으면 3층에 가 있어도 될까?"
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곧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그의 심경을 잘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을대로 쉬고있어. 어차피 꽤 걸릴테니까. 그럼 잠시만."
나는 거실에서 열쇠꾸러미를 찾아 들고왔다. 그걸 그에게 건내면서 말했다. 손에 조금 녹슨 철 냄새가 돋아왔다.
"자. 가서 열면 돼. 거기 열쇠보면 어디문인지 나와있으니까. 아, 냄새는 다 빼고와."
"담배 안필거거든."
"정말?"
"지금은."
"그럼지금은 별 보러 가는거네?"
"아무래도 그렇지. 취미니까."
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보이며 웃었다.
나는저택의 모든 방에는귀중품이 없을 뿐더러 훔쳐갈수 있는 물건도 아니며 또 그가 그럴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두말없이 열쇠를 건네주었다.
애초에 경찰이 아닌가. 그의 집도 가족도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그와 나는 사이가 좋았다.
나는 씩 웃어보인후에 탈의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바구니에 담겨있는 옷가지를 흘겨보고는 속옷을 벗어 넣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와는 확연히 다르게도. 당연하지만 모자이크는 없었다.
감흥이랄것도 없이 익숙해져서인지 모르겠다. 멋대로 흐트러진 체모만 있었을 뿐이다.
나는 목욕탕의 문을 열었다. 탕이 드러났다. 도시의 목욕탕만큼은 아니지만 분명히 일반적인 집의 그것과는 다르다.
처음 청소하려고 했을때는 죽어나는줄 알았을 정도였다. 나는 눈앞에 드리운 탕이 모두 7가지라는 것을 그때 이해했다.
온탕, 냉탕, 열탕, 그리고 차를 우려낼수있는 특별탕 4칸. 보일러실 바로 위에 있을 사우나 1칸.
어찌보던 이 목욕탕을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게 되어있다.
나는 그 값을 그림을 판 돈과 더불어 토지값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다른 토지의 임대료에 비해 헐값에 가까운 금액인지 몰라도 헥타르단위의 토지는 충분히 이 욕실을 관리할수 있었다.
따뜻한 욕실에 발끝을 적셨다.
조금 지릿한듯 발가락 끝이 놀라온다.
물속으로 발을 밀어넣는다. 물 표면이 천천히 눌러오듯 진득하니 온기가 오른다.
조금 편하게 풀린 양 다리를 탕안으로 넣으며 몸을 기대어 앉는다.
물은 찰랑거릴뿐 철벅 소리 한번없이 부드럽게 퍼져나가며 일렁이다가 탕 외벽에 부딫혀 갈라져 사라진다.
"후우우..."
가슴언저리에서 물이 흔들린다. 눈을 가볍게 감고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잠수한다.
코에서 기포가 부글대며 탕위로 흩어진다. 얼굴이 뜨겁다.
억지로 숨을참고 고개를 아래로 더 들이밀었다.
몸 전체가 탕 속에서 유유히 흔들리고 보골대는 기포터지는 소리만이 목욕탕을 메운다.
천천히 숨이 가빠오는 자신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린다.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에서 물줄기가 쏟아져내리고 떨어지는 물은 탕을 적시며 주르륵 소리를 낸다.
내 안에 응어리져 뭉쳐있던 불안감이 조금 씻겨나간건지 아니면 그렇게 착각한건지 몸이 조금 가벼웠다.
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쉰다. 내쉬는 공기가 무겁게 퍼진다.
폐가 온기로 젖어가는 감정에 말없이 다리를 편다.
다시 적막이 찾아온 욕실엔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똑 똑 소리를 내며 탕안으로 떨어지고 그저 정적을 느끼듯이 금발의 청년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잠시 말이없던 청년은 그렇게 앉아있다가 돌연 눈을 떴다.
느릿하게 팔을 뻗어 자신의 머리뒤로 얹는다.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목을타고 가슴으로 내려오는 손은 어느샌가 복부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을 겨우 제어하고있었다.
다시 생각을 거듭한다. 청년은 겨우 다시 '나'로 돌아왔고기억을 더듬어내기 시작한다.
크지는 않지만. 길고 가느다란 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손이다.
언제나 무뚝뚝하던 아버지는 목욕탕에서역시 마찬가지였다. 청결을 유지하라는 말이었다.
그저 말없이 어린 나의 등에 몇번이고 물을 부었었다. 뜨거운 물에 몇번이고 놀라도 끝나지 않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이머리속에는 남아있었음에도 가슴으로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조금 더워졌고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렀다.
볼에 흐르는 뜨거운 것이 물방울인지 땀방울인지 혹은 잘못떨어진 눈물인지 모르게 나는 다시 얼굴에 물을 뿌린다.
멈춰있던것은 자신 혼자라는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슬슬 팔이 무거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머리가 제일 무거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녹아버릴것 같았다.
"너무 오래있었어. 분명히."
진득하게 들러붙으려 내 다리를 감아오는 물을 애써 지쳐 무거워진 몸으로 들어내며 탕을 나왔다.
샤워기가 달린 좌석이 늘어선 자리. 가만히 앉아 물을 틀었다.
샤워기 끝에서 뿜어져나온 차가운 물은 얼굴로 직격했지만놀란 가슴은 멋대로 뛰어도 지친 몸은 움직일 생각도 않는다.
쓸어내린 등에서 욱씬거림이 느껴진다. 탕에 오래있어 익어버린건가.
말없이 찬 물을 머리에 끼얹는다. 식어버린 가슴에 한없이 퍼붓는다.
