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46화 (246/303)

〈 246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 브리깃의 예술가

* * *

덜그럭 거리는 소리.

포크와 나이프가 부딫히는 소리.

랍스터와 피쉬앤칩스같은 것들과 늘어선 파스타와 튀김류 요리. 조림같은것도 하나 있다.

내가 시킨건 씨푸드파스타 하나였고 또 그것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다.

제인은 뭘 그리 많이도 시키는지. 배가 많이 고프긴 했나보다. 그러면 대체 왜 아무거나 안먹겠다고 한거야. 아무거나 잡히는대로 시켜놓고서.

아니 뭐 고상하게 포크랑 나이프만 가지고 식사를 하는건 좋다만.

"맛있어?"

"못 먹을 정도는 아니네."

"남이 사주는걸 얻어먹을땐 설령 그렇더라도 맛있다고 해주는게 예의아니냐?"

"됐거든? 나도 돈 있어.너야말로 지갑 집어넣어. 내가 사 줄 테니까."

"그럼 그러던지."

굳이 자기가 낸다는걸 거부할 이유 같은건 없었으니까. 그래서 오케이 했을 뿐이다.

안그래도 우리집 같은경우는 이제 무늬만 귀족이었던 상황이기도 했으니까.

"다음에 내가 진짜 맛있는게 뭔지 알려줄테니까 전화하면 제대로 받아."

굳이 그럴 이유가 있으려나 싶긴 했지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간 아무말이 없던 나와 그녀사이 침묵이 있었지만

그것이 어색하다기보다는 불쾌함에 자리를 뜨고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없이 계속 파스타를 포크로 말아올렸다.

마른목에 물컵을 찾았다.

"거기 있는 물병 좀 줘."

"주세요 해봐."

"장난칠 기분 아냐."

누구때문에 식사만하는지 정도는 알아줬으면 싶었는데 하여튼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눈치가 영 없는게 문제였다.

"재미없긴."

"재미있으려고 밥먹는거 아니잖아."

"그래도 나정도 되는 여자랑 밥먹으면서 말한마디 없는건 너무한거 아냐?"

"너 정도 되는 여자가 뭐 어느정도 되는 여잔데? 그냥 식사나 조용히 하자."

뚱해서 삐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지만 이제는 별 감흥도 없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일까.

물을 잔에 따라 마실 뿐이었다.

"에잇"

나의 팔을 올려친 손에 떠밀려져 물컵을 놓쳐 물이 쏟아졌고 나의 바지는 물에 축축해졌다.

물론 컵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이건 뭐 가게 입장에서 뭐라고 해도 아무말못할것 같은데.

조금 어이가 없어서 화가났다. 한마디 하면서 고개를 들었을때였다.

"지금 뭐ㅎ.."

당황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가 있었다.

다시 조금 진정하고 물어보았다. 얘가 이러는데 화내기도 뭐했기 때문이었다.

"왜그랬어."

"그..미안.."

"일단 내가 정리할테니까 식사나 마저 해."

"아니, 내가 할게."

"시끄러. 앉아서 먹어. 기분 안좋으니까."

말없이 착석한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과연 이게 왕실 비서를 지내고 엘리트코스를 밟은 국내에서 최고로 출세했다고 여겨지는 여성이라는 말인가.

큰 유리조각을 모아 정리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의자를 닦아내고 자리에 착석해서 포크를 들었다.

생각없이 정면을보니 울것같은 표정의 제인이 있었고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애먼 포크를 접시위 파스타를 모으며 돌리고만있었다.

"일단 먹어. 다먹고 생각하자."

"그..바지는.."

"어쩔수 없지. 시간좀 있으니까 마르길 바라야지."

움찔대는 그녀의 어깨가 잠잠해질 쯤 나는 파스타를 휘젓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씨.."

당황해 놀란 제인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눈만 올려서 힐끔 쳐다본 상태다. 나는 하고싶은 말이 없었다.

"화장실 다녀올게."

대답은 듣지않은채 화장실로 가서 옷 매무새를 다듬고 거울을 봤다. 애매하게 풀린 머리와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바지도 아직 축축했기에 이대로는 어디로도 갈 수 없을것 같았다. 화장실을 나와서 자리로 돌아왔다. 제인이 말없이 앉아있었다.아까같은

자신감은 사라진걸 보니 확실히 미안하긴 한가보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같이 좀 갈데가있어."

그녀가 일어나서 지갑을 꺼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다른손으로 지갑을 꺼내고 말했다.

"내가 낼게."

"아니, 내가 내도 되는데"

"안그래도 잔뜩 뜯어낼 생각이니까 걱정마"

"뜯어낸다고?"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계산을 마치고 식당을 나서서 말했다.

"옷은 젖었고 머리는 헝클어졌어. 이것만 처리하면 나머진 뭐라고 안할게. 자, 네가 뭘 하면 되는지 알겠지?"

잠시 그녀가 눈을 반짝인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그랬냐는듯 제인은 밝은 얼굴로 콜사인을 하고 웃고있었다.

"맞아, 그꼴로 성에 갈순 없지."

왠지 신나보이는데 그렇게도 양심적인 애였던가 싶어져서 왠지 다시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손에 끌려 미용실로 갔다.

내가입을 열기도 전에 멋대로 그녀가 말을마치고 나는 선택권도 없이 머리칼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음. 역시 생각한대로야.훨씬 괜찮다."

내 머리를 손보는건데 왜 좋아하는건지.

내가 그렇게 평소에 이상하게 하고 다녔던가 싶어서 부끄러워질 뻔도 했다.

옷은 내가 기껏 고른 옷대신 세련된 옷을 선물받았다.

확실히 브리깃이 되기전엔 상상도 못하는 값의 옷이었고 솔직히 지금도 산다고 하면 꺼려질 정도의 고가였으므로 별말없이 받았다.

사준다고 할때 안받으면 언제 또 받겠는가 싶어서.

