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브리깃의 예술가
* * *
먼저 연기를 뱉어낸것은 헤럴드였다. 말없이 짙은 연기를 그저 가늘게 쉬었다. 잠시간의 침묵을 한숨으로 찢어내며 그가 말을 건넨다.
"이제 하루 지났으니 이틀뒤지?"
"어."
"너. 어쩔 생각이냐."
"뭐가."
"네 목줄. 제대로 부지할수 있냐는 소리야."
말없이 빨아들인 연기가 입에 고여 메케한 소음을 이루어낸다. 목을 찌른다. 다시 콜록이며 쏟아내기는 싫었기에 그저 밤바람에 섞듯 뱉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난 뭐가 하고싶은걸까."
"지금에 와서 고민한대도 바뀌는건 없어."
"선택을 강요당한다는거. 꽤 메스껍네."
"선택이 문제가 아니야. 생존이 문제지."
"생존, 그래. 생존문제지."
헤럴드의 입이 벌어져 그곳에서 깊은 한숨이 비집고나왔다. 연기가 둥글게 비어져나온 사이에 뜨거운 우울이 서려있었다.
"너 지금 정상 아니잖아. 다 보이는데 뭘 숨기려고 드는거야. 모를 사이 아니잖아."
"벌써 걸렸나. 아니, 걸릴수밖에 없지 이건."
"나도 차라리 모르는게 편하겠지 싶다."
"나는 뭐가 두려운 걸까. 추방, 실각, 죽음, 수감, 어느것도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것도 각오하지 못한거지. 더 깊이 말하면 너는 그것들보다도 너 자신이 두려운거야. 너도 모르는 너 자신이."
"그럴리가."
쓰게 뱉어내는 연기는 이제 차게 얼어붙어 날카롭게 쏟아붙는다. 파고들어가는듯이 가슴을 후벼판다.
기억을 쏟아내고 감정을 찢어낸다. 나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다.
"그럴리가? 아니. 너는 에드먼드로 끝나게 되어있다.
네가 6귀족의 명예와 긍지높은 브리깃이든 그냥 멍청한 화가든 너는 결국 에드먼드 브리깃으로 끝난다. 너의 아버지도 그랬듯이."
불쾌감이 드러나 일그러진 얼굴에 순간적인 망설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나도 모르게 침묵할수 밖에 없었다.
사실은 맞는말이라는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기 때문일것이다. 헤럴드는 말을 이어간다.
"너는 모든게 두려운거야.소집령때문만은 아닐거고.
아마 저택으로 이사하고 난 이래로 줄곧 그랬을 거다.
넌 그런 놈이니까. 분명 저택이고 귀족이니 하는것보다 작은방에서 그림이나 그릴 그런 놈이니까.
갑자기 수중에 이런게 들어온들 편할리가."
"닥쳐."
나의 말을 무시해 넘긴 그가 입에서 시가를 떼고 계속 말을 잇는다. 그의 눈동자가 어느샌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그저 넌 지금 아직 준비가 안되어있어. 귀족으로서도, 에드먼드로서도. 어느쪽이던 방향을 정해."
나는 당황인지 울분인지 모를 감정에 욱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시가를 물고있던 상황에 그런걸 몸이 받쳐줄리 없었다.
곧 물고있던 담배는 떨어지고 나는 쿨럭거리며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메케해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헤럴드가 나를 보고 등을 두드려주며 팔 한쪽을 받쳐주었으나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순간적으로 휘청여 결국 주저앉아버렸다.
나는 금방 담배를 다시 주워들고 바닥의 잔디에 슬쩍 붙은 불씨를 밟아껐다. 그러고도 한참을 쿨럭이다 거센숨을 몰아쉬며 일어서 나는 다시 시가를 입에 물고 말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바뀌는건 없어."
잠시 끄덕이던 그가 다시 나에게서 별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묻는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야?"
"처신해야지. 그에게. 아니 그들에게서 살아남으려면말야. 적이 한둘이 아니니까."
"어떻게 처신할지를 묻는거야.구체적으로. 막연한 계획은 빠른 실패를 불러오게 되어있지."
"너한테서 들을줄은 몰랐는데, 그거 재밌었어."
그가 물던 시가를 손으로 옮기고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잇몸사이에 머금던 연기를 한번에 뱉는다. 뜨거운 연기에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떨지만 그마저도 세게 물어 피가 샐 정도로 그는 당황했다.
나는 그의 이런 반응의 원인에 대해 알고 있었고 또 그 역시 아마 일생동안잊지 못할것이다.
어떻게보면 그는 왕에게 버림받은 또 한명의 피해자였다. 다만 그는 잊혀졌고 나는 그럴수 없었다.
어느샌가 온화하던 그의 눈이 매서워진것을 느낀 나는 순간 움츠러든 등을 다시 폈다.
그러나 곧 그 눈에 어린 화가 나를 향한것이 아니라는것 또한 이해했다. 나는 바로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
"어...그래.."
잠시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고 밤바람이 볼을 스치는 감각과 아무일 없듯 그저 그자리에서 어리듯 빛나는별.
그리고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던 일렁이는 밀밭만이 있었고 이따금 풀벌레 소리가 싸르르 하며 들려왔다.
그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겨우 진정한 두 남자가 그저 말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슬슬 쌀쌀하네."
"그러게나 말이다."
"들어가기 전에 몇마디만 더 하자면.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뭘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감도 안잡혀."
"그렇겠지."
"그래도 하고싶은건 생긴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그러냐..?"
어느순간 밤하늘의 모든 별들이 연기로 덮였다는 느낌이 들어갈쯤.
연기는 더이상 퍼지지 않고 흐려져 그저 한숨뿐인 시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남은것 없게 되어버렸다.
남은게 없게 비어버린건 시가뿐은 아니었다. 나도, 옆에 선 헤럴드역시 텅 비어 있는 빈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냥 불안에떨면서 가진것하나 없는 빈손을 펴지 못하고 손에 쥔 자신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을 정도의 위인들일 뿐. 스스로 나아지는건 없었다.
