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플뤼네의 중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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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을 꺼내두고 난로에 불을 지폈다.
창문을 조금 열고 어느새 늘어진 노을을 바라보면서 집무 책상을 마주하니 밀회의 상황이 머리속에 하나둘 떠올랐다.
이 나라의 사법교육체계를 정립한 입장으로서 이런 일을 내가 준비하는 것에 일말의 거리낌이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 다가오지 않아서인지 혹은 걸리지 않겠다는 자신이 있어서였는지 이제껏 그닥 크게 신경쓰지 않았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면 그저 신경쓰고 싶지 않았거나.
그러나 결국 이것이 현실이고 나는 결국 언젠가 왕의 잔에 설탕을 넣어야 하는 이 계획의 성패를 쥐고있는 카드이다.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의 차이가 앞으로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나의 역은 제일 단순하다면 단순하고 동시에 제일 리스크가 큰 일이기도 하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이용당한 입장이었다.
독을 준비하기로 한 에그니아는 결국 내게 독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입장이고
에네도르 역시 회의의 주도라고 해봐야 왕에게 의견을 피력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닌가.
그 또한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고 리스크가 어느정도 수반되는 일임에는 분명하나 명백히 내가 제일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이다.
즉 이 계획은 내가 아니라면 성공할 수 없다.
또한 이들 모두는 내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변명거리와 이유가 생긴다는 것이고
나는 이 일이 끝난 이후에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건 즉 왕 하나를 목표로 세워진 계획이 아니다.
이들은 내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애초에 왜 내가 그들의 계획에 가담할 필요가 있었는가?
이 계획은 6귀족이라면 말 그대로 누구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나를 일부러 포섭한 이유는 그것이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든 위험을 끌어안고 자신들을 대신해 몰락해 사라져 줄 사람.
나는 그 목적으로 선택받은 것이다.
이는 나를 죽이기 위해 만든 계획이기도 하다.
죽이지 않는다는 방법도 분명 있을 텐데.
왕자와 에네도르 그리고 에그니아 단순히 보면 셋일 뿐이지만
그 셋이 이 국가의 절반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그들과 같이 걸어가는 지금이 내 목숨을 부지하며 방법을 강구하기에 유리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는 협력하되 뒤에서는 등을 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언제나 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왔기에.
나는 누구에게도 이 고민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그래서 아무도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문을 두번 짧고 간결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난 후에
헤이나 하녀장이 문 밖에서 서비스왜건을 끌고 들어왔다.
덜덜거리는 소리는 일절 없었다.
깔끔하고 정돈된 예식과도 같은 품위에 만족스러워 웃음이 나왔다.
"커피 여기있습니다."
커피를 책상위에올려두고 머핀을 두 개 커피 잔 옆에 내려두었다.
"그래 온 김에 이야기나 잠시 하지. 시간 되나?"
"네 오후 10시 이전까지는 잡무 및 신입 교육외에 맡은 바 업무는 없습니다."
"잡무라..? 내가 자네한테 시킨 일 중에 잡무가 있었다고? 내 판단이 잡무정도로 취급되는 일이었나."
"죄송합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렸어야 했군요. 지금 드린 커피 잔과 머핀의 그릇 및 포크, 나이프의 설거지입니다."
"그거라면 확실히 잡무라고 할 만 하군. 자네 생각보다는 한가하구만?"
"하녀장의 위치이므로 제 아래의 하녀들을 교육하는 것이 주 업무입니다."
"그래. 뭐, 나보다 그런 방면에서는 뛰어날 테니까 말이지."
"감사합니다."
"그래...그런데 그럼 적어도 하녀 교육만큼은 완벽해야 하지 않나? 내가 교육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무슨 소린지 아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금일 오전중에 노엘 집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라."
"오후 아홉시에 부를 예정이었는데 자네가 꽤 많이 한가해 보이더군. 실제로도... 그랬고 말이야."
"트리아나에 대해서는 차후 재 교육을 해 두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내가 자네를 부른건 그녀의 재교육에 대해서가 아니라네.
왜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묻고있는거야.
한번 통제되지 않은 분자는 결국 조직 전체를 와해시킨단 말이지.
단순히 하녀 하나의 일이 아니란 말이네.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룰.
그게 없다면 그저 짐승의 무리와 다를 것이 없단 말이야. 이해하겠나?"
"책임지고 어떤 처분이든 감수하겠습니다. 감봉이라거나 사임이라거나..."
"아니, 누가 멋대로 정하라고 했나. 진정하게.
모든 일에는 그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한 법이네.
이유없는 선택은 후회를 부르지.
대의. 그게 자신을 당당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네.
그게 있다면 고개숙일 이유도, 헤메는 지금에 대한 변명도 필요없지.
확고한 대의가 있고 이를 이루려는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네.
그 명분이 자네와 나를 구분짓는 지표가 된다고 하면 이해하겠나?
