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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이야기-253화 (253/303)

〈 253화 〉 슬픈 귀족의 이야기 ­ 플뤼네의 중재자

* * *

복도는 조용해서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만이 바닥의 카펫을 긁었다. 내 집무실을 나오면 펼쳐진 복도는 넓기보다는 긴 구조를 이루고 서서 어딘가 으스스한 분위기 마저도 내고 있었다.

주변의 난간은 목재로 이루어졌으나 바닥은 철제와 대리석이 혼재했는데 이는 몇년전 원인모를 화재가 원인이다. 잠이 들 새벽쯤 갑자기 쾅쾅대며 노엘이 두드린 문소리를 듣고 일어났을때는 이미 저택의 20% 는 소실되어 있었다. 그때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불탄 계단을 구르게 되었고 그 이후로 목이 오른쪽으로 잘 돌아가지 않지만 목보다는 패턴이 일그러져 불규칙한 저택의 몰골이 더 아팠다. 당시 화재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걷다보면 그 소실된 계단에 다다르는데, 이전과는 다른 계단의 색이 어색하다.

원래 계단은 참나무 원목을 조각한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불타버린 부분을 메우면서 참나무가 부족했던 탓에 물푸레나무를 사용해 지금도 밟는 느낌이 적잖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계단에 걸터앉아 달빛을 받는 계단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갈라진 틈이 곳곳이 난 낡은 목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마저도 사용인의 매일같은 걸레질로 무뎌져 어느새 반들반들하다고 여겨질 만큼 닳아졌다.

세월이 그대로 배겨 갈라지면서도 삐걱 소리도 내지 않게 단단히 고정된 목판들을 보면서 말 못할 무언가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무너지지 않게 맞물린 목재 계단은 어째서인지 노엘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얼굴들을 가만히 곱씹으면

어느새 조금은 진정하게 된다.

"심지어 이 목재 계단마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를 짚고 일어서서 계단을 내려간다.

발걸음 소리가 더벅더벅 울렸지만 그럼에도 삐걱이는 소리는 없었다.

나의 저택, 나의 이 넓은 성은 그런 공간이었고 나는 이 성과 그것을 소유한 자였다.

그렇기에 나는 삐걱여서는 안되며 홀로 완전해야한다.

어떤 학자라도 지금 이 감정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끔씩은 말이지."

문득 담배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집무실로 돌아가고싶지는 않았다.

담배를 태운다는 것은 내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천재들은 말했지. 자신의 분야가 아닌 곳에 사사로이 사고하지 않으며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몰가치한 정보에 뇌의 용량을 소모하지 않으며

학습한 것이 불필요할 경우,이를 잊기위해 힘쓴다.

이것이 모른다는 것이고 배움의 격을 만드는 것이며 학술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지."

계단아래 홀은 푸른 달빛에 어스름했다.

홀 가운데 서서 눈에 들어오는 내 저택의 모습을 둘러보며 서 있었다.

하인들은 대부분 잠을 자고 있을 것이고, 하녀장과 집사는 내가 집으로 보냈으며 하녀중에는 아직 출근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그렇기에 이 저택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 정적이 나에게는 일종의 허가와 같이 다가왔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저택대문을 바라보니 이미 잠긴 자물쇠를 달고서 굳게 닫혀 열릴 생각도 없어보이는 문 밑으로

좁은 틈을 따라 바람이 새고 있다. 막아둔 벽 어딘가에서 새어나오는 것 처럼 바람은 그렇게 조용히 윙윙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슬리퍼를 툭툭 치는 바람에 눈치챈 사실이지만 조금은 습한 이 바람이 마치 비를 한바탕 쏟아낼 것만 같다.

슬금슬금 기어오는 것은 비단 바람 뿐만이 아니라는 듯이 사부작대는 머리를 긁으면서 생각했다.

규칙적인 것들을 사랑하던 나였지만 어제의 행보는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투성이였다.

규칙적인 루틴을 만들어 살아오면서 불편함을 느낄때도 있었으나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야말로

타인과 나의 격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루틴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면에 더 집중했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온 세상이 좁았다는 듯한 느낌을 받는 요즘, 나는 무엇이 나를 바꾸었는지를 생각하기로 했다.

일상을 탈피하게 만드는 과도한 충격은 전환점이 된다고 했다.