그래서 그런건지 모른다. 이정도면 나름 괜찮겠다 싶어서 원래 입던 옷은 차에 다시 실어두었다.

"그래, 고맙다. 이정도면 이제 문제없겠네."

"그렇지?감사해도 좋아!"

완전히 본래 페이스를 찾은것 같다. 기분은 나쁘지만 축 쳐진것보다야 나은가. 그래서인지 그냥 한번 씩 웃어주었다.

"어차피 또 이따 볼텐데 나는 이만 간다. 이따보던가 하자."

"..."

뭐라고 중얼거린것 같지만 들리진 않았다. 굳이 듣지 않아도 지장은 없는 이야기겠지만.

나는 그길로 차에타서 겔데어스를 만나러갔다.

그의 저택은 해안가를 끼고 도는 높은 절벽산책로 안쪽으로 넓은 마당과 바닷바람을 볼수있는 말 그대로 깎아지른 절벽 위 저택이었다.

그 옆으로 등대 대용의 야탑이 있었는데 어민들에게 유용했다는듯 하다.

역시 스케일이 다르구나 싶었다.

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다가 멈칫했다.

떼를 쓰는 어린애마냥 날 봐달라고 하는 느낌이 들어서.

준비를 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고 바쁠지도 모르는데 무턱 노크를 하기가 주저되어 돌아섰다.

절벽 앞 크게 휘어자란 소나무가 시원한 향을 내고

쓰르르 하는 풀벌레소리가 들렸고 파도가 일렁이는 광경은 눈앞을 아른거리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이곳은 조용하지 않겠구나.

차를 타고 비탈길을 굽이돌아 겔데어스 가 저택을 떴다.

바그락 거리는 자갈이 차 바퀴에 밟히며 소리를 냈다.

곧 포장도로가 이어진 번화가로나온 자동차를 구석에 세워두고 도서관을 찾았다.

자료실에 들어가 책을 하나찾을 생각이었다.

"에드먼드. 여기엔 왠일이지?"

"모건."

"차려입은걸 보니 준비는 마쳤다 이건가."

"내 얘기가 또 듣고 싶은거라면 밖에서 조용히 따로 보던가 해야할걸?"

"아니아니, 이번엔 이쪽도 일이있어서 한가하진 않아."

"아쉽게 됐네."

"하나 둘 준비가 됐거든."

"뭐가?"

"기자가 뭘 하겠어. 큰건 하나 건진거지."

"그렇기도 하겠군."

그가 낡은 보고서를 뒤적이며 말을 삼키는듯 보였다.

나도 굳이 그를 방해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기에 책을 골라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찾던 책인 종치는 자들의 기억은 나오지 않았다.

부글거리며 녹아버린 기대감은 가슴에 말라붙었다.

책만을 계속 돌아보듯 선 그들에게 해줄 말은 없었다.

그저 쌓인 정보 속에서 무얼 찾고싶은지도 모른채 뒤적거리던 서적들이 한두권씩 쌓여가기 시작할 쯤 내 어깨에 묵직한 손이 올라왔다.

"이거. 네가 찾는 해답이 되지 않을까?"

모건이 낡은 책을 하나 건넸다. 표지가 다 뜯어져 헤진 책은 무어라고 마감도 떨어져 한두장이 삐져나온 상태였다.

"이건 뭐야?"

"글쎄, 읽어보지그래?"

"일단 빌리고 집에가서 볼게."

"아니, 그건 도서관 소유가 아니야.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인데, 이제야 주인을 찾은것뿐이지. 언제든 가져가서 편하게 보라고."

"그래. 고마워. 난 이만 가봐야겠어."

"그래 에드먼드, 이따 보자고."

도서관을 나와 차에 타서는 시트를 뒤로 젖혀 눕고 책을 꺼내들었다. 낡은 책사이에서 종이가 한장 떨어졌다. 반쯤 타고 남은 종이는 분명 타다남은것, 혹은 타고있는것을 억지로 끄집어낸 것. 둘중 하나겠지. 고급진 필체로 쓰여있는종이는 아무래도 편지인것같았다. 내용 전반을 알아볼수는 없었으나 읽을수 있는 부분이 빛바랜 상태로 남아있었으므로.

「내 신뢰하는 여섯__________________

경에게 이 편지가 전달 되었___________

최근 중시되는 문제중 하______________

이들의 처우와 생활난에 대____________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______________

이들 모두에_________________________

자유와 평등을 이념으________________

나는 나의 생각에 대한 경의 의견_______

이 편지는 누구에게도 공개해__________

빠른 시일내로 답_____________________

믿고 있네 에스트릭___________________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국왕 엠페리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건 피의 장미사건에서 찾을수 없었던 왕의 밀서라는것을.

이걸 왜 모건이 가지고 있었는지 알수는 없었다.

머리가 또 복잡해졌다. 곧 추스린 감정을 억지로 눌러두고 책을 펼쳤다. 그건 아버지의 일기였다.

첫장부터 에스트릭스 브리깃의 사인이적혀 있는 명실상부한 기록. 나는 이 기록을 보고갑자기 등 뒤가 서늘해지는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저택에 있던 일기는 과연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나는 그 일기를 살라버렸다. 그게 혹시 무언가의 증거가 되는것은 아닐까? 나는 무엇을 한거지? 모건. 그가 모건 제이미로서 이야기할수 있는것이라는게 이런거였나? 나는 일기를 또 넘겼다. 거기엔 붉은펜으로 모건이 일일이 각주를 달아놓은 내용이 있었다.

피의 사건의일주일쯤 전 부분부터 적힌내용이었고 내용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왕을 죽인적이 없었다. 각주로 달린 문구는 또 충격적이었다.

[그렇다면 왕의 밀서는 어디로 갔는가?]

다음장으로 넘어가자 그곳에는 또 다른 각주가 빼곡히 적혀있었다. 나는 각주만 모아서 따로 읽기로 했다.