"뭔가 더 하고싶은 말이라던가 없어?"
"글쎄 별말 없는것 같다. 뭔가..막혀버렸어."
그가 짧아진 시가를 바닥에 지져끄고는 새로운 시가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렇다고 들어갈건 아니잖아? 지금 들어가기엔.."
"어. 너무 이르지. 이제와선 왜 나왔는지도 모르겠지만서도."
나는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시가 끝부분부터 타들어가는것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주변을 다시 둘러본다.
자고있는개와 바람에 여유롭게 흔들리는 밀밭. 옆에서 생각에 잠긴 친구.
구름에 살포시 가려진 달. 어느새 조금 흐려진 별. 이제 조금 무슨 말을 하고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내가 지금의 이 감정. 그리고 생각을 완벽하게 언어로 구사해낼수 없을것 같았기 때문이라면 얼추 맞을 것이다.
"헤럴드."
"왜?"
"헤럴드 네빌리온."
"무슨일인데."
"결정했다. 가서 뭐라고 할지. 또 어떻게 처신할지."
"어떻게 할 건데?"
"6귀족이고 뭐고 안한다고 할 생각이야. 그냥. 이제 질려버린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네."
"그게 대답이라니. 어떻게 이렇게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는지 신기할 수준이네."
"언제부터 네가 내 행동도 예상하는 사람이 된거지? 조금 당황스러운데."
"그렇지만 그게 사실인데 별수없지 않겠어?"
나는 실없이 웃으며 담배를 지져껐다. 메케한 끄트머리에서 쓴연기맛만이 피어나왔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에게 새로운 시가를 또 한 개 건넸다.
"아니, 난 이쯤하려고. 아껴둬."
"오늘 아니면 날도 없다니까."
"그럼 내가 너한테 준 첫 시가라 생각하고 니가 해라. 오늘 아니면 날도 없을 테니까."
"그래. 그럼 이만 들어가는거냐?"
나는 깍지를 낀 손을풀어 왼손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오른손으로 머릴 쓸어넘기며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어 튕겨보이며 말했다.
"아니. 아직 묻고싶은게 있어서. 남은 시가는 많고 밤은 길다고 누가 그러더라고."
"누가 그런건지 참."
"그러게. 참 못난 사람이지 뭐냐. 그건 각설하고, 물어보겠는데, 이제 난 그렇다 치고. 넌 어쩔거냐?
분명 2일뒤에 궁으로 불리는게 나만은 아닐텐데?"
"그건 무슨 소리지?"
살짝 돌린 시선을 놓치지 않았던건 무엇때문이었을지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쏘아붙인다던지 혹은 추궁한다는 느낌으로 그에게 조금 과하다 싶게 말을 치켜붙였다.
"6귀족에 왕. 그리고 기자가 다수. 기록관역시 있을거고.
파티에 동원될각종 인사및 인원을 생각하면 경비에 치중될 병력은 현재 주둔중인 배치인원으로는 부족할게 뻔한데 당연히 경찰로 때우겠지."
"이런정도까지 머리가 돌아간단 말야?"
"나를 어디까지 무시하던거야."
그가 뒷목을 긁적이며 말했다.
"너라면 어떨것같냐."
"뭘."
"동생이. 하나뿐인 동생이 죽었어.
아직도 미쳐버리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라고. 나는.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이렇게 여전히 경찰이야.
범인은 잡혀가지도 않았고, 죽지도, 벌을 받지도, 직장에서 잘리지도 않았어.
그리고 내 눈앞에 그때의 그 주동자가 나타난다면. 과연어떻게 하는게 좋은걸까.
그 연회는 아마... 응... 내겐 그런 의미가 될거야."
"그게 네 대답이라면 말리지는 않을게. 미리 말해둘게. 그간 고마웠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테고."
"그래. 나도 뭐 예상못한건 아니었으니까."
"네 말대로 우린 아마 변한게 없는것 같다. 아마 그때부터. 춥다. 슬슬 들어가자."
"그래."
밤이 늦었고 하늘은 어두웠다. 별은 떠있었지만 여전히. 아니, 어느 밤보다도 길고 어두웠다.
내가 잠자리에 들었던 것은 밤새 들려오던 울음소리와 풀벌레소리가 천천히 잦아들던 새벽이었다.
긴 밤동안 나는 꿈도 꾸지 않고 쓰러져 그저 잠을 잤고 왜인지 무거운 몸은 일으키기 어려웠다.
눈을 뜬것은 11시를 지나 해가 이미 중천을 지났을 쯤이었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내 머리맡에 놓인 종이쪽지 한장과 저택의 열쇠 꾸러미와 함께 제일 먼저 느낀건 헤럴드의 부재였다.
침실문이 열린것을 발견하고 침실로 가 봤으나 거기 있던것은 깨끗하게 개여있는 침구류와 빌려준 잠옷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쪽지를 펼쳤다.
「잘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자는꼴이 어떻게 그렇게 부스스한지 좀 한심스러워서 웃음이 나더라.
앞으로 두어시간은 더 잘것 같아서 인사없이 먼저 간다. 오늘 일이 조금 많아서 말이지.
네가 빨아버린 옷은 그냥 너 가져. 기분이다.
대신 굴러다니는 옷 한벌 가져간다.
헤럴드.」
나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맞다. 그는 일이 있을 테니까.
나는 알딸딸한 머리를 진정시키며 주방으로 갔다. 물 한잔을 컵에 받았다.
컵에서 찰랑이는 물을 입으로 옮겼다. 유리컵에 입술자국이 남았다.
목부분부터배로 점차 시원해지는 기분이 오싹해 잠이 달아나기에 충분했다.
집에 다시 혼자뿐이라는 적적함에 나는 계단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 외출할 목적으로 티셔츠, 그리고 검은바지를 꺼냈다.
