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47화 (247/303)

〈 247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 브리깃의 예술가

* * *

침묵속에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달갑지만은 않은 케이는 벌써 눈을 둘곳을 모르고있다. 마른 목뒤로 애써 침을 넘겨보지만 그저 갈증만이 남았다.

"짐이... 이곳으로 경들을..."

왕이 잠시 말하기를 주춤했다. 그러고는 헛기침을 한번 크게 하더니 눈빛으로 6귀족을 흝어보았다.

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비춰진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를 느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순간적인 느낌으로 그게 무엇인지 조차 제대로 모르면서. 막연히 무언가가 변했다는 싫은 감정만 잠시 떠오르다 사라졌다.

"그래, 경들을 부른것은 곧 6귀족의 재정비를 위함이 우선이다.

거기 있는 에드먼드 브리깃 전 공작에 대한 6귀족으로의 복직을 제안하는 바이다. 이견있는 사람있는가?"

머뭇대는 눈치가 오가는 것을 견디기 어려운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는..그런 중책을 맡을 수 없습니다."

차갑게 식어가는 분위기속에서 나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 돌아오고있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것 내 생각을 굽힐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 엮여서 내게 돌아오는 것으로 자유를 사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왕이 물었다.

"그 이유를 묻겠다. 감히 왕의 제안을 거절하다니."

손에서 땀이 베어나온다.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격하게 들었지만 이대로 승낙해버리면 그것또한 내게는 위험했다.

머리를 굴려 합당한 대답을 찾아내기란 쉬운일이 아니었으나 결국 나는 솔직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마땅한 변명또한 떠오르지 않았다. 내게 남은 것은 궤변과 불신 뿐이었다.

그 불신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향한 불신이며 동시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내게 보내는 불신에 건 희망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종자로 보이기 위한 발악과도 같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좋으리라.

"그것이 명령이 아닌 제안이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뢰옵기에 황송하다고 사료됩니다만.

저는 폐하의 곁에서 보좌하기에 능력이 부족합니다. 저희 아버지, 에스트릭스 브리깃처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어리석은 것은 잘 알겠다. 지금 짐이 그대를 6귀족으로 복직시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가?

그것은 곧 왕을 위한 것이고 왕권의 실질적 강화가 된다.

국민들 앞에서 상징적인 6귀족이 불러올 심리적 안도와 형식일 뿐이라지만 구조적 안정감을 줄수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는 것 같아 말하겠노라. 짐은 그대에게 그 어떠한 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다."

예상은 하고있었지만 이것은 또 이것 나름대로 상처가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든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 직책을 거부해야 했다.

"그러시다면 폐하,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만,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세우시는것은 어떠신지요?"

그 말에 에그니아가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무례하다, 지금 네 앞에 계신분은 국왕이란 말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네가 어찌..!"

그가 나를 쏘아보는 눈초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무언가 증오가 더 심하게 느껴진것 같았다.

그냥 나에 대한 혐오인지 아니면 그 뒤에 무언가 숨겨진 것인지조차 나는 잘 몰랐다.

"그만. 진정하라."

왕이 조용하게 말을 꺼낸다.

"맞는 말이다. 그대의 앞에 앉아있는것은 국왕이다 브리깃.

경이 지금 무슨 실례를 저질렀는가에 대해 잘 알도록 하라. 그리고 또한 에그니아경, 나는 그대의 발언을 허한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아니지...짐은... 관대하기에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럼, 브리깃. 이야기를 계속하지.

백성들은 지금 6귀족으로서의 브리깃을 바라고있다. 민심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대가 아닌 타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것으로는 백성들이 기대하는 완벽한 6귀족의 양상을 이룰수 없다는 것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것은 단순히 성 내의 머리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니라.

성밖의 저들은 언제나 부족함을 우선하고 가진것에 만족할 줄 모르며 상부를 탓하고 짐을 욕하고있다.

이 모든 것을 해설하는 것은 나 하나의 부덕이 아니라 결코 멈출줄 모르는 저자들의 욕망이다.

그러나 그들 또한 짐의 국가의 재산이고 소유물이기에 짐은 그들에게 당근을 주려고 한다.

그래야만...저들은 이제껏 그래온 것처럼 분노와 적의를 가슴에 품고서도 삭이고 삭혀 순종적인 노동력이 될 테니까 말이지.

지금 저들이 원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의 이름이지. 그렇기에 짐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안한것이다.

다시 묻겠다. 아직도 요구를 거절할 생각인가?"

나는 말할 수 없었다. 그 순간의 머뭇거림을 국왕은 놓치지 않고 왕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에게로 다시 시선을 모았다.

그 짧은 움직임이 모은 시선은 살짝 식었던 분위기를 다시 무겁고 또 어둡게 만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시간을 주마. 짐의 연회가 끝난 후에 다시 묻겠다. 생각을 정리하라.

그러나, 그때도 이와 같이 대답한다면 그대의 선택에 상관없이 강제력을 행사할수 있음을 그대는 알아두는것이 좋을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건... 나로부터의 조언이기도 하다. 받아들여라 브리깃."