[왕의 밀서가 사라진것이 아니라면 누군가가 고의로 은폐한 것이리라.]

[어디에 숨겼을까?]

[접근방식이 틀렸다. 과연 어디라면 숨길까?]

[저택안은 왕 사후에 철저히 조사당하므로 아닐것이다.]

[저택밖으로 편지를 빼돌리기는 어렵다.]

[의심받지않을 방식으로 저택수사전에 손을 써둔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편지가 저택을 벗어난것은 언제인가?]

[저택수사이후 다른 5명의 귀족저택도 수사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왕의 죽음 이전에 저택을 모종의 방식으로 빠져나가 모든 조사가 끝나고 나서 안전하게 수중으로 반입될 방식이 뭘까]

[피의 장미사건 이전저택 내에서 반출된 물건은 없었나?]

[혹은 피의 장미사건 저택 조사 당시 의심받지 않을 장소는 없었는가?]

나는 더 이상 각주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 조건에 들어맞는 물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였다.

그것이 아버지를 파멸로 몰아갔다.

어머니 사후 분명 묘에 같이 묻혔을 물건이 어느샌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었다는것을 바꾸어 생각했다.

어머니무덤의 초상화의 액자. 그림과 코르크판 사이의 빈공간은 편지정도를 숨기기에 최적이었겠지.

그상태로 매장된 그림은 당연히 수색망을 피해간다. 아마 아버지조차 건드리지 않았겠지.

묘도 묘이거니와 누구도 아닌 어머니의 묘였으니.

이 이후 아버지 사후 재산 처분권을 주장하며 묘에서 그림을 꺼내 거기서 편지를 찾은 다음 불태우고 남은 그림은 미술관에 기증이나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그게 가능하려면...

[너라면 알겠지? 내가 이 편지를 누구의 저택에서 찾아낸 건지.]

"시그릿 플뤼네.."

웃음이 나왔다. 허탈함과 당했다는 그 분노와 지금껏 누구보다 믿고 따랐던 것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어리석은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어느샌가 눈시울이 붉게 눈앞이 흐려지고 이를 꽉 물고있는 내가 있었다.

뺨을타고 흐르는 눈물이 입으로 흘러들었다. 짠맛보다 쓴맛이 나는것 같았다.

부글거리는 속이 끓는것 같아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그것이 우리 아버지가 되어야 했는지.

그렇다면 왕을 죽인것도 시그릿 플뤼네인가? 차에서 내려 도서관으로 다시 올라갔다.

도서관에서 문헌과 서류를 뒤지고 있는 모건을 발견하고 말했다.

"알고있었어?"

"모건 제이미로서 네게 말해줄수 있는건 그게 다야."

"장난하는것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거야."

"난 이제 내 나름대로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여기 있는거야."

그가 조사하고있는 문헌은 하나같이 피의 장미사건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큰건 하나 잡을거라고."

그의 얼굴에주먹을 날렸다. 앉아있던 그가 앞으로 엎어졌다.

"너 이새끼.. 그게 지금 무슨 개소리야. 큰건? 큰건? 이 새끼가 지금 누굴 병신으로보나!"

쓰러졌던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내 얼굴에 주먹이 날아왔다. 맞은 주먹에 뒤로 자빠진 내게 모건이 말했다.

"네가, 네가 뭘 알아 이 개자식아. 지금껏 아무것도 몰랐던 주제에.

내가 뭐때문에 조사하고 또 뭐때문에 이러고 있는것 같냐.

고작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새끼가 뭣도 모르고 설쳐대는거 마음에 안들었어!"

모건이 그렇게 말하고는 화를 삭이며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하더니 말했다.

"아니다. 미안하다. 네가 제일 힘들겠지. 나는 이걸 알리고 싶어.

이 사건을 돈벌이로 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이 사건을 공표하고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 뿐이다."

"아냐. 내가 성급했어.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건 알고 있었는데도.."

"머리 한거 헝클어지진 않았나?"

"어, 이정도면 괜찮을것같아. 그보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그래. 뭐든지."

"헤럴드. 그도 여기에 연관이 있는거겠지."

"그건 내입으로는 말할수 없어.

나중에 직접 들으라고 친구."

"아니, 그거면 확실해졌어."

"이제 한시간쯤 남았나?"

"한시간 하고도 30분정도."

"그렇군."

나는 말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그에게 말했다.

"만년필 한자루 있지? 기자니까."

"만년필? 있지. 왜?"

"좀쓸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하나만 빌려줘. 나중에 새걸로 하나 사줄게."

"아니,뭐 안그래도 되는데. 자. 가져가라고."

그에게만년필을 하나 받아들고 가까운 지물포에 가서 종이에 양가죽을 덧댄 작은 노트를 하나 샀다.

가까운 화장실에서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다 머리를 다듬고 노트에 적었다.

「여기부터가 나의 기록이다.」

남은시간동안 말없이 아버지의 일기를 복기하면서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7시가 넘어 20분을 넘어갈쯤 성문앞에 군대를 이룬 사람들을 지나 성문앞에 섰다.

"잠깐.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경비병둘이 지키고 있는 왕성 입구에서 나는 씩 웃어보이며 말했다.

"에드먼드 브리깃 공작입니다. 들여보내 주십시오."

"증거는 있습니까?"

"증거?"

"초대장 말입니다. 초대장."

아무래도 아버지 실추 이후 내가 직접적으로 알려진 적은 없었으니 모를법도 하다. 그래서 나는 나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에 내가 당황해 우물쭈물하고 있는 동안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여어~ 뭐하고들 있어? 사람들 많은데 빨리빨리 들여보내자구."

"케이 겔데어스?"

"어~에드먼드!"

경비병 둘이케이의 말을 듣고 있다가 되물었다.

"정말 이분께서.."

"엉, 에드먼드야."

"이거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그들이 길을 비켜줬음과 동시에 케이가 내 손을 잡아끌며 떠들어댔다.