어차피 무료한 일상의 반복이었으므로 도시에 나가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주방의 토스터에 식빵 두장을 넣고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 지기까지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았다.
외출하는 날 까지 게으를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렇게 가식적인 인간이다.
커피는 한번에 입으로 들이부어 입천장을 다 벗긴 후 빵 두장을 입에 물고 나는옷을 갈아입고 저택을 나왔다.
구석에 있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못해도 한시간 이상은 차를 타야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밀밭사이로 난 길을 가로지르며 나는 간만에 잡은 운전대의 어색함을 한껏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채로 운전을 했다. 이런 기분은 그림을 그릴때 외에는 잘 느낄수 없는 것이었기에 꽤 즐거웠다.
휘날리는 바람이 밖으로 스쳐가는것은 어떻게보면 또 익숙했지만 그보다도 도시로 간다는 자체로 또 흥미유발이라는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고 생각하니 또 기분은 좋았다.
내가 원래 타던 차는 중고로 산 낡은승용차였는데 저택에 주차된 아버지의 차는 못해도 내가 타던것의 30배는 넘는 값의 차였다.
차에대해 관심이 없는 나라도 확실히 승차감이 다르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속도나 가속면에서도 차이가 확연했다.
나는 그래서인지 더 사고를 낼것같아 긴장했다. 결국 나는 차가 가진 성능의 100%를,아니 60%도 채 끌어내지 못한채로 오랜시간을 타고 달렸다.
한참을 달려 시야에 들어온 도시의 입구를 잇는 다리를 잠시 바라보면 이나라의 과거양상을 조금 알것도 같았다.
큰 강과 또 긴 교량이 보여주는 일종의 미에서 나는 또 한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으나 곧 다리를 건너며 잊어버렸다.
무작정 집을 떠나 시내로 나와 적적함을 달래려고 했지만 막상 나와보면 할것을 만들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나 대책없는 사람이었다. 이제부터 뭘 할지 정하는것도 시간이 걸렸다.
나는 결국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었다.
잠시의 수화음이 이어지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흘렀다.
"여보세요, 널스페이지모건입니다."
"모건. 나 에드먼드인데, 지금 시간 괜찮을까?"
"누구부탁인데요. 없던 시간도 만들어드리지요.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거지?"
"중앙스트리트 3번지 베어핏 카페에서 기다릴테니까 느긋하게 30분 내로 와."
"베어핏 카페? 거기라면.."
"왜 신문에 그림 싣는다는 명목으로 종종 만나던 바 위층이야. 익숙하잖아?"
"하긴. 그렇군. 묻고싶은게 많으니까 단단히 각오해둬."
"우연이네. 이쪽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지. 서로 피곤해지겠어."
"기자한테서 정보를 빼낸다니 배짱이 좋군. 좋아. 기다리고 있으라고. 정보료는 비싸게 받을테니까 지갑은 두둑히 채워넣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베어핏 카페의 문을 열었다. 짤그랑하는 종소리가 얕게 퍼졌다.
나의 입점을 확인한 바리스타가 커피를 한손으로 따르며 인사를 건넨다.
자주왔어서꽤 친하다고 자부할수 있다. 요즘은 좀 뜸했지만.
"오랜만에 왔네 에드먼드? 바쁜가봐?"
"네,누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뭘로줄까?"
"아무거나 추천대로 주세요. 너무 안달달한걸로."
그렇게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커피를 로스팅하는 바리스타는
원했던 원치 않았던간에 자주 나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된 사람이었고
또한 모건과 나를 동시에 이어주는 일종의 발판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창밖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불렀다.
"이거. 커피."
"아..빠르네요."
얼굴에 옅은 웃음이 있는걸 보고는 조금 불안한 기분은들었으나 곧바로 한모금 넘겼다.
말그대로 쓰고 달달한 맛이었다. 부드럽지않은 중간이 없는 아주 쓰고 아주 달아 마치 혀가 마비되어 버릴 것 같은 그런맛이 났다.
한모금을 겨우 넘기고 뜨거운 혀를 진정시키며 그녀를 쏘아보자 큭큭대고 웃으며 나를바라본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있었다.
"어머, 마음에 안들었니? 자신작이었는데."
"장사 접으셔야되겠는데."
"아냐, 성공했는걸?"
"아오 진짜"
"농담이고. 자. 여기, 제대로 끓인거."
"이번엔 진짜 먹을수 있게 끓인거 맞죠? 나 이것도 또 그러면돈 안낼거야."
"먹을수 있다니까? 아마도."
기분이 묘했다. 불안하긴했지만 도리가 없었으므로 그냥 마셨다.
일반적인 아이스 커피였다.
시원하고 좋았다.
"봐, 괜찮지?"
"진작에 이랬으면 좋았잖아요."
"재미가 없잖니. 얘는 센스가없어."
"재미로 장사해요?"
"엉. 이 건물 내꺼거든. 세만 떼도 먹고살수 있어."
정말 볼수록 콱 한대 후려주고싶다만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스 커피에 한해서는 정말 괜찮았기 때문에 집에서 대충 내린 커피보다 만족스러웠다.
물론 아무데서나 사먹는 믹스커피나 자판커피보다도 말이다.
"저기 네 친구온다. 자 이거, 저친구 가져다줘."
"이거 방금 그 지뢰커피 아니에요?"
"맞아."
"으으 사람이 어떻게.."
"제목은 모건 핫 brand.2"
"네이밍 센스하고는."
그러면서도 나는 잔을 받아들고 그에게 갔다.
"어. 이제왔어?"
"아, 먼저 와있었군. 하기사 그게 맞겠지만."
"어. 일단 이거부터 받으라고. 저기있는 누님이 가져다 주라던데?"
"아, 고마워. 일단 마시고 시작하기로하고, 앉지."