나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들어라, 경들은 이 방에서 들은 일은 발설하지 말라. 또한 이 이후에 에네도르경은 접견실로 오라.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예, 왕이여."

왕은 술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오늘의 만찬은 건배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으니 한잔씩 들라. 그대들의 연회를 즐기길 바란다."

잔을 나누고서는 말없이 와인을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왕은 자리를 둘러보고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와 동시에 무거웠던 공기를 가르는 것은 에그니아경이었다.

"브리깃! 미친건가! 국왕의 앞에서 무슨 실례를!"

"진정해, 에그니아. 아직 어리니까 그럴수도 있지."

반 그레고리 데어믹스경이 그를 말리며 일어선 그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에그니아의 표정은 여전히 나를 찢어죽일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남은 분위기속에 조용히 일어난 에네도르경이 표정을 찡그리며 나가버렸다.

"저급한것들."

그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차에서 졸던 나에게 천것이라고 이야기 한 그 여성이었다.

여전히 고압적이고 고고한 그대로였다. 아마 더 심한 말을 하려다가 그것이 자신의 품격을 더럽힌다는 점이 거슬려,

그래서 말을 고른 정도에 불과한 것 같은 사람을 내려보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내 얼굴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저도. 나가보죠. 다들 나중에봐요 아저씨들."

케이 겔데어스는 그 말을 끝으로 나가버렸다. 이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가 말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날 선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 뒤를 따라 에그니아도 자리를 떴다. 그는 나갈때까지도 나를 괜히 노려보고 있었기에 나는 고개만 조용히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마지못해 날 용서한다는 것처럼 눈길을 돌렸다.

데어믹스경은 이쪽을 잠시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품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깊은 연기를 뿜은뒤 그가 내게 꺼낸 말은 단순했고 또 무거웠다.

"긴 말 않지. 에드먼드. 지금은 조금 경솔했어."

"네.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됐네. 나가보게. 에그니아를 조심하고. 아마 자네를 씹어먹지 못해서 안달일테니."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연회가 끝나고 잠시의 휴식시간중 내 대기실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헤럴드조차도 없이 텅 빈 대기실 창가에 홀로앉아서 휘파람을 불고있었다.

그냥 입에 붙는대로 밤바람을 맞으면서.

그러고 있다가 무료해져 작은 노트의 뒷장에 만년필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작은 새를 한마리 그리고 싶어졌다. 자유의 상징이라는 그런 상징적인 의미에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동시에 무엇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상황을 모두 뒤집을 화려한 사건의 시작을 바라며.

새를 그리고 있을때 갑자기 대기실의 문은 벌컥 열렸다.

"큰일났습니다!"

경비다. 경찰이 아닌것으로 보아 병사로 보였다.

다시보니 니슨이 방에 배치되기 이전에 방에 배치되었던 병사다.

나는 놀라 슬쩍 손이 미끄러졌다. 그러나 곧 침착을 가장하며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게.. 사람이 죽어있습니다!"

"뭐요?"

"현재 연회는 중지되었으며 인원을 통제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혼란중에 급작스레 발견되었기 때문에

소란을 완벽히 중재하지 못했습니다.

고로 6귀족분들의 신원 확보와 더불어 통제된 구역을 통해 지정된 보호구역으로 안내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아!!"

나는 급히 그를 따라 나섰다. 뭘 해야 할지도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펜과 노트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에게 짐을 챙길 약간의 시간을 구걸했다.

그는 원칙상 안된다고 말하다가도 내 얼굴에서 뭔가를 본건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입니다. 오래 걸리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서.

방을 나서면서 바라보니 확실히 복도 끝 구석에는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사람들이 복도에 몰려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사체를 치울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는 의미겠지.

왕성에서, 그것도 사람들의 시선이 이렇게나 몰리는 버크레이엄 궁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사고가 일어나면

분명 범인도 범인이지만 왕의 권위가 추락할텐데.

나는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별일 없을 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던 것은 그래도 모르게 믿을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뽑았던 푸른 카드는 분명 내게 해가 없으리라 말했으니까.

그래도 나는 왠지 모르게 피어오르는 불길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병사를 따라 나아가면서도 나도 모르게 돌아가는 시선끝에

이 사건의 처량한 희생양을 두고 싶었다.

연회장이 아니라 이곳에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은 적어도 귀빈이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들사이로 들어가 확인하니그곳에 고꾸라져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은 니슨이었다.

"우욱..!"

구역질이 올라오는걸 참고 다시 그녀의 사체로 눈을 돌렸다. 한번 역류한 것 같다.

목 안에서 쓴 맛이 난다. 자는 것 같은 얼굴로 누워있었다면 또 모를까.

그녀는 무언가에 큰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바닥은 이미 끝부분이 말라붙어 시간이 오래 지났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시체를 치울 시간도 없었는데, 피는 말라붙었다는 점에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주변에 어지럽게 튀어있는 금화를 발견한 내가 제일 먼저 느낀것은 두려움이었다.

'금화는 얼마든지 있다. 진정하자.'

내가 저 금화를 주었을 거라는 결론에는 쉽게 도달하지 못할것이라고 위로하듯 자아 최면을 건다.