"나없었으면 또 못들어오고 저 앞에서 뻘타다가쫒겨났다 그치? 에이 그게뭐야 가오떨어지게."

"그래, 니 덕이다."

"대기실은 저기 있는 안내병한테 물어보면 알려줄거야. 이젠 실수하지 말고. 바이~"

늘 밝은 녀석이라 호감형인 녀석이니만큼 시원했다. 나는 대기실을 안내받고 안내병에게 물었다.

"저기.."

"네, 부르셨습니까."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좋을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안내병,다른 분들은 어디계시는지 들을수 있을까요?"

"어느분 말씀하시는 겁니까?"

"6귀족 포함해서 귀빈들에 대해서 대기실 위치를 묻는겁니다.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요."

"아, 그러신 거면 팜플렛이 있으니까 드리겠습니다.

곳곳에 사복경찰과 군을 배치해 두었으니 여차하면 길을 물어 동행하셔도 됩니다만 우선 지금은 대기실을 나가실수 없으십니다.

조금 이따 국왕폐하께서 말씀하신 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연회가 있은 후부터 개인행동 가능하십니다. 협력 부탁드립니다."

"못할것도 없죠."

나는 방에서 받은 팜플렛을 천천히 읽어봤다.

그리고는 다시 노트를 꺼내 만년필로 덧붙여 적었다.

「2층 복도 우측 3번째방. 나의 대기실.

첫번째는 에그니아, 두번째는 반 데어믹스의 대기실이고

3층 복도 기계관리실 우측 1번째, 케이 겔데어스의 대기실,

2번째방. 시그릿 플뤼네 대기실. 3번째는 에네도르 대기실이다.

마지막으로 5층 특별방 로즈테라스가 딸린 방.

왕의 3번째 별실.」

마지막은 글을 써넣기가 힘들었던게 잉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마 끝물이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안내병. 여기 혹시 제가 쓸 만한 잉크가 있습니까?"

안내병은 잠시 고민하다 밖으로 나가더니 밖에 서있는 또다른 병사에게 무어라고 잠시 이야기하더니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금방 하나 가져다 드린답니다."

"지위가 어느정도 있으신것 같으신데."

"나름 국가귀빈인 6귀족의 개인대기실에 배정받은 병사이니 만큼 어느정도의 지위는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긴 그것도 그렇겠군요."

잠시 그러고 있으려니 정중한 노크소리와 함께 병사 하나가 잉크병을 들고 찾아왔다.

거수경례를 하면서 경직된 분위기로 할일만 하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런 그를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내겐 그럴 권한이 없었다.

"안내병. 이따가 있을 연회 이후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죄송합니다. 연회이후에는인수인계 진행후 경찰들이 대다수의 저희 자리를 대체하게 될겁니다.

남아있을 인원들이 아닌경우에는 대부분 연회까지의 활동계획만 전달받은 상황에 있습니다."

"그럼 성내 경비나 안내병도 바뀌는겁니까?"

"네. 성문에 배치된 둘을 제외하고 바뀌지 않는다고 장담할수 있는 인원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밖에서 또 한번 짧은 노크소리가 세 번 울렸다. 안내병이 내게 다시금 거수경례를 올려붙이며 말했다.

"지금시간부로 저는 본 장소및귀빈경호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그말인즉슨..?"

"문 앞에 새로 안내원이 하나 있을겁니다. 민간에서 고용한 인력입니다.

서비스쪽으로는 저희보다 나을겁니다. 좋은밤 되시기 바랍니다."

문을 열고 나를 밖으로 인도한 그는 웃으면서 돌아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앞에 조금 더 키가 작은 여성이 하나 서 있었다.

"당신이 그 안내원?"

"네. 맞아요, 어머나, 미남이시네요.우선은 연회장까지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말 편하게 하세요, 듣자하니 6귀족이라던데. 그정도쯤 되면 뭐 우리랑은 계급이 다른거잖아?"

"아뇨, 그렇게까진.."

계단을 돌아 내려가서는 몇개의 방을 지나고나니 그녀가 말했다.

"뭐, 도착했어요. 여기야. 좋은시간 보내요."

그러고는 안내원은 발걸음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녀를 급히 불러세웠다.

"잠깐."

"왜부르는거죠? 뭐 더 궁금한거라도?"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게 왜 궁금한지는 모르겠지만 이름은 니슨이에요. 혹시 괜찮으면 기억해줘요."

"니슨..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바이~"

어디선가 본것같았던 여성안내원이었기에 이름을 물었으나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는 문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반국민은 없고 귀빈들이 그 자리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거물급이거나 혹은 이름을 들어봤을법한 인물들이었다.

벌써 가벼운 티타임이었나보다. 과자가 쌓인 통에서 비스킷과 커피를 집어들고 막 과자를 입안에 넣을 때였다.

"저기요, 혹시 브리깃의 가주 되십니까?"

"아, 그렇습니다."

"저는 엥겔이라고 하는데 혹시 아시나요?"

엥겔. 들어본적은 있는 이름이었다. 기억을 못해서 그렇지. 내가 잠시 고민하다 그 이름의 출처를 떠올리고 대답했다.

"영화 감독, 맞으시죠?"

"아, 영광입니다.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데 알고계신다니."

"아뇨, 뭘 이정도로."

그녀가 신이난 눈치로 계속 말을 이었다.

"기왕 이렇게 본것도 인연 아니겠어요?"

"그렇겠네요."

"다음에 시사회때 꼭 영화 보러 와주세요."

"네. 그렇게 하죠."

그러고나서 감독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굉장히 텐션이 높은 사람이로군.

그녀를 보내고 나는 또 다른 과자가 진열된 테이블에서 작은 시폰케이크 조각을 하나 입에 넣었다.

"시폰케이크 좋아하시나 봐요?"

또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이런자리에 익숙하지 않은것은 나 혼자뿐이라 그런건지 나도 모르게 놀라서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 눈을 째려보았다.