"왕자인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으면 마신 커피 때문인지 요의가 있어서 나는화장실로 향했다. 홀 귀퉁이에 이어지는 화장실은 생각보다 너무나 컸다. 이 홀에 초대받을 인원을 고려해서 지어진 것이니 만큼 거대해서 화장실 칸막이만 대여섯은 되어 보이는데 나는 잘 올 기회가 없었다. 늘 집무실근처나 침실 근처의 화장실을 이용했기 때문인가. 아무래도 잠이 깬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볼 일을 마치고손을 씻어낸 후에 나는 욕실로 향했다.

욕실 앞 탈의실에 옷을 벗어두고 근처 비치된 수건을 챙겨 욕실 문을 열었다. 새벽인지라 어둑한 욕실은 과연 달빛조차 닿지 못했다. 불을 켜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더듬대며 돌아다니다가 돌로 된 분수조형에 팔을 부딫히고 나서야 불을 켰다. 팔에는 멍이 들어 있었다.

"답지않은 일을 했군."

그나마 적당한 크기의 욕조에 물을 틀었다.

물이 차오르는걸 가만히 바라보면서 돌로 만들어진 욕조에 들어갔다. 분명 무슨 돌이었는지 알고 있었는데 대리석이나 화강암이 아니고서야 무슨 돌인지 잊어버리고나선 알 방법이 그닥 없었다. 돌에 그리 큰 관심을 두던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이 발 밑을 적시기 시작했고 차오르며 느껴지는 감상은 따뜻함 보다는 시원함이었다.

"보일러를 잊고있었나."

보일러를 켜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나려다가 발가락을 또 욕조에 들이받고 나서야 괜한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 따뜻한 물로 몸을 풀고 숙면을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괜한 발가락을 두어번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축하게 젖은 발이 잠을 깨우며 찬 돌바닥에 닿았고 나는 발을 딛음과 동시에 작게 몸을 떨었다.

탈의실바닥에 깔려있던 러그에 발을 문지르며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혹여 잠이 깬 누군가에게 몹쓸 꼴을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내가 그를 해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한명을 구해 한명분의 일을 해 낼수 있게 만드는데 드는수고로움보다는 옷을 입는것이 간단하니까.

"보일러실이 어디였는지 모르겠군."

평소 나의 목욕에 맞춰알아서 물을 데우던 것은 하인들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부르려면 부를수야 있었겠지만

그러고싶지는 않았다. 지금의 나 혼자의 기분을 방해받는 것 같아서.

손을 비비며 저택의 구조를 떠올려본다. 보일러실이니 만큼 지하에 자리하고 있으리라 생각이 들어 지하실로 가는 복도를 찾아 걸었다. 새벽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기도 했으나 이미 달아난 잠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라도 목욕을 하겠다는 이상한 나름의 집념이 있었다.

"후우."

보일러실은 아니나 다를까 지하 1층에 마련해둔 작은 공간이었다. 파이프와 화로가 번잡한 보일러에 주변에 대충 쌓인 어마어마한 양의 목재 장작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보이는 난로에 될수있는 대로 장작을 때려붓고는 불을 붙이고 나왔다.

나무타는 냄새가 나서 제대로 한 거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늘 내게 맞는 일을 해 왔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익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스로 완벽하게 처리하고 싶다는 일념 같은 것이 있었기에 누군가에게 묻지는 않았다.

보일러를 뗀 후에 나는 터벅터벅 걸어 침실을 찾았다.

이유는 없었다. 문득 텅 빈 복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에 대해 의구심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자야지. 빨리 누워 자고 뭐든 잊어야지. 괜히 이렇게 헤매는 것 역시 내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침실은 늘 고요했고, 약간은 서늘했지만, 보일러의 영향인지 금방 온도가 오르는 것은 느껴졌다.

나는 겨우 거기 기대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고 나는 눈만 감은 채로 겨우 밤을 지새게 되었을 뿐이다.

아침 해가 이불 틈으로 새어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우... 오늘은 왠지 여러모로 피곤하겠군."

아침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술술 지나간다.

난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고 그저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출근하는 하인들을 눈으로 훑었다.

간밤에 아무래도 일이 있던 건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하인들도 있었다.