카페 창가에 가방을 둔 모건의 앞에 커피를 놓았다. 창가에서 꼭볕이 들어 따뜻했다.
커피에 뜬 얼음이 반짝이며 빛을내며 물을 흘리고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모건이 안경을 고쳐쓰며 커피, 그 쓰고 달디단 커피를 마셨다.
"아, 모건 핫 이구나. 전이랑 비교해서 설탕 함량이 조금 낮아진 느낌인데."
그가 이쪽을 바라보고 씩 웃고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윙크를 날렸다.
"당연하지. 브랜드 2호니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손으로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올려세우며 내민 그녀에게 같은 손동작으로 응수하는 모건을 보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맛있어..?"
"머리쓰는 직업이다보니 확 쎈게 좋더라고. 당떨어지고 머리지치고 하다 보니까. 이건 그 와중에도 향이 진하고 깊어서 좋아해."
아무래도 자신작이라던 말은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굳이 저걸 사서 먹고싶다는 생각은 없다.
맛을 알고있기에 더욱 그렇게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별문제는 없었기에 나는 부족했던 아침을 보충할 목적으로 조각 케이크를 세조각 주문했다.
치즈, 티라미수, 초콜릿.
그렇게 주문하고 나서 차라리 식사를 한끼 제대로 할걸 하는 수준의 가격표를 받아들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미스였다.
"그래서 하고싶다는 말이 뭐야."
"2일뒤 소집령건이지. 뭐긴, 이미 다 알고 받아적을 준비 끝내둔것 아니었나?"
"원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하는겁니다. 형식적으로. 부담없이 대답만 하면 돼."
"역시 알고는 있었지만 불쾌한걸."
"알고서 부른거잖아?"
나는 모건의 제멋대로 꼬여있는 페이스에 말려들기 싫었기 때문에 먼저 말을 꺼냈다.
그는 묘하게 기분나쁘게 말하는것 같으면서도 늘 브리깃과 왕정의 이야기에 민감했다.
예리하다고 하는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의 진의는 모른다.
"이야기를 계속하지. 나는 이번에 가서 6귀족의 모든 권리를 포기할 계획이야."
"음. 그건 또 참신한 대답인데?"
"다행이네. 이번에도 예상범주 이내였더라면 분명 열받아서 커피를 엎었을지도 모르거든."
바리스타의 시선이 따갑게 뒤통수에 꽃혀오는것을 애써 무시하고 커피를 쭉 소리나게 빨아올렸다.
고개를 들자 모건이 여태없던 소름끼치게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왜..왜그렇게 노려보는거지?"
"아냐. 별일없었어. 기분탓일거라 생각해."
하지만 그의 표정은 많이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칼날서린 눈빛으로 날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베일것 같아서 다시금 긴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나면 뭘 할 생각이지?"
"국왕에게서 자유를 얻고 그 높은 지위를 버리고 나면 조금은 편할수 있을까?"
"그렇기야 하겠지. 너는 확실히 너희 아버지와 달라.
결단도 판단도. 너희 아버지라면 분명 악착같이 달라붙었겠지만
너는 그럴 위인이 안되고 또 동시에 너희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일생전체를 바쳐도 어려울거야."
"역시 넌 지금 나한테 뭔가 있는거야. 독기. 응어리진 무언가가 있는거라고."
그의 눈에 불편한 무언가가 있음을 이해할수 있었을것이다. 누구라도 그의 눈을 봤더라면.
"아무래도 말은 그렇게 했어도 역시 화가 나는건 어쩔수 없나보다. 미안하다."
"아냐. 뭔가가 있었겠지."
잠정적인 침묵 이후 한층 진정된 듯한 모습으로 그가 다시 노트에 펜으로 무언가를 끄적이며 말을걸었다.
"왜 그러기로 했는지. 조금 구체적으로 들어봐도 괜찮을까."
"부담감. 그리고 역겨움.지침. 여러가지 있겠지만 일단은 내가 싫다고 할까.
귀족이기 위해서 스스로를 포기하는 기분이라서 말야. 그리 편한것만은 아니더라구.
어릴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고
또 그때부터 질리도록 주입받은 양식이니만큼
이제와서는 뗄 정도 없을만큼 신물이나서.
차라리 포기하는게 편하겠다 싶으리만큼 귀족, 아버지에게, 나 스스로에게 지쳐버린것 같아."
"그건 그럴수 있겠군. 내가 성급했어. 미안하게 됐네.
사람마다 각자 다 다른거니까.
내가 애먼데에 화를 내고 있었다는건 잘 알았으니까 말이지.
커피는 내가 사지. 뭔가 아직 조금 더 묻고 싶은건이 있는데 그것도 포함해서 계속해 볼까."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잇기 전에 커피를 마셨다.
차가운 얼음이 한 조각 입으로 흘러들었다.
목 뒤로 차가운 커피가 넘어가면서 위장을세게 긁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얼음을 까드득 씹어 삼키면서 한조각짜리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으로 가져다 넣었다.
조금 느끼하달지 하는 애매한 맛. 그렇지만 뱉기에는 아까운 맛.
그 속에서 달달한 맛이 퍼지듯이 이어졌고 입술에 묻은 차가운 크림치즈를 혀로 훔치면서 입으로 옮긴다.
커피를 한번 더 마시게 되었다. 목이 막힐정도로 달아서.
"모건. 커피는 산다고?"
"거기있는 케이크도 포함해서 이 카페에서 구입한 식품 전반에 대해 값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는거지."
"오케이."
나는 매대쪽의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잔 더 추가해 달라고 했다.
모건의 표정이 애매하게 비뚤어진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침착하게 무표정을 가장하고 있는 그는
아마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뽑아내려고 드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참아내는 중일것이다. 나에게 정보적 가치가 다소 존재함에 감사했다.
"좋아. 내가 알기로는 기자들과 경찰들을 비롯한 대거의 인물들이 궁으로 초대되었다. 맞나?"