그러면서 주변을 조금 더 살폈다.

놀란상태로 눈을 부릅뜬 채로 죽은 그녀의 표정이 생생하기도 했다.

"저 사람, 어떻게 죽었습니까?"

"등을 날카로운 것으로 찔린것 같습니다. 칼과는 다른 무언가 송곳같은것 말입니다.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으로 보입니다.

더 자세한건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무릎 및 우흉부에 총상이 존재합니다."

속이 메슥거리는것을 겨우 버텨내고 공책에 필기했다. 이 기록이 유용할 순간이 올것이라 믿으며.

그 자리를 벗어나 나는 화장실로 직행했고

경비가 보는 앞에서 속을 비웠다. 보다못한 그가 내 등을 두드려주기까지 나는 쓴물을 뱉어냈다.

"하아...고맙습니다."

"안내역이 저런꼴을 당했으니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제가 인계받았습니다. 험한꼴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잠깐. 뭐라고요?"

"죄송합니다?"

"아니, 그 전에."

"안내역이 저런 꼴을.."

"안내역? 내 대기실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방금전까지는 안내역은 니슨 외에 없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함이 기어올라온다. 설마라는 생각도 잠시. 곧 확신한 절망과 의구심이 뒤통수를 후려친다.

"헤럴드..."

곧바로 달려 헤럴드가 경비하던 4층에 갔으나 그는 고사하고 경찰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공책을 꺼내들고 6귀족의 대기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빠르게 복도를 달렸다.

내 뒤로 육중한 절그럭 소리를 동반한 무장한 병사가 검을들고 뒤쫒아 따라오고 있었고 우리 둘은 본능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는 분명히 또 위험할 수 있었다는것을. 그리고 헤럴드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그런 내 발을 멈춘것은 3층의 기계관리실옆 대기실이었다.

관리실 방 문 밑에서 흘러나온 찐득한 피가 복도를 적시고 있었으니까.

니슨이 죽은 것보다는 이후에 흐른 것 같았다.

"사람을 불러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병사는 뛰어가버렸다. 겁이났다.

문을 열면 보일 광경이 두려웠다.

그러나 내가 열지 않으면 이 문 너머 혹여 살릴수 있는 인간을 죽게 버려둘지도 모른다.

이 귀빈실이 늘어선 복도의 구석에서, 내가 짐작한 최악의 수.

이 너머에 누군가 또 죽어있을 것이다. 아마 내가 아는 얼굴이.

그리고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그것이 케이 겔데어스일지도 모른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고 문은 잠겨있지않았다.

"케이!"

문을 밀쳐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 순간 내 앞에 싸늘하게 쓰러져 죽어있는 케이를 보고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그를 흔들어 깨우려 했을때 그의 등 뒤로 박힌 나이프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적셔지는것을 보면서 나는 놀라 그만 울어버렸다.

그의 마지막은 평소에 그에게서 기대할수 있었던 희망을 산산히 박살내는 듯 했다. 늘 밝았던 그의 뒤로 넘긴 호쾌한 머리는 말라붙은 피로 떡져 멋대로 굳어있었다.

늘 웃어 넘기던 입은 말을 잃고 닫혀버렸다. 더는 무엇도 생각할수가 없었다. 흐려진 판단력에 그를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어느새 양손은 말라붙은 피로 검붉게 칠해져 있었고 방은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다만 내 티셔츠에 피가 묻은 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케이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흰자를 까뒤집고 있었고 그의 입에 피거품이 물려 조금전까지 부글대고 있었으리라.

왜 그가 홀로 이 방에 쓰러져 죽어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피냄새에 취해서인지 혹은 상황을 견딜 수 없었는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퀘한 피냄새속에 빨려들어가듯이.

내가 정신이 들었을때는 이미 몸을 쇠사슬에 속박당한 채로 감옥으로 보이는 장소에 내던져져 있었다.

습하고 퀴퀴한 공기에 기분이 나빠졌다. 올려다본 천장에 거미줄이 드러져 있고 벽을 따라 곰팡이가 너절하게 피어있었다. 감옥 바깥에 병사 두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좀 드십니까?"

문득 화가 나서 고개를 치켜올렸지만

병사의 질문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느껴 그에게 물었다. 묻고 싶은것이 너무 많았다.

"여긴 어디죠?"

"지하 감옥입니다. 왕성 내 범죄자를 임시로 구류하는 장소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곳에서는 임시 구류를 주로 담당하기 때문에 감방 수도 적습니다.

처리기간을 거쳐 교도소나 감옥으로 이감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케이 겔데어스 공작 살해 용의로 체포되셨습니다만,

저희 측에서 공작님의 무실에 대한 많은 증언이 있으므로 곧 풀려나실 겁니다.

잠시만 불편하시더라도 참으시길 부탁드립니다. 규정이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애써 웃어보이며 끄덕였다. 그러나 미칠것 같았다. 손에 묻은 피는 굳어 찐득해져 있었고 옷을 적신 피는 굳어 제멋대로 옷을 구겨놓고 있었다.

