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플뤼네의 중재자
* * *
"노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두번 두드리고 노엘이 문밖에서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나는 그에게 손짓하며 짧게 대답했다.
"물 한잔. 오늘자 신문이랑 면도준비를 부탁하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나갔다. 그가 입은 정장은 집사로서의 품위를 잘 살려주고 있었다.
집사복이라고 해도 나름 신경써서 맞춘 정장이다.
내가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인데 단벌임에도 불구하고 헤지지 않게 매번 말끔한 매무새를 지켜 입고있는 모습이 그의 성실성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의자에 돌아앉아 눈을 감고 잠깐 에그니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독특한 얼굴은 언제봐도 정감이 가지 않는다.
역겨운 얼굴. 생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얼굴에 내 등을 맡긴다는게 싫었다.
머리털 한 올도 없는 그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그를 떠난 머리털이 지혜로운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도 한다.
나는 그러면서도 사실은 그들이 날 배신하고 몰락시키기 위해 나를 속이는 것은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있자니 다시 문이 열리고 물 한잔과 신문을 든 노엘과 그 뒤로 물을 담은 양동이와 면도도구를 실은 서비스왜건을 끙끙대며 끌어오는 하녀가 보였다.
"노엘, 저친구는 이름이 뭐였지?"
"트리아나입니다."
"트리아나라고? 고생했어. 자네는 이만나가봐도 좋아."
"ㄴ..네."
트리아나라는 하녀는 왜건을 내 옆에 세워두고 다소 경직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갔을 때 나는 노엘의 손에서 물컵을 받아들고 빙긋 웃으며 물었다.
"뭐지?"
"죄송합니다."
"우리 플뤼네에 저런 어설픈 하녀가 있을거란 생각은 못했는데?"
"엊그제 들어온 신입입니다."
"누가 가르쳤나?"
"아마 그쪽은 헤이나 하녀장이 관리하고 있었을 겁니다."
"헤이나라고? 오늘 저녁 9시에 잠시 나좀 보자고 하게. 그리고 자네는 책임지고 저 반푼이를 교육시켜둬."
노엘은 콧수염을 가볍게 잡으며 미소띈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내가 물을 마시고 나서 의자 옆 테이블에 두자 조금 말려있는 신문을 건네는 노엘은 이미 그와 동시에 면도의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신문을 받아들고 첫장을 넘겼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1면은 왕의 6귀족소집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 자세한 이야기를 알 수 없었던 신문사의 조간신문은 미스터리한 무언가를 멋대로 추리하며 들떠있었기에 나는 바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노엘은 내 얼굴에 폼을 바르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작은 일 하나라도 대충 처리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나의 품위를 지켜주는지 모른다. 나의 집사는 유달리 그런남자였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품위를 잃지 않았으며 자세가 언제나 올바른 그야말로 집사의 표본이었다.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보군요."
"보고있었나?"
"주인에 대한것은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않는것이 집사 아니겠습니까?"
"가끔은 그러지 않아도 되네. 자네는 말이지."
그가 얼굴에 폼을 바르는데 맞춰 고개를 살짝 돌려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할 필요도 없네."
"그렇군요."
"이해는 한건가?"
"물론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폼을 바르던 붓을 내려두고 면도칼을 바꿔들었다.
면도를 시작하기 전에 면도날을 한번 차갑게 씻어내고 따뜻한 수건으로 닦아낸 후 자신의 뒷머리를 조금 잘라본 후 만족한 듯이 면도칼을 들었다.
그는 매번 면도를 부탁하면 이 일을 반복했다. 묘한 신뢰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것이 그의 전문성을 반증했다.
내 수염을 부탁해도 세련되게 다듬을 수 있다는 자신감.
매번 새로 면도날을 교체해서 사용함은 당연했고 굳이 일련의 과정이 없더라도 잘 드는 날임에는 명백했다.
그러나 그는 당연하다는 듯 반복한다.