"그말대로지. 나를 비롯해 널스페이지 신문국장. 게리지페이퍼 취재진 대거. 그리고 방송국에서도 기자 다수. 또.."
"아니, 기자는 이제 됐어. 다른 쪽으로는 없을까?"
"기본적으로 6귀족. 그리고 사무엘 경찰국장.
그리고 사진사 피츠버그씨. 영화감독 엥겔씨, 초대가수 로는 에이브람스제네핏, 크로울리 나비에나,
그리고 배우도 다수. 빈저드, 덴, 메르켈 같은 사람들도 온다는군."
"그리고 경찰다수와 일부 관계외 국민이지?"
"입장권은 별도로 판매했으니까.
값이꽤 나갔을 텐데 기어이 그걸 산 이유는 아마 그거겠지."
"그거라고?"
"아, 아직 몰랐나? 초대장 받았을것 아냐?"
"아직 확인을 안해봐서. 그런걸 받았던가?"
"왕으로부터의 중대발표가 있다고 했지. 미리 들어두면 향후 10년간은 금전적으로 이익이 있을 거라던가."
"어제는 왜 말해주지 않았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갈거였잖아?"
"마음에 안들어."
"뭘 새삼스럽게. 그래서 이쪽 질문인데, 그 이후에는 어쩔거지?"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 남은 치즈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넣고 우물거리다가 남은 커피와 함께 넘겼다.
커피를 쫘압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빨대로 빨아넘기니
곧 차가운 플라스틱 컵 두잔에 담긴 커피를 들고 그녀가 찾아와 나에게 미소와 함께 커피 두잔과 험한소리를 건넸다.
"자. 주문한거 두잔. 사이즈는 말 안해서 그란데로 했어.
먹고 뒤지시던지 아니면 비싸게 내시던지.
다음부터는 처음 만들때 한번에 시켜. 값은 제대로 받을테니까.
아, 모건 스페셜 핫 드립 브랜드 2는 서비스야."
커피이름에 뭔가 추가된것 같은데. 그래도 뭐 괜찮겠지 싶었다.
초콜릿 케이크를 또 조금 잘라서 입에 넣었다. 치즈케이크보다 더 달았다. 예상은 했지만.
느끼한건 덜해서 낫다고 하면 더 나았다. 가만히 보다가 크게 한조각 덜어서 모건에게 들이밀었다.
"자, 니가 사는건데 맛은 봐야지. 아 해봐."
"묻는거에 대답이나 좀 해주시지."
그러면서 그는 포크를 뺏어들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본인의 이름을 딴 커피를 마셨다.
"다 좋은데 살이 좀 많이 붙겠는데."
그러고는 나를 바라보며 재촉하듯이 펜을 들고 노트를 두드렸다.
"6귀족이 아니더라도 나는 귀족이다.
몰락한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경제적으로는 여유로운 상황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이제 그러고나면 문제될 것도 없을거고. 그림이나 그리면서 살아야지."
"그게 그렇게 태평한 문제가 아닐것 같다는 생각은 안하는거군. 대책이 없다고 해야하나."
"거 너무하네. 본인을앞에두고 막 그런소리 하기야? 참 센스없는 사람이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도 생각했다. 동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것말고는 마땅히 처세술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와서 떠맡기에는 6귀족이라는 짐은 과분한 날개옷이었고 나는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라 그저 거부하고 회피할 뿐이었다.
피하지도 못한채로 그저 애써 어떻게든 숨어보려고 노력하는 거북이.
그것이 지금의 나였다. 담담한척 대답했지만 내심 불안했고 그랬기에 더 허세를 부린건지도 모르겠다.
초콜릿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먹었다. 입 주변에 초콜릿 크림이 또 묻었으나 이번에는 휴지로 닦아냈다.
역시 커피를 마셨고 이번에는 일부러 얼음하나를 물었다.
당 떨어진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안쓰던 머리를 너무 굴린것인지 모른다.
문득 어제 읽던, 읽다 그만둔 책의 글귀가 떠올라입으로 뱉어버렸다. 생각하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갔다.
"저항조차 하지 못한채로 죽어가는 이들의 묘는 지키는 자 하나없이 무성한 풀들이 쌓일 뿐이었다"
"엘리마네..?"
문득 들린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놀라정신이 들었다.
"알아?"
아마 나처럼 별 생각없이 흘린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놀라 그를 쳐다보았을때
그는 두 눈시울이 붉어진 채 일그러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깊은 슬픔. 그리고 놀람으로 일그러진 그 얼굴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창백함을 담고있었고,
눈빛만큼은 죽을듯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변명하기도 전에 그는 나를 떨리는 목소리로 날 보며 말했다.
"나한테..할말이 꽤 많을거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방울 흘렀다.
그 나름대로 아마 절제하고 또 절제하던 것이겠지. 한방울은 멈추지 않고 흘러 그의 뺨을 적셨다.
뒤이어 눈물은 흐르고 그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말을 잇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엘리마네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점이 생겼지만 차마 물을수 없었다.
모건은 한참 그렇게 말없이 울더니 지갑에서 지폐를 네 장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나중에 그가 진정되었을때 다시 전화하기로 했다.
차마 그 돈을 써서는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내돈으로 계산했다.
바리스타인 그녀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다.
"너 무슨소릴 했길래 애가 저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집에 있던 책 내용이었는데. 그걸 그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어요."
나는 카페를 나와 대로변을 걸었다. 차는 있었지만 잠시 걷고싶었다.
아마 모건도 바로 일터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장가가 나올때까지 계속 걸어서 어느샌가 시장한복판에 서있었다.
커피 한잔을 들고서. 한잔은 카페를 나오기 전에 원샷하고 왔다. 뜨거운 음료를 시키지 않았기에 다행이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차가운 커피를 마셔도 머리와 가슴한구석이 계속 뜨거웠다.