한번에 모든걸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난 그걸 아주 잘 알고있지.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거라네.
그러나, 교육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야기가 다르다네.
완전히 숙달되기 이전에 어느 누구도 함부로 실전에 투입해서는 안되네.
이는 현장에서의 실패로 이어지고 주변에 폐를 끼치지.
그 결과로 지금 자네는 나에게 필요이상의 설교를 듣는 중이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시그릿 플뤼네 공작님이시죠. 제 고용주이십니다."
"그렇군."
커피가 조금 식어 마시기 괜찮은 온도가 되어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펜을 다시 들었다. 아직은 김이 나는 커피를 불었다.
그래도 아직 뜨거워서 질리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종이에다 적었다.
'헤이나 하녀장, 하루의 휴가를 주겠네. 내일은 푹 쉬게."
헤이나 하녀장에게 종이를 건네자 그녀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내일은 맡은 업무가 있으므로..."
"커피잔을 내려놓고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흩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시간상으로 2초도 채 되지 않을 짧은 순간에 말하려던 입을 닫은 헤이나 하녀장에게 한마디로 답했다.
"쉬게."
"네."
"자네 업무는 내일 하루 없는 것으로 하지.
나가면서 내일 자네가 맡은 업무를 정리해서 차트로 만들어오게.
인수인계할 때 필요하도록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직접 다른 하녀들에게 인수인계를 마쳐둬도 되네.
쉬는 동안 다른 생각은 하지말게.
자네도 오래 일했으니 이런 날도 있어야지. 아 이거 받아가게."
"그...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이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 대타를 그리 잘 하리라 생각하지는..."
"내 알아서 하겠네. 자네도 잠시 쉬고 오게나.
내가 보기에 이번 실수는 과로로 인한 피로에서
촉발된 것일테니까 말이네.
자네는 유능한 인재야. 잃기에는 아깝지."
나는 그녀에게 수표를 건넸다. 그녀의 한달 월급보다 두배정도 많은 금액이었다.
그녀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않는 것인지 할 수 없는 것인지.
여튼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봉투를 받고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하고 나는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콧등에 조금 땀이 나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머핀을 집어들었다.
빵은 포슬포슬해 적당히 따뜻해서 먹기 좋게 생겼다.
빵 아래에 모양을 잡아주던 틀을 제거하고 세로로 절반을 찢었다. 초콜릿 칩이 들어있었다.
반으로 찢은 머핀을 들고 한 번 더 반으로 나눴다. 한 입 거리가 된 머핀을 입에 집어 넣었다.
적당히 식었지만 여전히 맛은 좋았다. 너무 달지 않았고 적당히 부드러웠다.
커피가 필요한 간식이라고 하면 꼭 들어맞는 센스있는 머핀이었다.
그러나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나눈 조각을 하나 더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보기로 했다.
조금 입이 말랐고 수분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나는 커피를 조금 마셨다.
머핀을 가득 문 입 사이에 커피가 스며들어서 적당히 넘길만해졌다.
"이 커피가 달았다면 마셨을까?"
그러고는 나는 잔을 들어 남은 커피를 머핀 위에 흐르거나 튀지 않게 부었다.
촉촉하게 젖은 머핀을 보고 문득 든 생각이 혼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를 믿고 이해할만한 사람. 노엘과 헤이나가 없는 지금 필요한 사람.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다이얼을 몇 번 돌리고 연결음을 기다리며 다른 손으로 외투에서 담배를 꺼냈다.
조금 구겨진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불을 당겼다. 한번에 붙이려고 했는데 실패해서 불은 붙지 않았다.
다시 천천히 불을 가져다 대며 숨을 당겼다. 익숙한 일인데도 왠지 새로웠다.
그때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연결되었다.
"오랜만이구만 시그릿."
조금은 낮고 가라앉는 듯 한 목소리의 주인은 브리깃의 가주 에스트릭스였다.
나는 그에게 전화한 목적은 밝히지 않았다.
"잘 지냈나보군."
"당연하지. 그나저나 무슨일이지? 나에게 전화를 다 걸고. 또 뭔가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어 도움이 필요한가?"
"아니 그런건 아니고 그저 내일 쯤 시간이 나는지를 묻고싶네."
"내일? 내일이라... 잠시만 기다려보게. 일정을 확인 해 볼 테니."
"천천히 하시게. 바쁜일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군. 어디보자... 내일은 3시쯤부터 시간이 비는군. 대략 두시간정도 같이 대화할 수 있겠어."
"충분하네. 자리는 어디가 좋은가? 내가 가지."
"집으로 오게. 오랜만에 좋은 술을 준비해 둘 테니까."
"그러면야 고맙지."
"뭘 그런일로, 내가 자네에게 빚진 일도 있고 하니말이야."
"빚? 아 자네 아들 말인가?"
"그런거지. 뭐 아무튼 내일 보세."
"그러지. 좋은...아니, 편안한 저녁 되시게."