그것이 날 안심시켰다. 나는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펼쳐둔 2면은 다시 별것아닌 연예계의 이야기라던가 잡다한 이야기였고 나는 혀를 차고 신문을 도로 접었다.
"신문이라는 게 참 별것 없어. 이런거라면 동네 꼬마라도 다 쓸수 있을거라고."
나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다시 편히 기댔다. 자세를 고쳐앉았음에도 개의치 않고 노엘은 상처없이 면도를 이어갔다.
그의 얼굴은 어제나 진지했고 그런 그는 차가운 얼굴임에도 매력이있었다.
"노엘, 오늘 지시한 일은 모두 취소하지. 3일간 휴가를 주겠네.
면도가 끝나면 간만에 집이라도 다녀오게. 가족들이라도 만나고 와. 트리아나였던가? 그 하녀 건은 내가 따로 이야기하지."
"감사합니다. 딸아이가 좋아하겠군요."
"그래, 그럼 가는길에 딸아이 선물도 좀 사 주게. 이번달은 조금 더 얹어주지."
그의 굳은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보고있으면 가족이라는 것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원해서 그런것은 아니었지만 나이가 40이 넘도록 독신이라는 것은 나로서도 자랑할 일은 아니었다.
사실 그렇기에 더 권력에 집착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한숨 잘테니 면도가 끝나면 깨워주게."
20분 정도가 지나서 그가 나를 깨웠을 때는 이미 서비스 왜건도 물잔도 다 정리된 상태였고
내가 이야기 하기도 전에 내게 시가를 꺼내 내밀며 다른 손으로 지포라이터를 꺼내들고 점화할 준비를 마친 후였다.
시가를 늘 이시각에 부탁하곤 했기에 별말없이 받아들고는 입에 문 채 사무용 책상의 서랍을 열었다.
펜과 공수표를 꺼내 그에게 수표를 써주고 휴가를 승인했다.
그의 표정은 몇번을 봐도 적응하기 어려울 만큼 웃음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 넓은 방에 고독함이 찾아올 것 같아서 일어섰다.
방을 나서 홀로 걸어갈 때 하인들이 저마다 나를 알아차리고 90도로 인사하는 광경은 슬슬 눈에 익어 지쳐간다. 형식적인 그 인사들은 나를 말라가게 했다.
"가족이라.."
홀로 외출하기로 했다.
저택은 누군가가 관리할 것이다. 내가 없어도 늘 같은 장소를 같은사람이 관리할 일은 분명했다.
화장실에서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면서 세수를 하려다 면도날에 베인것으로 보이는 상처를 발견했다.
늘 없던 일이라 그런것인지 그 어색함에 픽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없던 일이었다.
간단히 외출준비를 마치고 저택문을 나섰다. 뒤로 하인들이 인사를 꾸벅 올리고 있어도 손은 두어번흔들어준다면 충분하다.
나는 그런 입지의 사람이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마 나만이 아닐 것이다.
내게 인사를 붙이는 저들마저도 이 계급사회에 순종하고 있으며 일말의 의문을 품지 않는다.
이는 국가로부터 어린 나이부터사상을 교육받은 결과물이다.
사상을 가르치는 것이 제일 위험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건 곧 지식인과 노동계층에게나 해당하는 것이다.
즉 정치권자는 이를 이용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 하나의 전략이고 이는 그들에게 있어 예리한 무기가 된다.
이를 사용하지 않음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그것은 곧 이 국가의 근본인 신분제와 암묵적인 노예제의 승인이다.
엠페리어 국왕은 이를 철폐하고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매번 실패했다.
그렇기에 이번 성명서에 더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왕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였으니까.
그는 그 끝이평등의 결과로 자신의 위치와 왕관마저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처럼 행동했다.
그가 정말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순수하게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열정과 추진력은 과연 아무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만일 해방을 주도하게 된다면 불완전한 성공을 가정하는 경우에도 국가에는 큰 타격이 있을 것으로 보이기는 했다.