내가 대체 뭘 실수한것인지 모르겠다. 점심은 생각도 나지 않았기에 나는 미술관으로 향했다.
마음을 진정시킬 목적에서였다. 입장료는 꽤 비싸게 받았지만 말이다.
미술관의 전시물은 하나같이 유화를 비롯해 값이 나가는 작품이었다.
수채는 취급하지도 않았으며 캔버스에 그렸음이 명확한 고급품이었다.
실력이 그에 미치지 못해 아쉬운 작품들도 더러 있었고나는 그 재료들이 나에게 있었더라면 저것보다는 조금 더 낫지 않았으려나 하는 생각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폐가 답답해온다.
아무래도 밤에 몰아 피웠던 시가가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들끓는 가래를 뱉어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에 켈럭이며 뱉어낸 침에 섞인 가래를 물로 씻어보내면서 나는 묘한 답답함을 느꼈다. 손을 씻으면서 거울에 비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곧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되어 손을 닦고 나왔다.
전시물을 관람하면서 걷는 도중 나는 한 작품을 보고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여성의 초상이 그려진 작품으로, 다른 사람들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고 스쳐지나간 작품.
그 작품을 보고 나는 가만히 서서 한참을 굳어있었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 작품이었으니까.
어머니의 생일에 선물했던 초상이 그곳에 있었다. 분명히 장례를 치르기위해 저택으로 이송되면서 동봉했을것이고 묘에 어머니와 함께 묻혔을 터인.
또 그렇게 지금껏 여겨왔었던 그림이었다.
작품 소개란에 웃는 여인이라고 쓰여 있는 그림의 원래 제목은 나의 어머니였다.
어째서 이 그림이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작품소개에는 기증자의 이름역시 쓰여있었다.
[시그릿 플뤼네]
아저씨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본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버지의 이름도 아닌 아저씨의 이름이라니. 이해할수도 없었거니와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길로 미술관을 나왔다. 차에 시동을 걸고 시그릿 아저씨의 저택으로 몰았다.
뭐라도 그의 입에서 직접 듣고싶었기 때문이다. 착잡하고 답답했던 가슴이 이제 미어터지려고 한다.
그의 저택 앞에서 나는 대문의 벨을 눌렀다. 클래식음악의 어느악장을 연주하던 벨소리 사이로 음성이 들렸다.
"에드? 무슨일인가?"
"듣고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게나."
잠시후 육중한 철문은 그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덜컹이며 열렸다.
문고리의 여우장식이 맨들맨들 해 질 정도로 닳아있다.
많은 손을 탄거겠지.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자 브리깃과는 다른 대리석의 바닥이 깔려있었다.
차분한 목재 라운드 테이블이 있었고 캔들이 그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20M정도 직진했을때 저택의 정문이 있었다.
역시 6귀족의 중추라고 불리는 남자의 저택이다. 정문의 문고리가 열리고 그 앞에서멀끔한 정장의 아저씨 하나가 나타났다.
"이쪽으로 오시죠. 공작님이 기다리십니다. 허나, 다음부터는 미리 연락을 조금.."
"알겠습니다. 그건 뭐 차후에 다시.. 그보다는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택에 고용인을 들일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6귀족이니까. 그 막대한 권력을 업었으니까.
허나 이 단순한 일에도 나는 조금 허탈한 박탈감을 느꼈다. 왜인지 모를 그런 박탈감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속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응접실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시그릿 아저씨가 캐주얼한 옷을 입고 의자에 앉아 파이프를 물고 신문을 든 채로 고개만 돌려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무슨일로 갑자기 이곳까지 온 건지 우선 그 이유를 들을수 있을까?"
"그러죠. 미술관에 전시되어있던 그림때문입니다."
"그림이라고?"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고 말투에 적잖은 귀찮음이 보였다.
아저씨는 지금 내 말에 큰 관심이 없다. 혹은 정말 짚이는게 없던지.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키기 위해 그의 눈을 보고 말했다.
"제가 그린 그림입니다. 정말 모르세요?"
"모르다마다. 게다가, 명예로운일이잖니. 그런게 날 찾아온 이유가 되는건 아니란다. 알잖아?"
"제 어머니를 그린 그림이었고 저택에서 반출될 일 또한 없어야 할 그림이
왜 아저씨의 명의로 기증되어 미술관에 전시되어있는지에 대해 여쭈러 왔습니다."
그가 신문을 덮었다. 덮은 신문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숨을 내뱉더니 그가 수염을 한손으로 만지면서 말했다.
"모르는 일이야."
"그럴리 없습니다. 아저씨. 진실을 요구합니다."
"자네 그림이라면 적당히 내 이름을 대고 찾아가게.
나는 정말 모르는 일이야.수십장의 그림을 전시하기위해 모았고
또 그것들을 한번에 미술관측으로 보내는 거니까 어쩌다가 그 안에 섞여들어간 것 같은데.
그 경로까지는 내가 알 수단도 방법도 없어."
"그러니까 우연히 기증한 그림속에 제 그림이 섞여들었다는 겁니까?"
"자네 아버지한테서 받은 그림도 꽤 많았으니까 그때 받은 건지도 모르겠어."
나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묻고싶었으나 그러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도와준것이 있었고, 지금 내가 건들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그의 말이 사실일거라는 생각이 조금 들어서.
나도 모르게 동조해 버렸다는것이다. 억울했다. 나의 아버지가 정말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랬다.
오늘 하루 풀리는일이 없었다. 나는 그자리에서 더이상 뭐라 따질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인채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림은 회수하겠습니다. 느닷없이 죄송했습니다."
다시 담배를 물던 그가 날보고 뭐라 말하려던 순간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났다.
"에드먼드를 정문까지 잘 안내해 주시게. 에드, 자네도 잘가고. 얼마뒤에 또 만나지."
그러고는 전화를 받으러 나가버렸다.