토할 것 같았다. 메슥거리는 건 둘째치고, 눈앞에서 케이가 자꾸 아른거렸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쾌활한 소리를 멋대로 뱉어대며

분위기를 펴내던 남자였다. 그리고 그 케이를 죽인 자가 어쩌면 정말 내 생각대로 헤럴드일지도 몰랐기에. 정말 그 미묘한 가능성이 두려웠다.

붉은 물감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안했지만 여전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배신한 헤럴드와 그로 인해 죽어버린 케이로 머리가 착잡했다.

"저..경비병...미안하지만, 물 한잔 마실수 있겠습니까. 목이 너무 타고 심란해서 진정이 되질 않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도리질을 하더니 다른 한 명의 병사에게 잠시 자리를 맡아달라고 이야기하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아, 원래는 진짜 안되는 겁니다만은 공작님은 결백하시기도 하고 제가 너무 죄송하니까 이번에는 가져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야기 하시면 안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가 계단 위로 걸어 올라가고 다른 한 사람의 병사가 감방 문을 열쇠로 열더니 감옥안으로 들어왔다.

나의 발목에 있는 족쇄와 팔의 수갑을 풀더니 사슬을 풀어 바닥에 내려두고 내게 깍듯이 경례를 붙여올렸다. 그러고는 그도 짧은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했다.

"지이..금 가암..옥에서 대기..하시는 동안.. 부울편하시지 않게끄음.. 풀어...드리겠슴다. 저어히도오 이러는게... 편하지느은...않슴다.

묶여..서는...물 한잔도...편하게.. 못 드시니까유..."

말이 어눌하게 느린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감옥 문을 닫았다. 그러나 자물쇠는 걸지 않았다.

그러나 탈출도 무엇도 하고싶지 않았다.

감사는 고사하고 오히려 감옥을 나가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발걸음도, 머리도 그만큼 무거웠다.

"감사합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조차 몰랐다.

다시 잠을 청할까 했는데 아무래도 감옥이라는걸 알고 나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경비병, 잠깐 괜찮습니까?"

"네에.. 무슨...일이심까?"

"여기에 현재 수감된 인원은 몇이나 됩니까?"

"셋임다."

"셋이라고요?"

"네, 그렇..슴다. 여기, 장부가..있었..는데에.."

그러고는 자신의 옷 주머니부터 안주머니, 가방을 뒤적이더니 조그마한 명부를 꺼내들었다.

말투와는 달리 빠르게 펼쳐들고는 내용을 읽어주었다.

"남성이이..두울, 여성이..한 명이 있슴다아."

"한명은 나겠군요."

"네..그리고 에네도르 공작님도..계심다."

"에네도르가? 그럼 남은 한명은 누구죠?"

"어..왕실, 비서..라고 되어있슴다.. 제인..반.."

"데어믹스죠?"

"네. 그렇슴다.."

뭔가가 이상하다는것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치고 그에게 물었다.

"두 사람을 만나봐도 되겠습니까?"

"다르은 사람드을 한테.."

"비밀로 하겠습니다."

경비병이 끼익대는 철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텅 빈 감옥 복도로 나왔다.

멀리갈 것도 없이 제인은 바로 옆 병실에 쓰러져

수갑에 족쇄까지 도망칠수 없게끔 완전히

포박되어있었다.

"이건 인권의 문제인것 같은데."

그녀의 수갑을 풀어주고 안대와 입에 문 천을 풀어

바닥에 던졌다. 그녀는 나를 보자 놀라는 눈치였다.

내 손에 묻은 피를 보면 누구라도 그럴것이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체포당했다면 믿을거냐? 너야말로 휴가 간다고나갔던거 아니었어?

뭔 죄를 지었길래 여기 쳐박힌 건지는 몰라도 범죄자 주제에 편하게 말 걸지 마."

"뭐? 범죄자? 야! 말 함부로 하지 말아줄래? 급한 호출이래서 돌아왔더니 바로 이꼴이네.

난 결백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끌려와서 묶여있다고! 너야말로 꼴을 봐!

나보다 몇 백배는 나쁜 새끼 같거든? 너 꼴은 왜그래, 어디 다친거야? 안 아파?"

용케도 걱정부터 하는구나 싶었다. 누가 보더라도 사람을 죽인것 같은 몰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겔데어스가 살해당했어. 겔데어스를 살려보려다가 묻은거야.

믿을지는 모르겠는데.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건 똑같으니까 못믿어도 별수없지. 경비병한테 물어봐도 좋아."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은 믿어줄게.

넌 사람을 죽일만한 위인이 아니니까.

너같은 쫌팽이 그림변태가 무슨."

어찌보면 조금 안도했다. 그러면서 일말의 적은 신뢰감이 생긴것도 같았다.

그때 물을 가지러 갔던 경비병이 돌아왔다.

놀란 표정으로 달려와 물을 내게 건네면서 말했다.

"일단은 여기서 나오지 마십시오.

위에서, 그러니까 왕궁에서, 또 살인이 일어났습니다.

에그니아 공작이 살해당했습니다. 감옥 입구를 잠글 테니 여기서 대기해 주십시오. 열쇠는 드리겠습니다."