분명히 좋지못한 인상이었겠지만.

그리고 그 앞에는 두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들에게 사과해야했다.

"아..그, 죄송합니다. 이런자리가 익숙하지가 않아서 놀랐던것 같습니다."

그러자 중년의 남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수도 있는게지요. 처음이란건 그래서 재미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빈저드씨."

맞장구친 남자가 웃으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빈저드라고 소개받은 중년의 남성은 못해도 50이 넘어보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흰머리를 제외하면 주름이라던지 기미따위는 찾기 어려웠다. 말그대로 단정한 노신사의 이미지를 가진 남성이었다.

이 사람이 빈저드씨라고 하면, 분명히 다른 한명은

"덴이라고 합니다. 영화배우를 하고있습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다행히도 예상범주 내에 속했다.나는 그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에드먼드 브리깃입니다. 어쩌다보니 초대되긴 했지만 아직 미숙하다보니 실수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잘부탁드립니다."

"젊음의 특권일 겁니다. 실수하고 다시 일어서는것. 그 과정속에서 무언가 얻는게 있었다면 그 기억도 웃어 넘길수 있는 추억이 될 테지요."

덴이라고 했던 남자는 와인잔을 흔들며 천천히 물결치는 붉은빛 와인을 한모금씩 하곤 했다.

"에드먼드씨, 어떻습니까, 같이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뇨, 저는 술이 약한사람이라,실례할지 모르니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이 두 인물이 목적없이 접근했다고 보긴 어렵기도 했고 나는 부차적인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두 분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브리깃 경.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빈저드씨의 온화한 미소가 잠시 있다가 이내 얼굴 근육 어딘가로 파묻혀 버렸다. 그러고는 빈저드씨는 덴씨와 함께다른방향으로 사라졌다.

연회라고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었군.

잠시 인사를 주고받으니 이름을 들었던 사람들과는 대략적인 인사와 함께 연락처정도나 혹은 사인을 받을수 있었다.

내가 연회장 한 테이블 모퉁이에 앉아 잼이올라간 초콜릿 비스킷을 반으로 부러뜨렸을때 이 연회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부의 귀빈들은 장소를 옮겨 파티를 계속했고 나는 단지 앞자리로 조금 옮긴 자리에서 그들 사이에 섞였다.

음식을 먹으면서 감격한 사람과 눈에 핏대를 세우고 춤을추는 사람. 또 정말 우아하게 연회를 즐기는 사람, 오자마자 술판에 정신이 팔려 연거푸 들이키는 사람.

파티라기보다는 무질서함에 가까워진 상황에서 장내의 모든 빛이 하나씩 점멸했다.

이윽고 모든 빛이 사라지자 조용해진 분위기속에서 웅성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탁 소리와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진 곳에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단상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위에는 젊은 남성이 하나 서있었다.

"정숙. 품위를 지키도록. 경비병, 술에 만취한 이들을 성 밖으로 몰아내라.

내... 연회를 망치는 자들이다. 품격. 이를 모르는자가 내... 연회에 올수 있으리라 생각지 말도록..."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증명이라도 하듯이 거기에 서있었다.

"내가..."

그는 말한마디를 뱉고서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이내 그러고는 안심했다는듯이 말했다.

"페테이어...국왕이다."

대중의 박수를 받으면서 왕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의... 파티를 즐겨주길...바라네."

왕은 목소리를 낮게깔고서 말을 천천히 끌었다. 절대자의 여유인것인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침착하게 중간중간 공백을두고 말을 잇는방식. 굉장히 독특한 화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기에 나는 마른 비스킷을 씹으면서왕을 쳐다보았다.

"여기에온 여러분들 모두를 환영한다. 모두... 나의...국민이기...때문이지. 우선은 먹고 마시고 즐겨라.

이번 연회는 짐이...신뢰하고...의지하고 있는 6귀족의 재결성을 목적으로 하고있다.

곧모든 국민들이 제각각의 방식으로 이익을 쟁취할것임에 명확하고,

나는 여기모인 자들에게 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이 연회를...국왕...으로서...친히...주최한...것이다. 부디 즐겨주기 바란다."

그의 말이 끝나고 성내에 다시 하나둘씩 빛이 돌아왔다.

어두운 공간에 익숙해진탓에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잠시 기다리자 왕이 서있던 단상은 어느새 오케스트라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휘자가 멋들어지게 목례를 마치고 모든 연주자가 인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조율하던 그들 사이로 한 여성이 올라섰다.

지휘자 옆에 놓여있던 조그만 발판앞에 마이크가 준비되자 지휘자가 말했다.

"소개드립니다. 초대가수, 에이브람스 제네핏 씨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좌우로 인사를 했고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저는 지휘를 맡은 크로울리 나비에나 라고 합니다. 오늘 저희가 준비한 곡은

아름다운 밤,

꿈은 깨지 않을지어다,

봄날의 계곡,

사랑하는 사람의 협주곡 4번,

그리운 날들에게 의 총 5곡입니다.

감사합니다."

준비된 간식을 하나 집어들고 있을쯤 귓가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먼드,잠시 시간좀 내주겠어?"

고개를 돌려 본 곳에는 아니나다를까 모건이 있었다. 평소엔 안 입는 옷을 차려입고 펜과 노트,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뭔데?"

"아까 왕말야. 이상한거 없었어?"

"그건 또 무슨소리야?"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까 일단 장소를 옮기자."

"그런거라면 내 대기실로 가자."

"불안한데?"

"그럼 일단나가서 생각하지뭐."

그러고는 나는 그의 손에 끌려나가듯 연회장을 나갔다. 그리고 대기실 앞을 지나다 그녀를 봤다.

"니슨!"

모건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봄과 동시에 그녀가 내게로왔다.

"브리깃 공작님? 무슨일이시죠?"

"이 성내에서 제일 눈에 띄이지 않을만한 장소를 찾고있어요. 어디죠?"