나는 정문까지 질질 끌려나왔고 미술관으로 돌아가 아저씨의 이름을 댔으나
그림은 기증절차가 완료되었다는것과 증명수단의 부재로 나는 나의 그림을 500달러씩이나 주고 구입했다.
차로 돌아가 그림을 실어놓고 문을 잘 잠그고 나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2시가 지나가고있는 시각을 보고는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런...씨발.."
욕이 새어나왔다. 터벅터벅 인파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패배자가 된 감정을 안고서 그저 거리를 걸었다.
베어핏카페 지하의 바는 7시부터 여는것으로 알고있었다. 5시간을 때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허탈한 감정과 또한 많은 의문을 안고 전화부스를 찾았다.
코인을 넣고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돌렸고 수화음이 몇번 나지않아전화가 연결되었으나 상대는 말이없다.
"모건? 염치없다고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따 7시, 베어핏 카페 지하의 바로 한번 나와줄 수 있을까?
강요는 아니고 그냥 조금 할 말이 있어서. 내가 뭘 실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아니다. 미안.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던것 같다. 혹시 생각이 진정되면 전화나 한통 줬으면 좋겠다."
말없이 전화는 끊겼다. 더 이상 아무말도 하고싶지 않다는 것인지 혹은 긍정인지 이제는 생각할수도 없었다. 그저 텁텁했다.
"시가, 받아올걸 그랬나."
나는 그길로 차를 몰고 가까운골목으로 가서 주차해두고 잠을 청했다.
할수 있는거라곤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을것이다. 더이상 나는 그 무엇도 하고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어스러이 졸던 눈을 비볐다.
여성하나가 서서 차를 바라보고, 아니 날 바라보고 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어..무슨일이시죠?"
"별건 아니고, 여기 이렇게 주차하면 안된다는걸 알려주고 싶어서."
"아, 네. 죄송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해서 도로변으로 몰고 나왔다. 뒤에서 어렴풋이 들린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이래서 천것들은"
그런걸로 화를 낼 정도로 소인배도 아니거니와 천것도 아닌 입장이었기 때문에 크게 감정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왜인지 거슬렸던 점은 사실이었다.
지금 상황에 편하지도 않고 그럴수 없을거라고는 것도 인지하고 있다.
비록 편안하지는 않지만 잠시 쉴만한, 시간을 떼울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럴 공간과. 사실 지금껏 줄곧 원해왔던 평안과 자유란 그런것이었고 나는 아직도 그 해답에 도달하지 못했다.
차라리 나도 일에 쌓여 이런 생각을 할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조금은 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와서 그런걸 생각해도 의미없었고
나는 이제 안식을 원한다는것만이 남아 조언을 구할, 적어도 잠시 안식할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필요할 뿐이었다.
욕망마저도 안전과 직결한다니.누구나가 원하는 욕망과는 거리가먼. 자신의 안위에 최소한의 욕구를 가진다니.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헤럴드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나는 그의 경찰서로 향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더라도 잠시 얼굴이 보고싶었다.
내게 남은 사람은 이제 얼마 없으니까. 나의 세계는 이미 거기에 있으니까 말이다.
경찰서까지 가는 길이 그렇게 가까운지,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는 처음 알았다.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가자안에 앉았던 경관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일로 오셨습니까?"
"네, 헤럴드 네빌리온 형사를 만나려고 왔습니다만 어디 있는지알 수 있을까요?"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우선 왜 그를 만나려고 하는지에 대한 경위를 들려주십시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강압적인 수는 쓰고싶지 않았지만 내가 할수 있는 수단은 모두 사용하는게 옳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잠시 고민한후 입을 열었다.
"에드먼드 브리깃 공작입니다. 개인적 용무로 급히만나야 할 일이 있으니 안내해주시죠."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들었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지났다. 시선이 따갑다. 분위기도 어둡다.
그의 눈이 달갑지만은 않은듯한 시선으로 나를 흘긴다. 그럴법도 했다.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 옷 소매를 흔들고 가는것을 느낀다. 잠시 나와 눈싸움을 하며 장부를 뒤적여 보더니 말했다.
"공작님, 안타깝지만 헤럴드 네빌리온 형사는 내일까지 휴가를 받은것으로 되어있군요. 근무일지를 봐도 그저께가 마지막 출근기록입니다."
"그렇습니까? 오늘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고요..?"
"그렇습니다. 추후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만 급한일이시라면 저희쪽에서 남는 인원을..."
"아뇨,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나서 경찰서를 나왔다.
어째서 헤럴드가 출근을 하지 않은건지, 왜 나에게 거짓말을 한건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건지 의문만이 쌓였다.
공기가 탁한기분이다. 한것도 없는데 시간이 벌써 4시 20분이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거지.."
목이 바짝 말랐다. 긴장이 되었고 또한 동시에 화장실에 가고싶어져 공중화장실을 찾았다.
전에 자주가던 도시 외곽 교외에 자리를 잡은 공원화장실로 걸어갔다.
화장실의 칸막이에 들어가 앉았다. 전에는 익숙했던 곳이었고 종종 옆칸이나 창문으로 담배피우는 냄새가 나지만 않는다면 꽤 있을만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굳이 있어야 한다면 다른공간을 택할게 뻔한 역겨운 담배냄새가 스멀스멀 암모니아에 섞여오르는 더러운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는 아마도 내가 귀족으로서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만은 아닐것이리라 믿는다.
벽에 아무렇게나 쓰여진 낙서에는 밖에서는 하지못할 외설과 풍문이 어지럽게 적혀있다.
대개 음란한 말들이 쓰여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싫다.화장실에서 내린 바지 속에서 나온 다리. 털없이 깨끗한 다리. 그리고 종아리에 난 흉터.
잠시 어지럼증이 나고 기운이 빠졌다. 냄새가 좋지 못한게 또 이유가 될것이다.
숨쉬기가 힘들었고안면근육이 경직되는 기분이었다. 몇십분간의 정적을 기다리고 나는 겨우 밖으로 나왔다.