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 남자마저 죽었단 말인가.

내 생각은 어떻게든 흐려지는 시야를 강제로 붙들고 사고를 이어갔다.

피해자가 하나같이 6귀족과 그 신변을 보호하던 자들이다 보니 범인이 노리는 것이 6귀족이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내 경우는 니슨이 죽은 것으로 내 목숨을 대신했다는 것이 너무나 불안했다.

감옥은 나를 구속하는 공간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내게 생존권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경비원은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내게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러고는 경비원 둘은 뛰어나가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왠지 불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따라나가려는 내 손목을 붙잡고

제인이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돌리며가지말라는 신호를 보냈고,

나는 별 수없이주저앉아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받은 물로 간단히 목을 축이고손에 말라붙은 피를 씻어냈다.

옷에 묻은 피는 씻을수도 없었기 때문에겉보기에는 충분히 이상하다고 생각할수 있었다.

진정하고 숨을 돌리니 내 옆에 있는 제인이 왜감옥에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제인이 잡혀온 이유를 생각해도 이거다 할 의견은 없었으나 결국 그녀와 함께 에네도르 공작을만나러 감옥을 이동했다.

방도 얼마 없는 감옥에차례로 수감해둔 인물들이 하나같이 높으신분들 이라는게 어이가 없었으나 다음 방문을 열었다.

궁금한것은 하나였다. 남자가 있어야 할 감옥에에네도르가 수감되었다는것이 오류였다.

감옥을 열고 들어가자 구석에 남자가 누워있었다.

열린 감방문으로 제인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잠깐만. 오지마."

그녀가 들어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감방밖으로 나갔다. 복도에 선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누운 남자를 확인했다.

그것은 내가 아는 에네도르공작이 아니었다.

"어...?"

발걸음이 멈추고 실없이 입이 열렸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안고 침을 삼켰다.

억지로 목 너머로 기어오르는 충동을 붙든다.

여성이 아니라는 점은 고사하고 감옥에 수감된 것은 다름아닌 왕이었다.

페테이어 국왕이라고 소개했고 단상에서 연설을 했으며 귀족들의 앞에서 축배를 든 왕이 쓰러져 있었고,

그 입에서 피를 토해 죽어있어꽤나 충격적인 얼굴이었다. 치뜬 눈에 초점없이 검게 변색된 얼굴에는 죽음의 여운이 그대로 전해지고있었다.

에네도르라니.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나와 제인을 데리고 원래 수감되었던 방으로돌아와 받은 물을 마셨다.

"왜 그래?"

"왕이 죽어있어."

"여기에?"

"어."

"...왕...? 왕이라고...? 그럼... 아... 혹시.... 그래서 언니가... 그렇구나, 이해했어."

"뭘?"

"입막음이었네. 너는 구실이 필요하니까 같이잡혀온거야.

처음부터 이 연회의 목적은 너의 환영같은 게 아니었어.

6귀족의 재결합이라는건 기존 귀족의 숙청과 더불어 이제 왕으로서의 복귀를노린거야.

나중에 나가서 제대로 설명해줄게. 아마 내가 말하기 전에 왕께서 말씀하시겠지만,

일단... 지금은 때가 아니야."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한 나는 다시 그녀에게 질문을 하려 했으나 그러기도 전에 탕탕 하는 철창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절그럭 대는 소리가 들렸다.

"열쇠가 하나가 아니었나."

나는 열쇠꾸러미를 복도 반대편으로 던져놓고 제인과 감옥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쇠꾸러미가 감옥 입구의 문을 열었고 무장한 갑옷의 병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섰고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병사가 내게 말했다.

"에드먼드 브리깃 공작님 되십니까.

잠시 저희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내가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양팔을 붙들려서 벽에 밀어붙여진 내게 인정사정없이 수갑을 채우고

팔을 뒤로 돌려 꺾은채로 포획한 병사들은 대장을 필두로 감옥 밖으로 나갔다.

대여섯명의 병사에게 포위당한채 끌려간 장소는 왕성 복도중앙에 큰 방,

왕의 옥좌가 있는 알현실이었는데 큰 문에 붉은 천과 금, 각종 보석이 세공되어 박힌 것을

수호대가 억지로 열어 제끼고 그곳으로 나를 데려가 무릎을 꿇리고는 대열을 찾아 양쪽 벽으로 정렬해 섰다.

그제서야 느꼈다. 이 병사들은 내가 아는 병사가 아니었다.

흰 갑옷에 붉은 사슴이 그려진 갑주를 두르고 하나같이 당장이라도 나를 찢어죽일듯 주시하는 이들.

양 벽에 25명씩 도합 50명의 병사가 창검으로 무장한채 나를 주시하는 광경이 장난으로라도편하다고는 말할수 없었다.

그리고 내 뒤로 끝도없이 들어오는 새로운 병사들 마저도 같은 복식을 갖추고 있다.

이들은 엠페레스의 적록기사단이었다.

일반 병사와는 비교되지 않는 소수정예의 병사들이 이곳에 있었다.