잠시 나를 올려보던 그녀가 되물어볼것만 같아 나는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했다.

"사적인 이야기를 좀 하고싶어서요."

"그런거라면 대기실에서 하셔도..?"

나는 그녀의 손에 금화를 두어개 집어주었다.

"어디입니까?"

"4층 외부테라스에 별도로 설치되어있는 좁은방이 있어요.

성내 일시 거주중인 고용된 인원들의 임시거처지만

현재, 새벽3시까지는 아마 6귀족의 관리감시를 맡았으니 비어있겠죠.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되어있으면서도 경치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다만?"

"외부전력은 일체 공급되지 않으므로 도청이나 도촬의 위험은 없지만 지금시간에는 빛도 전혀 없을거예요, 춥기도 하실거고."

"그런건 상관없어요. 고맙습니다. 지금부터 우린 아직 파티에서 나온적 없는거예요. 알죠?"

"에이, 아무리 그래도.."

모건이 씩 웃으면서 금화 한닢을 더 얹어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보이면서 작은 열쇠를 건넸다.

"방열쇠."

그녀가 힐끔 웃으며 말하기에 뭐라 할 기운조차 들지 않았다.

그냥 갔으면 아마 열쇠도 없이 그 테라스에서 방은 들어가지도 못한채로 돌아왔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는 혹여나 하는 생각에 돈뭉치를 그녀에게 보이며 물었다.

"혹시 아직 숨기는게 있습니까?"

"이제와선 관계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대기실, 화장실을 포함한 성내 전구역은

안내원, 경비원, 혹은 감시장치가 있고 4층 테라스안에 설치된 임시거처만이 장치가 없어요.

저희쪽에서 설치한 거니까 잘 알죠. 컨테이너 박스 한칸을 옮겨놓은구성이라 그런거긴한데.

원래 화물수송용 컨테이너박스였던것을 임시로 가져다 설치한 것이기 때문에 조작을 할 시간이 없었던 겁니다.

드린 열쇠로 4층 테라스 내 숙소문만 열수 있다면 큰 무리없이 몇분동안은 사담정도는 나눌수 있을거예요."

"몇분동안?"

"15분 간격으로 순찰을 돌아요."

"그렇군."

니슨이 내 손의 돈뭉치를바라보며 손을 내밀고 있었기에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있었다?"

"파티에서 나온적없고 마주친적도 없다."

"좋아요."

그녀에게 휙 뭉텅이를 건네고는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에드먼드, 나름 일처리가 빠른데?"

"만년필 값이야."

"싸게먹혔군."

그렇게 우리는 4층으로 향했다. 제발 그 누구도 마주치지않기를 바라면서.

나의 대기실을 경유해서 3층까지 올라간건 간단한 일이었다.

허나 3층부터 4층으로 올라가는일이 어려워보였는데 기본적으로 경비의 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글렀는데..모건, 꼭 4층까지 가야 할수있는 이야기야?"

"돈이 아까워서라도 가고싶은데."

"생각해보니까 나도 그렇군."

그렇게 나는 경비의 눈을 피해 한걸음을 내딛었다.

물론 그래봐야 2층과 3층사이의 중간계단일 뿐이었다.

"갈까?"

"어딜."

나의 물음은 모건이 아닌 목소리로 돌아왔다.

"모건..?"

내가 돌아보자 그곳에는 모건과 더불어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헤럴드."

"여~에드먼드. 반가워."

"네가왜 여기 있는건지는 묻지 않아도 되겠지?"

"경비로 고용된거니까 말야. 경찰이 어딜가겠어."

모건이 그 말을 끊어내며 말했다.

"부탁하나하지 헤럴드 네빌리온. 3층의 경비를 빼줬으면하는데."

표정이 바뀐 헤럴드가 모건을 보고 잠시 웃더니 곧 웃음기를 지우며 그를 째려보고 대답했다.

"배신자주제에 누구한테 뻔뻔하게 부탁같은소릴 하는거냐 제임스."

"엘리마네의 일이다.나 혼자만의 이야기는 아닐텐데? 그래도 같은 태도를 고수할수 있나?"

"알았어. 알았다고. 더러운자식. 들어주지. 어느정도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헤럴드가 주머니에서 시가를 하나 꺼내 물고서는 투덜거렸다.

"금연구역만 아니었어도."

불은 피우지 않은 시가를 문채로 그가 경비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숨 좀 돌리러가자."

곧 제각각의 담배를 문 경찰들이 그를따라 내려가고 복도는 두명의 경찰만이 남아 넓은 구역을 번갈아 돌며 순찰을 하고있었다.

그런 경비가 완벽할리 만무했고 4층으로 가는 빈 계단이 열렸다.

"가자고 모건.경찰들이 없을때 다녀와야지."

"그래."

4층의 테라스는 어두움 자체였고 별은 뜨지 않은 하늘에 어렴풋이 실루엣만 띄운 어둑한 달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구석에 처량하게 홀로 버려진,4층테라스의 빈 컨테이너박스는 정말이지 조용하고 또 삭막했다.

열쇠로 자물쇠를 풀고 들어가자 내부에는 무엇도 없고 다만 타다만 양초와 책상, 의자가 있을 뿐이었다.

뭐 덧붙이자면 거기에 책이나 펜이 한둘 있기는 했지만 별 내용은 쓰여있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 오기는 왔는데 하고싶은 말이 뭔지 들어보실까나?"

모건이 잠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반역이나 역모로 치부될수 있을것 같아서. 뭐, 6귀족이니만큼. 또 너는 브리깃이니만큼 걸렸을때 뒷감당이 안 될 것같았거든."

"역모? 역모라.."

"뭘 이제와서."

"그렇기야 하지만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건 어쩔수 없구만. 어쩌다가 이런건 또 알아가지고 말이지.

그렇게나 싫어하던 아버지가 또 이렇게 내 인생에 간섭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더랬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와서 뺄수는 없지. 적어도 그러려고 했었더라면 그 금화를써가면서 여기를 와서는 안됐지만. 일단 와버린김에 들으라고.