사노비를 제하는 것만으로도 왕권의 강화는 당연한 일이었다.
개인이 가지는 권력과 군대의 임의적 운영을 통제하는 것이니 단순 사노비의 해방은 전 세계적으로 역사속에서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성명서는 표면상이지만공노비마저도 제하는 것이니 만일 정말로 노예를 해방하게 된다면 국력과 맞바꾸어 민심은 올라갈 뿐이다.
이론상 시간이 지나서 다시 경제활성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거나 결국 국권의 격이 올라간다거나 하는 희망찬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그 거대한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당장 손에 잡히는 권력을 놓지 못했으며 왕의 이상보다 나의 욕망을 우선시 하게 되었다.
신분제라는 틀 안에서 안주하며현상을 유지해야 했다. 그렇기에 이제껏 왕의 시야 밖에서 주도적으로 왕의 계획을 방해한 것 또한 사실이다.
권력에 욕심이 없던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모르나 어찌되었건 그가 실행한 정책의결과는 늘 그를 성군으로 만들었다.
그가 늘 6귀족을 신뢰하고 이루어낸 성과라고 공을 돌려 자연히 덩달아 6귀족의 평판도 높아졌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이로인해 더 높은 사회적 권한 또한 보장되었다. 얼핏 보면 좋은 군신관계이다.그러나 이야기한 대로실은 귀족들의 반대를 이끌어내던 주축은 6귀족에 있다.
에그니아를 중심으로 군부귀족은 귀족 내 개별적인 군부연합을 만들었다.
이를 코탈 이라고 했는데,"Company Of The Armed Lineage"의 약자로, 군부 혈통 연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코탈은 에그니아를 필두로 내려오는 무력집단으로서 지하 투기장의 주 고객이자
이 국가의 병사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은 이들이 대거 소속된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실체화된 군대였다.
주로 왕의 노예 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이들이었다.
이들과의 합일점이 있었던 나는 그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지원할테니 인력및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에그니아 산하 건설업체였다. 그렇게 지어진 것이 바로 국가 지식의 근간이라 불리우는 할렌토 중앙도서관이다.
개인적으로 도서관에는 투자한 것이 많았기에 자주 가는 장소로 자리잡았다. 이는 단순히 직무나 업무 만의 이야기는 아니라 업무 외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나는 도시쪽의 중앙도서관을 찾아갔다. 그곳에 쌓인 책들은 내가 해야할 일들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듯 했다.
"시그릿 공작님 아니십니까, 어서 들어오시죠."
도서관장을 담당하고 있는 남자 맥이다.
아직 15세인 어린 그는 원래 전 도서관장을 맡던 덱의 아들이다.
이 도서관이 세워지고 나의 건의로 가문이 대대로 도서관장직을 맡고있는 어찌보면 형편좋은남자다.
나이가 아직 어린데도 용케 관장직을 맡아 해내는 것은 덱의 지원도 있겠지만 그가 영특한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덱은 잘 있나?"
"안쪽 별실에서 신간을 읽고 계십니다. 모셔올까요?"
"아니..됐네. 참 변함없이 꾸준하구만."
덱은 늘 책을 읽는것을 좋아하던 우리 집의 하인이었다.
사실 하인이라기엔 일처리를 잘 못해서 서재에 틀어박힌채 거기서 책을 정리하던 것이 주 업무였던지라
왕립 중앙도서관을 지을 때 도서관장을 맡을 인물을 임명하는 임무를 맡은 내가 두말없이 그를 임명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덱은 도서관장일을 마음에 들어했으며 날마다 새로운 책을 읽고 분류하는 일을 즐겼다.
그러나 4년 전에 일어난 도서관 화재로 중상을 입은 뒤 다리를 못쓰게 되어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날마다 도서관장의 별실에서 아들과 함께 거주하며 신간인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도서관을 빙 둘러보며 걷다가 도서관장의 별실앞에 도달했다.
