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 이야기-248화 (248/303)

〈 248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 플뤼네의 중재자

* * *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나는 손발이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았지만 무력하게 손끝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다 나의 업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궁에 처음 발을 들이면서 했던 이 궁에 뼈를 묻겠다는 말은 어찌저찌 지킨 셈이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올뻔도 했다.

정말 죽음이 가까워 지긴 한 것 같다는 생각에 이제 말도 나오지 않는 나는 여적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지간히도 지은 죄가 많았기 때문이라면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자신에게 변명을 한마디 얹자면,나는 속았고 명령받은 것을 수행한것 뿐인데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린것이다.

강요된 결과를 거부하기에 내게 걸린 것이 컸고 목숨값은 높았다.

아니, 이렇게 변명하는 시점에 알고 있는 것이다. 나의 선택은 틀렸음을. 나는 거기서부터 이미 돌아갈 수 없이 꼬인 거겠지.

그리고 그런 생각도 잠시, 내 머리를 내리찍는 구두굽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을 감고 모든것을 포기한 순간에 내 의식은 끊겨버렸다.

모든것은 8년전의 그날로 부터 시작된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양날의 검을 받고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렸다.

국왕. 그러니까 선왕이었던 엠페리어 국왕은 성군이라 불리던 남자였다. 이 나라의 경제적인 면에서도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 이상의 왕은 없었다.

이 나라는 그를 중심으로 6귀족이라고 불리는 6명의 귀족이 국가의 정상에서 회의를 통해 정치를 담당하는 왕권국가였다.

그러니 6귀족은 실질적으로 왕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공작으로 구성된 이들이었으니 실제 지위자체도 높았으나 여타 공작에 비해서도

더 실권을 잡고 국가를 흔든 것 역시 사실이다. 왕의 배려로 이루어진 것이겠지만 왕은 그들의 의견에 부합할 경우에는 통치 방침마저 바꿀 정도로 이들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이를 나의 권력으로 알았다. 나를 포함한 플뤼네, 에그니아, 브리깃, 반, 에네도르, 겔데어스로 구성되어 있는 이들은

개국공신 및 충성을 증명한 이들이 발탁된 국가의 수뇌부로서 6귀족은 뛰어난 효율성과 안전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반대로 생각하면 간단하다.

이 구조가 어떻게 비롯되었던 개개인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져버린 이들이 연합하려한다면 언제든 국왕의 목을 칠 수 있다는것은.

이들의 개개인의 힘은 국왕보다 적을지 몰라도 연합은 여론마저 비틀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모든일의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들중 그 누구도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는 없었다.

그것 또한 왕의 인품이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왕 엠페리어는 초대 왕이었던 베델그 왕보다 더 명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모든 이가 그렇게 왕을 지지하던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더 큰 무언가를 원했는지 ,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저녁, 노엘이 가져온 업무서류를 흝어보는 중이었다.집무실의 문을 네번 빠르게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들어오라는 말 한마디를 뱉었다.

헤이나 하녀장이 한 손에 편지를 들고 들어왔다. 아무런 소인이 찍히지 않은 투박한 검은색 봉투에 자색으로 문양이 그려져있었다.

편지봉투는 밀봉된 상태였고 촛농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왕실에서 사용하는 자색의 장식문양이 아니라면 그냥 버렸을 것이다.

나는 편지 귀퉁이를 나이프로 잘라낸 다음 편지를 꺼냈다. 내용은 투박한 글씨체로 아무렇게나 쓰여있었다.

「시그릿 플뤼네는 오늘 자정 왕성 4회의실로 오라」

이건 밖으로 새서는 안되는 내용이리라 생각했다. 즉시 난로에 편지를 던져버리고 아무일 없다는 듯이 연기를 시작했다.

"무슨일이십니까?"

노엘이 한 손에 행커치프를 꺼내 몇 번 가볍게 털어 내밀었고 나는 그걸 받아 손을 닦아냈다. 노엘에게는 대충 부지깽이로 털어 재를 정리하라고 이야기했다.

본인이 직접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 하인을 따로 불러도 좋고 원래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일단 자신에게 들어온 오더만큼은 완벽하게 처리하는 자였다. 그의 일처리 만큼 깔끔하고 흠잡을 일 없는 것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부러 고액을 쓰면서까지 그를 집사로 잡아두고 있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다른 빠르고 우수한 업무효율.

그건 다른 모든 장점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연 그것이 그의 장점의 전부는 아니다.

베테랑이고 현장에서 오래 일한만큼 유대감 역시 어느정도 쌓여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나와 일한지도 벌써 24년이 다 되어 간다.

머리가 희끗해지고 얼굴에 주름이 조금 생겼지만 그럼에도 그는 단정했고 흐트러짐 없는 품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잠깐 마른 한숨을 뱉고는 그대로 책상에 걸터앉아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이 잠깐 동안 생각의 흐름을 추렸다.

의자에 앉아 책상위로 팔을 걸치고 턱을 괸 채로 급작스런 상황을 다시 생각했다.