이미 나의 앞에는 쓰러진 인물과 제압당한 인물이멋대로 널브러져 있었고

그 끝에 옥좌에는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시작해볼까?"

여자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병사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알현실의 문을 닫아 잠근 뒤 무기들을 높이 치켜들고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왕국과 국왕께 충성을!"

"병사들은 들으라. 그대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성기사의 이단이요, 선대부터 존재했던 은화살이며, 왕의 탄생을 눈에 새긴 기억하는 배신자들입니다."

"왜 이곳에 서 있는가."

"왕을 기억하나 우리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고영원히 충성하나 죽는 날까지 배신자일 우리의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기 위함입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반역이다. 알고 있겠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반역이나무엇보다 숭고한 희생이 될것이고모든 것을 바로잡는 유일한 충정일 것입니다."

그러고 나자 여성이 내게 말했다.

"다시 만났군 브리깃?"

"에네도르경?"

"자네는 여전히도 눈치가 없군.

나는 페테이어 국왕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페트리나 엠페레스. 페트리나 여왕이겠지.

자네가 지금껏 국왕이라고 믿은건 에네도르 공작이라는 말이다."

"그..그런.."

그제서야 퍼즐이 맞춰졌다. 왜 내가 에네도르 가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는지조차.

에네도르는 대역이었던 것이다. 왕을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평생 대역으로 사용되고 버려지는 가문.

그렇기에 뱀의 문양을 사용하는, 비열하고 유연한 가문. 그녀가 에네도르였을때 내게 보였던 그 눈빛마저, 난 이해해버렸다.

나는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쳐박고 사죄했다.

죽을것이라는 생각이 번뜩 지나쳤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아니, 내가 원하는건 그런게 아니지.

대역을 기껏 세워뒀는데 눈치를 채고 있었다면그게 오히려 그것 나름대로 불쾌했을거야.

여성의 신분으로 국가를 온전히 통치하기란쉽지 않단 이야기는 이해하겠는가?

그래, 권력을 가질 때 까지 페테이어 국왕은남성일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다른 적으로부터 권력을 온존하고 더불어나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또...완벽한...선택이었지."

그녀가 잠시 웃더니 품에서 권총을 한 자루 꺼내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우선은 거기부터군. 거기 있는 제인 반 데어믹스가 밝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나도 매정한 사람은 아니니, 들려 주마. 나는 선왕이 죽기 전,그레고리 반 데어믹스에게 맡겨졌다.

텔레인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지. 나는 유년기를텔레인 반 데어믹스로 보낸 이후 에네도르와 바꿔

가주인 안나 에네도르를 연기했다. 사실 정말귀찮은 남자였다. 패기라곤 없고 우유부단해서

대역으로 세우기에는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았거든.

대본을 기껏 짜 두었건만 제대로 연기하지도 못해슬슬 더 살려두었다가는 일처리가 곤란할 것같아서 죽였다.

자신도 그렇게 될 운명이라는 것정도는 처음 대역을 맡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겠지.

아마 지하 감옥에서 봤겠지만 말이다. 어디보자,

음, 그래. 본론으로 들어갈까? 나는 진지하게 말해

에드먼드 브리깃. 너를 필요로 한다. 너의 능력이 아닌 너의 가문의 명성치, 지금껏 쌓아올린너의 아비의 노력이 필요하다.

너를 시작으로빈 자리의 6귀족을 재편성하고 국가를 재정비할생각이다. 예상 외로, 6귀족이 원치 않게 많이 죽었거든?

안나 에네도르가 국왕 페테이어로 자리잡기 위해. 그러기 위해 그 여자도 비서로 들였지.

제인 반 데어믹스.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여자였지.

혹여나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입을 막았지만,죽이긴 아까운 인재여서 말이다."

제인은 그래서 이 여자가 왕이라는걸 알고있었다는 이야기군.

그렇게 된다면 그레고리 반 데어믹스역시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제 왕이 여성이었다는걸 모르는 6귀족은 하나도 없는것인가... 다들 어떻게든 이해한 것 같으니 이제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어.

이 이야기를 결국 이렇게 꺼내게 되다니 그 잘난 6귀족의 명성도 다 땅에 떨어졌구나. 그래, 이런 오합지졸을 굳이 곁에 여섯이나 둘 필요는 없지.

이래서는 숫자가 맞지 않아. 마음에 안들어."

그렇게 말하며 여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가 높은 구두 굽으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치듯 밟아버렸다.

피가 튀어 구두는 금방 붉은 얼룩이 졌고 대리석 바닥에 선혈이 튀었다. 이미 흘러 굳은 피 위로 새로운 비가 차박차박 튀었다.

여왕은 남자의 죽음을 확신하고 가만히 그를 내려다 보다가 그 손에서 피가 튄 반지를 빼 자신의 손에 끼웠다.

"그래. 방금 또 한명 처리했구나. 필요없는 자리는 되도록 빨리 제거하는것이 좋지. 이번에는 몇명이나 귀족으로 세워둘까 고민이군.