국왕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까."

"빨리 시작해. 아무리 손을 써 뒀다지만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받을거야."

모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면서 펜과 작은 노트를꺼내들었다.

"아까 왕의 연설말인데. 보면서 이상한점 없었나?"

"글쎄? 말을 자르던거?"

"그래. 크게 4가지의 이상한 점이 있었지.

우선 첫 번째부터 이야기하면 아까의 왕은 말을 심하게 끊었어.

무언가를 말하는걸 꺼리는것 같아 보였다고."

"그렇게 들으니 또 그런것도 같군."

"무언가를 말하면서 꺼린다는건 그것에 무언가 찔리는게 있다는 이야기지.

두 번째로 중대사실이 아닌지도 모르지만 그는 단상에 홀로섰다.

국왕이라는 자가 경호없이 배치된 경비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단상에 오른다?

국왕의 패기를 떠나서 무모하지. 게다가 파티장 내에서는 실질적인 경비라고 할만한 자가 그다지 없었어."

"그래. 그건 개인판단일수도 있지만 우선 확실히 신중하지 못하군."

"셋. 행동의 부적절성. 왕이 등장함에도 아무도 인사나 혹은 그에 준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어. 왜냐?

왕의 등장이 행사화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지.

보통 일반적인 경우 왕의 등장은 행사내용에 추가해놓는게 당연해.

그게 왕을 높이고 위상을 세울수 있는 방식임과 더불어 왕권의 증명이 가능한거니까.

일종의 형식이고 굳어진 형태라는거야. 그런데 공적인 소개나 인사도 없이 몇마디 가벼운 연설로 마치고 내려갔다.

마치 간단한 공지만을 위해서 온 사람 혹은 내가 왕이라는 그 하나만을 공표하기 위한 사람.

이 두가지 경우라고밖에는 생각하기 어려운상황이지.

실제로 우리가 연설에서 느낀건 그가 왕이라는사실. 그리고 파티중에 과음하지 않을것. 이 두가지 뿐이잖아."

"이해했어. 그럼 마지막은?"

"전체적으로 맞지 않아. 말을 끊으면서 숨기려하고있는 내용.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더불어 홀로 단상에 오를 정도로 겁없고 패기있는 국왕이

과연 이유없이 말을 끊어 더듬어가면서까지 연설을 미룰까? 국민들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왜 왕으로서의 위엄은 보이지 않은건지.

결정적으로 오늘의 모습은 피의 장미사건의 대처를 주관한 페테이어 국왕의 모습과는 다르다.

너무나도 모순덩어리란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는거지 이 파티는..?"

"너의 의견이 어떤건지. 생각을 말해줬으면 한다 모건. 이 의문들이뭔지."

"이건 파티가 아니다.우리에게 국왕은 뭔가를 숨기고있어. 그게 모든걸 꼬아버린거다. 약점을 잡힌건지도 모르겠어."

나는 잠깐 생각하다 노트를 꺼내서 만년필로 이렇게 적어넣었다.

「왕의 파티는 별도의 목적을 지니고 있음.

왕은 현재 주체적인 입장이 아님.

그렇다는 것은 곧 6귀족의 복귀의 의미도 바뀌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다 에드먼드. 순찰이 올것같다. 슬슬 내려가자고."

"헤럴드가 얼마나 버텨줬는지가 관건이겠군."

테라스의 문을 다시 잠구고는 계단을 따라 내려간 나는 3층의 경비가 원상복귀 되어있음을 깨달았다. 걱정도 잠시 나는 곧 모건과 눈이 마주쳤고 그가 말했다.

"둘다 잡히면 곤란하다. 내가 먼저 가서 주의를 끌테니 그틈에 빠져나가."

"잡히면 어떻게될줄알고."

"아까 본대로 성밖으로 쫒겨나지않을까?"

"그런가."

"오케이. 다음에 보자고."

"잠ㄲ..!"

내가 말리기도 전에 그는 멋대로 튀어나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달려나갔다.

당연하게도 경비가 집중되어있던 복도는 그를 곱게 보내지 않았고 그의 뒤를 쫒아 병사들이 뛰어갔다.

나는 그 뒤를 몰래 돌아 내려갔다.

그러다 한두명의 병사에게 들켰으나 곧 인파사이에 섞여들어버린 나를 잡을수 없게되자 그들은 곧 돌아갔다.

아마도 내가 누군지 알았거나, 파티의 분위기를 망쳐서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연회장에 돌아오자 많은 국민들과 분리된 귀족. 그리고 대기실로 돌아간자들. 많은 이들이 제각각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후끈한 분위기에 취하고싶지 않았기에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다시 과자류만 집어먹었다.

과자속에 술이 들어있는 종류가 있다는것을 깨닫고서는 그것도 그만두었다.

초콜릿을 포함해서 과자의 대부분은 술이 들었다.

지금껏 내가 집어먹은 종류에는 용케도없었던 모양이다 싶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다수가 취해 쓰러져있고

그들을 성밖에 준비된 임시 수용소로 옮기는 병사와 안내역이 들키지않게끔 파티를 방해하지 않게 그들을 배제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파티를 빠져나와 나의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이미 불청객이 하나 쓰러져있었다.

헤럴드였다. 술에취한것은 아닌것 같았으나 대기실의 소파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그를 흔들어 깨웠다.

"어, 에드. 왔구나."

"뭐?"

"야 침대 좋더라. 아, 소파구나 이거. 생각보다 편해서 몰랐지 뭐야."

"네가 왜있어?"

"널 만나러왔지. 이래봬도 경찰신분이라 경호명목으로 네방에 올수 있는 사람이라고."

"그럼 지금 이방은 감시원이 너라고?"

"그래."

"어이가없네."

나는 다른 소파에 걸터앉으며 작은 상 위에 있는 물주전자를 들어 컵에 따랐다. 시원한 물에는 얼음도 있었다.