손을 씻으며 얼굴도 같이 씻어서 휴지로 닦아냈다. 그리고나서 잠시 공원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주시하기로 했다.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고있었고 또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이따금 이쪽을 바라보긴 했지만 별 생각 없었다.
사실 그런것에 신경쓰지 못할만큼 많은 생각에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어머니와 같이 이곳을 왔었을때는 별것 아닌일들에 웃을수 있었는데.
그리워져서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애써 참아내고 침을 뱉었다.
공원 가로 나있는 좁은 길은 걷다보면 차차 넓어진다.
그 좌우로 드문드문 나있는 청솔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이윽고 솔길이 된다. 나는 그 길을 걷는다.
여기서 찍어낸 종아리는 이제껏 이 길을 거부해왔었고 나 또한 지나지 않았으나 몇년이고 그럴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젠가는 지났어야 했을 길이다.
길을 따라 걷던 나는 곧 솔가지가 떨려 바람이 스치는 것에 두려워져 길을 돌아왔다.
솔향은 은은했고 부드럽게 그리고 청아하게 심장을 죄어오듯 압박했다.
더불어 종아리도 굳은듯이 움직이지 않았기에 나는 다리한쪽을 질질 끌며 돌아왔다.
솔길을 벗어나 공원으로 돌아와 다리를 계속 주무르자 다리는 다시 천천히 풀려 근육을 움직일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두시간 하고도 3분 남았다. 나는 목욕탕을 선택했고 다시 나의 의지로 알몸이 되었다. 옷을 케비닛에 보관하고 나서 탕으로 향하기 전에 가볍게
몸에 다시 물을 끼얹었고 공원에서의, 화장실에서의 기억과 그 불길함과 그 기분나쁜 공기를 씻어내듯이 샤워기를 머리에 대고 있었다.
겨우나를 타고내린 물들이 바닥에 낭자함을 깨닫고 고개를 들자 바닥에 빠진 머리칼이몇가닥 있다.
"탈모로 대머리가 되는것도 이제 금방이겠는데."
나는 탕으로 향했고 손을 먼저 담갔다.
온도를 재기 위함이었다. 집에있는 온탕의 온도보다 조금 높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탕이었다.
익어버릴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발을 집어넣었다.
두다리를 넣고 몸을 내리고 삶아지는 송아지처럼 육즙대신 진한땀을 흘리며 나는 고깃국을 만들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나는 생각없이 앉아 명상하듯 눈을감고 있었다.
"에드먼드?"
누군가가 날 부르는 소리에 눈을뜨니 눈앞에는 세상걱정없이 산다는 표정으로 케이가 서있었다.
"이런데서 만나는구나 겔데어스."
"그러게. 이런 목욕탕에는 무슨일로 온거야? 집에 목욕탕 있을것아냐?"
"기분전환이야. 너는?"
"난 아부지가 쓰고 계셔서 나왔지. 잘 나왔네. 여기서 이런 VVIP도 만나고 말야.
어때, 간만에 보니까 두배로 섹시하지?"
"언제부터 네가 섹시가이라고 생각하게 된거야?"
"전 날때부터 섹시가이였거든요? 너같은 아저씨랑 다르게 말이죠."
"내가 왜 아저씨야, 한살차이밖에 안나잖아?"
"아 구질구질해라. 이게 아저씨라는 증거라구. 깔끔하지 못하게 질척거리는거."
"이 돼지같은게."
"돼지? 돼애지이? 아니거든? 코끼리거든?!"
나는 케이와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며 웃었을 뿐이었지만 확실히 조금은 편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런 친구가 많았더라면 조금은 더 편했을까?
"네가 어딜봐서 코끼리야, 그냥 돼지지."
"이거봐봐, 코끼리지 완전 코끼리거든?"
"야, 미친놈아 뭘 들이미는거야 지금!"
주변사람들에게 민폐인듯해 나는 그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재밌네. 나도 너같은 친구가 좀 있었으면 좋았으려나."
"친구도 없어? 별수없네. 내가 친히 친구해줄게."
"이게 자꾸 형이랑 맞먹으려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는 나와 나를 바라보며 웃는 그는 정말 순수하게 행복해보였으리라.
"케이, 너는 이번 소집의 목적이 뭔지 알아?"
"아, 나 어려운거 몰라. 파티는 파티, 장사는 장사. 그거면 되지. 안 그래?"
"그래, 네말이 맞다."
케이의 긴 다리와 긴 팔. 그리고 긴 몸통은 정말 그의 특장점이라고 할수 있었다.
본인이 자랑하는 성기역시 실제로도 큰 사이즈였다. 돼지라기보다는 코끼리의 이미지가 맞기도 했다.
다만 복근같은것이 없고 배가 통통히 나온 체형이었기에 장난으로 돼지라고 부르곤했다.
하지만 정상체중인것도 사실이고 건강상 문제도 없을것이다. 단정한걸로만 치면 수염도 없었다.
아마 매일 하는것으로 보이는 면도가 그 원인이겠지.
지금은 비록 젖어서 눌려있지만 평소에는 시원하게 까고다니는 머리는 그의 성격을 잘 반영했다고 볼 만큼 어울렸다.
입버릇처럼 자기는 단순하고 편한게 좋다고 말했고 답답하기에 열어제낀다며 머리도 무역도 개방적인 무역왕인 남자였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것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인 것이지 결코 그가 바보라는 뜻이 아니다.
그랬더라면 무역으로 큰 수입을 벌어들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어려운걸 모른다고 표현하며 자신을 바보로 규정하는 이유는 겸손이라고 밖에 표현할수 없겠지.
정말대단한 녀석이다.
목욕이 끝날때까지 나는 그와 시시콜콜한 잡담을 했고 한결 가벼운기분이 되어 약속이 있다는 그를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6시49분. 나는 올지 안올지도 모르는 모건을 기다리며 발걸음을 바로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