지혜를 명했거늘 그 자리에 이렇게 아둔한 자를 둘 수야 없어. 천년의 지혜라고 불리는 여우가 울지 않겠는가.

정답에 조금 더 근접했던 것은, 지금여기 모인 50의 군사와, 그리고 여기 죽어가는 그래, 이름이 헤럴드였나?"

놀라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이름이 들려온 것에 대해 아니길 빌었지만 사실 스스로도 이미 인정해 버린 상태였다.

아마 그가 맞을 것이다. 조심스레 눈을 떠 바라본 옥좌앞에 널브러져 죽어가는 남자의 얼굴은 분명히 내가 알고있는 남성의 살집있는 얼굴이었다.

다른 한 명은 이미 머리가 박살난 채 숨이 끊어진 상태의 시그릿 플뤼네 공작이었다.

"6귀족이라는 이름이 울겠구나. 이제는 브리깃과 반, 오직 둘만이 남았다. 이래서야 수뇌부라고 부르기도 초라하지 않은가."

왕이 웃는 소리가 회장을 울렸다.

조용한 방에 오직 그 소리만이 들렸다.

잠시간 웃던 왕은 헤럴드를 바라보고 말했다.

"좋다. 경찰.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나?"

헤럴드가 입꼬리만 올려 웃고나서 신음소리에

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엘리마네..알고있나.."

익숙한 이름이었고 최근들어서 많이 거론된 만큼

기억에 애매하게 남아있던 이름이었다.

"본명...은...엘리마...네빌리온.. 브리깃의...하녀였지..."

네빌리온이라는 말에 설마 하는 생각과 더불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여동생이었다. 피의..장미사건때 희..생된...

7년전, 피의 장미 사건을 조..사 하기 위해서...

브리깃저택에는... 경찰이..3일간..

수사를 담당했다. 에스트릭..스 브리깃...을 비 공식적으로...체포하고..."

여왕이 거들었다.

"아, 그건가. 선왕 사후 6귀족을 모두 불러들여

왕성에 가둬놓고 조사를 진행한 사건.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일이었지.

감히 왕을 독살하려든 간큰 자가 있었으리라고는."

여왕은 히죽 웃으며 건방지다는 듯 바닥에 누운 헤럴드를 쳐다보고선 다시 자신의 옥좌로 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구두는 이미 피칠갑이 된 상태였으나 그럼에도 그녀는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잔인함 위에 피어있는 꽃, 그래 마치 장미와도 같았다.

"그때, 브리깃...조사에...파견된..경찰 명부...에는 2명의 이름이 있었다...

헤럴드.. 네빌리온.. 그리고...모건..제이미..

둘은 수사도중...서재에서...누군가 움직이는걸...발견했지...

주저없이 범인이나 그...은폐를...돕는 공범이라 생각한 나는... 권총을... 쐈고..

총을 맞고 쓰러진것은...엘리마네였다...

그저 자신이... 읽던... 책을.. 두고나와서...

의심받을까... 가지러 왔던...거라더군."

그러고 있으면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렀다.

울컥이면서 배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총에 맞은 상처인것 같았다. 말하면서 벌어졌을 것이다.

"그만..헤럴드...이제 됐어... 말을 아껴..."

내가 걱정한게 무색하게도 그는 계속 이야기를이어갔고 병사들의 포위속에

나는 그를 부축하는것도 하지 못한채로 그가 죽어가며 뱉는 유언을그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엘리마네는...즉사했고...나는...그곳의 물건들에튄...피를 보이는대로 닦아냈다...

책...은..의심받..지...않..게... 책장에..."

그는 그러더니 숨쉬기가 괴로운듯 몰아쉬며헉헉대며 말했다.

그의 말은 전에 없을만큼 빠르게끊기지도 않고 괴로운 숨과함께 쏟아졌다.

그의 외침은 마치 갈곳잃은 절규였고

구원잃은 절망의 목소리였다.

"그 행동은 나를 위한 행동이었어..!

내가 엘리마네에게 엮여 역적으로 처형당할까

괴로워서! 무서워서! 스스로 저지른 거였어..!

나는 엘리마네를 위하는 척 그녀를 배신한거야..

그런데...

사건은 보도되지 않았고 엘리마네는 역적은 커녕

저택에 있던 인원으로 보고되지도 않았다..!

그녀의 존재자체를 부정해버린거야.

내가 한 일은 뭐가 되는거지?

나는 왜 그런일을 한거지?

이제는 이유도 목적도 사라진 그냥 살인과

증거은폐인거야! 경찰이라는 인물이 살인을.

그것도 여동생을 죽이고 뻔뻔하게 살아가다니!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혐오스러웠던것은

내가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스스로 그 행동을 다행이라고 느꼈던 거였다!

나는 참을수 없이 괴로움을 느꼈고

스스로를 용서할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너에게 접근했고 그래서...

너에게...미안하다 브리깃... 에드먼드..."

말이 끝날때쯤 나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울고 있었다.

헤럴드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야기는 끝났나? 더러운 배신자. 그럼, 잘가게."

왕이 권총으로 헤럴드를 겨누고는 두번. 머리에총을 쐈고

헤럴드는 그자리에서 쓰러져 일어나지못했다.