그러고 나서 전화는 끊어졌다.
이미 그에게도 내게도 좋은 저녁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한다.
하다못해 편안한 저녁을 빌어주는 것이 오늘의 내겐 최선이었다.
식욕이 그닥 돌지 않았으나 하루종일 먹은거라곤 커피 조금이 전부였기에 남은 머핀을 모조리 입에 넣었다.
원체 소식을 하던 사람이다보니 크게 문제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많이 먹으려고 해도 위장이 줄어든 것도 같아서 입이 짧아져 식사시간도 점차 단출해지는 경향이 있다.
아무리 입이 짧다고 해도 머핀 하나로는 조금 아쉬운 감도 없잖아 있었으나
이미 헤이나 하녀장도 노엘집사장도 없었다.
그리고 그정도면 크게 배가 고프지도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담배가 아직 조금 남아 있었으므로 괜찮으리라 판단한 것도 있었다.
심심한 입을 달래기 위해 다시 담배를 찾았다.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의자에 누워 있으니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싶지 않았다.
그냥 이빨자국이 남도록 깨물어 두 손은 의자 팔걸이에 걸쳐두고 방안에 연기가 차는 걸 보고 있었다.
잠시 그러고 있자니 노크가 두번 있었고 문밖에서 들어가도 괜찮겠느냐는 헤이나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그녀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얼굴을 찡그리며 간단한 심호흡을 마치고는
한번의 콜록임도 없이 평소처럼 말을 이어왔다.
종종 내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도 익숙하리라.
늘 그래왔듯 불만은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네 지시하신 내일의 업무일정을 정리해 왔습니다."
"좋아, 거기 두게. 내일 하루 푹 쉬게. 너무 박하게 일만했잖나 자네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문을 나서려는 그녀를 보고 문득 생각이 나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 기다리게."
"네? 무슨일이십니까?"
"자네 가족은 어떻게 되나?"
"아들이 둘 있습니다. 큰 아이는 14살이고 작은 아이는 이제 5살이 됩니다."
"남편은 무슨일을 하는지 물어도 괜찮겠나?"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지 꽤 되었기 때문에 이제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 잡아둬서 미안했네. 간만에 아들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 주게."
그녀에게 인사하고 나는 그녀를 떠나보내며 가족에 대해 고민했다.
노엘은 분명 자신의 아이를 만난다는 일에 기뻐했고 덱은 그 인생을 놓았고 헤이나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머리로는 그들의 자녀가 큰 의미를 지니고 사랑이라는 것으로 묶여있음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런 사전적인 이미지보다 무언가더 디테일한 정보를 원했다.
내게 없는 것이야말로 욕망의 시작이다. 나는 지금 가족을 원하고 있었다.
이미 자식이 있는 그들과는 다르게 나는 독신이고 가정이 있는 그들과 다르게 나는 돌아갈 곳이라고는 삭막한 집이 전부였다.
가족이 없다는 점이 크게 불편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지금껏 가족이 없어서 손해보기는 커녕 유리한 점이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 심리적 안정감이 필요했다.
집무실 책상에 반쯤 열린 서랍을 열면 금일 아침 노엘이 가져다 주었던 조간신문이 들어있다.
대충 두어페이지 넘기고는 왕성호출건에 대해 추측한 기자들의 헛소리를 웃어넘겼었지만 아직 다 읽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 꺼내 들었다.
글씨가 적혀있었는데 왜인지 잘 집중이 되질 않았다.
"피곤한가보구만."
난독이 느껴지는 탈력감에 눈이 지친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방 구석의 턴 테이블에 가서 판을 올리고 바늘을 조심스레 올렸다.
드드득 하는 소리가 잠시 나다가 곧 음악이 나왔다.
텅 빈 방에 홀로 음악을 들으며 서 있으니 묘한 기분도 들어 펜을 들고 비는 노트에 글을 썼다.
가족이란 음악보다 여유가 되는 존재인가?
그리고는 이런 고민을 한다는 점이 우스워져 또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계속 웃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지치기 전에 빨리 눈을 붙여야겠다고 느꼈기에 나는 잠을 청하기로 했다.
입에 물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남은담배를 곽째로책상의 서랍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집무실 의자에 앉아 멋대로 울린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조용히 음악소리가 멀어져간다.
눈을 떴을때는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이었다.
어두움이 꽤 번져 방의 불을 켜지 않으면 책 한권도 읽지 못할 것같았다.
그나마 옅게 달빛이 창을 넘어 들어오고 집무실을 비추고있다.
은은하게 빛나는 달빛이 왠지 문쪽을 비추는 기분이 들었다.
마치 나를 밖으로 나오라고 부르는 것 같은 기분에 일어나 문을 열었다.
텅 빈 복도가 어두웠지만 그럼에도 홀쪽으로 이어지는 빛은 내가 이 큰 저택을 헤메지 않게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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