머리가 식어야했다. 복잡한 머리가 진정해야했다. 쏟아지는 물방울들은잊어버린 생각들이 되어 바닥에 흩어진다.
"젠장."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로 입을 헹궈내고 나는 머리를 감았다. 샴푸를 짜내서 머리에 발랐다.
기어이 헝클어 긁어내듯이 모든것을 찢어버릴 심산으로 머리를 흩었다. 상처가 났을것이다. 피가 베어나왔으니까.
물로 씻어내던 머리는 상처가 남아 따끔거렸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때뿐이었다.
빠진 머리카락이 바닥에 붙어 널려있는것을 물을 뿌려 흘리며 애써 진정하려들던 나는 곧 좌우로 크게 도리질치며눈을 감았다.
그리고서는 불을 끄고 욕실을 나왔다.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머리는 특히 더 잘 털어낸다.
몸에 묻은 물기는 흐르지도 않고 붙어 촉촉하게 닦였다. 넓은 옷을 새로 입고 남은 소매를 휘적이며 돌았다.
썩 만족스러워져 탈의실을 나왔다.분명히 헤럴드는 3층에 있을것이다. 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체관측실. 그러니까 연구실에는 그가 누워 별을 보고있었다. 아마 한참을 이곳에서 뒹굴었으리라.
"어, 왔어?"
그가 누운채로 고개만 들고 말했다. 어디서 꺼낸건지 돗자리도 준비했다.
이쪽을 보고 잠시 웃더니 일어나서 돗자리를 정리하고는 자신옆에 앉으라며 빈자리를 툭툭 치는 그에게 눈웃음을 지어 사인을 보내고 그의 옆으로 갔다.
"별은 잘 보이더나?"
"어. 육안으로도 보이는게 있고 망원경으로 보이는것도 있고. 별보는게 또 그런 재미가 있는거지."
"아주 소설을 쓰세요"
잠시 마주보던 우리는 말없이 숨도 못쉴 정도로 크게 웃었다. 한참을 웃다가 그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 너는 이런 좋은 시설이 있는데 왜 별도 한번 안보는건데?"
"봐서 뭐하냐. 낼모레 목이나 붙어있음 다행이지."
"지랄을 하세요"
다시 내 등판을 후려치며 웃는 그를 보고 나도 웃음이 나왔다.
"새끼 진짜"
잠시 멍하니 있던 그가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왜인지 그의 아직은 젖은 머리가 조금촉촉한것이 찬 밤공기에 빛나보인다. 달인지 별인지 싶은것들의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너 이 망원경 안쓸거면 나나줘라."
"가져가려면 가져가든가. 근데, 어떻게 가져가게?"
못해도 2M 40이상의 높이인 거대한 기구였다. 무게도 필시 그에 필적하게 중량이겠지.
"모르겠다."
"나도 주려면 주겠는데 말이다. 이거 바닥에 고정된거다. 박혀있어."
"그러냐."
사실은 박혔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내 알 바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되는대로 뱉은 말은 어떻게든 또 이어졌다.
"별이라는게 말이지. 멀리서보면 참 예쁜데, 반짝반짝하니 예쁜데 말이야, 꼭 가까이서 보면 그냥 둥그런것들이 구멍 숭숭난 그런것들이란 말이지."
"그렇지. 아무래도."
"그런데도 내가 별을 보는 이유는 그거야."
그가 날 돌아보면서 손가락을 튕겼다. 검지로 날 가리키며 그대로 총을쏘는 모션을 취하고서는 다시 돌아선다. 그러고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거기 있는게 아니거든."
"그건 또 무슨소리야?"
"맨날 붓이나 붙들고 있으니 모를법도 하지. 그러니까말야. 나는 저 별을 모르잖아. 멀리 떨어져있으니까.
그러니까 호기심이 생기는거고 그러면서 애정이 생기는거고. 결국엔 뭐, 정드는거지.
한번 그러고 나면 신경쓰여서 또 찾아보고. 내가 저 별의 입장이 아니고, 또 저 별이 손에 잡히는 구슬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런거지. 이 낭만을 니가 알아?"
"아니, 나는 그냥 모르고 살련다."
"그래. 이 별같은 새끼야."
"야, 그거 무슨뜻이야 너?"
그가 털털하게 웃으며 내 뒤통수를 툭 쳤다.
"야, 담배나 피우러가자."
그를 따라 어느새 정문밖으로 나왔다.
별하늘이 빛나는 것을 가만히 보다 주변을 보니 개집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리트리버와 아직 작고 푸른 사과가 있는 나무.
그리고 밀밭과 포도밭. 드넓게 펼쳐져있는 초원과도 같은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헤럴드가 카드뭉치가 든 아크릴 케이스 뒷면에서 시가를 두대 뽑아들었다.
"받아."
"안피워."
"줄때 받아. 오늘말고는 날도 없어."
시가를 받아들자 그가 라이터로 불을당겼다.
잿빛 연기가 스멀대며 피어오르는 시가를 입에 가져다 댔다.
오랜만에 하려니까 기침이 나왔다. 콜록이다 다시 가볍게 물었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은 뭐야?"
"꽤 길어질거야. 시가는 아직 많으니까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고."
"폐암으로 죽이려고 이 새끼가."
"당장 낼모레 죽게 생긴놈이 거기까지 걱정을해?"
"하긴."
내뿜은 연기가 고였다 퍼져간다.밤바람이 스쳤다.
남자 둘이서 그저 물고있던 담배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오랜만에 태운 담배가 속을 휘젓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