두어번 노크를 하면 안에서
"누구신지요?"
하는 코막힌듯한 소리가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 잘 지냈느냐고 인사를 건네고 그가 인사를 정중히 돌려주었다.
"어쩐일로 절 찾아오셨습니까?"
"덱, 묻고싶은게 있는데."
"무엇이든지 여쭤보시지요."
그가 읽던 책에 북마크를 달아두고 책을 덮으며 이쪽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그의 양 옆에 수도없이 쌓인 책들이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우선은, 그 다리는 좀 어떤가?"
"다리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움직일 일도 별로 없었으니 말입니다. 도서관에서 나갈일이 없었으니.
그리고 아들놈이 듬직해 지낼만 하지요. 거 높은곳의 책들도 부탁하면 가져다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아들이?"
"예, 아비혼자 키운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저리 잘 자라주니 고마울 뿐입니다."
"리사벳은 안타깝게 됐어."
"별수없지요. 그립기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애써 무덤덤한 척 어둔 표정을 숨기는 얼굴이 애처로웠다.
그의 아내였던 리사벳은 덱이 도서관장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부인이었다.
작가였던 그녀는 덱을 만나 전업을 그만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절필을 슬퍼했으나 제일 아쉬워했던 것은 덱이었다.
그들은 결혼한지 2년 만에 아들 맥을 낳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리사벳은 4년 전 도서관의 화재로 쓰러지는 책장밑에 있던 덱을 밀쳐내고 그 밑에 깔려 세상을 떴다.
덱은 그때 그녀가 밀친 덕에 목숨을 구할수 있었으나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니어서 서고에 깔려 다리를 다쳤다.
그때문에 그는 다리의 정강이가 골절되고 근육이 괴사해 버렸다.
그 이후로 모든걸 잃은 덱은 그럼에도 홀로 아들을 키웠고 맥이 저렇게 밝게 자란 것은 어찌보면 다행이자 축복일 수 밖에 없었다.
도서관장직을 그만둔 덱은 며칠을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고 일절의 말도 없이 독서에 전념했다.
이때의 그는 마치 폐인같아서 지인들을 비롯한 많은 인원이 안타까워했다. 그때 맥의 나이 고작 열 한살이었다.
그때부터 맥은 도서관장직을 받아 국가의 원조를 받으며 자랐는데 그럼에도 덱을 날마다 챙기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학교를 다니지 않음에도 또래보다 훨씬 영특한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아들의 간호와 주변의 걱정속에 덱은 1년만에 방 밖을 나섰다. 직접 쓴 책 한권과 함께.
그 책은 정말이지 소름이 돋았다. 아내의 죽음과 그의 인생의 절망을 풀어적은듯한 책이었다.
굉장히 적나라한 묘사는 그가 마치 매일 방에 틀어박힌 인간이라고는 상상할수 없을 만큼 자세했고
누군가는 이 책을 보면서 덱을 사이코패스라고 욕하기도 했다.
작가에 대한 궁금증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덱을 유명인으로 만드는 것에 일조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나 책에대한 그 어떠한 내용에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사람들의 질문을 회피해버렸다.
여러가지 추측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올랐지만 저마다 이렇다더라 할 수준일 뿐 제대로 된 내용은 없었다.
이 책이 정치를 비판한다느니 신에 대한 도전이라느니 여러 이야기가 나와도 그는 한마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책이 소설책이었다는 점이다. 그게 이 책의 이름이었다.
그게 덱이 아내를 기리기 위해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추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결국 책은 굉장한 인기를 끌었고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전국의 책을 좀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이 책을 읽어 볼 정도로.
이 책의 매력은 그것이었다. 현실적이고 소름끼치게 인간의 죽음과 절망,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미쳐가는 다른 인간에 대한 관찰을 소설로 만들어 놓은 것.
이 책의 내용이 기괴한 것은 물론이고 이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갔다.