"노엘은 없나. 헤이나 하녀장도 없군."

살짝 일어나 이마를 짚었다.

실없이 빠져버리는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 끼어있다.

뭉텅뭉텅 빠져나가는 머리칼이 요즘 들어 늘은 기분이다.

노엘이 없는 아침, 그리고 잠을 설쳐 피곤한 얼굴로 맞은 태양은

날 피폐해 보이게 만들었나보다. 만나는 하인들이 하나같이 무슨 일이 있어보인건지

내 시선을 신경쓰며 말을 걸지 않으려고 하는 걸 보면 아마 분명하다.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물리고 식사를 했다.

토스트 몇 장을 겨우 씹어 넘기면서도 그 맛 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영부영 넘긴 토스트에 적당히 맛이 좋다고 대꾸하고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다.

아침부터 차를 몰고 나가는 것이 익숙하지도 않았거니와,

요 며칠새는 계속 이어지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하인들은 요 근래의 내가 이상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그러나 먼저 내게 다가와 묻는 이는 없었다.

생각없이 차 핸들을 잡았다가 느꼈다.

손에 감각이 둔하다는 걸.

어쩔 수 없이 운전을 대신 해 줄 하인을 하나 불렀다.

운전수를 따로 들이지 않았던 것은 내가 드라이브를 좋아한 것도 있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나만큼 안정적으로 운전할 만한 사람은 없으리라는 생각도 있어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 상태로 운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준비를 마친 하인 하나가 하품을 손으로 가리며 다가왔다.

"공작님, 아침부터 시내로 나가시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그런건 아니네. 그냥 요 며칠은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말이야.

답답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네."

"그렇습니까."

"묻고 싶은게 있으면 편히 물어보게. 오늘이 아니면 대답하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닙니다."

"그런가?"

"...."

잠깐의 침묵이 무색했다.

"그런데 자네는 그게 왜 궁금했나?"

"아, 그... 어딘가 근심이 있어 보이셨기 때문에... 피로해보이시기도 했고,

밤잠을 설치실 정도로 고민이 있으신 것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런 편입니다."

"왜 그런건가? 나는 그냥 고용주일 뿐인데. 내 감정상태는 자네들의 업무 효율과 하등 관련이 없네.

물론 나는 감정에 따라 자네들을 사사로이 해고할 생각도 없고."

"예?"

"그러니까 내 말은, 왜 내게 그렇게 관심을 두냐는 걸세.

다른 사람이잖나?"

"물론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다는 감상은 있습니다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매정하...게...

아, 실언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아니야, 그냥... 음... 자네는 왜 내 밑에서 일하고 있나?"

"6귀족을 모시게 되는 일은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 말고. 자네가 분명 생각하고 있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저는 그저 하인일 뿐입니다."

"가정부로 정정하게. 그저 하인이라는 말은 맞지 않아.

나에게는 하인이지만, 자네 스스로에게는 마땅히 부를 직업이 필요하지 않겠나.

스스로 하인이라고 소개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러네요. 가정부...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여자치고는 운전을 상당히 잘하는군.

차를 운전해본 경험이 있나?"

"아, 뭐 어쩌다 보니까 배우게 되었습니다. 많이 몰아본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 카페로 가지. 아침이라 그런지 머리가 잘 안돌아가는 것 같네.

커피라도 한잔 마시면서 차분히 이야기를 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둘은 카페로 이동했다.

어김없이 베어핏 카페였다.

베어핏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리스타가 커피잔을 닦으며 말했다.

"또 오셨네. 오지 마시라니까요. 블랙리스트 몰라요?"

"미안하게 됐네. 블랙커피 한잔 주게. 그리고, 아. 자네는 뭘로 마시겠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

"커피가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말했다.

"커피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커피를 부탁할 수 있겠나?"

점원은 나와 내 옆의 가정부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테리카로 드릴게요."

조금 기다리면 커피를 건네는 바리스타가 내게 말했다.

"조금은... 달라졌네요."

"그랬길 바라네."

바리스타는 커피를 건네며 가정부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그쪽분은?"

"아... 로라...에요."

그제서야 이 가정부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에스테리카라고 하셨죠... 맛있네요. 곡물 향이 진하고. 고소한게..."

"물론이죠!"

바리스타가 환히 웃어보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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