그의 표정이 분노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최악의 표정이었다는것은 이루 말할수 없으나

다만 그 표정에 무언가 슬픔이 가득 번져있었다.

눈을 채 감지도 못한채로 치켜뜨고 머리에서 피를흘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안식을 찾지도 못한 채로 곧바로 왕의 명령으로성밖에 버려졌다.

왕은 다시 권총을 장전했고내게 들이밀었다.

"마지막으로 묻지. 6귀족으로 복귀할 생각이 있나?

제안일때에 수락하는 편이 좋을거라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거든.

이 다음에 이자리에 널브러질 사람이 너의 주변인이 될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그럴듯한 변명이나 대답을 할 수가 없어 하얗게 비어버린 머리를 싸매그냥 그렇게 끝을 내고 싶었다.

왕은 내가 보는 앞에서 제인을 끌고왔고같은 질문을 했다. 아버지인 그레고리 반 데어믹스를 이어 가주가 되라는 이야기였고

그녀에게도똑같은 총구가 겨눠졌다.

그녀는 당황한듯 보였으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나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아무런 말 없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결심한듯 작은 숨을 뱉고 분명하게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뭐라 말할 기분도, 그럴 입장도 아니었고 그저 그녀가현명하게 살아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언제나 최선의 길을 선택했고 최고의 옆에서살아왔습니다. 왕이시여. 전부터 지금까지도.

저는 엘리트였고 그저 명하신대로 해 왔습니다.

분부를 거절하는 일 따위는 없습니다."

왕은 흡족하다는 듯이 웃으며 총을 내렸다.

"그래, 출세에 눈이먼 너같은 자가 필요하지.

그 출세욕이 진심이든, 살아남기위한 가식이든말이다. 결과는 결국 모든것을 대변하지.

돌아가라. 너희는 충분히 유흥거리가 되었다.

나의 연회는 끝났다."

지친 몸은 무겁게도 삐걱거렸다.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몇번이고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펜을 잡고 편지를 썼다.

내 노트에 만년필로 왕성의 이야기를 적었다.

몇번이나 힘이빠지는 손에 억지로 꾹꾹 눌러 잉크를 박았다.

모건에게로 적은 것이었다. 집 문 앞 우체통에 넣어두면 분명 신문사에서 들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제발 모건에게 무사히 전달되기를 조용히 기도하며 한자 한자 읽기 쉽게 힘을 실어 적었다. 끝으로

나의 공책을 동봉해 넣고 공책의 마지막장에 있는

파랑새그림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자유인으로 살다갈거야.

자유인으로서 마지막에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파랑새 한마리라면 나는 만족해.」

그리고 나는 집밖의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두고 집으로 돌아와 그림을 그렸다.

자화상을 그렸다. 처음 이곳으로 왔을때보다

수척해져 눈은 퀭하게 패여 다크서클이 생긴

푸석해진 피부와 윤기를 잃은 머리카락을 그림에

옮겨넣고 완성된 그림앞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주방으로 가서 컵에 물 한 잔을 담아왔다.

아버지의 방은 여전히 서릿발처럼 차가웠고 난로는 켜지 않았다.

나는 복도를 맨발로 걸었다. 질질 끌리는 걸음이 무거웠다.

2층의 수많은 방들을 바라보면서 지금껏 기억하는 이 집을 돌아보았다.

설핏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다 바닥에 떨어진다.

툭툭 떨어진 눈물이 내가 걸어온 길을 장식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계단을 올랐다. 계단은 높았을지언정 나는 더이상 힘들지 않았다. 지친건지 힘든건지 모를 기분.

3층에 익숙한 테라스를 지나서 조용히 보이는 1층의 홀을 바라보았다. 3층이라도 이곳은 꽤 높다.

애초에 저택이 그리 작은 크기도 아니거니와 홀과 테라스가 있다는 것으로 이미 몇십, 몇백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또 그런 용도로 사용되던 집이었으니까. 나는 자유인이었고 자유인을 그리워했다.

이곳에 조각된 수많은 예술품들 사이로 나를 던진다. 나 또한 아름다웠던 시절의 예술이 되길 바라면서.

테라스의 유리막은 성인 남자의 힘으로 깨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깨지 않고 넘어갔다.

이 저택의 미를 간직하기 위함이었다. 이미 얼마 남지않은 일그러진 조형미를 두번씩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망칠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유리막을 넘어가 거꾸로 유리막에 매달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서서히 손에 힘을 놓았다. 손이 붙잡고있던 테라스를 놓고 서서히 몸이 추락하는 기분에 나는 두려움 보다는 또다른 기쁨을 느꼈다.

서서히 주마등이 지나가듯 흘러가는 기억들에 눈을 감았다. 나는 어느샌가 거꾸로된 세상을 날고 있었다.

내게 오랜시간으로 느껴진 몇 초간을 천천이 되새기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나는 이제 영원히 자유가 된다. 끝없는 꿈을 꾸기 위해서.

아마 영원히 깨어날 일은 없겠지.

나는 끝까지 예술가로 살다 갈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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