결국 수많은 루머를 끌어안은 이 책은 정치에 반한다는 이유로 왕에 의해 곧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이 금지되었다.
전국에서 책을 모아 불태웠으며 책의 필사를 포함한 어떤 사본도 남기지 않았다.
사실 말은 이렇게 모두 사라져 버린 책들도 그 섬뜩한 매력에 매료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책을 보관하고있었다.
책이 불살라지는 날 밤.
광장 앞에서 덱은 타오르는 불길속의 자신의 책을 보며 양옆에 칼을 들이댄 병사들 사이에서
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는 이런 서적을 쓰지 않겠다고 맹세해야했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자신의 책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던건지 아니면 이젠 지쳐버린 건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그저 불타는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연히 그 시선의 끝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제서야 알았다.
그의 뒤에서 병사들 사이로 소년 하나가 아버지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킬것이 생긴 아버지는 더이상 갈곳없는 분노를 표출할 곳도 없이 속으로 삭여가며 말없이 그들의 심판을 받았다.
그리고 3년간 그는 아들을 돌보기에 전념했고 그러면서 날마다 도서관장의 별실에서 독서를 했다.
"애써 무리하지 말게."
"예."
"자네는 말이야. 내가 아는 한, 자네는 말이지... 아니, 아니야..."
뭐라고 위로를 건네기도 어려웠다. 내가 그에대해 뭐라고 아는 체 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고 말을 해도 이미 입밖에 나선 그말은 하나의 변명으로 느껴질 테니.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가 아무리 이전처럼 웃고 떠들며 책을 읽고 있어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눈이 완전히 죽어버린 희망없는 눈이라는 것을. 빛없는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알던 덱은 돌아올 수 없음을.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잠시 눈을 감은채 말했다.
"미안하군. 자네한테 사서직 같은걸 맡기는게 아니었는데."
"이미, 다 지난일입니다. 모든게."
"정말 괜찮은가?"
"네. 그렇고말고요."
그 멍하니 고개를 돌리며 바라본 문 밖에는 맥이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분명히 덱은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맥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덤덤히 사다리를 오르며 책을 분류했고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덱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만족한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혼자가 아니니까요."
원망도 증오도 없는 그 표정과 말투에 나는 솔직히 두려웠다.
아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버지로서의 자랑스러움이었을까. 아니면 더 오래된 무언가의 후회일까.
그래서 더이상 무슨 말을 할지도 몰랐다. 그 의미 모를 얼굴이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오싹한 기분을 만들었고
결국 나는 그에게 건넬 적당한 인사를 찾지 못했다. 그저 잘 지내라는 말을 남기고 나는 다시 그를 독실에 홀로 남겨두고 문을 닫았다.
"이야기는 다 마치셨습니까?"
맥이 발빠르게 정리하던 일을 멈추고 사다리에서 내려와 물었다.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젊은 시절의 덱을 느낄수 있었다.
다만 조금 더 어렸고 조금 더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맥. 너희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네 등이 넓어서 다행이구나."
"아직 부족합니다. 아버지께서 고생하신데 비하면."
"아버지께 잘 해드리거라."
"예. 감사합니다."
"네가 자랑스러울 게다."
"일부러 아버지를 뵈러 이 먼 길까지 와 주신점 감사드립니다."
"비단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시다면 혹시 어떤 연유로 도서관에 오신 건지 들을 수 있을까요?"
"큰 이유는 없다. 그냥 생각이 난 김에 와 본 거란다. 매일 저택에서 업무를 보고 있으면 지치잖느냐. 기분전환 겸."
"그러시면 멀지 않은남쪽으로 있는 공원에 들르시는것은 어떠십니까.
사람들이 산책 겸 자주 다니기도 하고 그 근처에 휴식하기 좋은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지. 고맙구나 맥. 이만 가봐야겠다."
"그러시죠. 다음에 다시 방문해 주시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맥의 인사를 받으며 도서관을 나오고나서 나는 공원으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