그 이후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처리해야할 업무서류를 모조리 노엘에게 맡기고

"자네가 알아서 임의로 처리하게. 다 끝나면 다시 가져와 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나는 혹 내가 무언가를 실수했는가 생각했다.

자정에 왕성이라는 것은 분명 좋지 못할 일로 부른것임이 분명하고

더욱이 편지의 상태로보아 타인에게 말해서는 안되는 은밀한 것임이 분명했기에 나는 신변의 위협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무엇도 아닌 제일 중요한 사건이라 함은 왕이 나를 호출했다는 것이었다.

거부권은 없었음이 분명했고 나는 마른침을 넘기고 채비를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챙긴 나이프를 부디 쓸 일이 없길 바랐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나고 노엘이 서류뭉치를 정리해 들고 돌아왔다.

"제 임의로 처리해 보았습니다만 어느정도 부족한 부분이 있을런지 걱정이군요. 한번 재검하심을 추천드립니다."

재검은 필요없었다. 나는 그를 믿었기에 굳이 재검하려 들지도 않았다. 나는 대충 감사인사를 하고 그대로 의자를 돌려 집무책상 뒤 유리창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아까 그 편지 말인데."

"예, 무슨 일 있으신지요?"

"그 건에 대해서 말인데... 오늘은 10시에 퇴근하게. 저택 내에 모두에게 전하게."

"그렇게 하죠."

10시에는 정말 저택은 남은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사실 누가 남아있건 상관 없었으나 누군가가 내가 왕성으로 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서는 곤란했다.

사실상 이 밤에 차려입고 갈만한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이 국가에서 6귀족을 이 야밤에 불러낼 인물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리 내가 이렇게 채비를 마친대도 편지의 보랓빛 인장을 보고 눈치챈 이는 적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노엘과 헤이나는 의미를 알겠지.

그러나 적어도 정말이지 그 이상으로 오늘의 일을 알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 역시 일처리에 대한 어느정도의 완벽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6귀족으로서의 품격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생각했다.

왕이 믿고맡긴 문제조차 제대로 완수하지 못해서는 안된다. 저택의 하인이 알아버린다면그래서는 기밀인 이유가 없잖은가.

나는 가능한 한 차려입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뭔가 부족해보이는 마른 얼굴에 패인 뺨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허전해보이기에 모노클을 착용하고 나서 금고의 다이얼을 돌려 안쪽에서 녹색 여우가 새겨진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이러면 되겠지."

시간이 지나 12시를 3분 앞두고 나는 그가 지시한 방 앞에 도착했다. 나는 긴장으로 머리가 뻗치진 않았는지, 옷무새는 단정한지 정돈하고 나서 심호흡을 했다.

내가 그의 방문을 두드리자 왕자가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방음 장치가 설비된 방 안에는이미 먼저 와 있던 에네도르와 에그니아가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왕의 어전에서 왕의 부재를 지적하는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되기에 어딘가에 왕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침묵을 유지하고있자 왕자는 내게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붉은 와인이 담긴 잔을 눈앞으로 들이밀며 내게 인사를 건네온 왕자의 얼굴은 마치 너무나도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다만 뒤에 앉은 인물들이 너무나도 평온하게 앉아 저마다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이것은 나의 죄의 책임을 묻기 위한 자리는 아닐 것이라는 묘한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걱정이나 불안 혹은 공포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쁜듯한 얼굴이었다.

대머리인 거구의 남자, 놀란드 에그니아는 자기 손보다 훨씬 작은 유리잔의 목을 어떻게든 엄지와 검지로 잡고는 어울리지 않게 돌리며 호쾌한듯이 웃고 있었고

긴 흑발의 여성, 안나 에네도르는 정말 묘한 웃음을 지으며 우후훗 소리가 들리도록 웃었다.

나는 그 순간 느꼈던 안도감을 잊을정도로 그녀의 그 웃음에서 소름이 돋을것 같은 본능적인 위기를 감지했다.

그것은 웃음의 의미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 웃음의 의미는 몰랐다.

"그래, 시그릿 플뤼네... 잘 지내고 있었나? 왕자를 앞에 두고 한눈팔 여유로 봐서는 배짱은 상당히 두둑해 진 것 같은데."

"아. 그...그렇지 않습니다. 무탈히 지내긴 했사오나 모두 왕가의 은혜로 인한..."

"그만, 아부는 됐다. 그런걸 듣자고 부른게 아니다."

"그... 왕자전하께서는 그간 별탈 없..."

"있는것으로 보이는가?"

"아뇨. 그렇지는 않아보입니다..."

"굳이 필요없는 말로 흐름을 끊지 말도록. 나는 의미없는 대화를 싫어한다."

"그렇다면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성급해, 그리고 건방져. 지금이라도 그 목을 쳐 떨구고싶군."

"...죄송합니다. 왕자님."

"뭐 우선 배우들은 모두 모인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하지. 내가 오늘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단 하나. 왕을 승하시키기 위함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