"그나저나 카드점은 어떻게 됐어?"

헤럴드가 물었다.

"카드점?"

"네 주변인이 큰 피해를 볼거라던거."

"아 그건가.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 별일없을거라고는 생각하고있는데."

"제임스구나. 뭐 어디서 벌이라도 받았나보지?"

"그래. 그냥 그정도의 운세였어. 별건 없었지. 그나저나 이방의 원래 안내역은 니슨 아니었나?"

"조기 퇴근했어."

"적어도 새벽까진 근무한다고 했었는데?"

"관리구역이 바뀐거지."

그가 웃옷 안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들었다.

"하나 피워도 괜찮을까?"

"창문만 열어두면 나는 상관없는데 또 모르지 누가 불편할지도."

"너만 괜찮으면 상관없어."

"그런가. 나도 하나 줘."

"안피우는거 아니었어?"

"생각이 바뀌었어."

한개비 건네받은 시가에 불을 붙였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조금은 밝아졌다.

내 짧은 생각이 조금 연기를 내뿜으며 타들어가고있었다.

그것은 마치 내 뇌를 자극하면서도 천천히 목을조르는것 같았다.

"죽겠구만 정말."

"그래.."

"아까는 고마웠어."

그가 연기를 피워내면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 손에 들린 시가를 흔들어 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냥 내가 골초라서 그래. 고맙기는."

돌아본 눈과눈이 마주쳤다. 헤럴드의 눈은 어딘가 텅 비어버린것만 같아서 물었다.

"너는 몇시까지 여기에 있는거야?"

"글쎄다. 아직 할일이 남았으니까. 경비목적으로 온거기도 하니까 아마 너 집에갈때 까지는 있을걸."

"어우야 징글징글도 하다."

심란한 만큼 큰 심호흡이 돌아왔고 눈앞을 메운 연기와 더불어 머리가 아파온다.

어느샌가 또 콜록이는 내가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였다.

물고있던 초를 손으로 들고 크게 심호흡을 되풀이했다. 콜록이는 도중에도 확실히 나아지긴한다.

테이블 위에 재떨이에 잠깐 얹어두고서 나는 찰랑이는 물주전자를 유리잔에 기울였다.

물을 한잔 하고도 반잔 마시니까 축축하게 목이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사레들린건 어쩔수 없었다.

결국 나는 물을 마시고도 쿨럭거렸다.

"이게 대체 뭔짓거리라니.."

"그러게 말이다."

그러고있다가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다.

"너 이 방 경호는 언제부터 맡은거지?"

"너희가 3층 경비를 빼달라고 해서 담배피우러 가는데 부탁받았지.

남는인원이었으니까 알았다고 했어. 어려운것도 아니었고.

현재 성내에서 리볼버를 보급받은 경찰은 적은편이지.

아무래도 성내에서 무기를 들고다니는게 그림이 안좋잖아?

그러다보니 대충 짬되는 애들이 들고온것만 남겨주는데 그런 고급인력은 좀 밸류있는곳에 배치한단거지.

귀빈경호같은. 조금만 생각하면 간단한 이야기지."

나는 노트에 또 적어넣었다.

「헤럴드 적재적소배치. 브리깃 대기실. 권총 소지중. 귀빈경호담당자는 총 보유가능성.」

그렇게 적어놓고 말했다.

"식사는 언제부터지?"

"9시..지금이네? 가자!"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왔다.

무슨 식사를 9시가 다 되어서 하는가 싶긴 했다.

일반인과 6귀족의 경우 식사장소.

그러니까 식당의 위치에 차이가 있었는데 식당에는 일반인이 식사를 할수있는 넓은공간에

뷔페형식으로 된 음식이 있었고 그에비해 6귀족은 그 한층 위의 별실이었다.

그래서 헤럴드와는 어쩔수 없이 갈리게 되었으나 별수없는 일이었으므로 수용했다.

그러나 이에 납득불가한것은 아니었다. 다시말해 7시반에 집합한 귀족들도 식사할시간은 충분히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공복으로 식사를 준비한것.

혹은 억지로 식사를 하러 그 발걸음을 옮기는 이유는

아마도 이 식사가 저녁식사의 단적인 의미만을 내포하는것이 아닐것임에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제각각이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6귀족이 아닌 귀족의 경우는 또 다른 어딘가의 별실에 모여있으리라.

왕실의 식사는예상했던 이상으로 화려했다.

양고기를 위주로한 스테이크부터 각종 희귀한 식재라는것을 보기만해도 알수있을 수준의 음식이 세팅되어있었고

자리마다 접시에 배치된 말그대로 개인의 플레이트라는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자리 끝에는 왕이 앉아있었고 그 양옆으로 6귀족이 배치되어있었다.

식탁 가운데의 캔들이 고풍스럽게 타고있었고 등뒤로 기사단이 배치되어있었으며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이 간간이 리프트에 접시를 올려오곤했다.

그러나 이들중 누구도 먼저 나이프나 포크를 들지는 않았다. 왕이 무엇도 하지 않은채 접시위 음식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는 침묵속에 양식을 주시했고 그 무거운 분위기만을 삼킬 뿐이었다.

그 와중에 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들게."

그 소리가 나에게는 마치 최후의 만찬 혹은 심판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그니아의 선두로 그 뒤를데어믹스경이 따랐고 분위기에 압도당한 이들이 포크를 들었다.

나도 포크를 들어고기를 썰어먹었다. 사과소스라는걸 알수 있었다.

양고기 다리부분의 부드러운 부분을잘 요리했다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이런수준이라면 별다른게 없더라도 저녁을 굶고 왔을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적을수 있을법한 자리는 아니었으므로 포기했다.

식사시간은 마치 쥐죽은듯 조용했고 나는 애먼 목이 자꾸 탔으므로 물을 찾았다. 식사가 끝나갈쯤 왕이입을 열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할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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